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비내리는 무도회(01)
조회 : 1,618 추천 : 1 글자수 : 4,591 자 2022-08-13
쏴아아, 다각다각, 투드드득. 마차 한 대가 세찬 빗발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아델리아는 마차 창문을 손으로 훑어 내린 후, 손끝을 오므렸다.
‘리카드는 이제 북부로 돌아가겠지?’
아카데미 선배였던 리카드는 3년 전 졸업과 동시에 북부 영지로 돌아갔다. 졸업한 이듬해 북부는 대규모 몬스터 침공을 막아야 했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온드라국과 오랜 전쟁으로 지난 몇 달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리카드와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서 맘이 쓰렸다.
“황실 마탑에서 사기 쳤네, 비가 너무 많이 와.”
낮은 남자 목소리에 아델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금발에 연푸른 눈동자는 아델리아와 닮았지만,
목젖이 툭 튀어나온 남자는 아델리아의 이란성 쌍둥이인 라이너 프레오였다.
아버지 프레오 백작은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아델리아는 프레오 백작이 왜 저리 웃는지 짐작이 갔다.
행정부 수장인 프레오 백작은 원래라면 이 시간에 황실에서 무도회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무도회는 황후가 준비하다 하여 순수하게 손님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
런데도 비가 오는 걸 보니 직업병처럼 무도회를 걱정하는 듯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는 항상 준비하는 사람을 당황시키곤 한다.
“아~ 가기 싫….”
올리비아 프레오 백작부인은 콧등을 찡그리면서, 라이너의 입술을 꼬집었다.
”아, 아얏.“
“라이너, 가문의 후계자다운 모습을 보이거라.”
‘쯧쯧, 저럴 줄 알았다니까.’
아델리아는 라이너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라이너는 올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프레오 가문의 정식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다.
제국의 관례에 따르면, 여성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특히 결혼한 여성은 더더욱. 귀족 사회에서 남자든 여자든 결혼을 안 하는 자가 없었다.
후계를 위해, 가문 부흥을 위해, 인맥을 위해(가끔은 사랑해서), 여러 이유로 귀족은 반드시 결혼을 한다.
아델리아는 딱히 결혼에 뜻이 없었지만, 그녀도 곧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 징조로 여러 귀족 영식이 구애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2황자까지 열렬히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아델리아는 자신이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게 정말 못마땅했지만, 사실 그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더 멀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자리를 동생인 라이너가 맡을 거라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 저 얼탱이가 후계자라니.’
라이너는 객관적으로 멍청하다. 아델리아의 사적인 평이 아니라 아카데미 성적과 주위 평판이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심지는 그는 두번이나 유급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아델리아와 같이 입학했지만 졸업은 그녀보다 3년 늦게 하게 된 것이다.
반면 아델리아는 명석하다. 3년 전 아델리아는 제국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례적으로 문관과 무관 모두를 수석으로 졸업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모든 면에서 라이너보다 뛰어난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백작 부부는 물론, 프레오 가문의 방계 혈족과 백작령 가신들은 라이너를 후계자로 못 박아두었다.
프레오 백작이 탄 마차가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는 무도회에 참가하려는 가문들의 마차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아델리아는 그 광경에 머리를 짚었다. 어느 무도회보다 우아해야 할 황실 무도회에서 너저분하게 긴 줄이라니.
정말 격이 떨어지는 운영이었다. 멀리서 백작가의 문양을 본 경비대원이 성 입구에서부터 헐레벌떡 뛰어왔다.
경비대원은 우의를 입었지만, 물에 빠진 생쥐나 다름 없었다. 프레오 백작은 마차의 창문을 절반쯤 내렸다.
“빨리 동문과 서문을 개방하지 않고 뭐했나? 손님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뒤에 마차들은 다른 문으로 안내하게.”
프레오 백작의 꾸짖는 말에 아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었으면 벌써부터 다른 문을 개방해 빠르게 입장을 도왔을 것이다.
