전쟁(4)
조회 : 278 추천 : 0 글자수 : 5,386 자 2024-04-02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기분 나쁜 마계의 공기.
켈렌은 이에 익숙해지기 위해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마왕 토벌 때만 해도 이보다는 쾌적했었거늘, 마족들이 날뛰며 마기가 더욱 강해진 탓이리라.
켈렌은 혀를 차면서 능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바위와 탁한 강물.
그 주위로 떠다니는 찐득한 느낌의 마력.
한 번 봤다 한들, 익숙해질 수는 없는 풍경이었다.
진저리를 치던 켈렌은 곧 앞서가던 6번 얼음 요정이 박살난 것을 느꼈다.
행군하던 마족 병사들이 발견하고 부순 것으로 추정됐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돌리고, 몸을 쭉쭉 늘리며 풀어준 뒤, 켈렌은 목표물을 향해 날아올랐다.
빙설신룡, 프리나의 아이디어를 채용한 얼음정령화.
얼음 마력의 심장을 가진 순간부터 켈렌의 육체는 점점 인간보다 얼음에 가깝게 변해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얼음 정령 쪽에 가깝게.
원래도 육체만 인간일 뿐, 마력은 얼음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력회로의 중심이자 인간 육체의 중심이기도 한 심장이 마력으로 구성되다니.
얼음 정령으로 변하는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게 나쁜 건가?"
"으음... 내가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지."
"육신이 인간이어야만 켈렌인 걸까? 다리를 잃고 나무 막대를 끼운 해적은? 팔을 잃고 검을 단 기사는?"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들은 신체 결손의 대용품을 찾은 거지, 나처럼 아예 변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상관이람? 단순하게 생각해. 사고하는 네가 진짜 너지, 몸이 돌로 변하든 나무로 변하든."
자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켈렌은, 프리나의 지적에 마음을 놓았다.
놓고 보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육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
심지어 마력과 마력회로를 다루고, 영혼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마법사는 더더욱.
"맞는 것 같네. 그럼 첫 번째 고민 끝."
"두 번째는 뭔데?"
"이걸 어디 써먹을 수 없나 하는 거지."
"으음... 변신술은 어때?"
"그거... 괜찮네...!"
*****
가장 많이 연습했고, 그래서인지 가장 익숙한 용의 모습으로 켈렌은 날아갔다.
너무 잘 보이는 형태면 곤란하다고 말했지만...
"안돼! 무조건 용! 드래곤!"
"왜, 왜 그렇게 용을 고집하는 건데!?"
"...본모습으로 데이트하고 싶으니까...!!"
"......"
"저리 가."
"응."
"으아아악! 죽어라, 인간!"
빙설신룡의 멍청한 장면을 영원히 뇌리에 새기겠다고 다짐한 켈렌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잔혹했다.
얼음정령화를 하루에 여섯 시간이나 연습해야 했으며, 끊임없이 구박과 잔소리를 들어온 것이다.
'그래놓고...'
"뭐해?"
정작 프리나는 참새 모습으로 켈렌의 머리에 폴싹 앉아있었다.
켈렌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웃는 낯을 유지했다.
그러나 정령왕의 직감은 켈렌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내 생각했구나."
"...맞아. 어떻게 알았지?"
"안 좋은 쪽으로."
"......아니야."
켈렌이 뒤통수에 눈은 없지만 얼음 참새의 차가운 시선은 제대로 느껴졌다.
"봐줘."
"하는 거 봐서."
켈렌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곧이어 행군하는 마족 병사 무리를 발견했다.
선공은 켈렌이 가져갔지만, 그 직후 마족 군단도 켈렌을 발견했다.
"백년고드름."
"쏴라!"
허공에서 나타나 땅에 꽂히는 나무 크기의 거대한 고드름.
화염에 휩싸여 하늘을 가르는 금속 기둥.
