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아델리아의 결심 (1)
조회 : 1,222 추천 : 0 글자수 : 5,857 자 2022-09-16
아델리아는 종일 책상과 침대를 오고가며 하루를 보냈다. 회귀 전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프레오 백작이 오전에 방으로 들어온 것 빼면. 아! 3년 전에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 아카데미 갔구나. 과거에는 백작의 충고대로 시간표도 바꿨었나?
쌍둥이인 라이너는 작년에 유급당하고 여전히 3학년이었다. 그리고 올해도 유급하겠지.
아델리아는 라이너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회귀 전에는 백작의 지시로 라이너의 아카데미 생활을 감시했다.
시험 기간에는 밤새도록 과외도 시켜야 했다. 머리가 나쁘면 노력이라도 해야할텐데,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켜도 딴짓은 기본이고 잠깐 눈을 돌리면 도서관 구석진 곳에서 잠을 자거나, 처음 보는 영애와 노닥거리곤 했다.
'어떻게 내가 너랑 어머니 배 속에서 열달을 같이 있었지? 하.'
아델리아는 앞으로 라이너에게 일체의 관심도 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이번 생에는 라이너 말고도 신경 쓸게 많았다.
'수석 졸업이 아깝지만, 조기 졸업 해야겠어.'
빨리 움직이려면 아카데미에서 자유로워야 했다.
문제는 프레오 백작인데...결혼도 안 하고 관료도 안 한다고 버티면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설득할 만한 구실을 만들어야겠어.'
아델리아는 내일 바로 조기 졸업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할 일을 정리했을 뿐인데 벌써 해가 저물어 있었다.
아델리아는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웠다. 침대 캐노피를 바라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아델리아는 묘하게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종일 생각 정리하면서도 느꼈던 중요한 걸 놓친 느낌.
다시 머리가 어수선해지는 듯해 자리를 뒤척였다. 팔을 베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허전한 팔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 팔찌!’
이 당시 리카드와 자주 연락했었다. 우편으로 주로 연락하다가 우편이 일주일 이상 걸려 리카드가 전서구용 팔찌를 선물했었다.
팔찌를 쓰다듬으면 리카드의 전서구가 아델리아에게 날아오는 방식이었는데, 그 덕분에 연락을 당일에도 할 수 있었다.
팔찌 선물은 궁전 무도회 때 받으니까, 지금은 팔찌가 없는 게 당연했다.
‘만약 리카드가 나처럼 기억을 했다면, 오늘 바로 날 찾아왔거나 우편이라도 보냈을 거야.’
하루 내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에게 아무 연락도 없는 것이 이상했던 거였다.
‘리카드는 회귀 전의 기억이 없다는 거네....’
씁쓸한 현실에 아델리아는 애꿎은 팔목만 쓰다듬었다.
* * *
아델리아는 예나가 준비한 빵과 스프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가벼운 몸단장을 했다.
프레오 백작이 궁으로 가기 전 관료직 제안을 거절하고 조기졸업하겠다고 말할 계획이었다. 아델리아 인생에서 첫 반항이었다.
뚜벅뚜벅. 집무실로 내려가는 길은 그대로인데,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릴 때 라이너와 크게 다퉈서 집무실로 불려갔을때처럼 긴장감이 깔렸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긴장감을 가라앉혔다. 아델리아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똑똑똑.
“아버지 들어갈게요.”
아델리아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백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상시라면 문을 열지 않고 노크했을 텐데, 맘이 급하다보니 문부터 열었다.
프레오 백작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책상 옆에는 부관인 야노스가 결제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야노스는 아델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야노스.'
아델리아는 비밀 통로 끝에서 말고삐를 쥐고 있던 야노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작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기다렸던 야노스, 그의 죽음에 자신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이번에는 야노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백작은 시선을 올려 낮은 음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거니?”
"아버지께서 궁에 가시기 전 같이 차를 마시고 싶어서요."
프레오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델리아가 자신을 찾는 일이 드물었기에 무슨 이유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거기에 앉아 있거라."
아델리아는 집무실 쇼파에 앉았다. 백작은 책상 위에 있는 종을 두들겼다. 트레이를 끌고 온 하녀가 다기 세트를 올리고 찻잔을 내려놨다.
백작은 보고서 검토를 끝냈는지, 서명을 한 후 야노스에게 서류를 건넸다.
야노스는 백작에게 목례를 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백작은 아델리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차만 마시려는 건 아닐거고, 할말 있으면 해보거라."
“아버지, 아카데미 조기 졸업을 신청하려고 해요.”
백작은 찻잔을 내리면서 움찔했다. 백작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 졌다.
