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이게 군대예요?
조회 : 746 추천 : 1 글자수 : 5,711 자 2022-08-23
“에라이! 제에에에에에길!!”
달이 차오르는 밤.
아름다운 석조 건물 사이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카페 한구석에서 채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어이구, 저 망나니는 대체 왜 올 때마다 와서 저 지랄을 하는 거야? 분위기 잡치게.”
하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카페 주인조차 함부로 말리지 못했다.
“쉿! 조용해요! 저 아이 입은 옷이랑 옷깃에 훈장 안 보여요? 혁명군 소위라고요!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단두대로 끌려가고 싶어요?”
“에잉, 내가 더러워서 진짜······.”
때는 바야흐로 혁명 군부의 시대.
새파랗게 어린 소년일지라도 황제의 목조차 서슬 퍼런 단두대 위에 올려놓은 혁명군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용감한 자는 이미 모두 저승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꿀꺽꿀꺽!
“크하!”
쾅!
기세 좋게 와인을 들이킨 소년이 테이블이 부서지라 거칠게 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이어서 웨이터를 불렀다.
“술 더 가져와!!”
“쯔쯔쯔. 이거 벌써 고주망태가 다 됐구먼.”
그때, 그런 소년에게로 한 남성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남성은 소년과 안면이 있는지 맞은 편에 의자를 꺼내 앉으며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즐리 핸섬 경. 자넨 또 업무 끝나자마자 병나발을 부는 건가? 그러다 코 삐뚤어지겠네.”
그가 소년의 망나니 같은 행동에도 섣불리 질책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옛 귀족 가문의 자제이며, 지금은 혁명군의 중추에 있는 포어드 핸섬 중장의 외동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펜델이 술을 마실 생각이 없음에도 그를 마중 나온 것도 하필이면 그런 놈이 자신의 부하라는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이 차도 열 살이나 나는 이 어린 망나니를 신경 쓰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핸섬은 펜델의 배려에도 까칠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경 같은 소리 집어 치우십쇼, 펜델 중위님. 저 이제 귀족 아닙니다. 그놈의 귀족 칭호 없어진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핸섬의 대답에 펜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근본이 없어지지는 않는 법이지.”
“없어집니다. 귀족이 뭐 신이라도 됩니까? 근본 같은 소리······ 나라 망하면 가장 먼저 숙청되는 게 귀족입니다. 망해버릴 나라의 귀족으로 태어난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핸섬은 펜델의 말에 반대로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 쉬었다.
이쯤 되면 핸섬의 행동에 악의가 있다고 봐도 좋으리라.
“후우! 자네 그 비관적인 마인드는 도대체 어디서 자꾸 솟아나는 건지 내 이해할 수가 없군.”
“전 이 군부가 어떻게 그렇게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 또. 상관에게 말대꾸하는 버릇은 이제 좀 고치게. 자네 말마따나 이제 귀족도 아니라면 군인으로서의 품위라도 지켜야 할 게 아닌가?”
“군인의 품위는 무슨······.”
펜델이 인내심을 갖고 핸섬을 상대하는 동안에도 그의 무례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펜델이 슬쩍 노기를 드러냈다.
“어허.”
하지만 그는 마이동풍이었다.
“펜델 중위님.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고요. 지금 이 군부에 제대로 된 군인이 있긴 합니까?”
“말조심하게, 핸섬 경.”
“혁명에 가담했던 하사관들은 그나마 군인으로 훈련을 받았던 전문가들이니 그들은 괜찮다고 치자고요.”
핸섬은 헨델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념을 이어나갔다.
“그럼 뭐합니까? 그들을 지휘해야 하는 소위는 낙하산 타고 위에서 꽂아 넣은 애송이고, 그 위에 있는 중위라는 사람은 그런 놈 사돈에 팔촌 형이고, 예? 또 그 위에 있는 대대장님은 어떻고요.”
심지어 핸섬은 자기 자신조차 깎아내리며 군부를 욕하기 시작했다.