빗나가고 스쳐 지나가고 충돌하며, 대규모 격돌이 벌어졌다.
"뒤!"
"아차!"
그때, 마족 군단에서 발사한 금속 기둥이 허공에 멈추더니, 반대로 날아들었다.
여태 쏜 것만 십수 개.
그것들이 전부 켈렌을 향해 짓쳐왔다.
"젠...장!!"
켈렌은 용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보이며 공격을 피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만큼 타격을 입었다.
몸통에 직격으로 하나가 꽂히자, 다른 것들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켈렌은 그대로 불타는 금속 기둥에 눌려 땅에 내려찍혔다.
"화염 그물, 쏴라!"
충격에 흐려지는 시야로, 촘촘한 화염 그물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켈렌은 재빨리 변신을 풀고, 방어막을 펼쳤다.
급조했지만 마력을 두껍게 발랐기에 화염 그물 정도는 버티리라.
그러나 켈렌은 마계를, 마계의 군단을 얕보고 있었다.
치이익-!
화염 그물은 얼음 방어막을 빠르게 녹이면서 점점 조여들었다.
"계속해서 쏴라! 혼역화마탄昏逆禍魔彈!"
그제야 켈렌은 함정임을 깨달았다.
산 하나를 통째로 얼려버리는 대마법을 썼으니 켈렌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을 테고, 미끼로 군단 하나를 행군시킨 것...!
"정령계로 가 있어.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까."
"안-"
프리나를 재빨리 역소환 시킨 후, 켈렌은 주위에 마력을 방출했다.
그리고 흩뿌려진 마력으로 주변을 휩쓸어버릴 생각이었지만...
'혼역화마탄!'
마력 밀도를 불균형하게 만들고 마력의 흐름을 기괴하게 바꾸는 포탄!
마력 통제가 불가능한 건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몸에 받아들였다간 회로가 몽땅 망가져버릴 터.
"미친 것들... 나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까지 해?!"
켈렌은 어금니를 으득 갈면서, 방어막을 완전히 녹이고 조여드는 화염 그물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손이 불타는 고통을 참아내며, 켈렌은 그물을 확 찢어버렸다.
그리고 마력을 단번에 끄집어내 폭발시켜 주변의 혼란스러운 마력 흐름을 모두 밀어냈다.
마력 진공 현상.
마법사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혼란한 마력이 체내에 유입되기라도 하면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불타는 금속 기둥의 열기로 공기가 끓어오르고, 마력은 쥐똥만큼도 없는 환경에서 켈렌은 마족 병사 수백을 상대해야 했다.
"요즘 너무 쉽게 살긴 했지."
마지막 남은 마력을 긁어모아 얼음으로 검을 한 자루 만든 켈렌은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마법을 쓸 줄 아는 적은 없어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일까, 그마저도 불행일까.
그게 켈렌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켈렌이 서 있던 곳은 생각하기 전에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장으로 변모했고, 검을 배운 지 수 년이 지났지만 켈렌은 여전히 강한 검사였다.
*****
물론 마족 병사 수백을 혼자 다 썰어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하나하나가 인간보다 훨씬 강한 존재들이니 오히려 열이나 쓰러트린 게 기적에 가깝다고나 할까.
켈렌은 마력 회복 속도를 가늠했다.
빠르면 3분, 늦어도 10분이면 눈앞의 적들을 몽땅 쓸어버릴 수 있을 터.
그러나 그 사실은 적들도 알고 있었다.
"힘 빠진 마법사 하나를 여태 못 죽이다니, 자랑스러운 암흑 엄니의 병사들이 맞느냐!"
적군 지휘관이 고함을 버럭 치자, 켈렌을 향한 공격이 훨씬 매서워졌다.
막기는커녕 피하는 것도 버거웠고,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체력도 천천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앞선 병사 열 놈을 순식간에 썰어버린 광경에 적들은 겁을 집어먹은 듯 했다.
"이 자식들! 비켜라!"
