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여자의 사정
조회 : 1,070 추천 : 0 글자수 : 8,212 자 2022-08-14
“저어…….”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건다.
가녀리고 약한 귀여운 여성의 목소리에 수빈은 한 숨을 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작은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동그란 눈망울.
불그스름하게 물든 볼이 수빈의 시야에 들어온다.
뒤를 보니 검은색 머리의 그 뒤에 있는 친구인지, 조력자인지 모를 여자애가 파이팅이라 외치며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다. 언제나 시작되는 이 일에 대한 그저 예의상 물어보는 확인절차였다.
그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1%의 마음도 함께 담아서…….
“…제가 그러니까요. 그게…….”
단발 머리의 여학생이 움물쭈물하다, 이욱고 결심이 선뜻, 두 눈을 꼭 감은 채 말했다.
“저, 그, 그쪽에게 관심 있어요. 그, 그러니까 저와 카페 가서 커피 한 잔만 하지 않을래요?”
오늘은 그래도 좀 신선하네.
수빈의 머릿속에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평소에는 편지만 툭 내밀거나, 대놓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입술부터 내미는 여학생들이 많았는데, 수빈에게 있어서 이번 건 꽤 토마토지수가 높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감동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마음을 부여잡고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하는, 상대방에게 향하는 최대한의 고백. 얼마나 힘냈는지 그녀의 눈에는 어느 샌가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수빈에게 있어서 그런 고백 따윈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보다 못한 것이었다.
수빈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눈물 젖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말했다.
“손님. 여기는 연애하는 데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문하면 되는 것이고, 없으면 그냥 나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발머리 여학생의 동그란 눈동자가 더욱 땡글 해진다. 그녀의 눈에 담겨져 있는 불빛들이 부푼다싶더니 이내 또르르 하고 불그레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는 모습 따윈 이젠 지겹다.
냉정하게 그녀의 등을 돌리니, 이내 훌쩍훌쩍하는 신음소리와 그런 그녀를 다독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욕하는 소리도 들리긴 했지만, 수빈은 이내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한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놓으면 의례 듣는 익숙한 욕설과 비아냥들. 수빈은 그것을 욕쟁이 할머니가 떠드는 것 마냥 무심히 넘겨버렸다.
일일이 신경 썼다간 위가 버티지 못한다.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방패였다.
“야. 수빈아.”
누군가가 수빈을 부른다. 수빈의 고개가 미처 다 돌아가지 못했을때,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너 이녀석. 일은 안하고 또 연애질이냐?”
“낼 아침 밥숟가락을 들지 못하게 만들어 줄까?”
수빈은 어깨에 두른 동기의 손목을 잡으며 으르렁 거렸다. 민철은 그런 동기에 반응에 ‘어이쿠 무서워라’유난을 떨며 자신의 팔을 슬며시 뗐다.
“왜 그리 까칠하냐. 뭐 결벽증이라도 갖고 있는거야?”
“남이사.”
수빈은 손님이 떠나간 자리를 하나 둘 치우기 시작했다. 별로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자신의 어깨에 팔을 올린 것만으로도, 그냥 그 팔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민철은 그런 수빈을 보며 쯧쯔 혀를 찼다.
“나야 뭐, 남자라서 그렇다 치고, 아까 그 애들은 왜 그런거냐? 나름 좀 귀여웠던데, 그렇게 철벽을 치지 않아도 되지 않았냐?”
수빈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그렇다면 네가 꼬셔보지?”
날카로운 말에 민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노노. 네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나 같은 놈이 눈에 차겠냐? 그냥 그려려니 하고 있어야지.”
민철이 넉살좋게 이야기하니 수빈도 더는 날카롭게 대할 수 없어서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신도 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고 그것이 여성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하지만 그것은 수빈이 원한 모양세가 아니었다.
여자들이 줄줄 따라다니고,
일주일채 지나지 않는데 고백 받고,
지나가는 여자들이 말 한번 걸어볼까 안절 부절하는,
보통 남자라면 한 번쯤 어깨를 으쓱거릴 만한 것을 수빈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빈은 여자였으니까.
"수빈아 잠깐 이리 와봐."
