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 정벌(2)
조회 : 157 추천 : 0 글자수 : 6,481 자 2024-04-23
켈렌은 잘 단련된 집중력과 순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시간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사고가 일방적으로 가속되었다.
여덟 방향에서 느껴지는 살기등등한 공격.
광범위하고 속도도 빨랐다.
방어용으로 걸친 마법들만 믿고 버티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수준급의 마법이지만 이만한 위력을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켈렌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손에 마력을 모았다.
다시 시간이 빨라지고, 마계 귀족들의 공격이 한 곳에 모였다.
콰앙-!!
살벌한 굉음과 함께 지면이 갈라지고 온통 섞여 혼탁해진 마력이 솟구쳤다.
"젠장. 사라졌다!"
"위다!"
"제길...!!"
켈렌은 지면에서 솟아나온 얼음 기둥 위에 서 있었다.
"위 아래로 퇴로를 내주다니. 적이 하나뿐인 전투는 익숙하지 않은 거냐?"
켈렌의 도발에 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힘이 곧 법칙인 마계의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그들이었으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도 사실.
분노를 담은 공격을 계속할 뿐이었다.
"오만한 말을 지껄이는 것도 지금뿐이다!"
크페르토스가 얼어붙은 대검 대신 피로 굳혀 만들어낸 마검을 휘두르자, 얼음 기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놈도 공격을 전부 피한 것은 아니다! 왼쪽 어깨가 약점이다!"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가 고함을 지르자, 귀족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잡을 수 있다.
절대 불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썩어 문드러진 자, 파슬뤤토스가 역병 저주를 날렸다.
켈렌은 순간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환부를 얼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완전히 곪아 썩어 문드러질뻔 했을 터.
마음 같아선 잘라내고 처치하고 싶지만, 빈틈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타핫!"
크페르토스가 놓치지 않고 따라와, 혈검을 휘둘렀다.
켈렌은 얼음 검을 두 자루 뽑아내 혈검을 동강내버리고, 한 자루를 단창으로 바꿔 크페르토스의 가슴팍에 꽂아버렸다.
"크억!"
크페르토스는 얼음창을 쥐고 뽑아내려했으나, 얼어붙는 속도는 그의 예상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상체를 얼려버릴 냉기에, 크페르토스는 이를 악물고 얼어가는 몸을 쥐어뜯었다.
피와 살점이 허공에 흩뿌려지자, 고통스런 신음을 뱉던 크페르토스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피를 바친 만큼 강해지는 그의 능력은 이런 상황에 아주 어울렸다.
지면을 적신 피가 핏방울이 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혈탄폭풍血彈暴風!!"
핏방울을 총탄처럼, 동시에 폭풍처럼 휘몰아치게 하여 공간을 나누어버리는 크페르토스의 기술.
강한 적과 방해받지 않고 일대일로 싸우기 위해 시전하는 기술이지만...
차라리 방해를 받고 싶은 심정과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력을 증폭시켜 상처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당당히 켈렌을 보고 섰다.
힘을 개방했다고 한들, 크페르토스 혼자서는 켈렌을 절대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페르토스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생각이 없어졌다.
살아서 돌아가기는커녕 죽을 수밖에 없는 전투라면...
적어도 목적은 이루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법사여. 그대의 힘에 경의를 표하지. 오만함이 아닌 자신감이었군."
"이제 와서 아부 한다고 살려주진 못해."
"살아돌아갈 생각은 진작 버렸다."
크페르토스가 붉은 안광을 번쩍이고는,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푹 찔러넣었다.
켈렌은 눈앞의 귀족이 펼치는 기행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제 손으로 심장을 뽑아버리는 건 인간이고 마족이고를 떠나 할 짓이 못 됐다.
"나의 피로 나의 땅을 지키리."
이윽고 크페르토스의 마력이 수십 배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옛 마왕 토벌 당시, 마왕이 해방했던 압도적인 마력에 가까웠다.
"크합!"
뿐만 아니라 몸집까지 커지면서, 크페르토스는 거의 켈렌의 세 배까지 부풀린 몸집으로 공격해왔다.
주먹 한 번에 풍압이 일어나고, 발길질 한 번에 땅이 갈라졌다.
켈렌은 그 모든 공격을 간신히 피하고, 빗겨 맞으면서도 반격하지 않았다.
초조했는지, 크페르토스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시도했다.
한 대만 제대로 맞으면 그걸로 끝이다... 한 대만...!!