아델리아는 스푼으로 찻잔을 저으면서 평온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조기 졸업 요건은 이미 다 채웠어요. 더 배울것도 없으니 아카데미에 다닐 필요 없어요.”
"내무부로 바로 오려면 배워야 할 것들이 있을텐데."
백작은 여전히 아델리아가 내무부로 올 거라고 믿었다. 아델리아는 아직까지 백작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무부 관료직이 아니라면 졸업 후 약혼을 해야 한다고 못박아 두었다.
아델리아가 혼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기에 내무부 관료직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요, 저는 내무부에 가지 않을 거예요. 백작 영애가 굳이 직업을 가질 필요 없잖아요.
티파티나 사교모임 다니면서 사교활동을 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나요?"
아델리아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찻잔으로 입이라도 가려야 할 것 같았다.
아델리아도 자신이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교 모임은 아델리아도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다.
사교 모음에서 나누는 대화라고는 소문, 연애, 잘생긴 영식 등이 다였다. 남의 신상 이야기나 떠드는 사교계는 딱 질색이었다.
"사교활동보다 내무부가 더 배울 것이 많다. 네 성격에도 적합하고.”
아델리아는 백작의 말에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백작이 내무부로 부른 건 아델리아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회귀 전 우연히 자신을 내무부로 부른 이유를 듣게 됐다. 기가 찰 이야기였다.
그날은 집무실에서 백작과 라이너, 야노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작은 라이너가 후계자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아델리아에게 후계자 교육은 물론 제국 일을 배우게 했다.
라이너가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면, 아델리아가 라이너 옆에서 영지 살림과 백작가 사업을 보좌하길 바랐다.
라이너가 공식적인 후계자이지만, 중요한 일들은 아델리아에게 맡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델리아는 그 날 분노로 치를 떨었다.
"저는 내무부 일을 하고 싶지 않고, 배우고 싶지도 않아요. 그리고…"
아델리아는 눈을 치켜뜨고 강한 어조로 마무리했다.
"더 이상 라이너의 뒤치닥꺼리는 하지 않을거예요. 그 동안 많이 했으니 이해해주실 거라 믿어요."
백작은 싸늘한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노려봤다.
“하. 일단 알겠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다시 얘기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아델리아는 프레오 백작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비록 백작을 설득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는 의사표현이 이렇게 간단하다니.
아델리아는 방으로 올라가면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아델리아는 오후에 예나를 데리고 아카데미에 방문했다. 오늘을 끝으로 더 이상 아카데미에 올 일이 없으리라.
아카데미 밖에 있는 연병장에 마차를 세우고 아델리아만 내렸다. 예나에게 은화 1개를 주며 말했다.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렉스 데리고 카페에 가서 있어. 끝나면 부를게.”
예나는 기쁨에 가득찬 표정으로 은화를 받았다.
“예. 천천히 일보고 나오세요.”
“어.”
아델리아는 아카데미 정문으로 걸어갔다. 정문 앞에는 경비병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아델리아를 알아본 듯, 정문을 열어 길을 비켜줬다.
“고마워.”
아델리아는 경비병들의 호의에 웃음으로 답했다. 정문 앞으로는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연병장과 본관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연병장에서 졸업식 대표로 수상을 받았던 리카드가 떠올랐다.
졸업식 예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리카드를 생각하자 얼굴에 홍조가 들었다.
졸업식 예복이 하필이면 회귀 전 무도회 때 리카드가 입었던 무도회 복장과 비슷했다. 자연스럽게 무도회때 리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도회 입장하면서 영애들의 시선을 끌던 리카드, 아이나르의 춤신청을 막아주고 자신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이끌던 리카드,
발이 밟혀도 스무스하게 춤을 추던 리카드, 가슴이 벅차오른 날이었다.
‘칫, 왜 연락이 없는거야.’
회귀 전 기억이 없더라도 평소 답지 않게 결석한 자신이 걱정될 법도 한데. 서운할 만큼 리카드에게 연락이 없었다.
마음 한 켠에는 불안함도 있었다. 회귀 전 리카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화살을 대신 맞고 쓰러졌었다.
그때의 감정이 올라와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지만, 이제 없는 일이니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델리아는 리카드와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아카데미를 걸었다. 어느 새 아카데미 본관 행정학실에 도착했다.
행정학실 내부는 회귀 전 기억 그대로였다.
심지어 행정사무원이었던 에리스도. 에리스는 평민 출신으로 작년 말에 들어온 신입 사무원이었다.
“안녕하세요, 에리스 사무원님.”