황후가 자진해서 연회를 준비한다기에 뭐가 있는 줄 알았더니, 입장부터 엉망이었다. 안은 또 얼마나 엉망일지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그...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작님 마차는 동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쯧.”
프레오 백작은 혀를 차면서 창문을 닫았다. 경비대원의 안내를 받아 동문을 통과한 마차는 장미궁의 실내 무도회장에 도착했다.
장미궁은 로잘리아 황후 궁으로 실외 정원의 조경이 아름다워 야외에서 무도회하기 적합했다.
날씨를 예보하는 마탑에서 오늘은 화창하다 하여 실내 무도회장은 물론 실외 정원까지 무도회 공간이었다.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려 실외 정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실내 무도회장만 이용해야 하는데, 문제는 장미궁의 실내는 다른 곳보다 협소해 많은 손님을 수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설마 장미궁에서 그대로 무도회를 할 줄이야.”
아델리아는 당연히 다른 무도회장으로 옮겼을 줄 알았다. 무려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인데,
귀족들이 이 좁은 공간에서 다닥다닥 붙어 파티를 즐기는 게 말이 되는가. 거기다 더욱 가관인 건.
“여기로 옮기게!”
“아니, 이것부터 치워야 하지 않겠나?”
“저 좀 도와주세요!”
고용인들은 실내 무도회장에 탁자와 음식 준비도 끝내지 못했다. 실외 정원에 있던 것 같은 의자와 탁자가 비에 젖은 채 실내에 널브러져 있기까지 했다.
뻔히 무슨 상황인지 보였다. 일의 우선순위 없이 실외 정원도 정리하고 실내도 새롭게 세팅하느라,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여기가 황실 무도회인지 시장 바닥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너무 시끄러워.”
“라이너, 품위 좀 지키라고.”
라이너의 말에는 동감하지만 귀족이 품위 없이 밖으로 꺼낼 말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듣지 못했는지 가만히 계시길래 아델리아가 대신 입술을 꼬집었다.
“아앗, 그만 놔!”
라이너는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의 손을 뿌리쳤다. 얼굴을 찡그린 라이너는 아델리아를 노려본 후, 아카데미 동기생들이 모인 곳으로 가버렸다.
“하, 이 정도일 줄이야.”
프레오 백작은 무도회장 입구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작은 무도회장 담당 시종을 불러, 서두르라고 소리쳤다.
“무도회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좀 서두르게, 음식은 나중에 나르고 테이블부터 날라서 열을 맞춰.”
“거기 음식은 그만 나르고 테이블부터 맞추라고.”
프레오 백작은 담당자처럼 일을 지시했다.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얼추 정돈되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올리비아 백작 부인은 백작의 팔을 쓰다듬으며 이제 됐으니까 자리로 가자고 타일렀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백작부인과 같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버지, 저는 저쪽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델리아는 단상에 있으면 아이나르 황자와 마주칠까 봐 부러 내려왔다.
최근에 2황자의 구애가 달갑지 않은 터라 구석에 숨어 눈에 띄지 않을 계획이었다.
프레오 백작은 그렇게 하라는 듯, 한 손을 올려 응답했다.
“리카드 에오시엔트 대공자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델리아는 몇 달만에 보는 리카드를 울렁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시선을 끄는 높은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무도회 주인공이라는 듯 빛이 났다.
오일로 깔끔하게 정돈한 검은 머리카락은 그의 단정한 예복을 한층 더 맵시 있어 보이게 했다.
그를 따라 움직이던 시선에 다른 영애들의 모습이 걸렸다. 그들 역시 리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훤칠한 외모는 아카데미 때에도 유명했다. 영애들의 시선만 따라가도 리카드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항상 관심 받는 선배였다.
‘그리고 리카드를 따라가면 아델리아가 있다는 말도 있었지.’
아카데미에서 둘은 유명했다. 3학년 때 조기 졸업이 가능했던 리카드지만, 그는 4학년까지 수업을 신청했다.
