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
조회 : 1,068 추천 : 0 글자수 : 7,232 자 2022-08-16
“좀 알려주라.”
“싫어.”
칼 같은 나영의 단답에 아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왜 싫은건데?”
“아니, 그럼 내가 왜 그걸 너에게 알려줘야 하는 건데?”
지금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단답을 일삼던 나영이 아현을 돌아보며 반문한다. 목소리에 가시가 돋힌 걸 보니 엔간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현에게도 포기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녀석이 그날 한복을 뜯은 장본인이잖아. 축제때 그것 때문에 과대에게 엄청 혼났다고!”
그날 축제.
결국 아현은 돌아간 그날 한복의 주인인 과대 유나에게 엄청나게 많은 욕을 먹어야 했다. 도망간건 둘째치고, 아끼고 아껴왔던, 어여쁜 한복이 찢어져 있자 그만 화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거 집에서 신신당부 한건데 어떻게 해! 네가 물어줄거야? 엉?!’
결국 아현은 그날 유나에게 한복의 값을 반드시 지불한다는 계약서를 쓰고서야 풀릴 수 있었다.
“내가 뜯은 것도 아닌데, 다 물어줘야 하잖아. 그게 억울해서 그렇지.”
나영의 표정이 새초롬해진다.
“…그게 다야?”
“…어?”
열심히 더들던 아현의 입이 그 순간 다물어진다. 나영은 그런 아현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물었다.
“그게 사촌의 연락처를 알려줘야 하는 이유냐고.”
진지한 나영의 눈빛. 아현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향했다.
“무, 물론이지 그 이유 말고는 더 볼게 더 있겠어?”
“그…래?”
나영은 그런 아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남의 개인정보를 함부로 가르쳐 주는건 좀 그렇긴한데…….”
나영의 눈이 게스름하게 떠진다. 무언가를 살피는 기색에 아현의 머릿속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
그 말에 나영의 입가가 빙그레 웃는다.
오싹.
왠지 고양이처럼 웃는 나영의 모습에 아현은 소름이 돋는다. 왠지 말하게 해주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나영의 말이 더 빨랐다.
“네 얼굴 빌려주기 1주일정도?”
“뭐?!”
아현이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축제때 여장하면서 그 개고생을 했는데 또 하라고?
아현은 그 창피함과 치욕스러움을 아직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때만 생각해도 구토기가 올라올것만 같았다.
“싫어?”
악마의 유혹이 속삭인다. 아니 협박이려나? 아현은 찬찬히 두 개의 고민을 천칭에 올려다 보았다.
과연 어떤게 더 이득이고, 어떤게 더 손해인가.
과연 사촌의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할까.
아니면, 일주일동안 소악마의 스케치북이 되는 것이 더 문제일까.
아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냥. 네가 알아서 해. 화장 정도야 일주일정도 참아주지 뭐.”
“뭐라고?”
나영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그것은 친우의 얼굴을 마음껏 주무를수 있다는 기쁨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네 얼굴보다, 사촌의 정보를 더 원한다고?”
“그래. 결정했으니까. 빨리 그 사촌인지 오촌인지 그녀석의 정보나 줘.”
한숨놨다는 듯이 이제는 대놓고 달라고 하는 아현의 행동에 나영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어째서?
나영이 알기론 아현은 여장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질색할 정도로 싫어했다. 안 그래도 잘못보면 여자로 보이는 판에 여자로 꾸미는 것이라니.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자신이 연습삼아 화장 모델로 졸라대도 그것만은 안된다고 딱 거절하곤 했었다.
그것 때문에 아현을 구슬리고 설득(이라긴 협박)하는 기술만 늘어났긴 했지만…….
나영은 그 순간 아현과 수빈이 같이 서 있던 상황을 기억해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달콤하고 어색한 기류.
그날 묘하게 붉어져 있던 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나영은 헛기침을 하면서 운을 띄워 보았다,
“혹시 너…. 그 녀석에게 관심있어?”
“관시임?!”
아현이 팔짝 뛰며 놀란다.
“내가 게이냐? 내가 왜 남자에게 관심있어야 하는건데?!”
“아니 뭐. 그냥 걔에게 같은 남자로서 관심이 가냐고 물어본건데? 좀 잘생기긴 한데, 싸가지가 없어서……. 근데 왜 그렇게 흥분해?”
아현은 그런 나영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하고 대답을 했다.
“아, 아니 화내긴 누가…….”
