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읽어버린 기억
조회 : 886 추천 : 0 글자수 : 4,689 자 2022-10-18
리카드는 집무실에서 공허하게 연무장을 내려봤다.
모든 일이 잘 처리됐고, 빠진 것이 없었음에도 불안한 마을을 누를 수 없었다.
월초에 있었던 마물 토벌은 꽤 성공적이었다. 인명피해없이 끝났고, 부산물의 질도 어느 때보다 좋았다.
아카데미 졸업논문으로 발표했던 ‘북부의 식량난 해결을 위한 밀 개량’을 아르패스 공작과 가신들 앞에서 설명도 했다.
공작부부는 물론 가신들의 반응도 좋았다. 북부 영지민 삶에 관심이 많았던 셀리아 에오시엔트 대공비가 직접 맡아서 진행하겠다고까지 했다.
후계자 수업도 착착 진행 중이었다. 모든 일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데 뭔가 놓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은 마물 때문인가 해서 영지 주변을 돌면서 하루 종일 마물을 베었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기사단 훈련 성과가 떨어진 것이 이유 같아 며칠간 직접 대련도 하면서 빡세게 굴렸어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어제는 꿈 속에서 자신이 무도회에서 누군가와 춤을 추고 있었다.
춤 상대는 금발의 긴 생머리를 매끄럽게 늘어뜨렸고, 자신의 눈동자와 비슷한 연푸른색 드레스를 나풀거리면서 스텝을 밝았다.
춤 추는 내내 부끄러운지 두 뺨을 붉게 불들이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따금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는 맑은 하늘보다 더 푸르게 빛났다. 아침에 깨었을때는 도저히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리카드가 무도회장에 갈 일도 많지 않았는데, 자신을 애정 어리게 쳐다보는 눈길, 그것을 받아주는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
게다가 아침에 필립이 가져온 매와 한 통의 서신. 아무래도 자신이 잊고 있는 것이 이 편지와 관련 있어 보였다.
리카드는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편지지를 내려다보면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필립은 의아해서 물었다. 리카드는 편지의 겉봉투조차 뜯지 않았다.
수신인으로는 리카드 선배, 발신인으로는 아델리아 후배라고 적혀있었다.
리카드의 아카데미 시절을 모르는 필립은 그때 친분을 쌓은 영애라고 생각했다.
반면 리카드는 머릿 속이 복잡했다. 아델리아와 검술대련 몇 번 한 것 외에는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같은 수업을 들었던 적도 없었다. 그러니 편지를 주고 받을 사이는 더욱 아니었다.
호삐삐 삐삐삐. 푸드득!
리카드는 매서운 눈으로 조용하라고 새장 속에 있는 매를 째려봤다. 비록 동물이지만, 리카드의 살기에 한풀 꺾여 얼은 것처럼 몸을 깍듯이 세웠다.
‘저건 왜 나한테 갖고 온거야.’
필립은 리카드의 부관이자, 에오시엔트 대공령의 카스 남작가의 차남이었다.
리카드가 아카데미 졸업 후 후계자 준비에 들어가면서 아버지인 아르패스 에오시엔트 공작이 선별해준 사람이었다.
필립은 리카드와 오래 함께한 부하는 아니지만, 지시한 사항은 완벽하게 수행했다. 적어도 어제까진.
아침에는 출근하면서 매 한마리를 들고 온 것도 거슬렸는데, 갖고 온 편지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필립, 이 편지가 아델리아 프레오 영애한테 온 거라고?”
필립은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소공작님, 발신인란은 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리카드는 치켜뜬 눈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필립, 내가 아델리아 영애와 친분이 있었나?”
필립은 리카드와 일한지 겨우 3개월인데 그걸 어떻게 압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리카드가 원하는 답은 따로 있는 것 같아서 돌려 말했다.
“글쎄요. 제가 아는 한 소공작님은 친우가 없으신걸.”
리카드는 동의한다는 듯 입속말로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귀찮다는 듯 편지를 필립쪽으로 밀었다.
“알아서 버려.”
“뜯어보지도 않으십니까?”
리카드는 필립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보고서를 훑어봤다. 리카드가 북부영지의 식량 문제를 해결을 위해서 필립에게 지시를 해둔 내용이었다.
푸드득 푸드륵, 호삐삐 삐삐삐.
매는 리카드에게 경고를 받았다는 것을 잊은 듯 자신을 봐달라며 날갯을 하면서 울었다. 리카드는 소란스러운 매와 필립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매는 왜 갖고 온거지? 아직 훈련도 덜 된 것 같은데?”
필립은 어처구니없이 리카드를 쳐다봤다. 편지도 그렇고, 매까지 나사가 어디 풀린 듯한 리카드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필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공작님이 수도에 급한 연락용으로 쓴다고 훈련시키라고 하셨잖아요.
펜던트를 돌리면 다른 펜던트가 있는 곳으로 매가 갈 수 있게 훈련시키라고 하셔놓고는.
펜던트까지 소공작님이 직접 주지 않으셨습니까?”
필립은 양 손에 두개의 펜던트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리카드는 흠칫 놀라면서 매를 다시 쳐다봤다.
필립한테 받은 펜던트를 돌리자, 매는 날개를 파드닥거리면서 리카드에게 삐삐삐 소리를 냈다.
“내가 지시했다고? 누구하고 연락하려고 했더라?”
리카드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필립을 쳐다봤다. 필립은 생각났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파르만 황자님?”
리카드는 필립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
“그럴리가?”
“수도에 숨겨둔 애인이라고 있으십니까? 아카데미 4년이면 그러시고도 남는 기간 아닙니까? 어느 집 영애십니까? 혹시 아델리아 영애신가요?”