거리를 쉽게 좁히지 못하는 병사들을 밀치고, 마족 지휘관이 직접 나섰다.
한손도끼임에도 웬만한 인간 크기의 커다란 도끼를 들고 선 지휘관은 콧방귀를 뀌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도끼에 붉은 기운이 덧씌워지자, 켈렌은 마력이 불쾌하게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크하압!"
놈이 으르렁거리며 도끼를 내리치자 굉음과 함께 지면이 사정없이 쪼개졌다.
켈렌은 직감적으로 위협을 감지해 뒤로 훌쩍 피했고, 그 직후 갈라진 지면 틈에서 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놈. 꽤 훌륭한 감각이군. 이름은?"
"켈렌."
"요주의 인물이라길래 긴장했건만. 이름부터 별 볼 일 없군. 나 바트라그가 널 짓뭉개주마!!"
"얼음창."
허공에서 세 개의 얼음창이 만들어져 날카롭게 허공을 날았다.
"흠!"
치켜들었던 도끼를 거칠게 휘둘러 모조리 박살낸 뒤, 마족 지휘관은 쿵쿵거리며 빠르게 돌진해왔다.
"분노의 도끼!!"
마기가 감싸진 도끼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켈렌을 몰아붙이는 바트라그.
좌우를 번갈아 베며 체력을 빼고... 기습적으로 박자를 끊어 왼쪽을 두 번...
당황한 켈렌의 발이 꼬여 흐름이 끊어진 그 순간, 도끼로 내리친다!
콰지직-!!
"크핫핫핫! 별 것도 아니군!!"
의기양양한 바트라그.
그러나 흙먼지가 흩어지자 그의 얼굴은 금세 구겨졌다.
발 밑에 널브러진 게 으깨진 핏덩이가 아니라 박살난 얼음 파편뿐이었으니.
"잘 싸우던데? 계속 해봐."
마법사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오자, 바트라그는 고개를 홱 들었다.
거기엔 분명 땅에 추락해 부상을 입고, 마력이 몽땅 바닥났을 마법사가 떠 있었다.
"네놈...! 어떻게!!"
"내 마력이 고작 일그러진 마력 좀 밀어낸 정도로 바닥났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바트라그는 그제야 다른 이들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 토벌의 주력 중 하나였던 얼음 마법을 쓰는 마법사를 조심하라는...
평범한 마법사 수준으로 얕봤다가는 이미 얼어붙은 채 죽음을 기다릴 것이라는 경고들을 떠올린 것이다.
"솔직히 아르콜로메를 쏜 건 나쁘지 않았어. 화염 그물도 괜찮았고. 하지만 혼역화마탄이 패인이군."
"말도 안 된다! 그것은 마력 사용을 아예 차단 시켰을 터!"
"우위를 가져간 입장에서 자신의 시야를 차단하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
혼역화마탄의 연기!
그 짧은 연기가 흩어지기 전에 얼음 분신을 만들어내어 몸을 피했다는 건가!
"조금은 재미있었다. 너희에게도 승산이 모래알만큼은 있었지."
"마, 말도 안 된다...!!"
"이게 현실이다. 멍청한 놈. 전투에 홀려 부하들조차 챙기지 못한 지휘관이라니."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바트라그는 곧 온몸에 얼음 가시가 박혀 서서히 얼어붙는 부하들을 발견했다.
"...크아아악!"
바트라그는 악을 쓰며 하늘로 뛰어올랐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잘도 내 분신을 짓뭉개더군."
켈렌의 손짓에 허공에서 얼음 기둥이 나타나, 두려움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바트라그의 위에 떨어졌다.
지면과 얼음 기둥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를 본 켈렌은 얼굴을 찌푸리며 얼음 기둥을 땅 밑으로 깊이 밀어넣었다.
굳이 불쾌한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
"이것들이 미끼라면... 반대쪽으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켈렌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마계로 들어온 이상, 모조리 부숴버리고 떠날 생각이었으니.