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괜히 무안한 듯 뒷말을 흐렸다. 나영은 그런 아현을 보며 속으로 몰래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친해 질수 있으면 친해졌으면 좋겠다. 싸가지가 없어서 걱정되거든, 어렸을 때부터 친구는 나 하나밖에 없어서…….”
“그, 그래. 노력은 해볼게.”
아현은 더운지, 손부채질을 한다. 펄럭펄럭대는 손이 묘하게 어색해서 나영의 인상이 살짝 흐릿해졌다.
“여튼 연락처 주면, 갑작스레 욕하거나 돈부터 달란 소린 하지말고, 좀 친하게 지내줬으면 좋겠어. 같·은·남·자·로서 알았지?”
같은 남자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나영. 하지만 아현은 그것을 눈치채진 못했는지, 세로로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나영은 그런 아현을 바라보다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수빈이는 이 학교 경영학과에 재학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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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대 경영학과.
이름난 기업인을 배출시키고, 취업하기도 쉽다. 이름난 선배들이 잘 닦아놓은 레일에 올라타기만 해도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 읊는 그곳.
물론 경쟁도 치열해서 많은 학생들이 좌절하는 곳이기도 했다.
국학대를 다니는 학생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국학대의 진정한 꽃은 바로 경영학과에 있다라고.
“경영학과라…….”
아현은 높다란 경영학과의 건물 앞에 서성였다.
나영은 다른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연락처도, 톡 아이디도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알려준 것은 오로지 그가 다니는 곳이 이 국학대라고는 것과 경영학과라는 것.
그것도 그냥 알려준 것도 아닌, 선심쓰듯 말해준거다. 자신의 일주일 동안 얼굴을 내어주는 댓가로 말이다.
“하아.”
그래도 이름은 아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사람들에게 수소문 해서 찾을 수는 있으니까.
-그 녀석에게 관심있어?
아까 있었던, 나영의 질문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에 가슴이 찌르르하게 떨리던 묘한 느낌도 함께 떠오른다.
마치 심장언저리에 전기가 흐르는 그런 느낌. 아현은 괜히 콩닥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러 가만히 내리눌렀다.
‘왜 내가 그녀석에게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거지?’
알고 싶었다.
자신이 알 고 있는 단어로도 설명하지 못할 이 기분이 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날 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집사 녀석을 찾아야 한다.
아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깔끔했다.
학교 이사장이 밀어주는 곳이라 그런지, 다른 건물들에 비해 깨끗하고 새련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 디자인과도 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만만찮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숫제 하나의 어느 대기업 건물 같았다.
아현은 괜히 주눅드는 기분을 어떻게든 추스르고는 학생정보를 관리하는 곳으로 갔다.
“저기… 학생 하나를 찾고 싶은데요?”
“무슨 관계이시죠?”
관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내가 그 녀석이랑 어떤 관계였더라?’
친구?
그렇기엔 그날 하루 밖에 보지 않았다. 게다가 서로 악담을 해댔으니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문제 있어 보인다.
그럼 친구의 사촌?
그렇기엔 너무 사이가 없어보인다.
아현이 고민하고 있으려니 부서에 앉아 모니터 화면만 보던 여성직원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다.
“어떤 학생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정보는 함부로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다짜고짜 퇴짜를 맞았다. 아현은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보려 했지만, 경계심이 높아진 직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발품이라도 팔아 할지도 모른다.
그때 누군가가, 아현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아현은 사과를 하려다 말고, 자신을 지나치는 한 무리의 여대생들을 보았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깔깔 대며 지나가는 여성들.
‘어디 연예인이라도 나타났나? 왜 저리 몰려 다니는 거지? 혹시.’
그러다가 문득 아현의 머리에 무언가 스치는 게 있었다. 아현은 호기심과 기대감을 품은 채로 그들 무리에 은근 슬쩍 다가갔다.
“야, 오늘 경제학 듣는다며.”
“다른 팬들 와서 진쌓기 전에 빨리 가야돼. 그래야 말 한번 붙여보지.”
“아씨, 걔는 왜그리 잘생겨가지고, 날 심쿵하게 만들었데?”
“웃는 거 봤어? 완전 예술이라더라.”
재잘재잘대며 정보를 한움큼씩 뱉고가는 그녀들. 아현은 그들의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아현은 수빈이 어디서 강의를 듣는지 알게 되었다.
‘나 이정도면 탐정 해먹어도 되지 않을까?’
고작 남의 얘기를 듣는 거로 자랑 할 일은 아니다만, 아현은 자신 스스로 이런 고급정보를 얻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이런 자신감이면 금방 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현은 곧장 수빈이 있을 법한 강의실로 직행했다.