필립은 반쯤 접힌 음흉한 시선으로 리카드를 보며 말했다.
“필립, 너 술 적당히 하라고 했지?”
“어제 술 안 마셨습니다. 그리고 술 마시고 출근한 적도 없습니다.”
필립은 정신이 멀쩡하다며 가슴을 굳게 펴고 당당했다. 리카드는 올라오는 짜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닥쳐라.”
필립은 시무룩해져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네.”
리카드는 필립에게 관심을 끄고 보고서를 넘겼다. 필립은 매를 쳐다보며 리카드에게 물었다.
“그럼 매는 어떻게 할까요?”
리카드는 새장 안에 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자신이 지시를 했다고 하지만,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르패스 공작이 지시를 내린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필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켰겠지. 결국 리카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여기에 둬봐.”
“네.”
필립은 아르패스 공작이 지시한 내용이라면서 보고서 한장을 더 올렸다.
“이번 건은 관심있게 보시죠. 파르만 황자님이 북동부에서 발견된 광산 탐사에 호위를 요청하셨습니다.”
리카드는 필립이 준 보고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런 호위 임무는 후계자인 자신이 아니라 현 공작인 아르패스 공작에서 요청해야 했다.
아버지를 생략하고 자신에게 직접 의뢰한 것이 이상해 리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서를 읽은 후 리카드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흠… 광산에 마정석이 있을 거라는 거지?”
“네, 발테리 상단에서도 두번이나 탐사를 했다고 합니다.”
리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필립에게 물었다.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인데 용케 아무 일이 없었나 보군.”
광산 지역은 아르패스 공작이 여러 번 토벌하다가 포기한 지역이었다. 토벌을 하면 몇 달간 마물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광산 지역은 달랐다. 토벌을 해도 며칠이면 다시 몰려왔다. 토벌의 의미가 없다는 걸 안 아르패스 공작은 과감히 토벌을 포기했다.
어차피 광산 지역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 사람에게 피해주는 일도 없었다.
“마물이 몰렸던 원인이 마정석 때문인건가? 파르만 황자는 마물토벌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아버지가 하실 것 같진 않은데?”
“안 그래도 본격적인 개발 전에 마물 토벌을 하기 위해 발테리 상단에서 용병을 고용한다고 합니다.
공작님도 황제 폐하의 요청이라면 토벌을 지원하겠다고 하셨지만,
아우구스 후작가와 얽힌 일이라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발테리 상단은 아우구스 후작 가문이 운영하는 상단으로 제국 최고 규모의 상단이었다.
아르패스 공작은 늘 아우구스 후작에게 불만이 많았다.
북부는 발테리 상단을 통해서 남부식량을 구입하는데, 그 가격이 수도보다 3배가 비쌌다. 그런데도 대안이 없어 겨자먹기로 구입해야 했다.
리카드도 이런 사정을 알기에 파르만 황자의 요청이 탐탁치 않았다.
호위는 어쩔 수 없지만, 광산 개발 전 마물 토벌은 황궁 내 기사단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르만 황자님은 언제 오신다고?”
“다음 주초에 오실 예정입니다.”
리카드와 필립은 집무실 벽에 달린 달력을 보면서 말했다.
“경호는 3기사단에서 맡는다. 인원을 차출하고 경호 훈련을 하라고 해.”
리카드는 광산보고서를 필립에게 넘겨줬다.
“아 그리고 야콥은 어디있지?”
야콥은 리카드가 수도에서 데려온 정보원이었다. 아카데미 때부터 줄곧 리카드 옆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첫번째 심복이었다.
야콥은 평범한 사람보다 눈과 귀가 밟은 편이었다. 게다가 몸집이 작고 날렵해서 잠입과 은신에도 능숙했다.
리카드는 야콥을 정보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줄곧 훈련시켰다.
“술마시고 하수구에 자고 있겠죠? 야콥에게는 뭘 조사하라고 시키실겁니까?”
필립은 리카드에게 더 자세하게 알려달라는 듯 눈짓했다.
“아델리아 영애에 관한 모든 다. 하나도 빼지 않고.”
필립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네네 소공작님도 이제 그러실 나이죠.”
필립은 자기 표정을 깨닫고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필립의 오른쪽 뺨에 서늘한 감촉이 스치듯 지났다.
탁!
필립은 오른쪽 뺨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돌려 문에 박힌 펜을 쳐다봤다.
“어이쿠. 말도 못합니까? 그러니깐 아직까지 친구 하나도 없으신 겁니다.”
필립은 오른 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면서 불퉁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시끄러워. 더 보고할 거 없으면 나가.”
필립은 어처구니 없어 하며 보고서를 챙겨들고 집무실을 나갔다. 리카드는 한 동안 문에 박힌 펜을 쳐다보기만 했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그 백작 영애의 장미 가시
13.013 광산탐사 (3)조회 : 87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69 12.012 광산탐사 (2)조회 : 79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21 11.011 광산탐사 (1)조회 : 8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740 10.010 읽어버린 기억조회 : 89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89 9.009 아델리아의 결심 (2)조회 : 1,0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90 8.008 아델리아의 결심 (1)조회 : 1,2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57 7.007 동부의 왕자조회 : 80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807 6.006 17살의 봄조회 : 1,25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86 5.005 회귀 (2)조회 : 2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90 4.004 회귀 (1)조회 : 56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26 3.003 비내리는 무도회(03)조회 : 49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920 2.002 비내리는 무도회(02)조회 : 712 추천 : 1 댓글 : 0 글자 : 4,876 1.001 비내리는 무도회(01)조회 : 1,625 추천 : 1 댓글 : 0 글자 : 4,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