켈렌은 이에 익숙해지기 위해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마왕 토벌 때만 해도 이보다는 쾌적했었거늘, 마족들이 날뛰며 마기가 더욱 강해진 탓이리라.
켈렌은 혀를 차면서 능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바위와 탁한 강물.
그 주위로 떠다니는 찐득한 느낌의 마력.
한 번 봤다 한들, 익숙해질 수는 없는 풍경이었다.
진저리를 치던 켈렌은 곧 앞서가던 6번 얼음 요정이 박살난 것을 느꼈다.
행군하던 마족 병사들이 발견하고 부순 것으로 추정됐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돌리고, 몸을 쭉쭉 늘리며 풀어준 뒤, 켈렌은 목표물을 향해 날아올랐다.
빙설신룡, 프리나의 아이디어를 채용한 얼음정령화.
얼음 마력의 심장을 가진 순간부터 켈렌의 육체는 점점 인간보다 얼음에 가깝게 변해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얼음 정령 쪽에 가깝게.
원래도 육체만 인간일 뿐, 마력은 얼음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력회로의 중심이자 인간 육체의 중심이기도 한 심장이 마력으로 구성되다니.
얼음 정령으로 변하는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게 나쁜 건가?"
"으음... 내가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지."
"육신이 인간이어야만 켈렌인 걸까? 다리를 잃고 나무 막대를 끼운 해적은? 팔을 잃고 검을 단 기사는?"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들은 신체 결손의 대용품을 찾은 거지, 나처럼 아예 변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상관이람? 단순하게 생각해. 사고하는 네가 진짜 너지, 몸이 돌로 변하든 나무로 변하든."
자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켈렌은, 프리나의 지적에 마음을 놓았다.
놓고 보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육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
심지어 마력과 마력회로를 다루고, 영혼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마법사는 더더욱.
"맞는 것 같네. 그럼 첫 번째 고민 끝."
"두 번째는 뭔데?"
"이걸 어디 써먹을 수 없나 하는 거지."
"으음... 변신술은 어때?"
"그거... 괜찮네...!"
*****
가장 많이 연습했고, 그래서인지 가장 익숙한 용의 모습으로 켈렌은 날아갔다.
너무 잘 보이는 형태면 곤란하다고 말했지만...
"안돼! 무조건 용! 드래곤!"
"왜, 왜 그렇게 용을 고집하는 건데!?"
"...본모습으로 데이트하고 싶으니까...!!"
"......"
"저리 가."
"응."
"으아아악! 죽어라, 인간!"
빙설신룡의 멍청한 장면을 영원히 뇌리에 새기겠다고 다짐한 켈렌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잔혹했다.
얼음정령화를 하루에 여섯 시간이나 연습해야 했으며, 끊임없이 구박과 잔소리를 들어온 것이다.
'그래놓고...'
"뭐해?"
정작 프리나는 참새 모습으로 켈렌의 머리에 폴싹 앉아있었다.
켈렌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웃는 낯을 유지했다.
그러나 정령왕의 직감은 켈렌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내 생각했구나."
"...맞아. 어떻게 알았지?"
"안 좋은 쪽으로."
"......아니야."
켈렌이 뒤통수에 눈은 없지만 얼음 참새의 차가운 시선은 제대로 느껴졌다.
"봐줘."
"하는 거 봐서."
켈렌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곧이어 행군하는 마족 병사 무리를 발견했다.
선공은 켈렌이 가져갔지만, 그 직후 마족 군단도 켈렌을 발견했다.
"백년고드름."
"쏴라!"
허공에서 나타나 땅에 꽂히는 나무 크기의 거대한 고드름.
화염에 휩싸여 하늘을 가르는 금속 기둥.
빗나가고 스쳐 지나가고 충돌하며, 대규모 격돌이 벌어졌다.
"뒤!"