켈렌은 얄밉게도 공격을 피해다녔고, 크페르토스는 평정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크워어어억!!"
도발의 포효까지 내지르며, 크페르토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피가 모여 굳어 만들어진 한 쌍의 또 다른 팔.
네 개의 팔로 무시무시한 공세를 펼치는 크페르토스였다.
그리고 한 순간, 켈렌의 회피가 반의 반 박자 늦었다.
아주 약간의, 눈을 깜빡이는 시간의 절반 정도의 찰나.
크페르토스의 공격은 그보다 빨랐다.
"...컥!!"
켈렌의 옆구리에 크페르토스의 주먹이 통렬히 적중했다.
크페르토스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갈비뼈와 내장을 쳐부수는 감각을 느끼며,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자신이 치명타를 먹이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이게 진정한 동귀어진 아니겠는가.
그 말대로, 마계를 어지럽히던 마법사는 날렵하게 움직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발작하며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컥... 커흑...!"
옆구리는 마치 칼로 난도질 당한 것처럼 흉측한 표식이 검붉게 타올랐다.
"후... 후후... 내 피는 저승길 선물이다..."
목적을 이뤘다는 생각에, 크페르토스는 뒤로 조금 물러나 발작하는 켈렌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온몸의 힘이 진작 빠져나갔음을 깨달았고,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지면에 엎어졌다.
생명체에게 허락된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모아 한 번에 터트린 대가는 죽음이었으니.
크페르토스는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귀족들도 느낄 수 있었다.
섣불리 들어설 수 없는 피의 폭풍 안에서 느껴지던 소름 끼칠 정도로 강대한 마력.
그 압도적인 마력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장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크페르토스..."
피의 폭풍이 잠잠해지자, 오데라토트의 눈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켈렌이 들어왔다.
"저놈이...!!"
오데라토트의 눈이 번쩍였다.
그의 온몸에서 돋아난 칼날이 켈렌의 팔다리를 찢어놓기 직전.
오데라토트는 위화감을 느꼈다.
크페르토스가 죽음을 무릅쓰고 마법사에게 치명타를 먹였을 터.
하지만 본능과 직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법사는 하찮은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크워어! 죽어라!!"
야수의 심장, 페리바코스가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한 채 켈렌을 향해 돌진했다.
오데라토트가 말릴 새도 없이 재빠른 돌진이었다.
"건방진 애송이 주제에-"
다음 순간, 귀족들은 섬찟한 감각을 느꼈다.
페리바코스가 달려들다말고 엎어져 산산이 부서져버린 것이다.
마치 유리 조각을 냅다 집어던진 것처럼.
피를 토하던 켈렌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발작적으로 튀어나오는 기침에 피가 계속 섞여나오긴 했지만, 적어도 켈렌이 이 자리의 모두를 쓸어버리는 데에 지장은 없는 듯 했다.
"무슨... 인간이 아니군."
"아츠라카에선 꽤 많은 변화가 있었지. 암흑 정령들도 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네놈...!"
암흑 정령들이 자신들에게 정보를 바쳤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그러지 않았을 이유가 없지."
켈렌은 그렇게 말하면서,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무심하게 닦아냈다.
오데라토트가 관찰한 것과 달리, 켈렌은 여전히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크페르토스의 목숨을 바친 공격은 아무리 방어 마법을 겹겹이 두른 켈렌이라 해도 멀쩡히 견디기 어려웠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정령화가 일어나고 있는 켈렌에겐 그 위력이 반감되는 면이 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상당한 피해였다.
"미리 깔아뒀군...?"
오데라토트는 산산이 부서진 페리바코스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만약을 위해서다. 내가 공격을 받으면 그 위력에 비례하는 마력이 뿜어져나오지. 내 마력은 나조차 담고 있기 어려운 것인데, 그걸 온몸으로 덮어썼으니."
켈렌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에 오데라토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자, 켈렌도 웃음기를 지웠다.
"......"
"......"
두 강자의 마력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다른 귀족들은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격돌을 지켜볼 뿐이었다.
허공에서, 지면에서, 하늘에서 마법은 계속해서 난사됐다.
충돌하고 부서지는 거대한 마력의 격류는, 곧 켈렌의 일격으로 끝이 났다.
오데라토트와 마법 전투를 하면서, 켈렌은 얼음검을 하나 만들어내 천천히 전진했다.
오데라토트는 켈렌의 의도를 읽고 기를 쓰며 마법을 완성시켰지만...