열심히 조리하던 선배가 수빈을 부른다.
"뭔가 싴실 일이라도 있는 건가?"
상념에 잠깐 빠져있던 수빈은 선배의 부름에 달려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아, 딴 건 아니고, 너 축제 처음일 텐데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바람?
수빈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자신은 새내기에 불과하다. 이런 바쁜 축제날이면 분명 자신보다 선배들이 먼저 쉬고 싶었을 건데, 어째서 그런 소리가 나온 거지?
그러고 보니 다른 선배들에게서 반대표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했다.
"제가 빠지면 좀 그렇지 않나요?"
"괜찮아, 괜찮아. 너 하나 빠지다고 여기가 안돌아 가겠어? 그러지 말고 적당히 쉬다가 와."
남자 선배가 싱긋 웃으며 수빈을 재촉한다. 수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집사복을 고쳐입었다.
"그럼. 저 잠깐 쉬다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쉬다가 와."
"좀 오래 있다가 오면 더 좋고."
"천천히 놀다와. 이 선배가 잘 보고 있을 테니까."
"경영과 주점은 우리가 지킨다!"
특이한 환호다.
수빈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별 생각없이 바깥으로 나갔다. 이왕 이렇게 된거, 축제 때 자기 과로 한 번 놀러오라는 사촌을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수빈은 적당히 인사를 하며 천막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갔냐?"
조용한 대 선배의 물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래 학년의 후배들.
"그럼 작전 개시다."
대 선배의 눈이 반짝이며 손님들에게로 향한다. 손님들은 어쩐지 남자보다는 여성손님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하 호호 웃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성 손님들을 보며 연애가 고픈 남학생들이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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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사람이 많이 몰린다.
이리저리 치이기도 쉽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제대로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빈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녁시간대라 그의 집사복이 어둠속에 녹아들어 있어 눈에 띄진 않았지만, 그 만큼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가긴 어려웠다.
"야! 네가 봤어? 내가 만지는 거 봤냐고!"
"하. 이 새끼가 술 꼴아가지고, 발뺌하네. 네가 얘 엉덩이 은근슬쩍 만졌잖아!"
소란스러움에 수빈의 시선이 절로 간다.
남자 세 명과 여학생들의 대치 상태로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남학생 세 명.
주점에서 일하고 있을 법한 여학생들의 차림새.
한 여학생을 감싸고 과대로 보이는 여학생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일이 일어났는지 굳이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런 것들 때문에 남자가 욕을 먹는거지.'
수빈은 혀를 끌끌 찼다.
저런 걸 보면 남장하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다. 이렇게 남장을 강요하고 있는 아버지도 짜증나고, 그것을 암묵하는 집안 사람들도 무척 싫었다.
좋지 않는 기억이 떠오르자 수빈은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너 다음에 보면 뒤졌어! 반드시 콩밥 처먹여 줄거야!"
"야, 너 밤길 조심해라. 알았어?!"
사태는 어느 사이엔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수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금 인파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저런 것 보다 사촌을 만나서 노는 게 더 현명할 것같았다.
수빈은 폰을 꺼내 사촌에게 전화 걸었다. 얼른 이런 축제 따윈 접고 만나서 술이나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해서 신호음만 울릴 뿐이었다.
"뭐야. 불러놓고 전화는 왜 안 받는데?"
수빈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음만 반복적으로 울릴 뿐 누군가가 받는 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어디서 찾는 다지……?"
학교는 꽤 넓은 데다가 오늘 같은 축제날은 인파가 몰려 사람 찾기가 모래 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급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분명 사촌이 디자인과라고 했을 텐데, 그렇다면 디자인과 주점에 있을 려나?'
문득 떠오른 생각.
밑져야 본전이다.
만약 가서 없다 해도 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촌의 사교성 하나만큼은 끝내주니 아마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향하자, 수빈의 어영부영했던 행동이 목표를 가지고 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디자인과 주점이 저기 근방이라 했는데.'
눈동자가 빠르게 주점 간판들을 훑는다.
다리는 시선이 오가는 쪽을 향해 부지런히 걷는다.
그리고 수빈이는 저 멀리 한쪽에 있던 디자인과 주점의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어? 뭐야. 엄청예쁜데?”