“안녕하세요. 아델리아 영애님. 어떤 일로 오셨어요?
“아카데미 조기 졸업 신청을 하고 싶은데요.”
에리스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카데미는 조기 졸업을 신청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이었고 개교이래 조기 졸업을 신청한 사람은 없었다.
작년에 리카드가 조기 졸업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아델리아와 1년을 함께 하고 싶어서 신청을 하지 않았다.
“제가 알기론, 이미 조기졸업 요건은 충족했어요.”
에리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어. 그게. 제가 처음하는 일이라. … 잠시만요.”
에리스는 허둥지둥 자신의 서랍을 뒤졌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뒤 이곳저곳 캐비넷을 뒤졌다.
마침내 활짝 웃는 표정으로 구석진 서랍에서 서류 한장을 찾아냈다.
“아 찾았다.”
에리스는 환한 표정으로 아델리아에게 조기 졸업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는 여기에 있어요. 지도교수님과 면담하신 후 지도 교수님 면담 보고서를 받으셔야 해요.”
‘지도교수.’
아델리아는 지도 교수 말이 나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아델리아의 지도교수는 역사, 지리를 담당하는 스텐 엘리브 백작으로 프레오 백작의 오랜 친우였다.
아카데미는 재학생들에게 지도 교수를 배정한다. 하지만 재학생들은 지도 교수와 면담을 하진 않는다.
지도교수제도는 이름 뿐이고 실제는 재학생끼리 교류가 목적이었다. 지도교수와 함께 재학생끼리 주 1회 모여 티타임을 갖는 것이 전부였다.
평가도 출석만 하는 것이 전부인지라, 지도교수 없이 재학생끼리 모여 간단한 티타임만 가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기 초라 올해의 지도교수는 아직 배정 되지 않았다. 스텐 엘리브 백작은 어디까지나 작년 지도교수였다.
‘누구한테 가야하지?’
아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설핏 웃었다. 에리스에게 인사를 한 후 행정학 사무실을 나갔다.
간단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도 교수 면담이라니.
아델리아는 졸업 논문이나 다른 시험이 더 있을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무래도 스텐 엘리브 백작을 만나야 할 것 같은데, 프레오 백작의 입김이 들어갈까봐 골치가 벌써 아파왔다.
미간을 두드리면서 행정학실 복도를 걷는데 게시판에 붙인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벽보 앞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벽보 끝자락을 잡고 유심히 살폈다.
프레오 백작이 오전에 방으로 들어온 것 빼면. 아! 3년 전에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 아카데미 갔구나. 과거에는 백작의 충고대로 시간표도 바꿨었나?
쌍둥이인 라이너는 작년에 유급당하고 여전히 3학년이었다. 그리고 올해도 유급하겠지.
아델리아는 라이너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회귀 전에는 백작의 지시로 라이너의 아카데미 생활을 감시했다.
시험 기간에는 밤새도록 과외도 시켜야 했다. 머리가 나쁘면 노력이라도 해야할텐데,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켜도 딴짓은 기본이고 잠깐 눈을 돌리면 도서관 구석진 곳에서 잠을 자거나, 처음 보는 영애와 노닥거리곤 했다.
'어떻게 내가 너랑 어머니 배 속에서 열달을 같이 있었지? 하.'
아델리아는 앞으로 라이너에게 일체의 관심도 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이번 생에는 라이너 말고도 신경 쓸게 많았다.
'수석 졸업이 아깝지만, 조기 졸업 해야겠어.'
빨리 움직이려면 아카데미에서 자유로워야 했다.
문제는 프레오 백작인데...결혼도 안 하고 관료도 안 한다고 버티면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설득할 만한 구실을 만들어야겠어.'
아델리아는 내일 바로 조기 졸업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할 일을 정리했을 뿐인데 벌써 해가 저물어 있었다.
아델리아는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웠다. 침대 캐노피를 바라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아델리아는 묘하게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종일 생각 정리하면서도 느꼈던 중요한 걸 놓친 느낌.
다시 머리가 어수선해지는 듯해 자리를 뒤척였다. 팔을 베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허전한 팔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 팔찌!’
이 당시 리카드와 자주 연락했었다. 우편으로 주로 연락하다가 우편이 일주일 이상 걸려 리카드가 전서구용 팔찌를 선물했었다.
팔찌를 쓰다듬으면 리카드의 전서구가 아델리아에게 날아오는 방식이었는데, 그 덕분에 연락을 당일에도 할 수 있었다.
팔찌 선물은 궁전 무도회 때 받으니까, 지금은 팔찌가 없는 게 당연했다.