“전직이 치과의사입니다, 치과의사!! 솔직히 나이 많은 순으로 그냥 아무 사람이나 골라서 집어넣은 거잖아요, 네? 이, 이게, 이게 제대로 된 군대라고 볼 수 있냐고요!?”
핸섬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군부는 주위 대국이랑 전쟁해야 한다고 그러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가 제정신이 박힌 새끼면 그런 얘기를 꺼내면 안 되죠!!!”
“말조심하라 경고했네, 핸섬 소위!! 포어드 중장님은 자네 아버지이기 전에 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 중 한 분일세!!”
무례함이 극치에 이른 핸섬의 태도에 펜델이 드디어 노기를 드러냈지만, 그는 오히려 자기 옷깃의 계급장을 잡아 뜯어 집어던지며 맞받아쳤다.
부욱! 팅~! 떼구르르르, 탁!!
계급장은 그대로 땅바닥을 굴러 벽에 처박혔고, 이어서 핸섬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 안 해!! 나 소위 안 할 거라고요!! 죽으려고 작정한 놈도 아니고, 기필코 지고야 말겠다고 판 깔아놓은 전쟁터에 끌려나갈 바에야 상관 모욕죄로 감옥에 들어갈 겁니다!!”
“이 막돼먹은 자가!?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술 가져와아아아!! 가져오라고 말한 지가 언젠데 술이 안 와!!!”
펜델은 취기가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핸섬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화를 내지도 못하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쩌다가 이런 놈을 부하로 둬서······.”
간신히 분노를 다스린 그가 이어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다 맞다 치지. 그러니 진정하게. 자네 말마따나 현재 아국이 전쟁을 치르기 어려운 건 사실이니까.”
그러자 그의 태도에 침착함을 되찾은 핸섬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사과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그에게도 아직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는 듯했다.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형님.”
“난 자네 같은 동생 둔 적 없네. 중위님이라고 부르게.”
“아, 예~ 펜델 중위님. 그러죠.”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핸섬은 자리에 앉자마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중위님. 전쟁은 정말 아닙니다. 지금 국제적으로도 아국은 고립된 상태나 다름이 없는데, 이 상태에서 전쟁까지 일으켰다가는 분명 남동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될 겁니다. 그것도 세 나라와 동시에요!”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해내야 하는 것이 군인이겠지.”
“더 나은 길이 있음에도 가시밭길을 자처하는 건 멍청한 겁니다!”
이윽고, 탁자에 머리를 박은 핸섬은 술에 곯은 상태로 잠꼬대를 하듯이 중얼거렸다. 쿵!
“그건 그냥 외교에 실패한 것일 뿐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펜델의 귓가에는 웅얼거림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계속 이딴 식으로 가다가는 이 나라는 분명 망할 겁니다. 아니, 나라는 안 망해도 군부는 반드시 무너질 거에요······. 그럼 난 숙청일 거고······.”
“······에휴! 자네 취해도 너무 취한 것 같네. 그만 일어서지. 기숙사에 데려다주겠네.”
“그렇게 안 되려면 이 난장판이 된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데, 여긴 프랑스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나라엔 나폴레옹이 없다고요······.”
“그래, 그래. 알겠네. 알았으니 일어서게.”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두 사람 곁으로 뒤늦게 웨이터가 와인병을 들고 쭈뼛쭈뼛 다가왔다.
“어, 들어가십니까?”
“아, 그거. 킵 해주게. 계산은 하고 갈 테니······.”
펜델이 대충 웨이터를 돌려보내려는데, 술이라는 말에 번뜩 고개를 든 핸섬이 와인병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돌연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거 말고 소주는 없습니까?”
“소주, 가 무엇입니까?”
“됐소. 이 친구가 많이 취해 헛소리하는 모양이니, 무시하시오.”
“······비이이이이일어머그으으으으을······. 이 나라엔 멍청이밖에 없어.”
핸섬은 웨이터의 대답에 실망했는지 그대로 펜델의 부축을 뿌리치고는 비틀비틀 골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펜델이 그런 핸섬에게 소리쳤다.
“집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배웅은 하지 않겠네!”