"아차!"
그때, 마족 군단에서 발사한 금속 기둥이 허공에 멈추더니, 반대로 날아들었다.
여태 쏜 것만 십수 개.
그것들이 전부 켈렌을 향해 짓쳐왔다.
"젠...장!!"
켈렌은 용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보이며 공격을 피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만큼 타격을 입었다.
몸통에 직격으로 하나가 꽂히자, 다른 것들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켈렌은 그대로 불타는 금속 기둥에 눌려 땅에 내려찍혔다.
"화염 그물, 쏴라!"
충격에 흐려지는 시야로, 촘촘한 화염 그물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켈렌은 재빨리 변신을 풀고, 방어막을 펼쳤다.
급조했지만 마력을 두껍게 발랐기에 화염 그물 정도는 버티리라.
그러나 켈렌은 마계를, 마계의 군단을 얕보고 있었다.
치이익-!
화염 그물은 얼음 방어막을 빠르게 녹이면서 점점 조여들었다.
"계속해서 쏴라! 혼역화마탄昏逆禍魔彈!"
그제야 켈렌은 함정임을 깨달았다.
산 하나를 통째로 얼려버리는 대마법을 썼으니 켈렌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을 테고, 미끼로 군단 하나를 행군시킨 것...!
"정령계로 가 있어.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까."
"안-"
프리나를 재빨리 역소환 시킨 후, 켈렌은 주위에 마력을 방출했다.
그리고 흩뿌려진 마력으로 주변을 휩쓸어버릴 생각이었지만...
'혼역화마탄!'
마력 밀도를 불균형하게 만들고 마력의 흐름을 기괴하게 바꾸는 포탄!
마력 통제가 불가능한 건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몸에 받아들였다간 회로가 몽땅 망가져버릴 터.
"미친 것들... 나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까지 해?!"
켈렌은 어금니를 으득 갈면서, 방어막을 완전히 녹이고 조여드는 화염 그물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손이 불타는 고통을 참아내며, 켈렌은 그물을 확 찢어버렸다.
그리고 마력을 단번에 끄집어내 폭발시켜 주변의 혼란스러운 마력 흐름을 모두 밀어냈다.
마력 진공 현상.
마법사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혼란한 마력이 체내에 유입되기라도 하면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불타는 금속 기둥의 열기로 공기가 끓어오르고, 마력은 쥐똥만큼도 없는 환경에서 켈렌은 마족 병사 수백을 상대해야 했다.
"요즘 너무 쉽게 살긴 했지."
마지막 남은 마력을 긁어모아 얼음으로 검을 한 자루 만든 켈렌은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마법을 쓸 줄 아는 적은 없어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일까, 그마저도 불행일까.
그게 켈렌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켈렌이 서 있던 곳은 생각하기 전에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장으로 변모했고, 검을 배운 지 수 년이 지났지만 켈렌은 여전히 강한 검사였다.
*****
물론 마족 병사 수백을 혼자 다 썰어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하나하나가 인간보다 훨씬 강한 존재들이니 오히려 열이나 쓰러트린 게 기적에 가깝다고나 할까.
켈렌은 마력 회복 속도를 가늠했다.
빠르면 3분, 늦어도 10분이면 눈앞의 적들을 몽땅 쓸어버릴 수 있을 터.
그러나 그 사실은 적들도 알고 있었다.
"힘 빠진 마법사 하나를 여태 못 죽이다니, 자랑스러운 암흑 엄니의 병사들이 맞느냐!"
적군 지휘관이 고함을 버럭 치자, 켈렌을 향한 공격이 훨씬 매서워졌다.
막기는커녕 피하는 것도 버거웠고,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체력도 천천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앞선 병사 열 놈을 순식간에 썰어버린 광경에 적들은 겁을 집어먹은 듯 했다.
"이 자식들! 비켜라!"
거리를 쉽게 좁히지 못하는 병사들을 밀치고, 마족 지휘관이 직접 나섰다.
