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가리 깨지면 죽는 거지
조회 : 707 추천 : 0 글자수 : 4,657 자 2022-09-12
4. 대가리 깨지면 죽는 거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있네.
딱 봐도 성격 더러워 보이는데 이무기가 너만 죽이고 집에 가겠냐?
당연히 나를 쫓겠지?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하나라도 전력이 더 있는 지금이 기회다.
지금 이무기를 죽여야 한다.
망설이지 않고 망치를 이무기에게 겨냥했다.
“리터너나 이무기나 대가리 깨지면 죽는 거지.”
한방이다. 한방만 제대로 들어가면 된다.
유진이 힐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망치질은 소화기질보다 잘할 수 있습니까?”
당연한 소리.
“그립감이 다르지 않습니까.”
유진이 허여멀건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실드를 만들면서 왼손을 들어 이무기의 미간 정중앙에 빛을 쏘았다.
“저기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실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한계라서….”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아닙니까. 저거만 맞추면 됩니까?”
그륵그륵 하던 이무기가 다시 한번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무기도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듯 사력을 다하는 게 느껴졌다.
이무기의 왼쪽 눈동자에서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쏟아졌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망치를 뒤로 젖혔다.
이무기의 눈동자 색이 변하던 찰나, 젖먹던 힘을 다해 망치를 던졌다.
‘제발. 맞아라. 맞아라.’
이번만큼은 운이 따라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망치의 궤적이 아주 살짝 빗나갔다. 젠장.
역시 운이라곤 따라준 적 없는 인생.
이대로는 이무기의 오른쪽 눈썹 뼈를 때리겠지.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유진이 실드를 만들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더는 기회가 없다.’
유진은 생명력까지 쥐어짰다.
망치의 궤적이 미세하게 수정됐다.
빠각.
망치가 정확히 이무기 미간 정중앙을 때렸다.
쩌어억.
이무기의 미간 정중앙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무기는 살아있는 생명체라기보다 거대한 도자기처럼 온몸이 갈라졌다. 유진이 남겼던 살점을 베어낸 자상과는 다른, 완전한 깨어짐이었다.
막 불을 토해내려던 찰나였기에 데미지는 더 컸다. 거대한 불이 몸속으로 쏘아졌다.
훅.
전신에 퍼진 금 사이로 불이 새어 나왔다. 순간이었지만 우리가 있는 곳까지 어마어마한 열기가 몰아쳤다.
크어어억.
망치에 외상을, 자신의 불에 내상을 입은 이무기가 몸을 미친 듯이 틀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하나 남은 눈을 천천히 감으며 추락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으며, 이무기가 떨어진 숲 쪽을 바라봤다.
“이제… 된 겁니까?”
대답이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이미 피가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흥건한 피, 그 위에 쓰러진 사람.
의학적 지식이 없지만,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구원님!!!”
달려가 유진의 상체를 일으켰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
“이 백신 배낭, 화수분입니다. 한번 넣은 것은 무한대로 꺼낼 수 있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는 유진이 옆에 놓인 백신 배낭을 가리켰다.
“다만 약간의 조정을 좀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백신을 먹일 때마다… 원하는 것을 꺼낼 수 있도록.”
“네? 아니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똑똑한 양반이 설명을 그것밖에 못 합니까? 치료하고… 우선 치료부터 하고 천천히 설명해주십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으름장을 놨다.
사람이 있으면 어딘가 병원도 있겠지.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병원, 병원이 대체 어디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북쪽 빙하 지역에 가서… 폴투를 찾으세요. 리터너에 대한 답을 줄 겁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유진의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깜짝 놀라 유진을 붙잡으려던 순간, 하얀빛이 유진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사라졌다.
“뭐야? 연구원님! 야 유진 이 자식아!”
허공에 손을 뻗은 채로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옆에는 화수분이라고 했던 백신 배낭이 덩그러니 남았다.
뺨을 힘껏 내리쳤다. 이건 꿈이야. 꿈이어야지. 꿈이어야 돼.
짜악.
더럽게 아팠다. 꿈이 아닌가….
“하아……. 살려주려고 했으면 좀 안전한 데 데려다 놓던가.”
맥이 풀렸다. 이무기가 사람을 공격하고 어딘가 리터너가 있을 이런 곳에 혼자 남았다.
유진은 마법 뭐 그런 것도 하니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살 수 있을까?
…살아야지. 이대로 넋 놓고 죽을 순 없으니까.
근데,
“이럴 거면 주차장에서도 힘 좀 쓰지…… 개새끼가.”
우선 더 깊은 숲속, 이무기와 망치가 떨어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는 그립감 좋은 무기가 가장 중요하니까. 망치부터 확보해야 한다.
다행인지 탄내가 온 숲에 진동했다. 길을 헤매지도 않고, 탄내를 따라 이무기와 망치를 찾았다.
이무기는 온몸에 금이 간 그대로 죽어있었다.
탄내는 사체 안에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강한 불의 기운 때문인지 맹수들조차 근처에 오지 않았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크네.’
옆에 떨어져 있는 망치를 잡고 이무기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까 집채만 한 온몸에 금이 가던 장면이 너무 충격이었다.
정말 생명체가 맞는지 AI 도자기 로봇 같은 건 아닌지 지극히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이무기와 접촉한 손에 갑자기 검은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야?”
당황해 멈칫하는 순간, 일렁임이 커졌다. 주위에 알 수 없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황급히 손을 떼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이무기 안쪽에서부터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서서히 몸이 떠올랐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뭐야, 이렇게 이무기와 공중부양을 한다고?
