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광산탐사 (3)
조회 : 853 추천 : 0 글자수 : 5,569 자 2022-11-09
리카드를 잡은 아델리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델리아의 붉으락푸르락해진 양 볼에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하.”
리카드는 한숨을 쉬며 아델리아에게 잡힌 팔목을 풀었다.
“아델리아 영애, 답장을 보내지 않은 건 내가 잘못했군. 사과하지.
그렇지만 나는 다른 영애에게도 사적으로 편지를 보낸 적이 없어. 업무상 편지는 하겠지만, 그 편지도 내 부관이 작성하지.”
리카드는 고개를 들려 필립을 향해 어서 말하라는 듯 눈짓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필립은 당황했지만, 리카드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리아는 그거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리카드가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니.
북부로 갈 때 편지 하겠다고 말하고, 편지를 주고 받던 리카드는 누구란 말인가? 아 회귀 전이라 기억이 없는건가?
아델리아는 리카드가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아 순간을 모면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갈았다.
“거짓말.”
아델리아는 리카드의 팔목을 치고 씩씩거리며 몸을 돌려 리카드와 멀어졌다.
레오키디는 황망한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아델리아를 제국 최고의 신붓감으로 키웠다고 자부했다.
주위에서 듣는 아델리아 평판도 레오카디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조차도 아델리아를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델리아의 낯선 모습이 처음이라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
“소공작, 공사가 다망한지라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시켜 미안합니다. 나중에 따끔히 교육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리카드는 백작의 사과에 당황하며 정중한 태도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녁 때 영애와 오해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오카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리아에게 말해두겠습니다.”
리카드는 눈짓으로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광산 입구에 파르만 황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올라가시죠.”
리카드의 말에 구경하던 일행은 언제 소동이 있었냐 듯 광산입구로 이동했다.
다만 리키드의 부관, 필립은 호기심을 놓치 않고 뒤를 따르며 리카드에게 말했다.
“흠흠, 지금이라도 편지를 보시겠습니까?”
“편지 안 버렸어?”
“유능한 부관은 미리 대처하는 법이죠. 야콥이 준 정보에 오늘 아델리아 영애도 온다고 했는데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필립은 눈썹을 찡그리며 리카드를 노려봤다. 리카드는 필립의 불순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이 명백하기에 입술만 달싹였다. 필립이 편지를 읽어보라고 할 때 읽어봤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필립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리카드에게 넘기며 타박했다.
“연애 경험이 없으셔서 모르시겠지만, 평생 혼자 사실 것 아니라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만나보시죠.
영애만한 신붓감이 없더군요. 지금도 수도 사교계에 영식들이 난리랍니다. 그러다 놓치십니다.”
“조용.”
리카드는 출발 전 야콥이 보내 준 아델리아 정보를 확인했다.
하지만 정보에도 제 기억에도 아델리아와 접점은 없었다. 단순한 선후배 사이여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눈물을 흘렸던 아델리아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리카드는 상념을 떨치고 우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광산 입구에는 파르만과 레오카디가 지도를 두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대화중이었다.
리카드는 파르만 황자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침입한 마물은 모두 진압했습니다. 황자님.”
“수고했어.”
파르만이 리카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리카드는 광산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광산 개발이 확정되면 본격적으로 마물을 토벌을 할 예정입니다. 광산으로부터 도보로 1시간 거리까지 완벽하게 토벌을 해야 합니다.“
파르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토벌 범위가 넓군요. 예전에 토벌에 실패했다더니 그럴만하군요.”
리카드는 토벌 실패라는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
북부인들이 오래전부터 마물을 상대했다는 걸 모를리가 없을텐데, 실패했다는 말이 자신들의 능력부족을 탓하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보던 레오카디가 리카드를 대신해 설명을 이어갔다.
“토벌을 실패한 것이 아니라 더 할 필요가 없던 거죠. 주변은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척박합니다.
식량은 둘째치고 식수원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마물토벌까지 하면서 거주할 이유가 없었죠. 지금은 광산이 발견되었으니 반드시 토벌할 수 있습니다.”
리카드는 레오카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토벌 완료된 주변으로 화염석을 심어 두면 마물의 급습을 막을 수 있습니다.
대형 마물이 아닌 이상 수도병사들만으로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겁니다.”
화염석은 북부대공의 광산에서 발굴되는 마정석으로 몸에 지니고 있으면 체온을 유지해주고,
마물들의 접근을 막아줬다. 연구해보니 화염석을 불로 인식한 마물들이 접근을 꺼린 거였다.
레오카디가 자신의 설명에 리카드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확인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북부는 화염석 보급과 광산일대의 마물 수색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영지 경비 문제로 많은 인력을 뺄 수 없으니까요. 주 경비대는 반드시 황궁 기사단이 해야 합니다. 문제는.”
“폐하가 문제군요.”
파르만의 낯 빛이 어두워졌다. 광산이 발견될 당시,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긴다던 황제가 최근에 변덕을 부렸다.
마치 황제는 파르만이 광산 개발을 포기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파르만은 모처럼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 폐하가 무슨 이유에선지 발테리 상단의 단독 진행으로 마음이 기우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광산 개발의 이득을 발테리 상단의 뿌리인 남부만 취할 뿐, 황실 재정이나 동부 재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레오카디 말에 파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만은 광산 언덕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발테리 상단의 소후작을 쳐다봤다.
