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2부] 먼저 본 사람이 임자. (by. 율리어스)
조회 : 175 추천 : 0 글자수 : 4,428 자 2024-05-04
마차가 움직였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에선 이미 사람들이 다 내린 상태로 마차는 율리어스의 시야에서 멀어져갔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그의 시야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확연히 보이기 시작하는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헤 ~ 에”
그 감탄사는 자동반사적으로 속이 아닌 겉으로 튀어나왔다.
율리어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이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흐르는 은하수처럼 아름드리 빛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일부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가 소악마라는 소문에 의심의 여지가 생기고도 남았겠지만….
딱 10살이란 제 나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 순간이 마지막만 아니길.
저벅. 저벅.
어느샌가 어린 소녀는 다섯 살의 아장아장한 귀여운 걸음걸이로 정원의 근처까지 와있었다.
짧지만 바람이 일 때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바로 그의 눈이 고정되었다.
율리어스, 자신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자줏빛 머리카락.
아름답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수수한 듯 질 낮아 보이는 갈색 가죽 아래에 조금 얇아 보이는 어두운 빛깔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눈에는 그 소녀의 모습이 눈에 확연히 박혔다.
같은 머리카락 색을 더불어 무엇보다도…….
똘망똘망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한 작은 구슬들이 한 떼 모여 땡그란 옥구슬이 되어버린 듯한 분홍빛 눈동자.
두 번이나 맞물리는 빛깔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치 인력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린보다 훨씬 낫잖아?’
아이린은 아직 갓난아기였던 그의 또 다른 배다른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교를 해도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와 비교까지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툭 하면 울지….’
매우 귀찮은 느낌이 역력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고 있는 율리어스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아직 울음을 터트리는 걸로 밖에 자아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기인 아이린을 상대로 어디 쓸데도 없는 비교를 고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덜 귀찮고 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릴리스티아라고.
결국 율리어스. 본인이 정하고 결정한 전혀 의미 없는 비교에 아이린은 아기일 때부터 이미 릴리스티아에게 씁쓸하면서도 어쩌면 안타까운 무안의 1패를 당해버렸다.
그리고 율리어스가 말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빠져있는 사이 그는 자신의 입이 쩍 벌어진 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툭하면 빽빽 울어대는 아기랑 비교한다면 새로 온 이쪽 여동생이 낫다고 그의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촌스러운 티가 좀 남아있으면 어땠는가……!
신기하게도 예비 여동생은 앞으로 율리어스, 자신의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새어머니를 하나도 닮지 않았….
‘무, 무슨 소리야!’
율리어스는 자연스럽게 흘러갈 법했던 지나친(?) 생각에 순간적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그리고 그 흐름이 깨지며 파문이 일어났다.
큰일 날 소리로 율리어스는 그대로 자칫 인정할 뻔했었다.
‘저 여자는 평민이야.
내가 아무리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새어머니라니 말도 안 되지.’
율리어스의 아버지는 율리어스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만 어려운 느낌의 대상자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다거나,
도를 지나치거나,
딱 잘라 아니라고 부정해야 될 부분만큼은 그는 철저하면서도 아주 따끔하게 가르침을 내렸다.
‘뭐…. 아버지니까.’
처음엔 매번 율리어스는 가볍게 생각하며 넘어갔었다.
‘난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더 그런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어려워하지 말고 이해하자는 긍정적인 사고와 방식에 모든 걸 맡겼다.
[ 그게 아니지. ]
‘뭐가 아닌 거지….’
[ 왜 못 알아듣는 것이냐? 답답하군. ]
‘답답…. 아버지. 저야말로 답답하다고요. 네?’
[ 신중을 기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
‘닳도록 말했어요. 아버지.
하지만…….’
[ 넌 언제쯤이면 알아들을 생각인 거지? ]
뭔가 뒤틀리고 있었다.
긍정적인 사고 회로는 오래가는 건 어려워지고 말았다.
율리어스의 얼굴빛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러버리면서 말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
조금씩 뒤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듯싶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말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시초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 지금 네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구나. 율리어스. ]
이날이 최고 문제의 발달사가 되는 날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각인으로 남아버렸다.