저 꼴로 집에 들어가는 아들에게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펜델이 그를 배려한다지만, 그런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기는 싫었다.
“후! 저 친구를 어찌해야 할꼬? 앞으로가 더 걱정이구먼.”
달빛을 받으며 팔자걸음으로 사라져가는 핸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펜델도 그를 뒤로했다.
***
핸섬은 흔들거리는 시야를 따라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어느 석조 다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다리 위에서 달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수면을 쳐다보며 한숨 쉬었다.
“첫 번째 생에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이번 생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으려나······. 하! 아니지.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죽으면 다행이지. 아마 난 처형대에서 죽게 될 거야.”
그리즐리 핸섬. 올해 16살이 되는 그는 사실 대한민국에서 28년 동안 살았던 환생자였다.
인생 한 방을 노리다가 젊은 나이에 막대한 빚을 지고 한강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신의 유희인지, 아니면 악마의 농락인지는 몰라도 뜻밖에 두 번째 생을 부여받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안도했다. 귀족으로 태어난 덕분에 시대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가 있었으니까.
맛있지는 않지만, 음식은 풍족했고, 즐길 거리는 없었지만, 전생과는 달리 권력과 자유가 있는 삶이었다.
“후우!”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핸섬의 운명은 6살의 생일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그의 아버지, 포어드 핸섬이 혁명군과 함께 부패한 황제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제국, 포스탈리카는 그렇게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쿠데타가 성공하며 권력의 중추에 오른 아버지 덕분에 낙하산 소위가 되었고 말이다.
‘그러면 뭐하냐. 이놈의 군부는 나라 경영도 제대로 못 해서 자멸하기 직전인데······.’
하지만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유지할 능력 없이는 돼지 목의 진주에 불과했다. 하물며 공포 정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부 정권이라면 더더욱 좌불안석일 수밖에······.
“지들도 분명 그걸 알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주위에서 괜히 건드려 볼 때마다 발끈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거야.”
그가 태어난 이 나라, 포스탈리카는 비유하자면 프랑스와 닮은 구석이 있는 나라였다.
북쪽과 서쪽에 대양을 접하고, 남쪽으로는 지중해.
모양만 봐도 프랑스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식생도 비슷하고, 주식도 빵과 고기, 와인 등.
물론, 다른 점도 많긴 했다. 가장 다른 점은 역시 프랑스와 달리 역사상 첫 번째로 시민 혁명을 일으킨 나라가 아니라는 부분을 들 수 있으리라.
오히려 정반대로, 주위의 나라에 비해 가장 늦게 시민 혁명이 일어난 나라였다.
“여기선 왕족 **했다고 뭐라 지랄염병할 나라도 없는데······.”
그러니 포스탈리카가 주위 대국들로부터 느끼는 위협도 프랑스와는 사뭇 이유가 달랐다. 이미 주위에 대통령제 국가가 둘에 입헌군주제 나라밖에 없는데, 어떤 나라가 왕족 끌어내렸다고 쳐들어오겠는가.
그들이 자꾸 시비를 거는 이유는 현 군부가 뭐 하나 털어먹어도 아무 대응도 못 할 만만돌이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아까도 말했듯이 군부가 진짜 무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군부는 자존심 하나는 하늘을 찔렀다.
“그놈의 자존심! 그 쓸데없는 자존심만 내려놓아도 외교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하여간 빡대가리들이!”
지피지기면 백전불퇴라고 했던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현 포스탈리카의 군부는 아국의 상황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 사정도 모르는 멍청이들의 이합집산이었다.
그리고 그 군부의 중추에 그의 아버지가 있었고 말이다.
“그 빌어먹을 늙다리가 혹시라도 선전포고라도 하는 날에는 진짜 나폴레옹이라도 환생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끝장일 거야. 비이이이이이이러머거으으을!”
그렇게 되면, 최고 권력자의 직계자손인 그의 미래는 안 봐도 뻔했다.
아마 그의 아버지가 왕좌에서 끌어내렸던 황제와 똑같겠지.
‘목 댕강.’