도착 후 인사만 하고 눈 앞에서 사라진 그는 광산 주변만 둘러봤다. 중간중간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파르만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레오카디는 계속해서 경비 계획과 광산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리카드도 곁에서 같이 설명을 들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아델리아 뿐이었다.
일행은 오후 늦게 탐사를 종료하고 집결지로 복귀했다.
아델리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팔짱을 낀채 거친 숨소리를 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리를 질러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무관심한 리카드의 표정이 눈 앞에서 자신을 조롱하면서 내려보는 듯 했다. 혹시나 꿈이 아닐까? 볼을 꼬집었지만, 통증만 느껴질 뿐 현실이었다.
막사로 따라온 레이가 아델리아의 표정을 살펴보면서 조심스럽게 찻잔을 올려놨다.
“아가씨, 따뜻한 차부터 드세요.”
“어 고마워.”
아델리아는 찻잔을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놨다. 페퍼민트 향이 코끝부터 입까지 진하게 톡 쏘았다.
그 때문인지 떨리는 가슴이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한번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떨리던 마음이 진정되자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한 행동이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델리아의 맘을 눈치챈 듯 레이가 아델리아 얼굴 옆에서 손부채질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가씨,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아델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반듯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는 아델리아를 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우리 기사들 사이에서 리카드 소공작님은 냉혈한으로 유명하답니다.
마물토벌을 함께한 동료 기사 말에 따르면 살기가 어찌나 독하던지 마물들이 꼬리를 내릴 정도였다네요. 그런 분은 평생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거예요.”
아델리아는 레이의 말뜻을 알았지만, 동의할 수 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
“리카드는 아카데미 검술학부 선배였어. 레이가 말한 그 살기 나도 알아. 그것 때문에 리카드에게 대련을 청하지 못하던 동기들도 많았지.
나는 달랐어. 리카드와 대련하면서 많이 가까워지고, 같은 수업도 들었고. 리카드 졸업식 무도회 파트너도 했었고.”
“…”
“참 데뷔탕트 파트너였는데. 편지? 그거 아니 레이. 북부 영지로 가면서 자기가 먼저 편지할 테니 답장보내라고 했었다니깐.
북부로 초대하면 놀러오라고까지 했는데.”
아델리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레이는 아델리아의 말에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의 기억에 아델리아 데뷔탕트 파트너는 라이너였다. 그날 올리비아의 호위로 같이 갔기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가씨, 데뷔당트 파트너는 라이너 도련님 아니셨어요?”
아델리아는 라이너가 들리자 몸서리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레이.. 리카드였다니깐. 설사 리카드가 아니더라도 혼자가면 혼자했지 그 꼴통이랑 뭘 한다고?”
레이는 흥분을 한 아델리아를 보면서 두 분이 사이가 안 좋으니 자신의 기억이 틀린건가 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흠… 작년 데뷔탕트는 황실 주관이라 아가씨께 거부권이 없었는데. 마님께서도 두분 때문에 힘들어 하셨던 거 기억납니다.
도망치는 아가씨를 저와 예나가 겨우 마차에 태워서 보내드렸었는데요.“
아델리아는 커다래진 눈동자를 껌뻑거리며 레이를 쳐다봤다.
“내가? 내가 그 꼴통이랑 파트너를 했다고.”
“풋. 도련님 맞다니깐요.”
레이는 아델리아가 라이너를 싫어하는 마음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 같아 해죽였다.
“아 몰라 피곤해. 이제 좀 쉴게.”
“예, 아가씨 저는 막사 주변을 둘러보겠습니다.”
레이는 목례를 한 후 검을 챙기고 막사를 나갔다.
아델리아는 간이 침대에 몸을 엎드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리카드는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리카드의 눈은 자신과 처음 만날 때 그 눈이었다.
그렇다면 레이의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 아델리아가 기억하는 과거와 다르게 이번 생애는 데뷔탕트를 라이너와 했다는 것.
‘혹시 회귀의 부작용이 아닐까?’
별안간 아델리아는 스크롤을 찢었던 장소가 나디아가 말했던 오두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때문에 마법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디아 시녀로 일하면서 마법의 기초를 배웠었다. 마법이 발현되려면 시전자의 마력, 주문식, 매개체 이 3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아델리아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당연히 마력이 없었다. 그래서 마법을 쓸 수 없지만 나디아가 스크롤에 마력이나 매개체를 넣어 쓸 수 있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이래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있어요. … 완벽하진 않겠지만.”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나.’
주문 당시 리카드가 옆에 있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아델리아는 다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면 오두막이 아닌 곳에서 스크롤을 찢어 회귀한 모두가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주문이 얼만큼 잘못되었을까? 다른 사람들도 과거가 바뀌었나? 자신처럼 회귀 전을 기억하는 자가 있을까?
만약 로잘리아, 아이나르, 아우구스가 회귀 전을 기억한다면? 그것만큼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델리아는 불안감에 입술을 짓이겼다. 당장 아무에게나 도움을 청하고 싶다.
로잘리아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황실 기사단장이 소드마스터인 걸 숨기고 있다고, 그들이 리카드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모두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장 가까웠던 리카드가 자신을 기억 못한다니. 이제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아델, 들어가겠다.”
그때 강한 음조의 레오카디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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