어린 소년의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무표정이었다.
슬퍼 보이지도 않았으며 어머니를 위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셨다.
그는 율리어스 아버지 이전에 어머니 인생의 반려자였다.
그런데 저런 감정 하나 느낄 수 없는 목각인형과 다를 바 없다니.
어린 마음에 율리어스는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충격엔 헤어 나올 수 없었던 만큼이나 어린 소년의 마음에 큰 상처로 새겨지면서 남겨지고야 말았다.
‘난 어머니를 사랑하지도 않은 저런 매정한 인간을 내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겠어.’
부모님이라는 ‘아버지’이기 전에 ‘가주’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기로 결심이 선 율리어스였다.
꾹,
‘……………….’
마치 대못이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뭔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느낌도 같이 율리어스의 속마음을 점령해 갔었다.
‘이 느낌은……….’
사뭇 떠오르는 게 있었다.
용의 역린.
서재에서 표지와 책지가 해어질 정도로 낡은 한 권의 책을 읽은 게 마침 어린 소년은 떠올랐다.
붉은 드래곤의 비늘이 서슬 퍼렇게 치솟아 올라가 있는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용사가 드래곤을 물리치는 내용이었지만 그런 해피엔드의 끝맺음을 내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떠오르는 건 그 책의 내용에서 등장한 붉은 드래곤만이 지닌 용의 역린밖에 없었다.
‘아마 저 망할 아버진 모르겠지.’
아버지는 아무래도 율리어스도 몰랐던 용의 역린 같은 것을 건드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 어린 소년의 감정은 어둠의 소용돌이에 빠지듯 어둠이 꾸물꾸물거렸다.
‘역겹네.’
그 익숙지 않은 꾸물거림은 솔직히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다.
평상시엔 쥐 죽은 듯이 내 깊은 감정 아래 아주 깊숙이 숨어있었지만 단 하나의 장소에서만 예외로 어린 소년의 감정을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망할 아버지.’
아버지를 뵌 날에만 되면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삼켜버림에 그 원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회피하고자 일부러 피하는 날들도 늘어났었다.
[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율리어스 도련님. ]
“지금은 바빠.”
[ 가주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십니다. 율리어스 도련님. ]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내일 뵈어도 되지?”
[ 가주 님께ᄉ……….]
윽.
“간다고!”
매번 일부러 피하기는 힘든 일인 만큼 곤욕스러운 건 집사였다.
그런 집사에게 미안한 감정은 들었지만, 율리어스는 그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아버지 서재에 불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율리어스는 어느덧 열 살이 되었다.
‘하지만 망할 아버진 모르시겠지.’
어린 나이 때부터 소년은 혼자 괴로웠었다.
어머니의 비호를 받기는커녕,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늘어났었다.
그리고 그 원망만큼이나 아버지란 사람은 율리어스에게 이상한 소문이 붙도록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게 지금에 이른 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율리어스의 원망의 대상자에게 흥미로운 소녀가 생기고 그 정보를 낚아 채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처음에는 이용 가치에 관한 생각도 들었지만 직접 보는 순간 모든 검은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예비 여동생이라면 달랐다.
평민인 그쪽 어머니의 피가 섞여 있지만 그 피의 반은 율리어스 아버지의 피라는 걸 증명하듯
소녀는 어머니를 닮은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렷할 정도로 소녀의 이목구비는 율리어스나 아이린과 빼다 박아 넣은 것처럼 판박이였다.
그런 점을 비롯해 그는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라도 여동생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잖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히히.’
그는 드디어 자신의 나이 때에 맞는 익살스러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혼자 긍정의 의사를 굽히지 않겠다는 식으로 여러 번 고개마저 연신 끄덕거렸다.
율리어스는 새어머니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본심대로라면 새어머니란 존재는 아예 필요 없었고, 보자마자 첫눈에 꽂힐 대로 꽂힌(?) 예비 여동생은 마음에 쏙 들었다.
‘쟤는 내 여동생으로 안성맞춤이야.’
처음으로 그는 원하는 게 생겼다.
