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17살의 봄
조회 : 1,252 추천 : 0 글자수 : 4,986 자 2022-09-04
프레오 백작가의 아델리아의 침실.
"헉헉."
아델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떴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에서 뺨까지 짙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시선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익숙한 방과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반쯤 처진 창문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추었다.
‘하, 집이구나. 그럼 주문이 잘 돼서 과거로 돌아온 건가?’
아델리아는 한 손으로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 손이 축축히 젖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싣고 욕실로 이동했다. 혹시라도 생채기가 있을까 해서.
거울 앞에 서서 고개를 좌우상하로 돌려 이마, 일굴, 뺨, 턱을 세심히 살펴봤으나 평소처럼 깨끗했다.
오히려 한참을 푹 자다가 일어날 때처럼 피부도 매끈했고, 신체의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후의 반란이 꿈은 아니겠지? 진짜 과거라면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야 해.’
아델리아는 욕실을 나와 쇼파에 앉았다. 책상 옆에는 항상 벽걸이 달력이 걸려 있어 날짜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달력이 보이지 않았다. 내무부에서 일한 뒤로 습관처럼 걸어 둔 달력이었는데, 이상하게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가 치운 걸까? 의심스럽게 달력이 있어야 할 장소를 뚫어져라 보던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아가씨 일어나셨으면 아침 세수 준비해드릴까요?”
아델리아의 전속 하녀인 예나였다. 아델리아는 오늘이 며칠인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있는지, 반란은 정말 안 일어났는지,
어떤 것부터 확인을 해야할지 생각하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예나, 어제 황궁에서 반란이 있었는데 내가 죽을 뻔했거든.
공주님이 만드신 주문으로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데 오늘이 며칠이야? 이렇게 물을 수도 없지 않은가.
“아가씨.”
“어? 어, 준비해줘.”
아델리아는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덜컥. 방문을 열고 예나가 들어오면서 활짝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예나는 방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후 양동이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 세숫물.’
잠깐, 세숫물이라고? 수도 시설을 개량한 뒤로 예나에게 세숫물 시중을 받지 않았다.
욕실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세수를 할 수 있어 아델리아는 스스로 세수를 했다.
수도 시설 개량은 나디아의 시녀로 일할 때 있던 일이니 최소 1년 전이라는 말인데......
'하루 이틀 전으로 돌아간 게 아니잖아?’
아델리아는 시간을 되돌려도 길어야 일주일 정도로 생각했다.
근거 없는 추측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나디아의 능력의 과소 평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이었다면 곧장 아버지와 리카드를 찾아가 반란을 막을 생각있었는데.
지금이 정말 1년 전이라면 그들을 찾아가 봤자 헛소리한다고 무시를 당할 게 뻔했다.
당장 오늘이 며칠인지 확인을 해야했다. 예나는 세숫물 준비를 끝냈는지 욕실에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아가씨, 세숫물 준비됐어요. 식사는 방에서 하실래요?“
아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움직였다. 욕실 앞에는 예나가 나가지 않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건 예나가 조심스럽게 할 말이 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아델리아는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말해도 된다고 눈짓했다.
“아가씨 괜찮으시면, 식당에서 식사하시는 건 어떠세요? 백작님과 마님도 아가씨와 같이 식사하고 싶어하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델리아가 예나의 말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회귀 전, 부모님과 식사하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할 일이 아닌데 예나는 심하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혹시 어제 부모님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아델리아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실 그녀는 프레오와 크게 다퉜던 때가 있었다.
일주일 넘게 이어진 부녀의 냉전으로 모든 사용인이 둘의 눈치를 보던 때가 말이다.
아델리아는 오래되어 기억도 못했지만 눈앞의 예나에게는 현재 진행중인 일이었다.
“오늘은 속이 불편해서 방에서 간단히 스프하고 샐러드를 먹는 게 나을 것 같아. 부모님께는 그렇게 전해줘.”
“예? 예, 아가씨. 그럴게요.”
예나는 아쉬워하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사실 무사한 부모님을 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정보 없이 부모님을 만났다가 이상한 말을 할지도 몰랐다.
회귀한 오늘에 대해 알아낼 때까지 뭐든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세면을 끝낸 후 침대 옆 테이블 의자에게 앉아 멍하게 창문을 바라봤다.