핸섬은 이대로 강물에 빠져들어 첫 번째 삶처럼 생을 끝내는 게 과연 **보다 나을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누가 알겠는가. 두 번째 생이 있다면, 세 번째도 있을지 몰랐다.
“여기 있었군.”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악!!”
“······왜 그러나?”
곧바로 뒤돌아선 핸섬의 눈동자에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펜델은 아니었다. 펜델이 아무리 그보다 나이가 많아도 저렇게 주름이 자글자글하진 않을 테니까.
남자는 적어도 예순은 넘어보이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취기 때문에 시야가 흔들려서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누, 누구세요?”
핸섬의 질문에 노인이 난간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카페에 물건을 두고 갔더군.”
이어서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카페에 물건? 가게 웨이터인가?’
노인이 그에게 건넨 물건은 그가 조금 전에 펜델과 말다툼하다가 옷깃에서 뜯어서 던져버린 계급장과 휘장이었다.
“아, 그거······.”
“받게.”
“아, 예. 감사합니다.”
핸섬이 계급장을 받아들자, 노인은 멋대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군인이 계급장을 집어던지면 쓰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로 하면 되는 거지.”
“어, 에······. 예. 그런데 누구······?”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워낙에 자연스러운 태도에 핸섬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빠르게 눈을 비볐다. 그리고 뒤늦게 초점을 맞춘 핸섬의 눈동자에 노인의 목덜미가 보였다.
“나 말인가?”
왜 얼굴이 아니라 목덜미가 보였냐고? 그야 거기에 달빛을 받아 빛나는 무언가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으니까.
핸섬이 노인의 목덜미에서 빛나는 다섯 개의 별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허읍!”
동시에 핸섬의 머릿속에서 그의 이름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마, 마가토 원수님!?”
“쉿. 조용히 하게.”
놀란 핸섬이 급히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차분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냥 오늘 좀 말동무가 필요해서 말이야.”
동시에 그의 옷깃에서 반짝거리던 다섯 개의 별이 겉옷 안으로 가만히 모습을 감추었다.
“혹시 괜찮다면 시간을 조금만 내줄 수 있겠나?”
달이 차오르는 밤.
아름다운 석조 건물 사이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카페 한구석에서 채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어이구, 저 망나니는 대체 왜 올 때마다 와서 저 지랄을 하는 거야? 분위기 잡치게.”
하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카페 주인조차 함부로 말리지 못했다.
“쉿! 조용해요! 저 아이 입은 옷이랑 옷깃에 훈장 안 보여요? 혁명군 소위라고요!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단두대로 끌려가고 싶어요?”
“에잉, 내가 더러워서 진짜······.”
때는 바야흐로 혁명 군부의 시대.
새파랗게 어린 소년일지라도 황제의 목조차 서슬 퍼런 단두대 위에 올려놓은 혁명군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용감한 자는 이미 모두 저승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꿀꺽꿀꺽!
“크하!”
쾅!
기세 좋게 와인을 들이킨 소년이 테이블이 부서지라 거칠게 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이어서 웨이터를 불렀다.
“술 더 가져와!!”
“쯔쯔쯔. 이거 벌써 고주망태가 다 됐구먼.”
그때, 그런 소년에게로 한 남성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남성은 소년과 안면이 있는지 맞은 편에 의자를 꺼내 앉으며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즐리 핸섬 경. 자넨 또 업무 끝나자마자 병나발을 부는 건가? 그러다 코 삐뚤어지겠네.”
그가 소년의 망나니 같은 행동에도 섣불리 질책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옛 귀족 가문의 자제이며, 지금은 혁명군의 중추에 있는 포어드 핸섬 중장의 외동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펜델이 술을 마실 생각이 없음에도 그를 마중 나온 것도 하필이면 그런 놈이 자신의 부하라는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이 차도 열 살이나 나는 이 어린 망나니를 신경 쓰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핸섬은 펜델의 배려에도 까칠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경 같은 소리 집어 치우십쇼, 펜델 중위님. 저 이제 귀족 아닙니다. 그놈의 귀족 칭호 없어진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핸섬의 대답에 펜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근본이 없어지지는 않는 법이지.”