한손도끼임에도 웬만한 인간 크기의 커다란 도끼를 들고 선 지휘관은 콧방귀를 뀌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도끼에 붉은 기운이 덧씌워지자, 켈렌은 마력이 불쾌하게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크하압!"
놈이 으르렁거리며 도끼를 내리치자 굉음과 함께 지면이 사정없이 쪼개졌다.
켈렌은 직감적으로 위협을 감지해 뒤로 훌쩍 피했고, 그 직후 갈라진 지면 틈에서 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놈. 꽤 훌륭한 감각이군. 이름은?"
"켈렌."
"요주의 인물이라길래 긴장했건만. 이름부터 별 볼 일 없군. 나 바트라그가 널 짓뭉개주마!!"
"얼음창."
허공에서 세 개의 얼음창이 만들어져 날카롭게 허공을 날았다.
"흠!"
치켜들었던 도끼를 거칠게 휘둘러 모조리 박살낸 뒤, 마족 지휘관은 쿵쿵거리며 빠르게 돌진해왔다.
"분노의 도끼!!"
마기가 감싸진 도끼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켈렌을 몰아붙이는 바트라그.
좌우를 번갈아 베며 체력을 빼고... 기습적으로 박자를 끊어 왼쪽을 두 번...
당황한 켈렌의 발이 꼬여 흐름이 끊어진 그 순간, 도끼로 내리친다!
콰지직-!!
"크핫핫핫! 별 것도 아니군!!"
의기양양한 바트라그.
그러나 흙먼지가 흩어지자 그의 얼굴은 금세 구겨졌다.
발 밑에 널브러진 게 으깨진 핏덩이가 아니라 박살난 얼음 파편뿐이었으니.
"잘 싸우던데? 계속 해봐."
마법사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오자, 바트라그는 고개를 홱 들었다.
거기엔 분명 땅에 추락해 부상을 입고, 마력이 몽땅 바닥났을 마법사가 떠 있었다.
"네놈...! 어떻게!!"
"내 마력이 고작 일그러진 마력 좀 밀어낸 정도로 바닥났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바트라그는 그제야 다른 이들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왕 토벌의 주력 중 하나였던 얼음 마법을 쓰는 마법사를 조심하라는...
평범한 마법사 수준으로 얕봤다가는 이미 얼어붙은 채 죽음을 기다릴 것이라는 경고들을 떠올린 것이다.
"솔직히 아르콜로메를 쏜 건 나쁘지 않았어. 화염 그물도 괜찮았고. 하지만 혼역화마탄이 패인이군."
"말도 안 된다! 그것은 마력 사용을 아예 차단 시켰을 터!"
"우위를 가져간 입장에서 자신의 시야를 차단하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
혼역화마탄의 연기!
그 짧은 연기가 흩어지기 전에 얼음 분신을 만들어내어 몸을 피했다는 건가!
"조금은 재미있었다. 너희에게도 승산이 모래알만큼은 있었지."
"마, 말도 안 된다...!!"
"이게 현실이다. 멍청한 놈. 전투에 홀려 부하들조차 챙기지 못한 지휘관이라니."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바트라그는 곧 온몸에 얼음 가시가 박혀 서서히 얼어붙는 부하들을 발견했다.
"...크아아악!"
바트라그는 악을 쓰며 하늘로 뛰어올랐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잘도 내 분신을 짓뭉개더군."
켈렌의 손짓에 허공에서 얼음 기둥이 나타나, 두려움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바트라그의 위에 떨어졌다.
지면과 얼음 기둥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를 본 켈렌은 얼굴을 찌푸리며 얼음 기둥을 땅 밑으로 깊이 밀어넣었다.
굳이 불쾌한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
"이것들이 미끼라면... 반대쪽으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켈렌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마계로 들어온 이상, 모조리 부숴버리고 떠날 생각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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