애초에 마법 전투부터 켈렌과 비빌 수준이 아니었으니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안된다!"
오데라토트가 검에 베여 쓰러짐과 동시에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가 켈렌의 내상을 발견했다.
썩어 문드러진 자, 파슬뤤토스가 저주를 날려 이를 악화시키려 했지만 이 또한 켈렌의 예상 범위 이내였다.
"빙옥반사경氷玉反射鏡"
주먹만한 얼음 구슬이 나타났고, 저주는 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가 몇 배의 위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힘의 주인이자 저주의 주인인 파슬뤤토스가 반사된 저주를 흡수했다.
느껴지는 막대한 힘에 한 번, 그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켈렌의 마력에 두 번 놀란 파슬뤤토스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평범한 반사 마법이었다면 힘을 얻었겠지만... 내가 체질상 평범한 마법은 못 부리는 터라."
켈렌은 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는 무심코 시선을 함께 향했다.
1초.
1초라는 시간 동안 인페네라토의 사고는 평소의 몇 배로 가속되었다.
얼음 마법.
구름.
얼음 알갱이.
마력 분포.
번개.
강력한 일격.
"모두 피해라!"
인페네라토는 고함과 함께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나 불운한 두 귀족은 그 말에 따르지 못하고는 하늘에서 내리꽂힌 얼음 번개에 직격당하고 말았다.
"이제... 셋인가?"
발악하는 자, 인푸르사니아
혼란시키는 자, 마디시페로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
세 귀족은 켈렌을 노려보았다.
그들도 방어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켈렌은 너무나 손쉽게, 마치 비눗방울 터트리듯 꿰뚫어 죽여버렸다.
"후우..."
어둠을 부리는 자, 아스코라토의 죽음으로 어둠이 흩어지자, 별이 잔뜩 박힌 밤하늘이 드러났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켈렌은 마력 순환을 더욱 빠르게 돌렸다.
"이마저도 전력이 아니었다는 건가...!"
세 귀족은 기함하며 몸서리를 쳤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강자를 건드린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오만했던 것은 그저 탁자 앞에 앉아 힘을 과신하던 그들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한다...! 투로바트!"
혼란시키는 자, 마디시페로는 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력을 몽땅 내뿜어 영역을 선언했다.
세계의 법칙이자 마력 운용의 절대기초마저 흔들어버리는 그의 영역.
투로바트는 어떤 마력이건 완전히 불규칙적인 형태로 바꾸어버리는 단 하나의 원칙을 세우는 영역이었다.
마력 회로가 폭발하거나 소멸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 상대 최악의 카운터!
심지어 상대가 정령화가 진행된 마법사라면 그 영향은 더욱 커졌다.
마력을 원동력 삼아 움직이는 정령은 이 영역 안에서 말라 죽을 테니.
"만약 바루펠이었다면..."
마디시페로는 조소를 머금었다.
극복하기 힘든 고비를 맞으니 멘토라면 어찌했을 지 생각해보는 것인가?
물론 본인 또한 모든 마력을 전부 내뿜어 영역을 완성시킨 것이기에 서 있는 게 전부지만, 눈앞의 마법사도 마력을 이끌어낼 수는 없을 터...
"...이런 영역을 내게 펼치진 않았겠지."
아직도 건방을!
마디시페로는 오만한 마법사의 건방을 꾸짖으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흘러나온 건 호통이 아닌 한 줌의 날숨.
아래를 내려다보자 수백의 얼음 가시와 얼음 결정이 그의 몸에 박혀 있었다.
그것도 살아있는 듯 그의 몸을 타고 올라오다가, 안으로 파고들기도 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컥... 꺼헉...!!"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쿨럭."
켈렌도 마력 회로에 상당한 대미지를 받았는지 꽤나 휘청거렸다.
"마력 원리 하나만큼은... 마탑에서 제일 빨리 배웠다...!"
마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불규칙성의 작용은 무엇인지.
켈렌의 머릿속엔 이 영역을 근본적으로 돌파할 방법이 이미 존재했다.
"말...도 안된다...!"
물론 마디시페로는 어이가 없었다.
본인조차 알 수 없는 영역의 불규칙성을 이용했단 말인가!
"뭐, 당연히... 규칙을 발견한 건 아니고..."
"......"
"운이 좋았을 뿐이지."
자신의 영역이 이토록 허무하게 파훼당했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마디시페로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영역, 투로바트가 걷히고 켈렌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은 두 귀족은 깊이 고민했다.