아델리아와 똑같이 수업을 신청해, 둘은 4학년 내내 붙어 다니게 되었다.
거기다 대련, 청강, 과제까지도 같이 해 1년 동안은 항상 붙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카드를 보니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아버지인 프레오 백작에게 목례한 후 자리에 앉았다. 시종이 준 포도주를 마신 그는 무도회장을 두리번거렸다.
‘누굴 찾는 건가?’
과거를 떠올리며 멍한 눈빛으로 있다가 리카드와 눈이 마주쳤다.
‘어 깜짝이야!’
아델리아는 양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크릴 제국의 마테오 요하라 하네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악단은 연주 중인 음악을 멈추고 즉시 황제 입장곡으로 바꿔 연주했다. 귀족들은 일제히 단상을 바라보면서 박수를 쳤다.
황제와 황족들, 가신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황제가 중앙석에 앉자, 뒤따라오던 황족과 가신들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리에 앉은 황제는 의자 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시작하거라.”
“지금부터 제국의 건국 기념 무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빠바바바밤, 짝짝짝. 경쾌한 곡이 울리면서 좌중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작년 11월 제국은 온드라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온드라국은 제국의 동부와 맞닿은 마법사의 나라였다.
전쟁은 이겼지만, 여전히 온드라국 잔당들은 마법으로 제국을 괴롭혔다. 제국은 승리의 증표로 온드라국 공주를 포로로 데려왔었다.
황제는 제1황자인 파르만 하네스와 온드라국 공주를 정략 결혼 시킬 계획이었다. 온드라국 잔당들을 포용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무도회 시작 전에 마테오 요하라 하네스 황제 폐하의 중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귀족의 대표인 에브라 백작이 단상에 일어나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이마에 잔뜩 주름이 잡힌 황제가 에브라 백작에게 발표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브라 백작이 단상 우측을 턱 짓으로 가리키자 황실 대변인이 단상 앞으로 걸어왔다.
단상 앞에 온 관료는 황제를 향해 인사를 한후 두루마리를 펼쳤다. 악단의 나팔수가 나팔을 불어 주의를 끌어줬다.
빠바바밤.
[짐은 온드라국 공주 나디아 제카로드를 파르만 황자의 반려로 맞이하겠다.
제국인들은 나디아 제카로드를 황비로 간주하고 예우를 갖춰서 대하도록 하라.]
와아아아아. 짝짝짝짝.
발표가 끝나자마자 박수와 함성, 그리고 악단의 결혼 약속을 연주가 울렸다.
나디아와 파르만은 단상 중앙으로 걸어와 손을 맞잡고 귀족들을 향해 예를 표했다.
음악이 왈츠 곡으로 바뀌면서 파르만과 나디아는 중앙 무대로 이동해서 무도회 첫 춤을 열었다.
나디아 는 백색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티아라를 썼고, 자주색 계열의 드레스를 입었다. 자주색 계열 드레스는 황족에게만 허용되었다.
자주색 염료는 제조 과정이 까다롭고, 제조되는 양도 적었다. 나디아가 자주색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은 정략 결혼을 공식화한 셈이었다.
둘의 춤이 끝나자, 귀족 영애와 영식이 하나둘 무대 위로 올라갔다. 파트너를 데리고 참석한 커플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춤을 췄다.
파트너가 없는 영애와 영식은 호감을 갖았던 상대방을 찾아서 춤 신청을 주고 받았다.
비는 내리지만, 댄스 플로어만큼은 달달해서 꿀이 떨어질 정도였다.
아델리아는 무대로 나가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서 포도주 잔에 입술만 대고 있었다.
분명히 아이나르 황자가 춤 신청을 권하겠지만, 최대한 피할 생각이었다.
허리를 꽉 쥔 코르셋 드레스와 높은 굽의 구두가 불편해서 춤 출 엄두도 안났다. 아델리아는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커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리카드 ... 어디에 있을까?’