“뭐? 어디? 어디?”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빈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까 봤던 남자 셋이서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또인가?
수빈은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나중에 또 진상을 부릴줄은 알고 있었지만, 하필 자신의 눈앞에서 또 진상을 부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악연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당황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야, 도망가지 말고, 우리랑 술 마시지 않을래?”
“우리랑 같이 저 쪽에서 술마시자 응?”
“이것들이 이거 안놔?!”
“뭐야. 목소리도 엄청 매력적인데?”
비명보다는 화를 내는 한 여학생. 수빈은 그제야 여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푸름과 하얀을 겸비한 한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와는 전혀 동떨어진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복장이 주변을 화사가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사하게 만들어주는 한복의 매력은 그저 악세사리로 지나지 않게 만들었다.
단아한 얼굴에 존재하는 가녀린 눈매와 사람을 궤뚫어 보는 듯한 깊고도 또렷한 눈동자가 수빈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불그스름한 입술 또한 충분히 유혹적이라 뭇 남심의 마음을 모조리 집어 삼킬것만 같았다.
“예쁘다…….”
생각이 절로 입밖으로 튀어나온다. 그 정도로 그 여성은 누가봐도 매력적이었고 또한 아름다웠다.
너무나 부러웠고, 또한 질투가 났다.
왜, 저 아이는 저렇게 예쁠까.
수빈의 다리가 절로 움직인다.
어쩜 저렇게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을 자유롭게 과시하고 다닐 수 있을까?
천천히 그들 사이로 다가가는 수빈의 모습.
나도 저렇게 예뻐질 수 있다면,
평범하게 여자처럼 꾸미고 다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저 빌어먹을 진상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그대로 집대성한 저 여성분에게 더러운 손으로 찝적이려고 하지 않는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수빈은 주먹을 날리려고 하는 사내의 손목을 그대로 붙잡았다.
-텁.
“그쯤 하지?”
당황한 그녀석의 얼굴이 수빈의 시야에 들어온다. 술이 취해 비틀거리면서 얼굴을 대추빛처럼 불그스름해진 그들의 얼굴.
추했다.
“뭐냐, 넌. 이거 안놔?”
술 취한 사내가 수빈을 보며 피식웃는다. 엔간히도 같잖게 보였나 보다. 수빈은 피식 웃으며, 아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로 술취한 사내를 향해 으르렁 거렸다.
“네가 그 손을 놓으면 나도 놓지.”
“이 허여멀건한 새끼가!”
사내가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수빈에게 달려든다. 충분히 협박을 했는데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벌을 줘야지.’
수빈이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힘을 줬다.
“아야야야야.”
충분히 단련된 그의 악력은 사내의 손목을 부러뜨리기엔 충분했다. 다만 지금 사람이 많이 보고 있어서 그러지 않을 뿐이었다.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술취한 사내.
“이 녀석이!!”
친구 인듯한 술취한 사내 둘이 덤벼든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주제에 덤빈다니 가소롭다. 수빈은 사내의 손목을 꺾어 자신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뒤에 그대로 밀어버렸다.
남자 둘이서 고작 한 사람을 비틀비틀 받아들이는 꼴이 우습다. 수빈은 이대로 녀석들을 어떻게 박살을 내야 잘 박살냈다고 소문이날까 하는 시시한 고민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고민은 여성이 자신에게 기대오는 것으로 산산히 부서졌다.
자신을 믿기라도 한 듯 기대어 오는 가녀린 여성. 자신의 꿈이자 질투의 대상인 가장 아름다운 여염집 아가씨.
만약 자신이 묵사발 내고자 그들을 상대한다면, 자신이 두 사람을 상대하는 사이 다른 한사람이 이 여성을 인질로 삼아버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위험한 일은 물론이거니와, 이 아가씨에게 커다란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른다.
짧지만 긴 고민, 선택지는 하나였다.
“도망치자.”
“응?”
수빈은 여성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인파를 벗어났다. 한복이 무척 거추장 스러운데다가 잘 뛸까 불안했지만, 상대방들도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야 어디가 거기서!”
“이 새끼들이 거기서지못해!”