이제라도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빌어야 하나?
시간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사고가 일방적으로 가속되었다.
여덟 방향에서 느껴지는 살기등등한 공격.
광범위하고 속도도 빨랐다.
방어용으로 걸친 마법들만 믿고 버티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수준급의 마법이지만 이만한 위력을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켈렌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손에 마력을 모았다.
다시 시간이 빨라지고, 마계 귀족들의 공격이 한 곳에 모였다.
콰앙-!!
살벌한 굉음과 함께 지면이 갈라지고 온통 섞여 혼탁해진 마력이 솟구쳤다.
"젠장. 사라졌다!"
"위다!"
"제길...!!"
켈렌은 지면에서 솟아나온 얼음 기둥 위에 서 있었다.
"위 아래로 퇴로를 내주다니. 적이 하나뿐인 전투는 익숙하지 않은 거냐?"
켈렌의 도발에 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힘이 곧 법칙인 마계의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그들이었으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도 사실.
분노를 담은 공격을 계속할 뿐이었다.
"오만한 말을 지껄이는 것도 지금뿐이다!"
크페르토스가 얼어붙은 대검 대신 피로 굳혀 만들어낸 마검을 휘두르자, 얼음 기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놈도 공격을 전부 피한 것은 아니다! 왼쪽 어깨가 약점이다!"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가 고함을 지르자, 귀족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잡을 수 있다.
절대 불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썩어 문드러진 자, 파슬뤤토스가 역병 저주를 날렸다.
켈렌은 순간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환부를 얼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완전히 곪아 썩어 문드러질뻔 했을 터.
마음 같아선 잘라내고 처치하고 싶지만, 빈틈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타핫!"
크페르토스가 놓치지 않고 따라와, 혈검을 휘둘렀다.
켈렌은 얼음 검을 두 자루 뽑아내 혈검을 동강내버리고, 한 자루를 단창으로 바꿔 크페르토스의 가슴팍에 꽂아버렸다.
"크억!"
크페르토스는 얼음창을 쥐고 뽑아내려했으나, 얼어붙는 속도는 그의 예상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상체를 얼려버릴 냉기에, 크페르토스는 이를 악물고 얼어가는 몸을 쥐어뜯었다.
피와 살점이 허공에 흩뿌려지자, 고통스런 신음을 뱉던 크페르토스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피를 바친 만큼 강해지는 그의 능력은 이런 상황에 아주 어울렸다.
지면을 적신 피가 핏방울이 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혈탄폭풍血彈暴風!!"
핏방울을 총탄처럼, 동시에 폭풍처럼 휘몰아치게 하여 공간을 나누어버리는 크페르토스의 기술.
강한 적과 방해받지 않고 일대일로 싸우기 위해 시전하는 기술이지만...
차라리 방해를 받고 싶은 심정과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력을 증폭시켜 상처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당당히 켈렌을 보고 섰다.
힘을 개방했다고 한들, 크페르토스 혼자서는 켈렌을 절대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페르토스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생각이 없어졌다.
살아서 돌아가기는커녕 죽을 수밖에 없는 전투라면...
적어도 목적은 이루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법사여. 그대의 힘에 경의를 표하지. 오만함이 아닌 자신감이었군."
"이제 와서 아부 한다고 살려주진 못해."
"살아돌아갈 생각은 진작 버렸다."
크페르토스가 붉은 안광을 번쩍이고는,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푹 찔러넣었다.
켈렌은 눈앞의 귀족이 펼치는 기행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제 손으로 심장을 뽑아버리는 건 인간이고 마족이고를 떠나 할 짓이 못 됐다.
"나의 피로 나의 땅을 지키리."
이윽고 크페르토스의 마력이 수십 배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옛 마왕 토벌 당시, 마왕이 해방했던 압도적인 마력에 가까웠다.
"크합!"
뿐만 아니라 몸집까지 커지면서, 크페르토스는 거의 켈렌의 세 배까지 부풀린 몸집으로 공격해왔다.
주먹 한 번에 풍압이 일어나고, 발길질 한 번에 땅이 갈라졌다.
켈렌은 그 모든 공격을 간신히 피하고, 빗겨 맞으면서도 반격하지 않았다.
초조했는지, 크페르토스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시도했다.
한 대만 제대로 맞으면 그걸로 끝이다... 한 대만...!!
켈렌은 얄밉게도 공격을 피해다녔고, 크페르토스는 평정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크워어어억!!"