그의 성격상 아버지에게도 원하거나 원하는 바를 말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인정하지 못하지만 꽂혀버린 여동생이라면 인정할 마음이 율리어스의 속마음에서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에선 이미 사람들이 다 내린 상태로 마차는 율리어스의 시야에서 멀어져갔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그의 시야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확연히 보이기 시작하는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헤 ~ 에”
그 감탄사는 자동반사적으로 속이 아닌 겉으로 튀어나왔다.
율리어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이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흐르는 은하수처럼 아름드리 빛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일부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가 소악마라는 소문에 의심의 여지가 생기고도 남았겠지만….
딱 10살이란 제 나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 순간이 마지막만 아니길.
저벅. 저벅.
어느샌가 어린 소녀는 다섯 살의 아장아장한 귀여운 걸음걸이로 정원의 근처까지 와있었다.
짧지만 바람이 일 때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바로 그의 눈이 고정되었다.
율리어스, 자신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자줏빛 머리카락.
아름답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수수한 듯 질 낮아 보이는 갈색 가죽 아래에 조금 얇아 보이는 어두운 빛깔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눈에는 그 소녀의 모습이 눈에 확연히 박혔다.
같은 머리카락 색을 더불어 무엇보다도…….
똘망똘망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한 작은 구슬들이 한 떼 모여 땡그란 옥구슬이 되어버린 듯한 분홍빛 눈동자.
두 번이나 맞물리는 빛깔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치 인력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린보다 훨씬 낫잖아?’
아이린은 아직 갓난아기였던 그의 또 다른 배다른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교를 해도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와 비교까지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툭 하면 울지….’
매우 귀찮은 느낌이 역력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고 있는 율리어스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아직 울음을 터트리는 걸로 밖에 자아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기인 아이린을 상대로 어디 쓸데도 없는 비교를 고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덜 귀찮고 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릴리스티아라고.
결국 율리어스. 본인이 정하고 결정한 전혀 의미 없는 비교에 아이린은 아기일 때부터 이미 릴리스티아에게 씁쓸하면서도 어쩌면 안타까운 무안의 1패를 당해버렸다.
그리고 율리어스가 말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빠져있는 사이 그는 자신의 입이 쩍 벌어진 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툭하면 빽빽 울어대는 아기랑 비교한다면 새로 온 이쪽 여동생이 낫다고 그의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촌스러운 티가 좀 남아있으면 어땠는가……!
신기하게도 예비 여동생은 앞으로 율리어스, 자신의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새어머니를 하나도 닮지 않았….
‘무, 무슨 소리야!’
율리어스는 자연스럽게 흘러갈 법했던 지나친(?) 생각에 순간적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그리고 그 흐름이 깨지며 파문이 일어났다.
큰일 날 소리로 율리어스는 그대로 자칫 인정할 뻔했었다.
‘저 여자는 평민이야.
내가 아무리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새어머니라니 말도 안 되지.’
율리어스의 아버지는 율리어스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만 어려운 느낌의 대상자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다거나,
도를 지나치거나,
딱 잘라 아니라고 부정해야 될 부분만큼은 그는 철저하면서도 아주 따끔하게 가르침을 내렸다.
‘뭐…. 아버지니까.’
처음엔 매번 율리어스는 가볍게 생각하며 넘어갔었다.
‘난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더 그런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어려워하지 말고 이해하자는 긍정적인 사고와 방식에 모든 걸 맡겼다.
[ 그게 아니지. ]
‘뭐가 아닌 거지….’
[ 왜 못 알아듣는 것이냐? 답답하군. ]
‘답답…. 아버지. 저야말로 답답하다고요. 네?’
[ 신중을 기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
‘닳도록 말했어요. 아버지.
하지만…….’
[ 넌 언제쯤이면 알아들을 생각인 거지? ]
뭔가 뒤틀리고 있었다.
긍정적인 사고 회로는 오래가는 건 어려워지고 말았다.
율리어스의 얼굴빛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러버리면서 말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
조금씩 뒤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듯싶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말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시초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 지금 네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구나. 율리어스. ]
이날이 최고 문제의 발달사가 되는 날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각인으로 남아버렸다.
어린 소년의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무표정이었다.
슬퍼 보이지도 않았으며 어머니를 위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셨다.