술취한 사내들이 엉거주춤 그들을 쫓으려고 했지만 워낙 술에 많이 취한 탓이었는지, 쫓아오다말고 자기들끼리 지치거나, 구토를 했다. 덕분에 수빈과 여성은 손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달린다.
초등학교 이후로는 거의 하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수빈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고 달린다는 사실이 무척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의 손이 생각보다 부드럽지 않다는 것도.
또 자신이 여자의 손을 처음 잡았다는 것도
무척이나 어색하고 민망했다.
왠지 레즈비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수빈은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한적한 대학공원까지 오자마자 얼른 손을 뗐다.
“여튼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별로…….”
고마움을 표하는 그녀의 말에 퉁명스럽게 말하는 수빈의 단답. 스스로가 하고도 부끄러운지 몰래 헛기침을 했다.
수빈의 시선이 한복 여성의 아래 위로 훑는다.
다시금 봐도 예쁘기는 엄청 예뻤다.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이 부글부글 일정도로.
“너 그렇게 하고 다니면 애들이 너 좋아할 줄 알지?”
그래서 수빈의 말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동시에 묻어나왔다. 여성의 눈이 당황으로 물든다. 왠지 한 방먹였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입이 자기 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좋아하는 건 말이지. 그저 네 외모만 볼뿐이야. 알아? 네 그 멋드러진 빛 좋은 개살구만 볼 뿐이라고. 그러니 그런 파리 같은 녀석들이 꼬이는 거지.”
여성의 당황스런 얼굴이 슬슬 분노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까 그 자리에서 날 왜 구해준건데?”
“그냥 꿀 쫓는 벌레들이 맘에 안들어서.”
계속된 독설이 마음에 안들어서 였을까? 여성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설마 우는 건가?
하긴 이정도의 독설이라면 보통 여자애라면 분을 참지 못해 눈물 뚝뚝흘리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자신도 여자다. 자신의 무기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하지만, 한복 여성은 수빈의 예상과는 다르게 반응했다.
“…나도 이딴 식으로 생기고 싶지 않았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한복여성의 말. 수빈은 자신이 잘못들었나 싶어.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뭐라고……?”
“나도 이딴식으로 생기고 싶지 않았다고! 이 머저리야!”
머저리?
순간적으로 수빈의 화가 치솟았다. 이 축복받은 외모를 가지고 이딴식으로 생기고 싶지 않았다니. 그럼 누군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가?
‘나도 이렇게 머저리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고!’
자기도 모르게 여성의 멱살을 강하게 쥐어 뜯었다.
“이 여우같은 계집애가 누가 누굴 보고 머저리라고 하는거야!”
“난 여우도 아니고 계집애도 아냐. 이 머저리야!”
수빈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계집애는 뭘 믿고 까부는 거지? 내가 남자처럼 보이지 않나?
수빈은 반사적으로 뭐라고 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복여자의 말에 절로 입을 다물었다.
“너 같은 놈들은 남이 어떻든 모르지?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사실 너도 내 외모 때문에 여기까지 끌고 온거 맞잖아! 변태처럼 아무도 안다니는 이딴 곳에 끌고 와서 어떻게 해보려는거 맞으면서 뭘 아닌 척 새삼스레 떠들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강하게 던지는 그녀.
“너는 이 빌어먹을 외모 때문에 길 다닐때마다 긴장되는 거 넌 아마 평생 모를거다. 이 머저리야!”
그녀의 마지막 말에 수빈의 얼굴이 자연스레 굳었다.
-빌어먹을 외모 때문에 길 다닐 때마다 긴장 되는거 넌 아마 평생 모를거다. 머저리야
-나도 여자야. 남장 같은거 정말 싫다고!
방 구석에 혼자 앉아 서럽게 울던 자신의 모습과 지금 그녀가 말하는 모습이 겹쳐보였다.
아, 저 아이도 나랑 같은 아픔을 겪고 있었구나.
뛰어난 외모라는 것은 세상사는데 커다란 이득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 커다란 위협이 되기도 한다.
특히 여자같은 경우는 힘이 없으면 세상 풍파에 아픔을 겪는 일이 종종 있었다.