자리에 리카드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누구와 춤을 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델리아는 무대를 둘러보면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문득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리카드는 이제 북부로 돌아가겠지?’
아카데미 선배였던 리카드는 3년 전 졸업과 동시에 북부 영지로 돌아갔다. 졸업한 이듬해 북부는 대규모 몬스터 침공을 막아야 했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온드라국과 오랜 전쟁으로 지난 몇 달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리카드와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서 맘이 쓰렸다.
“황실 마탑에서 사기 쳤네, 비가 너무 많이 와.”
낮은 남자 목소리에 아델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금발에 연푸른 눈동자는 아델리아와 닮았지만,
목젖이 툭 튀어나온 남자는 아델리아의 이란성 쌍둥이인 라이너 프레오였다.
아버지 프레오 백작은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아델리아는 프레오 백작이 왜 저리 웃는지 짐작이 갔다.
행정부 수장인 프레오 백작은 원래라면 이 시간에 황실에서 무도회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무도회는 황후가 준비하다 하여 순수하게 손님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
런데도 비가 오는 걸 보니 직업병처럼 무도회를 걱정하는 듯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는 항상 준비하는 사람을 당황시키곤 한다.
“아~ 가기 싫….”
올리비아 프레오 백작부인은 콧등을 찡그리면서, 라이너의 입술을 꼬집었다.
”아, 아얏.“
“라이너, 가문의 후계자다운 모습을 보이거라.”
‘쯧쯧, 저럴 줄 알았다니까.’
아델리아는 라이너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라이너는 올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프레오 가문의 정식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다.
제국의 관례에 따르면, 여성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특히 결혼한 여성은 더더욱. 귀족 사회에서 남자든 여자든 결혼을 안 하는 자가 없었다.
후계를 위해, 가문 부흥을 위해, 인맥을 위해(가끔은 사랑해서), 여러 이유로 귀족은 반드시 결혼을 한다.
아델리아는 딱히 결혼에 뜻이 없었지만, 그녀도 곧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 징조로 여러 귀족 영식이 구애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2황자까지 열렬히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아델리아는 자신이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게 정말 못마땅했지만, 사실 그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더 멀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자리를 동생인 라이너가 맡을 거라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 저 얼탱이가 후계자라니.’
라이너는 객관적으로 멍청하다. 아델리아의 사적인 평이 아니라 아카데미 성적과 주위 평판이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심지는 그는 두번이나 유급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아델리아와 같이 입학했지만 졸업은 그녀보다 3년 늦게 하게 된 것이다.
반면 아델리아는 명석하다. 3년 전 아델리아는 제국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례적으로 문관과 무관 모두를 수석으로 졸업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모든 면에서 라이너보다 뛰어난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백작 부부는 물론, 프레오 가문의 방계 혈족과 백작령 가신들은 라이너를 후계자로 못 박아두었다.
프레오 백작이 탄 마차가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는 무도회에 참가하려는 가문들의 마차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아델리아는 그 광경에 머리를 짚었다. 어느 무도회보다 우아해야 할 황실 무도회에서 너저분하게 긴 줄이라니.
정말 격이 떨어지는 운영이었다. 멀리서 백작가의 문양을 본 경비대원이 성 입구에서부터 헐레벌떡 뛰어왔다.
경비대원은 우의를 입었지만, 물에 빠진 생쥐나 다름 없었다. 프레오 백작은 마차의 창문을 절반쯤 내렸다.
“빨리 동문과 서문을 개방하지 않고 뭐했나? 손님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뒤에 마차들은 다른 문으로 안내하게.”
프레오 백작의 꾸짖는 말에 아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었으면 벌써부터 다른 문을 개방해 빠르게 입장을 도왔을 것이다.
황후가 자진해서 연회를 준비한다기에 뭐가 있는 줄 알았더니, 입장부터 엉망이었다. 안은 또 얼마나 엉망일지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그...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작님 마차는 동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쯧.”
