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거대한 빙하가 반기고 있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는 빙하는 장엄함 이상의 무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태양빛에 반사된 빙하는 눈부셔서 함부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태양빛만큼 가득 품은 빙하의 한기가 스스로의 크기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빙하는 어떤 대답도 내려주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오롯이 있을 뿐이었다.
북해의 물결은 무엇이든 보여주겠다는 듯 푸르렀으나 태양의 질투에 가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갈매기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돌고래 소리가 이곳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는 했으나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듣고 싶어하는 환청을 나 스스로 만드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따금 들리는 파도소리만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였다. 파도에 맞춰 배가 꿈틀거렸다.
마법항로를 이어주던 마법진이 박살났기에 목적지를 잃었다. 다행히도 장애물을 감지하는 마법진은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에 암초를 향해 멋대로 대가리를 쳐박고 좌초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마법진 또한 언제까지 유지될 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망가지는 게 나았을지도…'
애초에 한낱 인간이 마법의 법칙을 추측한다는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이 탐사는 어쩌면 마법을 지배하겠다는 인간의 오만함이 가져온 참사일지도 모르겠다. 마법은 단지 세계 곳곳에 자리에 존재하는 현상일 뿐이다.
마법을 탐색한다거나 발명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망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런 마법사의 존재를 사람들은 원했고 등장했으며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북해의 마지막 마법사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선지자의 유언에 따라 북해원정대가 구성되었다. 북해의 관문으로 마법항로를 이은 탐사선이 준비되었고 탐사선에는 수많은 항해를 겪은 항해사와 선원들, 그리고 북해의 마법사에게 바칠 제물들을 가득 채웠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선원들은 북해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다. 모든 건축물이 백금으로 만들어져서 모든 북해의 기사들이 금으로 만든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고
평범한 바다의 생선보다 수십배는 큰 생선들과 고래떼들이 가득해서 곳간에 기름이 넘쳐나 동네 아낙이 그 기름으로 요리를 한다거나
북해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들조차 매끼니마다 생선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모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들은 항해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위해 그들은 배를 몰았다.
그게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탐사선은 북쪽으로 향했고 북해는 낯선 이방인들을 반기지 않았다.
파도는 항해선들을 위협했고 마법항로가 가야할 곳을 방해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모두는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 짐작했다.
파도가 하나 둘 씩 선원들을 삼켰다. 선원들을 짐짓 쾌활하게 술판을 벌이며 뱃머리를 잡았다.
마법항로가 완전히 붕괴됐을 때, 그들은 그들이 만든 억지스러운 미소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배가 뒤집혔다.
탐사선의 제물들이 바다를 떠다니다 지평선 밖으로 사라졌고
제물보다 무거운 인간의 몸들은 가라앉아 그대로 먹이가 되었다.
분명히 그랬어야 했는데…
어째선지 탐사선의 이름을 잃은 난파선 위에 누워 있었고
난파선은 길을 잃은 채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었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존본능보다는 더 큰 피로가 몸을 묶었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다.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가 한데 뭉친 것만 같았다
“살려줘!!!!!”
갈매기 소리가 선장의 비명으로 들렀다. ‘이깟 인생 한 번 뿐인거 바다 사나이가 어찌 제 목숨을 아끼겠냐’고 항상 호언장담하던 선장은 사라지기 전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다음 생엔 새로 태어나 날라 다녔으면 좋으려나 싶었는데 돌고래가 높이 뛰어 갈매기를 삼키고 그대로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적어도 선장은 좋은 곳으로 갔으리라.
빙하의 영향인지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러고 보니까 따뜻한 스튜를 먹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한창 뱃멀미에 고생하느라 마지막으로 끓인 스튜를 먹지 못했던 기억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게워내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라도 밀어 넣어볼걸.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차라리 감각도 이대로 앗아가 주면 좋겠는데.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뒤엉키는 소리에서 말 소리도 섞여 들린다.
죽은 이들의 환청인가.
웃지만 말고 같이 얘기하자.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왔다.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은데.
저승사자인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리는지 모르겠다.
이봐요, 저승에선 스튜 나오나요?
물어보고 싶은데 말은커녕 입도 뻥끗거리기 어렵다.
저승사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에 모여서 내 피부를 툭툭 눌렀다.
아직 죽어가는 중인지 피부에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저승사자들이 다시 쑥덕거린다. 그만 조잘대고 데려갈 거면 빨리 데려가지.
눈에 힘을 주자 희미하게나마 저승사자들이 보였다.
북해의 저승사자는 도포를 입지 않고 대신 비늘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매끄러운 꼬리를 퍼덕이며… 응?
이거… 저승사자가 아니라 어인 아니야?
순간 생각보다 본능이 앞질렀다. 입에 있는 소금기를 최대한 모았다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사… 살려줘!”
저승사… 아니, 어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살아있어! 시체가 아니었나봐! 오랜만에 고기맛 좀 보나… 아니 뭐라고?
다시 소리를 질러보려고 했지만 아까 힘이 마지막이었는지 꺽꺽대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내 얘기를 제대로 듣기는 한 건가?
그냥 먹고 모른 척 하면 안 돼? 안 돼! 두 어인이 나를 두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제는 먹자는 어인의 주장이 더 강하단 거였다.
어차피 이 녀석밖에 없는데? 우리끼리 비밀로 하면 아무도 모른다고! 그… 그런가?
그렇긴 뭐가 그래 이 미친 물고기 자식들아!
당연히 내 외침은 허공에 묻혔고 저 식인 물고기들이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는데? 환청이겠지?
최대한 몸부림쳐보기는 했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하고 정작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내 몸아. 이대로 잡아먹히는 것보다 바다에 빠지는 게 낫지 않을까? 살고 싶다면 어서 굴러가!
비늘이 내 몸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몸이 시체처럼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목에 힘을 주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내 의지와는 달리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남아있는 신경이 툭 끊어진 것처럼 내 의식은 파도 저편으로 멀리 멀리 쓸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