‘만약 리카드가 나처럼 기억을 했다면, 오늘 바로 날 찾아왔거나 우편이라도 보냈을 거야.’
하루 내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에게 아무 연락도 없는 것이 이상했던 거였다.
‘리카드는 회귀 전의 기억이 없다는 거네....’
씁쓸한 현실에 아델리아는 애꿎은 팔목만 쓰다듬었다.
* * *
아델리아는 예나가 준비한 빵과 스프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가벼운 몸단장을 했다.
프레오 백작이 궁으로 가기 전 관료직 제안을 거절하고 조기졸업하겠다고 말할 계획이었다. 아델리아 인생에서 첫 반항이었다.
뚜벅뚜벅. 집무실로 내려가는 길은 그대로인데,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릴 때 라이너와 크게 다퉈서 집무실로 불려갔을때처럼 긴장감이 깔렸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긴장감을 가라앉혔다. 아델리아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똑똑똑.
“아버지 들어갈게요.”
아델리아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백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상시라면 문을 열지 않고 노크했을 텐데, 맘이 급하다보니 문부터 열었다.
프레오 백작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책상 옆에는 부관인 야노스가 결제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야노스는 아델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목례를 했다.
'야노스.'
아델리아는 비밀 통로 끝에서 말고삐를 쥐고 있던 야노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작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기다렸던 야노스, 그의 죽음에 자신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이번에는 야노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백작은 시선을 올려 낮은 음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거니?”
"아버지께서 궁에 가시기 전 같이 차를 마시고 싶어서요."
프레오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델리아가 자신을 찾는 일이 드물었기에 무슨 이유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거기에 앉아 있거라."
아델리아는 집무실 쇼파에 앉았다. 백작은 책상 위에 있는 종을 두들겼다. 트레이를 끌고 온 하녀가 다기 세트를 올리고 찻잔을 내려놨다.
백작은 보고서 검토를 끝냈는지, 서명을 한 후 야노스에게 서류를 건넸다.
야노스는 백작에게 목례를 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백작은 아델리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차만 마시려는 건 아닐거고, 할말 있으면 해보거라."
“아버지, 아카데미 조기 졸업을 신청하려고 해요.”
백작은 찻잔을 내리면서 움찔했다. 백작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 졌다.
아델리아는 스푼으로 찻잔을 저으면서 평온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조기 졸업 요건은 이미 다 채웠어요. 더 배울것도 없으니 아카데미에 다닐 필요 없어요.”
"내무부로 바로 오려면 배워야 할 것들이 있을텐데."
백작은 여전히 아델리아가 내무부로 올 거라고 믿었다. 아델리아는 아직까지 백작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내무부 관료직이 아니라면 졸업 후 약혼을 해야 한다고 못박아 두었다.
아델리아가 혼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기에 내무부 관료직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요, 저는 내무부에 가지 않을 거예요. 백작 영애가 굳이 직업을 가질 필요 없잖아요.
티파티나 사교모임 다니면서 사교활동을 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나요?"
아델리아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찻잔으로 입이라도 가려야 할 것 같았다.
아델리아도 자신이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교 모임은 아델리아도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다.
사교 모음에서 나누는 대화라고는 소문, 연애, 잘생긴 영식 등이 다였다. 남의 신상 이야기나 떠드는 사교계는 딱 질색이었다.
"사교활동보다 내무부가 더 배울 것이 많다. 네 성격에도 적합하고.”
아델리아는 백작의 말에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백작이 내무부로 부른 건 아델리아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회귀 전 우연히 자신을 내무부로 부른 이유를 듣게 됐다. 기가 찰 이야기였다.
그날은 집무실에서 백작과 라이너, 야노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작은 라이너가 후계자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아델리아에게 후계자 교육은 물론 제국 일을 배우게 했다.
라이너가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면, 아델리아가 라이너 옆에서 영지 살림과 백작가 사업을 보좌하길 바랐다.
라이너가 공식적인 후계자이지만, 중요한 일들은 아델리아에게 맡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델리아는 그 날 분노로 치를 떨었다.
"저는 내무부 일을 하고 싶지 않고, 배우고 싶지도 않아요. 그리고…"
아델리아는 눈을 치켜뜨고 강한 어조로 마무리했다.
"더 이상 라이너의 뒤치닥꺼리는 하지 않을거예요. 그 동안 많이 했으니 이해해주실 거라 믿어요."
백작은 싸늘한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노려봤다.
“하. 일단 알겠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다시 얘기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아델리아는 프레오 백작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비록 백작을 설득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는 의사표현이 이렇게 간단하다니.