“아가씨 아침 가져왔어요.”
예나는 수프와 샐러드가 담긴 든 쟁반을 쇼파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어, 고마워 예나.”
아델리아는 수푸를 몇 숟갈 떠먹었지만, 입에 맞지 않았다. 원래 먹는 수프보다 묽고 심심한 맛이었다.
’으 너무 싱겁네. 이 수프는 식단관리한다고 했을 때 먹었던 거잖아.‘
아델리아는 밍밍한 수프 덕에 지금은 언제인지 눈치챘다. 4학년 1학기 초. 이 수프는 그때 몇 번 먹고 포기했던 그 맛이었다.
수프를 내려놓고 포크로 샐러드에 있던 방울 토마토를 찍었다. 오늘 아침은 샐러드만 먹자.
“아가씨, 전 다른 일보러 내려갈게요.”
“잠깐, 예나 오늘이 며칠이지?”
제일 편한 예나가 떠나려 해 급히 물었다. 예나는 갸우뚱하며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지만 대답은 착실히 해주었다.
“3월 3일이요.”
“지금 몇 년도야?”
4학년 1학기 초면 제국력 1197년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도 기억 못할 때 이 맛없는 수프를 먹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제국력 1197년이에요.”
역시나 추측했던 때가 맞았다. 이때의 아델리아는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던 모범생이었다. 아마 아침을 먹은 다음에 학교를 가야 할 테니, 미리 손을 써두자.
“오늘은 아카데미 쉬겠다고 전문좀 보내줄래?“
"네? 오늘 쉬신다고요?"
아델리아는 아카데미 졸업 전까지 지각은 물론 결석, 병가도 없었다. 예나에게 아델리아가 아카데미 쉬겠다는 말은 처음 있는 일이라 이해 되지 않았다.
"어, 어제 밤 꿈자리가 별로라 오늘은 좀 쉬고 싶네?“
"그럼 의사 선생님을 불러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반나절 푹 쉬면 나을 것 같아.”
"네, 아가씨."
예나는 방을 나가면서도 힐끗 고개를 돌려 걱정했다. 아델리아는 거짓말로 걱정 끼쳐 미약하게 미안했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오늘은 아카데미 수업보다는 회귀 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고 싶었다.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머릿 속이 복잡해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 할 것이 뻔했다.
‘회귀라니, 왜 나를 보내셨을까? 공주님도 회귀하셨을까? 리카드도 옆에 있었으니 리카드도 회귀했을까? 누군가 달려오는 것 같았는데?'
아델리아는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협탁 위에 있던 종이와 펜을 들어 테이블로 다시 돌아왔다.
아델리아는 반란이 있었던 무도회를 떠올렸다. 로잘리아 황후가 귀족파를 포섭해서 황제와 가신들을 살해하고 황제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었다.
나디아는 온드라국의 마법사들도 참여했다고 했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아델리아는 머리를 흔들고 양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올해 발생할 사건부터 기억해보자. 아카데미는 계속 다녀야 할까? ’
아델리아는 아카데미 입학 후 3년 내내 수석이었다. 게다가 이미 졸업을 위한 최소한의 학점요건은 갖춰졌다.
매년 필수과목외에 상위 학년이 수강해야 할 과목들도 동시에 수강했다.
굳이 4학년까지 아카데미에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회귀 전에도 조기 졸업을 생각했다. 프레오 백작의 권유만 아니었다면.
마침 리카드도 졸업하고 북부 영지로 돌아갔기 때문에 더 다닐 맘도 없었다. 아델리아의 16살, 3학년의 추억은 인생에서 소중한 시기였다.
리카드와 1년을 짝꿍처럼, 연인처럼 지냈던 꿈 같은 시기였다. 너무 달콤해서 1년, 아니 한 학기만이라도 더 다닐 수 있냐고 할 뻔했다.
그랬다면 리카드는 분명 따랐을 것이다. 하필 북부의 몬스터 습격이 거세지면서 리카드는 졸업식도 참가하지 못하고 북부 영지로 돌아갔다.
‘아.’