그는 율리어스 아버지 이전에 어머니 인생의 반려자였다.
그런데 저런 감정 하나 느낄 수 없는 목각인형과 다를 바 없다니.
어린 마음에 율리어스는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충격엔 헤어 나올 수 없었던 만큼이나 어린 소년의 마음에 큰 상처로 새겨지면서 남겨지고야 말았다.
‘난 어머니를 사랑하지도 않은 저런 매정한 인간을 내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겠어.’
부모님이라는 ‘아버지’이기 전에 ‘가주’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기로 결심이 선 율리어스였다.
꾹,
‘……………….’
마치 대못이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뭔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느낌도 같이 율리어스의 속마음을 점령해 갔었다.
‘이 느낌은……….’
사뭇 떠오르는 게 있었다.
용의 역린.
서재에서 표지와 책지가 해어질 정도로 낡은 한 권의 책을 읽은 게 마침 어린 소년은 떠올랐다.
붉은 드래곤의 비늘이 서슬 퍼렇게 치솟아 올라가 있는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용사가 드래곤을 물리치는 내용이었지만 그런 해피엔드의 끝맺음을 내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떠오르는 건 그 책의 내용에서 등장한 붉은 드래곤만이 지닌 용의 역린밖에 없었다.
‘아마 저 망할 아버진 모르겠지.’
아버지는 아무래도 율리어스도 몰랐던 용의 역린 같은 것을 건드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 어린 소년의 감정은 어둠의 소용돌이에 빠지듯 어둠이 꾸물꾸물거렸다.
‘역겹네.’
그 익숙지 않은 꾸물거림은 솔직히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다.
평상시엔 쥐 죽은 듯이 내 깊은 감정 아래 아주 깊숙이 숨어있었지만 단 하나의 장소에서만 예외로 어린 소년의 감정을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망할 아버지.’
아버지를 뵌 날에만 되면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삼켜버림에 그 원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회피하고자 일부러 피하는 날들도 늘어났었다.
[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율리어스 도련님. ]
“지금은 바빠.”
[ 가주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십니다. 율리어스 도련님. ]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내일 뵈어도 되지?”
[ 가주 님께ᄉ……….]
윽.
“간다고!”
매번 일부러 피하기는 힘든 일인 만큼 곤욕스러운 건 집사였다.
그런 집사에게 미안한 감정은 들었지만, 율리어스는 그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아버지 서재에 불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율리어스는 어느덧 열 살이 되었다.
‘하지만 망할 아버진 모르시겠지.’
어린 나이 때부터 소년은 혼자 괴로웠었다.
어머니의 비호를 받기는커녕,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늘어났었다.
그리고 그 원망만큼이나 아버지란 사람은 율리어스에게 이상한 소문이 붙도록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게 지금에 이른 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율리어스의 원망의 대상자에게 흥미로운 소녀가 생기고 그 정보를 낚아 채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처음에는 이용 가치에 관한 생각도 들었지만 직접 보는 순간 모든 검은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예비 여동생이라면 달랐다.
평민인 그쪽 어머니의 피가 섞여 있지만 그 피의 반은 율리어스 아버지의 피라는 걸 증명하듯
소녀는 어머니를 닮은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렷할 정도로 소녀의 이목구비는 율리어스나 아이린과 빼다 박아 넣은 것처럼 판박이였다.
그런 점을 비롯해 그는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라도 여동생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잖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히히.’
그는 드디어 자신의 나이 때에 맞는 익살스러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혼자 긍정의 의사를 굽히지 않겠다는 식으로 여러 번 고개마저 연신 끄덕거렸다.
율리어스는 새어머니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본심대로라면 새어머니란 존재는 아예 필요 없었고, 보자마자 첫눈에 꽂힐 대로 꽂힌(?) 예비 여동생은 마음에 쏙 들었다.
‘쟤는 내 여동생으로 안성맞춤이야.’
처음으로 그는 원하는 게 생겼다.
그의 성격상 아버지에게도 원하거나 원하는 바를 말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인정하지 못하지만 꽂혀버린 여동생이라면 인정할 마음이 율리어스의 속마음에서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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