도발의 포효까지 내지르며, 크페르토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피가 모여 굳어 만들어진 한 쌍의 또 다른 팔.
네 개의 팔로 무시무시한 공세를 펼치는 크페르토스였다.
그리고 한 순간, 켈렌의 회피가 반의 반 박자 늦었다.
아주 약간의, 눈을 깜빡이는 시간의 절반 정도의 찰나.
크페르토스의 공격은 그보다 빨랐다.
"...컥!!"
켈렌의 옆구리에 크페르토스의 주먹이 통렬히 적중했다.
크페르토스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갈비뼈와 내장을 쳐부수는 감각을 느끼며,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자신이 치명타를 먹이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이게 진정한 동귀어진 아니겠는가.
그 말대로, 마계를 어지럽히던 마법사는 날렵하게 움직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발작하며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컥... 커흑...!"
옆구리는 마치 칼로 난도질 당한 것처럼 흉측한 표식이 검붉게 타올랐다.
"후... 후후... 내 피는 저승길 선물이다..."
목적을 이뤘다는 생각에, 크페르토스는 뒤로 조금 물러나 발작하는 켈렌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온몸의 힘이 진작 빠져나갔음을 깨달았고,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지면에 엎어졌다.
생명체에게 허락된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모아 한 번에 터트린 대가는 죽음이었으니.
크페르토스는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귀족들도 느낄 수 있었다.
섣불리 들어설 수 없는 피의 폭풍 안에서 느껴지던 소름 끼칠 정도로 강대한 마력.
그 압도적인 마력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장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크페르토스..."
피의 폭풍이 잠잠해지자, 오데라토트의 눈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켈렌이 들어왔다.
"저놈이...!!"
오데라토트의 눈이 번쩍였다.
그의 온몸에서 돋아난 칼날이 켈렌의 팔다리를 찢어놓기 직전.
오데라토트는 위화감을 느꼈다.
크페르토스가 죽음을 무릅쓰고 마법사에게 치명타를 먹였을 터.
하지만 본능과 직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법사는 하찮은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크워어! 죽어라!!"
야수의 심장, 페리바코스가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한 채 켈렌을 향해 돌진했다.
오데라토트가 말릴 새도 없이 재빠른 돌진이었다.
"건방진 애송이 주제에-"
다음 순간, 귀족들은 섬찟한 감각을 느꼈다.
페리바코스가 달려들다말고 엎어져 산산이 부서져버린 것이다.
마치 유리 조각을 냅다 집어던진 것처럼.
피를 토하던 켈렌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발작적으로 튀어나오는 기침에 피가 계속 섞여나오긴 했지만, 적어도 켈렌이 이 자리의 모두를 쓸어버리는 데에 지장은 없는 듯 했다.
"무슨... 인간이 아니군."
"아츠라카에선 꽤 많은 변화가 있었지. 암흑 정령들도 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네놈...!"
암흑 정령들이 자신들에게 정보를 바쳤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그러지 않았을 이유가 없지."
켈렌은 그렇게 말하면서,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무심하게 닦아냈다.
오데라토트가 관찰한 것과 달리, 켈렌은 여전히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크페르토스의 목숨을 바친 공격은 아무리 방어 마법을 겹겹이 두른 켈렌이라 해도 멀쩡히 견디기 어려웠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정령화가 일어나고 있는 켈렌에겐 그 위력이 반감되는 면이 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상당한 피해였다.
"미리 깔아뒀군...?"
오데라토트는 산산이 부서진 페리바코스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만약을 위해서다. 내가 공격을 받으면 그 위력에 비례하는 마력이 뿜어져나오지. 내 마력은 나조차 담고 있기 어려운 것인데, 그걸 온몸으로 덮어썼으니."
켈렌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에 오데라토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자, 켈렌도 웃음기를 지웠다.
"......"
"......"
두 강자의 마력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다른 귀족들은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격돌을 지켜볼 뿐이었다.
허공에서, 지면에서, 하늘에서 마법은 계속해서 난사됐다.
충돌하고 부서지는 거대한 마력의 격류는, 곧 켈렌의 일격으로 끝이 났다.
오데라토트와 마법 전투를 하면서, 켈렌은 얼음검을 하나 만들어내 천천히 전진했다.
오데라토트는 켈렌의 의도를 읽고 기를 쓰며 마법을 완성시켰지만...
애초에 마법 전투부터 켈렌과 비빌 수준이 아니었으니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안된다!"