“없어집니다. 귀족이 뭐 신이라도 됩니까? 근본 같은 소리······ 나라 망하면 가장 먼저 숙청되는 게 귀족입니다. 망해버릴 나라의 귀족으로 태어난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핸섬은 펜델의 말에 반대로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 쉬었다.
이쯤 되면 핸섬의 행동에 악의가 있다고 봐도 좋으리라.
“후우! 자네 그 비관적인 마인드는 도대체 어디서 자꾸 솟아나는 건지 내 이해할 수가 없군.”
“전 이 군부가 어떻게 그렇게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 또. 상관에게 말대꾸하는 버릇은 이제 좀 고치게. 자네 말마따나 이제 귀족도 아니라면 군인으로서의 품위라도 지켜야 할 게 아닌가?”
“군인의 품위는 무슨······.”
펜델이 인내심을 갖고 핸섬을 상대하는 동안에도 그의 무례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펜델이 슬쩍 노기를 드러냈다.
“어허.”
하지만 그는 마이동풍이었다.
“펜델 중위님.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고요. 지금 이 군부에 제대로 된 군인이 있긴 합니까?”
“말조심하게, 핸섬 경.”
“혁명에 가담했던 하사관들은 그나마 군인으로 훈련을 받았던 전문가들이니 그들은 괜찮다고 치자고요.”
핸섬은 헨델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념을 이어나갔다.
“그럼 뭐합니까? 그들을 지휘해야 하는 소위는 낙하산 타고 위에서 꽂아 넣은 애송이고, 그 위에 있는 중위라는 사람은 그런 놈 사돈에 팔촌 형이고, 예? 또 그 위에 있는 대대장님은 어떻고요.”
심지어 핸섬은 자기 자신조차 깎아내리며 군부를 욕하기 시작했다.
“전직이 치과의사입니다, 치과의사!! 솔직히 나이 많은 순으로 그냥 아무 사람이나 골라서 집어넣은 거잖아요, 네? 이, 이게, 이게 제대로 된 군대라고 볼 수 있냐고요!?”
핸섬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군부는 주위 대국이랑 전쟁해야 한다고 그러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가 제정신이 박힌 새끼면 그런 얘기를 꺼내면 안 되죠!!!”
“말조심하라 경고했네, 핸섬 소위!! 포어드 중장님은 자네 아버지이기 전에 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 중 한 분일세!!”
무례함이 극치에 이른 핸섬의 태도에 펜델이 드디어 노기를 드러냈지만, 그는 오히려 자기 옷깃의 계급장을 잡아 뜯어 집어던지며 맞받아쳤다.
부욱! 팅~! 떼구르르르, 탁!!
계급장은 그대로 땅바닥을 굴러 벽에 처박혔고, 이어서 핸섬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 안 해!! 나 소위 안 할 거라고요!! 죽으려고 작정한 놈도 아니고, 기필코 지고야 말겠다고 판 깔아놓은 전쟁터에 끌려나갈 바에야 상관 모욕죄로 감옥에 들어갈 겁니다!!”
“이 막돼먹은 자가!?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술 가져와아아아!! 가져오라고 말한 지가 언젠데 술이 안 와!!!”
펜델은 취기가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핸섬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화를 내지도 못하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쩌다가 이런 놈을 부하로 둬서······.”
간신히 분노를 다스린 그가 이어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다 맞다 치지. 그러니 진정하게. 자네 말마따나 현재 아국이 전쟁을 치르기 어려운 건 사실이니까.”
그러자 그의 태도에 침착함을 되찾은 핸섬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사과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그에게도 아직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는 듯했다.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형님.”
“난 자네 같은 동생 둔 적 없네. 중위님이라고 부르게.”
“아, 예~ 펜델 중위님. 그러죠.”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핸섬은 자리에 앉자마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중위님. 전쟁은 정말 아닙니다. 지금 국제적으로도 아국은 고립된 상태나 다름이 없는데, 이 상태에서 전쟁까지 일으켰다가는 분명 남동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될 겁니다. 그것도 세 나라와 동시에요!”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해내야 하는 것이 군인이겠지.”