수빈은 자신의 찢어진 옷고름을 어떻게든 여미는 한복 여성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찻다.
괜스레 미안했다.
옷을 찢었던 것도, 화를 냈던 것도 그 모든 것이 미안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번도 사과라는 걸 해본적도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빈은 안 주머니에서 받짓고리를 꺼내들었다.
당황하는 여자애를 무시하고 그대로 옷고름을 궤맸다. 어머니에게 배운 것중 하나라 그런지 그녀의 손은 막힘없이 술술 궤어들어갔다.
“너 같은 애도 외모 때문에 고민을 하는구나.”
자기도 모르게 문득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그것이 부끄러워 수빈은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너무 잘난 것도 문제군. 그런 행복한 고민이나 하고 말이야.”
“시끄러. 이런 건 잘난게 아니야. 그냥 저주나 마찬가지지.”
저주라. 그녀의 말이 맞긴 맞다. 분수에도 없는 외모는 독이나 마찬가지니까. 문득 시선을 올려보니 그녀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한복 여자의 눈동자가 어느사이엔가 호감을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여기까지군.
“쿡, 반하진 마. 반해봤자 너만 손해야.”
“누, 누가 반했다고 그래!!”
“당황하는 걸 보니 귀여운데?”
“이, 이익!”
한복 여성의 벌게진 얼굴이 꽤나 귀엽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창피했는지, 그대로 수빈의 손을 쳐냈다.
“다 했으면 손 치워. 변태야!”
“너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오는 타입이구나. 그러면 남자에게 인기없다?!”
사실이다. 뭐, 이런 귀여운 여성이라면 용서해줄 남자는 많겠지만.
수빈은 반짇고리를 수습하고는 일어설 준비를 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그녀가 정들기 전에 어서 여기서 떠나야 한다. 하지만 그런 수빈의 마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 유아현!!”
멀리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친구인가?’
갈색 머리의 웨이브 섞인 긴머리를 휘날리며 다가와 한복 여성을 열심히 구박하던 여성의 모습. 수빈은 익숙한 사촌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으며 나직이 사촌의 이름을 불렀다.
“나영아.”
“어? 수빈아?”
깜짝 놀란 그녀의 말에 수빈이 씨익하고 웃었다. 그렇게 찾아도 안보이더니 노닥거리니 잘만 찾아오네.
“뭐야. 불러놓고 왜 연락 안했어. 한참 찾았잖아”
“아, 그게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나영의 시선이 한복을 입은 여성 쪽으로 향한다.
“오늘 얘 좀 꾸며서 사진 촬영 좀 할까 했었거든.”
“사진 촬영?”
그제야 수빈은 한복 여성이 어째서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장식품이었군. 그것도 돈을 내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
“내가 물건이야?! 누가 누구보고 장식품이래!”
“닥쳐! 장식품주제에!”
수빈은 투닥 거리는 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촌의 친구인것도 좋았고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이름을 들었을 때도, 수빈은 그녀의 이름이 외모만큼이나 예쁘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만 보고 더는 볼 이유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외모에 빠지면 안된다.
다른 여성들처럼 추태를 부리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꿈.
꿈은 꿈만으로 끝나야 한다.
수빈은 그녀들이 가기전에 한복 여성, 아니 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그렇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깜짝 놀란 그녀의 눈에 다정하면서도 진지한 수빈의 갈색 눈동자가 들어왔다.
“너 자신을 너무 남에게 비추지 말란 소리야. 그렇게 남의 시선을 신경쓰고 다니면 결국 그 시선에 상처받는 건 너뿐이니까.”
더는 자신처럼 외모 때문에 힘들지 않기를.
“생긴게 뭐가 어때서. 그게 너를 표현하는 전부는 아니잖아?”
자신처럼 외모에 신경쓰다가 무너지지 않기를.
“그러니까 너무 외모에 대해 신경쓰지 말았으면 해. 그럼 난 이만.”
그렇게 수빈은 자신에게 하고픈 말을 아현에게 해주며 등을 돌렸다.
안녕. 나의 꿈.
어디서든 외모 때문에 힘들지 말고.
영원히 내 꿈으로만으로 남겨주길 바래.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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