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 침공
조회 : 288 추천 : 0 글자수 : 4,718 자 2024-04-12
켈렌이 마계에 발을 들인지 52시간.
마계의 고위 귀족들이 모인 암흑의 회랑은 평소와 달리 허둥거리는 분위기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서로의 의중을 살피기에 바빴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초조하지 않은 자가 없다는 사실을.
이유는 여럿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단 하나의 마법사였다.
"그자를 어찌하면 좋겠소?"
어둠을 부리는 자, 아스코라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사이, 별을 따르는 자, 콰사로스가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만만히 여겨선 안 될 적이오. 차라리 전선에 최소한의 병사를 남겨두고, 그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 어떻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
"뭐라?"
콰사로스는 자신의 답을 일축한 목소리에 분노했으나, 그 정체를 깨닫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피를 흩뿌리는 자, 크페르토스.
이번 전쟁에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했으며, 그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킨 휘하 귀족들을 단신으로 절멸시킨 장본인.
"그 마법사는 마왕 토벌 사건의 주요 인물이다. 마브론 평원의 광경을 본 적 있나?"
"으음..."
전투 전후의 풍경을 떠올린 귀족들이 침음을 흘렸다.
"병력을 얼마나 보내든 그자는 별 감흥도 없이 몰살시킬 터."
"그러나 가만히 내버려두기에는...!"
"물론. 마계를 활보하게 두어선 좋지 않겠지. 허나 좋은 방법이 있나?"
"......"
침묵이 더욱 깊어졌다.
크페르토스는 붉은 눈동자로 회랑 저편의 암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자는 마왕을 겪고도 살아남았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정령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도 하더군."
"인간 마법사가...!"
"어떻게?"
귀족들은 동요했지만, 크페르토스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 시대에 아츠라카에 도달한 자들은 모두 인간. 이상할 것이 없지. 진정 중요한 문제는 그자가 마왕을 토벌할 때보다도 훨씬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내 부하들을 시켜 그자의 저력을 엿보았다. 정령화가 거의 진행되었더군."
마계 귀족들은 크게 경악했다.
인간이 정령으로 변하다니,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일이지 않은가.
"들리는 바에 따르면... 얼음의 정령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하더군요."
숲 속에 숨는 자, 루쿠라토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나 그 또한 귀족들을 술렁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빙아설파신룡과?!"
"그자는 인간의 한계를, 아니, 세상의 법칙을 어겨가면서까지 강해지려는 것인가!"
귀족들이 초조해하자, 암흑 회랑의 마력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에 크페르토스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젓자, 술렁이던 마력이 금세 안정되었다.
"그래,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 마법사는 마계에 크나큰 위협이 되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그자를 막을 수 있지?"
"......"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왕조차 죽이지 못한 마법사를, 그 누가 감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마왕은 혼자였고, 그에게는 동료가 있었으며, 여지껏 누구 하나 시도한 적도 없는 대마법을 펼쳐 살아남은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귀족들은 마왕보다 약하고, 마법사는 그때보다 강해졌다.
"우리 모두가 부딪혀도... 안 될 상대입니까?"
결국, 모두가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의견이 나왔다.
크페르토스는 안광을 거둬들이고 생각에 잠겼다.
콰사로스는 눈을 감고 별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스코라토는 자신의 얼굴 위에 어둠을 덮었다.
"우리가 협력하여 그를 상대한다면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완전한 협력이 불가능하겠지."
증오하는 자, 오데라토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크페르토스를 향해 있었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는 귀족들은 서둘러 방어 수단을 갖췄다.
하지만 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암흑 회랑에서 싸우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두 마족은 알고 있었으니.
"그럼 내가 먼저 그 마법사를 만나겠다. 녀석의 힘을 빼놓을 테니 그 후에 쳐라."
"수십 년 만에 좋은 아이디어를 뱉는군."
"나와 함께 그자를 칠 자가 있는가?"
귀족들 중 몇몇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크페르토스가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베었고, 흘러내린 핏방울은 손을 든 귀족들의 머리 위에 표식으로 변했다.
"전투에 참여하는 것으로 피의 서약은 효력을 다한다. 도망치는 것도 자유니 알아서 하도록. 그러나 마계를 위해 그자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함을 잊지 말라. 일주일 후에 그자를 치겠다."
크페르토스는 그 말을 끝으로 핏빛 오오라와 함께 암흑 회랑에서 사라졌다.