“더 나은 길이 있음에도 가시밭길을 자처하는 건 멍청한 겁니다!”
이윽고, 탁자에 머리를 박은 핸섬은 술에 곯은 상태로 잠꼬대를 하듯이 중얼거렸다. 쿵!
“그건 그냥 외교에 실패한 것일 뿐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펜델의 귓가에는 웅얼거림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계속 이딴 식으로 가다가는 이 나라는 분명 망할 겁니다. 아니, 나라는 안 망해도 군부는 반드시 무너질 거에요······. 그럼 난 숙청일 거고······.”
“······에휴! 자네 취해도 너무 취한 것 같네. 그만 일어서지. 기숙사에 데려다주겠네.”
“그렇게 안 되려면 이 난장판이 된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데, 여긴 프랑스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나라엔 나폴레옹이 없다고요······.”
“그래, 그래. 알겠네. 알았으니 일어서게.”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두 사람 곁으로 뒤늦게 웨이터가 와인병을 들고 쭈뼛쭈뼛 다가왔다.
“어, 들어가십니까?”
“아, 그거. 킵 해주게. 계산은 하고 갈 테니······.”
펜델이 대충 웨이터를 돌려보내려는데, 술이라는 말에 번뜩 고개를 든 핸섬이 와인병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돌연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거 말고 소주는 없습니까?”
“소주, 가 무엇입니까?”
“됐소. 이 친구가 많이 취해 헛소리하는 모양이니, 무시하시오.”
“······비이이이이일어머그으으으으을······. 이 나라엔 멍청이밖에 없어.”
핸섬은 웨이터의 대답에 실망했는지 그대로 펜델의 부축을 뿌리치고는 비틀비틀 골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펜델이 그런 핸섬에게 소리쳤다.
“집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배웅은 하지 않겠네!”
저 꼴로 집에 들어가는 아들에게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펜델이 그를 배려한다지만, 그런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기는 싫었다.
“후! 저 친구를 어찌해야 할꼬? 앞으로가 더 걱정이구먼.”
달빛을 받으며 팔자걸음으로 사라져가는 핸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펜델도 그를 뒤로했다.
***
핸섬은 흔들거리는 시야를 따라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어느 석조 다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다리 위에서 달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수면을 쳐다보며 한숨 쉬었다.
“첫 번째 생에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이번 생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으려나······. 하! 아니지.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죽으면 다행이지. 아마 난 처형대에서 죽게 될 거야.”
그리즐리 핸섬. 올해 16살이 되는 그는 사실 대한민국에서 28년 동안 살았던 환생자였다.
인생 한 방을 노리다가 젊은 나이에 막대한 빚을 지고 한강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신의 유희인지, 아니면 악마의 농락인지는 몰라도 뜻밖에 두 번째 생을 부여받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안도했다. 귀족으로 태어난 덕분에 시대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가 있었으니까.
맛있지는 않지만, 음식은 풍족했고, 즐길 거리는 없었지만, 전생과는 달리 권력과 자유가 있는 삶이었다.
“후우!”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핸섬의 운명은 6살의 생일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그의 아버지, 포어드 핸섬이 혁명군과 함께 부패한 황제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제국, 포스탈리카는 그렇게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쿠데타가 성공하며 권력의 중추에 오른 아버지 덕분에 낙하산 소위가 되었고 말이다.
‘그러면 뭐하냐. 이놈의 군부는 나라 경영도 제대로 못 해서 자멸하기 직전인데······.’
하지만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유지할 능력 없이는 돼지 목의 진주에 불과했다. 하물며 공포 정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부 정권이라면 더더욱 좌불안석일 수밖에······.
“지들도 분명 그걸 알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주위에서 괜히 건드려 볼 때마다 발끈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거야.”
그가 태어난 이 나라, 포스탈리카는 비유하자면 프랑스와 닮은 구석이 있는 나라였다.