하지만, 아현에게는 커다란 오산이 하나 있었다.
누구나 알법한 그 정보를 누설하고 간 팬들. 그리고 그 정보를 알고 있는 팬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 까 하던 그 생각을.
아현은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깨닫게 되었다.
‘이런 썩을…….’
한 두사람이 아니다.
마치 바다를 연상케하는 수많은 여대생들의 물결들이 강의실의 입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아현은 여 대생으로 이루어진 인산인해를 보고 질린 듯이 멍청하게 서있었다.
‘뭐야. 연예인이라도 되는 거야? 왜 이리 사람이 많아?!’
미형에다가 남자답게 잘생겨보였던 수빈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신의 부러움을 한껏 훔쳐간 그의 외모. 하지만 이렇게 여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일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어쩐다……?”
이대로 막무가내로 들이밀어봤자 이야기도 제대로 못할 것 같았다.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않으면 다행이겠다.
아현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인 이상 하루종일 여기서 진을 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강의 시간이 끝나면 나올건 분명하고, 끝까지 쫓아다니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아현은 수빈이 혼자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현은 수빈이 혼자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의가 끝나고서도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거는 여학생들과,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팬들의 모습. 게다가 인기는 어찌나 좋은지 팬들이 사라져도 새로 마주치는 여학생들이 수빈은 그냥 보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수빈은 그런 그녀들의 말을 받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지나쳐간다라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저 녀석이 그냥 지나치든 입술을 박든 뭔상관이지?’
아현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훌훌털어냈다. 저렇게 냉정하게 지나치면 혼자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빈을 몰래 따라다니며 때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화살처럼 쏘아져나간다.
수빈이 혼자가 된 것은 그가 학교를 나설때가 다 된, 황혼이 질 무렵이었다.
이제야 이야기를 한 번 붙여볼 타이밍이 나왔다. 아현은 그가 혼자가 되자 마자 곧바로 나타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현은 수빈이 학교를 나설때까지 수빈에게 이야기를 걸지 못했다. 그보다 아예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었다.
아현도 왜 자신이 수빈이 혼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걸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딴게 문제가 아니었다.
도무지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수빈이 점점 학교에서 멀어진다. 내일을 기약하기엔 너무 오래기다린데다가, 내일이 되어도 팬을 자처하는 여대생들이 진을 칠게 분명했다.
“에라이…….”
아현은 침을 꿀꺽삼키고, 수빈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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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차를 타지 않았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거나 그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도 않았다.
‘이 근처에 사나?’
그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타지에 적을 두고 있을 학생이라면 근처 동네에 방을 잡아서 사는 건 당연한 일상중 하나였다. 다만 학교 근처에 방을 잡기에는 터무니 없이 비싼게 문제지.
아현 또한 학교 근처에 방을 잡고 등하교를 있었으니, 별 문제 될 이윤 없었다.
수빈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문득 한 곳에서 멈춰섰다. 아현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같이 멈춰섰다.
‘왜 멈춰선거지?’
수빈은 한참을 서성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한 일자로 꾹 다물고는 그대로 들어갔다. 아현은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헐레 벌떡 달려갔다.
“으음…….”
아현은 침음을 삼켰다.
그곳은 한 상가의 입구였다.
불빛 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둑어둑한 입구. 약 3층 높이의 두 개의 기둥이 어슴푸레 검붉은 빛을 만들어낸다.
저게 녹이 슬어서 붉은 빛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어두운 황혼이 만들어내는 환상인지 아현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위를 조금 더 올려다보니 페인트칠이 거의 다 벗겨진 커다란 간판이 눈에 띈다.
그마저도 여기저기 상처입은 부분이 많은지라 글자의 몇 부분은 이미 읽기 어려운 상태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글자들을 조합해서 어떻게든 유추해보니 [먹자 골목 입구에 어서 오세요.]라는 제목이 나왔다.
한때는 멋지고 대단해 보였을 간판은, 이젠 너무 흉물스러워서 계속 보고있기가 힘들었다.
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빈은 왜 이런곳을 찾아온거지?
집이 이 근처인가?
궁금증과 호기심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가 사색에 잠길 시간도 없이 수빈이 어둠속으로 점점 사라져간다.
아현은 궁금증을 제쳐두고 수빈을 따라어둠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부는 컴컴했다.
아직도 비춰지는 황혼 덕에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께름칙하고 칙칙한 시야는 변하지 않았다.
버려진 좌판. 그리고 그 위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찌거기들. 정체를 알수 없는 담은 검은 봉투에 날벌레들이 음습한 소리를 내며 찌거기들 위에 서성거린다.