오데라토트가 검에 베여 쓰러짐과 동시에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가 켈렌의 내상을 발견했다.
썩어 문드러진 자, 파슬뤤토스가 저주를 날려 이를 악화시키려 했지만 이 또한 켈렌의 예상 범위 이내였다.
"빙옥반사경氷玉反射鏡"
주먹만한 얼음 구슬이 나타났고, 저주는 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가 몇 배의 위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힘의 주인이자 저주의 주인인 파슬뤤토스가 반사된 저주를 흡수했다.
느껴지는 막대한 힘에 한 번, 그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켈렌의 마력에 두 번 놀란 파슬뤤토스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평범한 반사 마법이었다면 힘을 얻었겠지만... 내가 체질상 평범한 마법은 못 부리는 터라."
켈렌은 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는 무심코 시선을 함께 향했다.
1초.
1초라는 시간 동안 인페네라토의 사고는 평소의 몇 배로 가속되었다.
얼음 마법.
구름.
얼음 알갱이.
마력 분포.
번개.
강력한 일격.
"모두 피해라!"
인페네라토는 고함과 함께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나 불운한 두 귀족은 그 말에 따르지 못하고는 하늘에서 내리꽂힌 얼음 번개에 직격당하고 말았다.
"이제... 셋인가?"
발악하는 자, 인푸르사니아
혼란시키는 자, 마디시페로
꿰뚫어보는 자, 인페네라토
세 귀족은 켈렌을 노려보았다.
그들도 방어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켈렌은 너무나 손쉽게, 마치 비눗방울 터트리듯 꿰뚫어 죽여버렸다.
"후우..."
어둠을 부리는 자, 아스코라토의 죽음으로 어둠이 흩어지자, 별이 잔뜩 박힌 밤하늘이 드러났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켈렌은 마력 순환을 더욱 빠르게 돌렸다.
"이마저도 전력이 아니었다는 건가...!"
세 귀족은 기함하며 몸서리를 쳤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강자를 건드린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오만했던 것은 그저 탁자 앞에 앉아 힘을 과신하던 그들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한다...! 투로바트!"
혼란시키는 자, 마디시페로는 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력을 몽땅 내뿜어 영역을 선언했다.
세계의 법칙이자 마력 운용의 절대기초마저 흔들어버리는 그의 영역.
투로바트는 어떤 마력이건 완전히 불규칙적인 형태로 바꾸어버리는 단 하나의 원칙을 세우는 영역이었다.
마력 회로가 폭발하거나 소멸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 상대 최악의 카운터!
심지어 상대가 정령화가 진행된 마법사라면 그 영향은 더욱 커졌다.
마력을 원동력 삼아 움직이는 정령은 이 영역 안에서 말라 죽을 테니.
"만약 바루펠이었다면..."
마디시페로는 조소를 머금었다.
극복하기 힘든 고비를 맞으니 멘토라면 어찌했을 지 생각해보는 것인가?
물론 본인 또한 모든 마력을 전부 내뿜어 영역을 완성시킨 것이기에 서 있는 게 전부지만, 눈앞의 마법사도 마력을 이끌어낼 수는 없을 터...
"...이런 영역을 내게 펼치진 않았겠지."
아직도 건방을!
마디시페로는 오만한 마법사의 건방을 꾸짖으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흘러나온 건 호통이 아닌 한 줌의 날숨.
아래를 내려다보자 수백의 얼음 가시와 얼음 결정이 그의 몸에 박혀 있었다.
그것도 살아있는 듯 그의 몸을 타고 올라오다가, 안으로 파고들기도 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컥... 꺼헉...!!"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쿨럭."
켈렌도 마력 회로에 상당한 대미지를 받았는지 꽤나 휘청거렸다.
"마력 원리 하나만큼은... 마탑에서 제일 빨리 배웠다...!"
마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불규칙성의 작용은 무엇인지.
켈렌의 머릿속엔 이 영역을 근본적으로 돌파할 방법이 이미 존재했다.
"말...도 안된다...!"
물론 마디시페로는 어이가 없었다.
본인조차 알 수 없는 영역의 불규칙성을 이용했단 말인가!
"뭐, 당연히... 규칙을 발견한 건 아니고..."
"......"
"운이 좋았을 뿐이지."
자신의 영역이 이토록 허무하게 파훼당했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마디시페로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영역, 투로바트가 걷히고 켈렌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은 두 귀족은 깊이 고민했다.
이제라도 고통 없이 죽여달라고 빌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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