북쪽과 서쪽에 대양을 접하고, 남쪽으로는 지중해.
모양만 봐도 프랑스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식생도 비슷하고, 주식도 빵과 고기, 와인 등.
물론, 다른 점도 많긴 했다. 가장 다른 점은 역시 프랑스와 달리 역사상 첫 번째로 시민 혁명을 일으킨 나라가 아니라는 부분을 들 수 있으리라.
오히려 정반대로, 주위의 나라에 비해 가장 늦게 시민 혁명이 일어난 나라였다.
“여기선 왕족 **했다고 뭐라 지랄염병할 나라도 없는데······.”
그러니 포스탈리카가 주위 대국들로부터 느끼는 위협도 프랑스와는 사뭇 이유가 달랐다. 이미 주위에 대통령제 국가가 둘에 입헌군주제 나라밖에 없는데, 어떤 나라가 왕족 끌어내렸다고 쳐들어오겠는가.
그들이 자꾸 시비를 거는 이유는 현 군부가 뭐 하나 털어먹어도 아무 대응도 못 할 만만돌이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아까도 말했듯이 군부가 진짜 무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군부는 자존심 하나는 하늘을 찔렀다.
“그놈의 자존심! 그 쓸데없는 자존심만 내려놓아도 외교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하여간 빡대가리들이!”
지피지기면 백전불퇴라고 했던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현 포스탈리카의 군부는 아국의 상황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 사정도 모르는 멍청이들의 이합집산이었다.
그리고 그 군부의 중추에 그의 아버지가 있었고 말이다.
“그 빌어먹을 늙다리가 혹시라도 선전포고라도 하는 날에는 진짜 나폴레옹이라도 환생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끝장일 거야. 비이이이이이이러머거으으을!”
그렇게 되면, 최고 권력자의 직계자손인 그의 미래는 안 봐도 뻔했다.
아마 그의 아버지가 왕좌에서 끌어내렸던 황제와 똑같겠지.
‘목 댕강.’
핸섬은 이대로 강물에 빠져들어 첫 번째 삶처럼 생을 끝내는 게 과연 **보다 나을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누가 알겠는가. 두 번째 생이 있다면, 세 번째도 있을지 몰랐다.
“여기 있었군.”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악!!”
“······왜 그러나?”
곧바로 뒤돌아선 핸섬의 눈동자에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펜델은 아니었다. 펜델이 아무리 그보다 나이가 많아도 저렇게 주름이 자글자글하진 않을 테니까.
남자는 적어도 예순은 넘어보이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취기 때문에 시야가 흔들려서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누, 누구세요?”
핸섬의 질문에 노인이 난간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카페에 물건을 두고 갔더군.”
이어서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카페에 물건? 가게 웨이터인가?’
노인이 그에게 건넨 물건은 그가 조금 전에 펜델과 말다툼하다가 옷깃에서 뜯어서 던져버린 계급장과 휘장이었다.
“아, 그거······.”
“받게.”
“아, 예. 감사합니다.”
핸섬이 계급장을 받아들자, 노인은 멋대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군인이 계급장을 집어던지면 쓰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로 하면 되는 거지.”
“어, 에······. 예. 그런데 누구······?”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워낙에 자연스러운 태도에 핸섬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빠르게 눈을 비볐다. 그리고 뒤늦게 초점을 맞춘 핸섬의 눈동자에 노인의 목덜미가 보였다.
“나 말인가?”
왜 얼굴이 아니라 목덜미가 보였냐고? 그야 거기에 달빛을 받아 빛나는 무언가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으니까.
핸섬이 노인의 목덜미에서 빛나는 다섯 개의 별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허읍!”
동시에 핸섬의 머릿속에서 그의 이름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마, 마가토 원수님!?”
“쉿. 조용히 하게.”
놀란 핸섬이 급히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차분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냥 오늘 좀 말동무가 필요해서 말이야.”
동시에 그의 옷깃에서 반짝거리던 다섯 개의 별이 겉옷 안으로 가만히 모습을 감추었다.
“혹시 괜찮다면 시간을 조금만 내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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