“…….”
아현은 왠지 모를 끔찍한 상상에 시야를 다른데로 돌려버린다.
‘집에 가는 길이라도 이런 길은 조금 위험하지 않나?’
어둡고,
습하고,
으스스하다.
당장이라도 골목 한 부근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덮칠 것 같았다. 물론 악과 깡으로 무장해서 살아온 아현이 쉬이 겁먹진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여기는 충분히 위험한 곳이었다.
아현이 미행하고 있던 수빈을 살펴보았다. 올곧은 걸음걸이와 당당한 태도가 아무런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뭐 저래 당당해.’
이상한 곳에서 질투심이 끓어오른다.
정말이지 여러 가지로 맘에 안드는 녀석이었다.
‘그래, 네 녀석도 남자라 이거지?’
자신도 남자다.
고작 이정도에 겁먹을 줄 알아?!
머리에 피가 끓어 오른다. 아현은 수빈에게 다가서지못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당당하게.
수빈과의 거리가 점차 줄어든다. 어느 정도 거리가 줄어들자 아현은 그에게 외쳤다. 아니 외치려고 했다.
수빈을 덮치는 검은 그림자가 아니었다면.
“!!”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빈은 미처 대처를 하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수빈을 향해 거침없이 덤비는 그림자. 수빈은 방어하려 해봤지만, 거친 그의 몸짓과 이길 수 없는 힘에 어쩔 수 없이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아현의 머릿속에 무언가 툭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야이!! 씹어먹을 새끼가!”
육두문자를 뱉고는 그대로 나른다. 그리고는 수빈을 덮쳐 누르는 그림자를 향해 그대로 발차기를 먹였다.
“크읍?!”
힘에 밀린 탓인지, 아현의 돌진에 밀린 탓인지, 그림자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나뒹군다. 하지만 아현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쓰러져 있던 괴인에게 다가가 그대로 발로 걷어차고 지근지근 밟았다.
“너 같은게 감히! 너 같은게 감히!”
용서할 수 없다.
저 녀석에게 감히 손찌검을 하다니!
저렇게 쓰러질 정도로 패다니!
저 녀석은!!
저 녀석은…….
순간 아현의 생각이 정지되었다. 아현의 행동이 멈추자, 그림자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추슬렀다.
“다음엔 반드시…….”
쇠를 긁는 듯한 소리. 그림자는 그대로 냅다 아현의 몸을 밀치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현은 그렇게 도망가는 그림자를 보고도 쫓지도 않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아현이 가만히 수빈이 쓰러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을 추스르고 있는 수빈의 모습은 마치 상처받은 야생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입가에 흘린 핏자국과 다수의 멍자국, 과한 폭력으로 인해 찢어진 옷가지.
“괘, 괜찮아……?”
아현이 급하게 수빈을 부축했다.
“괜찮습니다만…….”
수빈이 말을 얼버무린다. 축제날 보았던 고압적인 태도와 싸가지 없는 모습과는 또 다른 태도에 아현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현은 이 두근거림이 어떤건지 이제 깨달았다.
추운지 불그스름해진 두 볼을 가리지도 않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어떡하지? 나 저녀석을 좋아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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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멍하니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쳐다보았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
여리여리한 몸매.
숏컷을 했지만, 그래도 고양이상의 미형적인 얼굴.
도저히 자신을 구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것은 수빈에게 처음있는 일이었다.
남자처럼 보일려고 애썼기 때문에 늘 눈매가 날카로웠고, 다가오는 여성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감정을 죽이고 싸가지 없는 모습만을 보이려고 노력해왔다.
그 결과 질나쁜 양아치나 불량배, 그리고 자신에게 반한 여친을 가진 남자들까지, 싸우지 않는 일은 없었다.
물론 도와주는 이도 없었다.
‘남자니까, 알아서 하겠지.’
‘남자가 싸움좀 하면 뭐 어때,’
‘꺄아 싸움도 잘하고 섹시하잖아.’
자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수빈을 더욱더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남자로 보이니 어쩔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만은 달랐다.
무서운 힘으로 자신을 덮쳐 누르고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리던 그림자를, 저 아름다운 남성이 구해준 것이었다.
그것이 수빈의 눈에는 마치 어려운 일을 당하는 소녀를 구해주는 백마탄 왕자처럼 보였다.
가슴 밑으로 눌러든 소녀의 감성이 심장을 두드린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수빈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멋지다.’
동경이 아니다.
연정이다.
그것이 수빈의 인생에 최초로 나타난 연정이었다.
둘의 이상하고도 기묘한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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