크페르토스와 함께 싸운다는 피의 서약을 맺은 이들도 하나 둘 회랑을 빠져나갔다.
"그대들이 나, 오데라토트와 함께 싸울 이들인가?"
"난 빠지겠어. 마법사 하나 죽이는 데에 나까지 낄 필요는 없을 테니."
잠 자는 자, 세퀴에포메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암흑 회랑의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아쉽게 됐군. 하기야 회의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지."
오데라토트의 농담에 다른 귀족들이 킬킬댔다.
"그럼 우리도 서약을 맺지. 자해의 서약은 싸움에 참전하는 것으로 효력을 다한다."
오데라토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바늘이 자신을 포함해 다른 귀족들 앞에도 하나씩 나타났다.
그들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자, 그것이 가슴에 스며들어 서약의 문양이 되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이곳의 누구도 믿지 않으니. 그러나 그 마법사는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될 존재. 우리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하자고."
서약을 맺은 다른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암흑 회랑을 빠져나갔다.
오데라토트와 잠 자는 자, 세퀴에포메로만이 회랑에 남아 있었다.
"세메로."
"......"
"아직 잠들지 않은 것 안다."
"......"
"네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군?"
오데라토트가 말을 뱉자 마자, 암흑 회랑의 기운이 바뀌었다.
무거운 기체처럼 주위를 감싼 채 천천히 흐르던 암흑이, 오데라토트를 주시하는 것처럼 변화했다.
말을 조심하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은 모습.
하지만 오데라토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좌座를 노리는 것 아닌가?"
암흑 회랑은 점점 좁아져 오데라토트를 금방이라도 질식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퀴에포메로는 곧 잠들었고, 암흑 회랑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김이 빠진 오데라토트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암흑 회랑을 빠져나갔다.
*****
켈렌은 얼음 막대기를 던져 점을 치는, 마법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군단 셋을 박살내고 보급로를 끊어뒀다.
짧아도 이틀, 길면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마계에 쳐들어온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갔으니 성과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일한 뒤에는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켈렌이 언덕에 앉아 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그때, 켈렌이 던진 여섯 개의 얼음 막대기가 모두 수직으로 떨어져 부러져 버렸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역시 마계를 쑤시고 다니게 내버려두지는 않는군."
켈렌 역시 마계 귀족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마왕의 좌를 노리는 거대한 세력의 중심.
흉凶의 징조가 나왔으니 반드시 그들 중 몇을 조우하게 되리라.
어쩌면 전부 만나게 될 지도 몰랐다.
켈렌은 마음을 가다듬고는, 주변으로 얼음 요정과 얼음 새를 각각 스물이나 만들어 보냈다.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분명히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자리에서 몇 가지 대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계 귀족들은 다른 정예병이나 마족 기사들보다도 훨씬 강한 존재들.
단순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패배할 가능성도 컸다.
"무슨 일 있어?"
반半소환 상태로 두었던 빙설신룡, 프리나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켈렌은 고개를 저으며 대마법에 집중했고, 프리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켈렌의 마법진을 건드렸다.
그러자 단번에 위력과 효율이 올랐고, 켈렌이 끙끙대던 어려운 부분까지 완벽히 해결된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어떻게...?"
"비밀. 하는 거 봐서 알려줄게."
"오늘은 좀 자면 안 될까?"
"...빙결 유지랑 마력 증폭 연결 부위가 없었잖아."
"그건 해결했는데...?"
"나머지는 앞으로 하는 거 봐서."
프리나와 농담을 주고 받던 와중, 켈렌은 서쪽으로 보낸 얼음 요정 셋과 얼음 새 둘이 파괴되는 걸 느꼈다.
꽤 멀리 보냈기에 주위를 돌아다니는 마물에게 당했을 수도 있지만, 파괴되는 데에 거의 시간차가 없었다.
"으음..."
빙설신룡 또한 서쪽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얼른 반소환 상태로 돌아갔다.
반투명해지는 그녀의 몸체 너머로, 켈렌은 검붉은 마력이 솟구쳐오르는 것을 보면서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가히 초인적인 켈렌의 감각으로도 따라가기 벅찬 속도로, 대검을 든 마족 전사가 짓쳐왔다.
"크합!"
본인의 마력만큼이나 검붉은 대검을 휘두르며 나타난 마족 전사.