아델리아는 방으로 올라가면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아델리아는 오후에 예나를 데리고 아카데미에 방문했다. 오늘을 끝으로 더 이상 아카데미에 올 일이 없으리라.
아카데미 밖에 있는 연병장에 마차를 세우고 아델리아만 내렸다. 예나에게 은화 1개를 주며 말했다.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렉스 데리고 카페에 가서 있어. 끝나면 부를게.”
예나는 기쁨에 가득찬 표정으로 은화를 받았다.
“예. 천천히 일보고 나오세요.”
“어.”
아델리아는 아카데미 정문으로 걸어갔다. 정문 앞에는 경비병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아델리아를 알아본 듯, 정문을 열어 길을 비켜줬다.
“고마워.”
아델리아는 경비병들의 호의에 웃음으로 답했다. 정문 앞으로는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연병장과 본관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연병장에서 졸업식 대표로 수상을 받았던 리카드가 떠올랐다.
졸업식 예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리카드를 생각하자 얼굴에 홍조가 들었다.
졸업식 예복이 하필이면 회귀 전 무도회 때 리카드가 입었던 무도회 복장과 비슷했다. 자연스럽게 무도회때 리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도회 입장하면서 영애들의 시선을 끌던 리카드, 아이나르의 춤신청을 막아주고 자신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이끌던 리카드,
발이 밟혀도 스무스하게 춤을 추던 리카드, 가슴이 벅차오른 날이었다.
‘칫, 왜 연락이 없는거야.’
회귀 전 기억이 없더라도 평소 답지 않게 결석한 자신이 걱정될 법도 한데. 서운할 만큼 리카드에게 연락이 없었다.
마음 한 켠에는 불안함도 있었다. 회귀 전 리카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화살을 대신 맞고 쓰러졌었다.
그때의 감정이 올라와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지만, 이제 없는 일이니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델리아는 리카드와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아카데미를 걸었다. 어느 새 아카데미 본관 행정학실에 도착했다.
행정학실 내부는 회귀 전 기억 그대로였다.
심지어 행정사무원이었던 에리스도. 에리스는 평민 출신으로 작년 말에 들어온 신입 사무원이었다.
“안녕하세요, 에리스 사무원님.”
“안녕하세요. 아델리아 영애님. 어떤 일로 오셨어요?
“아카데미 조기 졸업 신청을 하고 싶은데요.”
에리스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카데미는 조기 졸업을 신청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이었고 개교이래 조기 졸업을 신청한 사람은 없었다.
작년에 리카드가 조기 졸업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아델리아와 1년을 함께 하고 싶어서 신청을 하지 않았다.
“제가 알기론, 이미 조기졸업 요건은 충족했어요.”
에리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어. 그게. 제가 처음하는 일이라. … 잠시만요.”
에리스는 허둥지둥 자신의 서랍을 뒤졌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뒤 이곳저곳 캐비넷을 뒤졌다.
마침내 활짝 웃는 표정으로 구석진 서랍에서 서류 한장을 찾아냈다.
“아 찾았다.”
에리스는 환한 표정으로 아델리아에게 조기 졸업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는 여기에 있어요. 지도교수님과 면담하신 후 지도 교수님 면담 보고서를 받으셔야 해요.”
‘지도교수.’
아델리아는 지도 교수 말이 나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아델리아의 지도교수는 역사, 지리를 담당하는 스텐 엘리브 백작으로 프레오 백작의 오랜 친우였다.
아카데미는 재학생들에게 지도 교수를 배정한다. 하지만 재학생들은 지도 교수와 면담을 하진 않는다.
지도교수제도는 이름 뿐이고 실제는 재학생끼리 교류가 목적이었다. 지도교수와 함께 재학생끼리 주 1회 모여 티타임을 갖는 것이 전부였다.
평가도 출석만 하는 것이 전부인지라, 지도교수 없이 재학생끼리 모여 간단한 티타임만 가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기 초라 올해의 지도교수는 아직 배정 되지 않았다. 스텐 엘리브 백작은 어디까지나 작년 지도교수였다.
‘누구한테 가야하지?’
아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설핏 웃었다. 에리스에게 인사를 한 후 행정학 사무실을 나갔다.
간단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도 교수 면담이라니.
아델리아는 졸업 논문이나 다른 시험이 더 있을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무래도 스텐 엘리브 백작을 만나야 할 것 같은데, 프레오 백작의 입김이 들어갈까봐 골치가 벌써 아파왔다.
미간을 두드리면서 행정학실 복도를 걷는데 게시판에 붙인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벽보 앞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벽보 끝자락을 잡고 유심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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