그제야 4학년 초에 있었던 프레오 백작과의 다툼이 떠올랐다. 이 당시 프레오 백작은 조기 졸업을 반대했었다.
1년 더 다니면서 제국행정, 재정학, 무역학, 대륙지리 등을 배우라고 하고는 졸업 후에는 내무부로 와서 본인을 도우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아델리아는 답답한 사무직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싫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다툼이 커져 프레오 백작과의 냉전이 꽤 오래 갔었다.
‘그래서 예나는 눈치를 보고 있는 거고, 부모님도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었구나.’
그렇다면 자신이 상황을 더 꼬았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먼저 같이 식사하자며 화해를 청했는데, 방에서 먹겠다고 퇴짜를 놓은 격이 돼 버렸다.
아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고 곧 생각을 지웠다. 화해는 오늘 저녁에 해도 될 일이어서 심각하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보다 조기 졸업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과거에도 조기 졸업해서 리카드가 있는 북부로 가고 싶었다.
그때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아 선택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 무시하고 저지를 수 있었다.
‘내 개인 감정에 따라 움직이다 미래가 이상하게 꼬이는 건 곤란해.
만에 하나 황후의 반란을 앞당기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신중하게 생각하자.’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환기한 아델리아는 앞으로 있을 일을 적기 시작했다.
제국력 1198년 졸업
제국력 1198년 5월 제국, 동부 사찰
제국력 1199년 3월 온드라국 1차원정
제국력 1199년 9월 온드라국 2차원정
제국력 1199년 12월 온드라국 항복
제국력 1200년 11월 건국 무도회 아이나르 정변
“약 2년 뒤에 반란이 있다는 거지...그럼 당장 뭐부터 해야 하지?”
아델리아는 회귀 전 나디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온드라국 칸타성 지하에 있을 거예요. 다시 찾으러 와주세요.”
“설마, 나디아님은 2년 전으로 회귀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셨나?”
안그래도 온드라국 칸타성 지하라고 말한 게 이상했었다. 제국의 황태자비가 된 분을 왜 온드라국에서 찾을까?
나디아는 이미 몇 년 뒤의 회귀를 예상하고 아델리아에게 힌트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나디아님이 먼저다. 황후는 천천히 생각하자, 어쩌면 나디아님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아델리아는 본인이 적어놓은 사건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방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아델, 들어가도 되겠니?”
프레오 백작의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아델리아는 급하게 종이와 펜을 협탁 내 서랍으로 넣었다.
아델리아는 여전히 잠옷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침대로 걸어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후 누웠다.
“네, 아버지 들어오세요.”
잠깐, 지금 냉전 중인데 들어오라고 해도 되나? 안된다고 말을 꺼내기 전 프레오 백작이 방문 열고 들어왔다.
프레오 백작은 무거운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아델리아는 몸을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아델, 어디 아픈거니? 오늘 아카데미 쉰다며.”
“아, 어제 무리를 했었나봐요.”
아델리아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지금은 컨디션이 안 좋은 것처럼 말했다. 백작은 한쪽 눈을 찡그린 후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그래, 주치의 선생님 불러줄까?”
“아니에요. 잠깐 쉬면 괜찮을 거예요.”
프레오 백작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아델리아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아델리아와 다툼이 맘에 걸렸다.
어릴 때부터 한번도 본인은 물론 올리비아 말도 거절한 적 없었기에, 아델리아가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내무부 관료직이 싫다면 결혼 준비나 하거라. 안 그래도 오래전부터 몇 개 가문에서 제의도 있었단다.”
'아. 결혼. 그랬었지. 회귀 전에도 이런 식으로 날 협박했지.'
아델리아가 조기 졸업을 포기하고 백작의 말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가 결혼이었다.
“아버지, 결혼도 관료도 다 싫습니다. 특히 관료직처럼 책상에서 서류만 보는 건 따분해요.”
백작은 아델리아의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역시 내무부로 부른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군.
계속 대화를 하면 맘이 불편해질 것 같아 그만 둘 때라 생각했다.
“그래 알겠다. 오늘은 쉬거라.”
백작은 자리에 일어나서 아델리아의 방을 나갔다. 아델리아는 백작의 등뒤를 바라보면 쓴 웃음을 지었다.
‘여전하시네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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