피를 흩뿌리는 자, 크페르토스였다.
마계의 고위 귀족들이 모인 암흑의 회랑은 평소와 달리 허둥거리는 분위기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서로의 의중을 살피기에 바빴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초조하지 않은 자가 없다는 사실을.
이유는 여럿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단 하나의 마법사였다.
"그자를 어찌하면 좋겠소?"
어둠을 부리는 자, 아스코라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사이, 별을 따르는 자, 콰사로스가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만만히 여겨선 안 될 적이오. 차라리 전선에 최소한의 병사를 남겨두고, 그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 어떻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
"뭐라?"
콰사로스는 자신의 답을 일축한 목소리에 분노했으나, 그 정체를 깨닫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피를 흩뿌리는 자, 크페르토스.
이번 전쟁에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했으며, 그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킨 휘하 귀족들을 단신으로 절멸시킨 장본인.
"그 마법사는 마왕 토벌 사건의 주요 인물이다. 마브론 평원의 광경을 본 적 있나?"
"으음..."
전투 전후의 풍경을 떠올린 귀족들이 침음을 흘렸다.
"병력을 얼마나 보내든 그자는 별 감흥도 없이 몰살시킬 터."
"그러나 가만히 내버려두기에는...!"
"물론. 마계를 활보하게 두어선 좋지 않겠지. 허나 좋은 방법이 있나?"
"......"
침묵이 더욱 깊어졌다.
크페르토스는 붉은 눈동자로 회랑 저편의 암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자는 마왕을 겪고도 살아남았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정령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도 하더군."
"인간 마법사가...!"
"어떻게?"
귀족들은 동요했지만, 크페르토스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 시대에 아츠라카에 도달한 자들은 모두 인간. 이상할 것이 없지. 진정 중요한 문제는 그자가 마왕을 토벌할 때보다도 훨씬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내 부하들을 시켜 그자의 저력을 엿보았다. 정령화가 거의 진행되었더군."
마계 귀족들은 크게 경악했다.
인간이 정령으로 변하다니,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일이지 않은가.
"들리는 바에 따르면... 얼음의 정령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하더군요."
숲 속에 숨는 자, 루쿠라토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나 그 또한 귀족들을 술렁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빙아설파신룡과?!"
"그자는 인간의 한계를, 아니, 세상의 법칙을 어겨가면서까지 강해지려는 것인가!"
귀족들이 초조해하자, 암흑 회랑의 마력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에 크페르토스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젓자, 술렁이던 마력이 금세 안정되었다.
"그래,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 마법사는 마계에 크나큰 위협이 되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그자를 막을 수 있지?"
"......"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왕조차 죽이지 못한 마법사를, 그 누가 감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마왕은 혼자였고, 그에게는 동료가 있었으며, 여지껏 누구 하나 시도한 적도 없는 대마법을 펼쳐 살아남은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귀족들은 마왕보다 약하고, 마법사는 그때보다 강해졌다.
"우리 모두가 부딪혀도... 안 될 상대입니까?"
결국, 모두가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의견이 나왔다.
크페르토스는 안광을 거둬들이고 생각에 잠겼다.
콰사로스는 눈을 감고 별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스코라토는 자신의 얼굴 위에 어둠을 덮었다.
"우리가 협력하여 그를 상대한다면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완전한 협력이 불가능하겠지."
증오하는 자, 오데라토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크페르토스를 향해 있었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는 귀족들은 서둘러 방어 수단을 갖췄다.
하지만 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암흑 회랑에서 싸우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두 마족은 알고 있었으니.
"그럼 내가 먼저 그 마법사를 만나겠다. 녀석의 힘을 빼놓을 테니 그 후에 쳐라."
"수십 년 만에 좋은 아이디어를 뱉는군."
"나와 함께 그자를 칠 자가 있는가?"
귀족들 중 몇몇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크페르토스가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베었고, 흘러내린 핏방울은 손을 든 귀족들의 머리 위에 표식으로 변했다.
"전투에 참여하는 것으로 피의 서약은 효력을 다한다. 도망치는 것도 자유니 알아서 하도록. 그러나 마계를 위해 그자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함을 잊지 말라. 일주일 후에 그자를 치겠다."
크페르토스는 그 말을 끝으로 핏빛 오오라와 함께 암흑 회랑에서 사라졌다.