프레오 백작은 혀를 차면서 창문을 닫았다. 경비대원의 안내를 받아 동문을 통과한 마차는 장미궁의 실내 무도회장에 도착했다.
장미궁은 로잘리아 황후 궁으로 실외 정원의 조경이 아름다워 야외에서 무도회하기 적합했다.
날씨를 예보하는 마탑에서 오늘은 화창하다 하여 실내 무도회장은 물론 실외 정원까지 무도회 공간이었다.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려 실외 정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실내 무도회장만 이용해야 하는데, 문제는 장미궁의 실내는 다른 곳보다 협소해 많은 손님을 수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설마 장미궁에서 그대로 무도회를 할 줄이야.”
아델리아는 당연히 다른 무도회장으로 옮겼을 줄 알았다. 무려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인데,
귀족들이 이 좁은 공간에서 다닥다닥 붙어 파티를 즐기는 게 말이 되는가. 거기다 더욱 가관인 건.
“여기로 옮기게!”
“아니, 이것부터 치워야 하지 않겠나?”
“저 좀 도와주세요!”
고용인들은 실내 무도회장에 탁자와 음식 준비도 끝내지 못했다. 실외 정원에 있던 것 같은 의자와 탁자가 비에 젖은 채 실내에 널브러져 있기까지 했다.
뻔히 무슨 상황인지 보였다. 일의 우선순위 없이 실외 정원도 정리하고 실내도 새롭게 세팅하느라,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여기가 황실 무도회인지 시장 바닥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너무 시끄러워.”
“라이너, 품위 좀 지키라고.”
라이너의 말에는 동감하지만 귀족이 품위 없이 밖으로 꺼낼 말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듣지 못했는지 가만히 계시길래 아델리아가 대신 입술을 꼬집었다.
“아앗, 그만 놔!”
라이너는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의 손을 뿌리쳤다. 얼굴을 찡그린 라이너는 아델리아를 노려본 후, 아카데미 동기생들이 모인 곳으로 가버렸다.
“하, 이 정도일 줄이야.”
프레오 백작은 무도회장 입구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작은 무도회장 담당 시종을 불러, 서두르라고 소리쳤다.
“무도회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좀 서두르게, 음식은 나중에 나르고 테이블부터 날라서 열을 맞춰.”
“거기 음식은 그만 나르고 테이블부터 맞추라고.”
프레오 백작은 담당자처럼 일을 지시했다.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얼추 정돈되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올리비아 백작 부인은 백작의 팔을 쓰다듬으며 이제 됐으니까 자리로 가자고 타일렀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백작부인과 같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버지, 저는 저쪽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델리아는 단상에 있으면 아이나르 황자와 마주칠까 봐 부러 내려왔다.
최근에 2황자의 구애가 달갑지 않은 터라 구석에 숨어 눈에 띄지 않을 계획이었다.
프레오 백작은 그렇게 하라는 듯, 한 손을 올려 응답했다.
“리카드 에오시엔트 대공자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델리아는 몇 달만에 보는 리카드를 울렁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시선을 끄는 높은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무도회 주인공이라는 듯 빛이 났다.
오일로 깔끔하게 정돈한 검은 머리카락은 그의 단정한 예복을 한층 더 맵시 있어 보이게 했다.
그를 따라 움직이던 시선에 다른 영애들의 모습이 걸렸다. 그들 역시 리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훤칠한 외모는 아카데미 때에도 유명했다. 영애들의 시선만 따라가도 리카드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항상 관심 받는 선배였다.
‘그리고 리카드를 따라가면 아델리아가 있다는 말도 있었지.’
아카데미에서 둘은 유명했다. 3학년 때 조기 졸업이 가능했던 리카드지만, 그는 4학년까지 수업을 신청했다.
아델리아와 똑같이 수업을 신청해, 둘은 4학년 내내 붙어 다니게 되었다.