크페르토스와 함께 싸운다는 피의 서약을 맺은 이들도 하나 둘 회랑을 빠져나갔다.
"그대들이 나, 오데라토트와 함께 싸울 이들인가?"
"난 빠지겠어. 마법사 하나 죽이는 데에 나까지 낄 필요는 없을 테니."
잠 자는 자, 세퀴에포메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암흑 회랑의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아쉽게 됐군. 하기야 회의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지."
오데라토트의 농담에 다른 귀족들이 킬킬댔다.
"그럼 우리도 서약을 맺지. 자해의 서약은 싸움에 참전하는 것으로 효력을 다한다."
오데라토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바늘이 자신을 포함해 다른 귀족들 앞에도 하나씩 나타났다.
그들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자, 그것이 가슴에 스며들어 서약의 문양이 되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이곳의 누구도 믿지 않으니. 그러나 그 마법사는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될 존재. 우리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하자고."
서약을 맺은 다른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암흑 회랑을 빠져나갔다.
오데라토트와 잠 자는 자, 세퀴에포메로만이 회랑에 남아 있었다.
"세메로."
"......"
"아직 잠들지 않은 것 안다."
"......"
"네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군?"
오데라토트가 말을 뱉자 마자, 암흑 회랑의 기운이 바뀌었다.
무거운 기체처럼 주위를 감싼 채 천천히 흐르던 암흑이, 오데라토트를 주시하는 것처럼 변화했다.
말을 조심하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은 모습.
하지만 오데라토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좌座를 노리는 것 아닌가?"
암흑 회랑은 점점 좁아져 오데라토트를 금방이라도 질식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퀴에포메로는 곧 잠들었고, 암흑 회랑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김이 빠진 오데라토트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암흑 회랑을 빠져나갔다.
*****
켈렌은 얼음 막대기를 던져 점을 치는, 마법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군단 셋을 박살내고 보급로를 끊어뒀다.
짧아도 이틀, 길면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마계에 쳐들어온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갔으니 성과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일한 뒤에는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켈렌이 언덕에 앉아 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그때, 켈렌이 던진 여섯 개의 얼음 막대기가 모두 수직으로 떨어져 부러져 버렸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역시 마계를 쑤시고 다니게 내버려두지는 않는군."
켈렌 역시 마계 귀족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마왕의 좌를 노리는 거대한 세력의 중심.
흉凶의 징조가 나왔으니 반드시 그들 중 몇을 조우하게 되리라.
어쩌면 전부 만나게 될 지도 몰랐다.
켈렌은 마음을 가다듬고는, 주변으로 얼음 요정과 얼음 새를 각각 스물이나 만들어 보냈다.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분명히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자리에서 몇 가지 대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계 귀족들은 다른 정예병이나 마족 기사들보다도 훨씬 강한 존재들.
단순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패배할 가능성도 컸다.
"무슨 일 있어?"
반半소환 상태로 두었던 빙설신룡, 프리나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켈렌은 고개를 저으며 대마법에 집중했고, 프리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켈렌의 마법진을 건드렸다.
그러자 단번에 위력과 효율이 올랐고, 켈렌이 끙끙대던 어려운 부분까지 완벽히 해결된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어떻게...?"
"비밀. 하는 거 봐서 알려줄게."
"오늘은 좀 자면 안 될까?"
"...빙결 유지랑 마력 증폭 연결 부위가 없었잖아."
"그건 해결했는데...?"
"나머지는 앞으로 하는 거 봐서."
프리나와 농담을 주고 받던 와중, 켈렌은 서쪽으로 보낸 얼음 요정 셋과 얼음 새 둘이 파괴되는 걸 느꼈다.
꽤 멀리 보냈기에 주위를 돌아다니는 마물에게 당했을 수도 있지만, 파괴되는 데에 거의 시간차가 없었다.
"으음..."
빙설신룡 또한 서쪽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얼른 반소환 상태로 돌아갔다.
반투명해지는 그녀의 몸체 너머로, 켈렌은 검붉은 마력이 솟구쳐오르는 것을 보면서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가히 초인적인 켈렌의 감각으로도 따라가기 벅찬 속도로, 대검을 든 마족 전사가 짓쳐왔다.
"크합!"
본인의 마력만큼이나 검붉은 대검을 휘두르며 나타난 마족 전사.
피를 흩뿌리는 자, 크페르토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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