거기다 대련, 청강, 과제까지도 같이 해 1년 동안은 항상 붙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카드를 보니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아버지인 프레오 백작에게 목례한 후 자리에 앉았다. 시종이 준 포도주를 마신 그는 무도회장을 두리번거렸다.
‘누굴 찾는 건가?’
과거를 떠올리며 멍한 눈빛으로 있다가 리카드와 눈이 마주쳤다.
‘어 깜짝이야!’
아델리아는 양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크릴 제국의 마테오 요하라 하네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악단은 연주 중인 음악을 멈추고 즉시 황제 입장곡으로 바꿔 연주했다. 귀족들은 일제히 단상을 바라보면서 박수를 쳤다.
황제와 황족들, 가신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황제가 중앙석에 앉자, 뒤따라오던 황족과 가신들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리에 앉은 황제는 의자 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시작하거라.”
“지금부터 제국의 건국 기념 무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빠바바바밤, 짝짝짝. 경쾌한 곡이 울리면서 좌중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작년 11월 제국은 온드라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온드라국은 제국의 동부와 맞닿은 마법사의 나라였다.
전쟁은 이겼지만, 여전히 온드라국 잔당들은 마법으로 제국을 괴롭혔다. 제국은 승리의 증표로 온드라국 공주를 포로로 데려왔었다.
황제는 제1황자인 파르만 하네스와 온드라국 공주를 정략 결혼 시킬 계획이었다. 온드라국 잔당들을 포용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무도회 시작 전에 마테오 요하라 하네스 황제 폐하의 중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귀족의 대표인 에브라 백작이 단상에 일어나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이마에 잔뜩 주름이 잡힌 황제가 에브라 백작에게 발표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브라 백작이 단상 우측을 턱 짓으로 가리키자 황실 대변인이 단상 앞으로 걸어왔다.
단상 앞에 온 관료는 황제를 향해 인사를 한후 두루마리를 펼쳤다. 악단의 나팔수가 나팔을 불어 주의를 끌어줬다.
빠바바밤.
[짐은 온드라국 공주 나디아 제카로드를 파르만 황자의 반려로 맞이하겠다.
제국인들은 나디아 제카로드를 황비로 간주하고 예우를 갖춰서 대하도록 하라.]
와아아아아. 짝짝짝짝.
발표가 끝나자마자 박수와 함성, 그리고 악단의 결혼 약속을 연주가 울렸다.
나디아와 파르만은 단상 중앙으로 걸어와 손을 맞잡고 귀족들을 향해 예를 표했다.
음악이 왈츠 곡으로 바뀌면서 파르만과 나디아는 중앙 무대로 이동해서 무도회 첫 춤을 열었다.
나디아 는 백색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티아라를 썼고, 자주색 계열의 드레스를 입었다. 자주색 계열 드레스는 황족에게만 허용되었다.
자주색 염료는 제조 과정이 까다롭고, 제조되는 양도 적었다. 나디아가 자주색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은 정략 결혼을 공식화한 셈이었다.
둘의 춤이 끝나자, 귀족 영애와 영식이 하나둘 무대 위로 올라갔다. 파트너를 데리고 참석한 커플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춤을 췄다.
파트너가 없는 영애와 영식은 호감을 갖았던 상대방을 찾아서 춤 신청을 주고 받았다.
비는 내리지만, 댄스 플로어만큼은 달달해서 꿀이 떨어질 정도였다.
아델리아는 무대로 나가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서 포도주 잔에 입술만 대고 있었다.
분명히 아이나르 황자가 춤 신청을 권하겠지만, 최대한 피할 생각이었다.
허리를 꽉 쥔 코르셋 드레스와 높은 굽의 구두가 불편해서 춤 출 엄두도 안났다. 아델리아는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커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리카드 ... 어디에 있을까?’
자리에 리카드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누구와 춤을 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델리아는 무대를 둘러보면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문득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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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그 백작 영애의 장미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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