아찔했다.
순간적으로 망치를 높이 들었다.
이무기든 내 손이든 박살을 내서라도 분리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패착이었다.
들어 올린 망치 위로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묠니르라더니 진짜 번개 먹는 망치였냐….
온몸에 찌릿찌릿 전류가 흘렀다. 땅으로 거세게 떨어졌다.
**
깨질듯한 두통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사방이 어두웠다.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몸 어딘가에서 낯선 감각이 콕콕 찔러왔다.
이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무기가 쓰러졌던 곳의 수풀이 듬성듬성 눌리고 망가지지 않았다면 정말 귀신에라도 씌었나 싶었을 것이다.
다만 뱃속이 이상하게 그륵그륵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인가? 배가 고파 그런가?
배낭과 망치를 챙겼다.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움직여야 했다.
리터너에 이무기에 번개까지. 오늘은 더럽게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한시라도 빨리 오늘 하루를 마감하고 싶었다.
한참 숲을 헤집었다. 이 놈의 숲은 흔한 등산로 하나가 없어?
이러다 여기서 죽겠다 싶을 즈음 작은 오솔길 하나를 발견했다.
장정 둘이 함께 걸으면 어깨를 계속 부딪쳐야 할 만큼 좁은 길이었지만 분명 누군가 다져놓은 길이었다.
어딘가 사람 사는 곳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걸으며 생각했다.
유진이 보여줬던 힘과 이무기.
그것은 유리겔라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이나 네스호의 괴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 마법이었고, 위험한 괴수였다.
괴수가 날아다니고 괴수를 쓰러뜨리는 마법이 난무하는 데다 무시무시한 감염병까지 있는 위험한 세계.
그런 세계에 홀로 내던져졌다. 내가 살아남을 확률? 피식 실소가 터졌다. 적어도 너무 적다.
유진이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그건 누군가가 데려간 것이었다.
그렇게 데려갈 능력이면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유진을 다시 만나 한국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든, 여기서 살 방도를 찾든 하려면 어쨌든 북쪽으로 가서 유진의 지인을 만나야 겠지?
폴투라고 했던가. 그 사람을 찾자.
…그런데 뭘 하든 우선 이 숲을 벗어나야 하는데.
걸어도 걸어도 적막한 숲은 끝이 없었다.
적막한 숲?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숲이 조용하다고? 숲은 조용할 수가 없다.
산짐승이든 날짐승이든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요란할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수풀을 헤치고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먹고 울고 자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세상에 알리는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숲이다.
그런데 조용하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최상위 포식자의 등장.
숲을 조용하게 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아직 보지 못한 최상위 포식자의 들숨과 날숨이 벌써 목덜미에 와 닿는 것 같았다.
대체 이 지독한 하루는 언제 끝나……. 죽어야 끝나려나.
이젠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 망치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리터너도 보고 이무기도 만났다. 그럼에도 살아있다.
포기는 없다.
망치는 한번 내려치고 나면 회수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무조건 한 방이다. 한 방을 노려야 한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걸음마를 처음 배운 아이처럼 한 발씩 천천히 내디뎠다.
사삭.
수풀이 움직였다. 뒤쪽인가?
삭.
이번엔 왼쪽 수풀이 살짝 움직였다. 언제든 풀스윙을 당길 준비를 했다.
수풀이 확 젖혀졌다.
컹!
수풀에서 검은 물체가 뛰어올랐다.
컹이라고?
스윙을 날릴 새도 없이 개가 매달려 왔다. 검은 개.
순식간에 내 몸에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실어 왔다.
이 상태로 망치를 휘둘러봤자 내 갈비뼈만 후려치게 될 텐데, 그 전에 떼어내야 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개가 먼저 내 뺨을 핥았다. 꺼칠하지만 따뜻한 개의 혀가 뺨에 닿았다.
오랜만에 만난 반려인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몸짓. 당황스러웠다.
“뭐야?”
고개를 저으며 개를 내려다봤다. 개는 비루와 닮아 있었다.
같이 장승 앞에서 마을을 지키고, 산을 헤집고 놀았던 동네 개 비루.
동네 사람들은 그 떠돌이 개를 멍멍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비루라고 불렀다.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올 때면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게 속상해서 어디 가서 맞고 오지 말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부디 ‘범 무서운지 모르는 비루먹은 개’처럼 되라고.
그런 비루가 내가 읍내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홀연히 사라졌다.
한동안은 열심히 비루를 찾았다. 하지만 팍팍한 인생에 집 나간 개 한 마리를 오래 담을 여유가 없었다. 비루는 그렇게 흐지부지 잊혔다.
그런데 지금 여기, 다른 지구에서 비루와 너무 비슷한 개를 만나다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 너였으면 좋겠다. 비루야.”
두 손에 힘을 주어 개를 꽉 안았다. 개는 내 눈가를 연신 핥았다. 산에 올라가 남몰래 울 때마다 비루가 그랬던 것처럼.
개는 신기하게도 어디 가지도 않고 내 곁을 지켰다. 너무 지쳐서 주저앉을 만하면 멈춰선 다리를 머리로 밀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등불.
작지만 확실한 문명의 흔적이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나를 따라 개도 헥헥거렸다.
하지만 등불 쪽으로 방향을 잡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서서 개를 기다렸다. 같이 가자고.
그런데 개는 반대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더니 머리로 나의 다리를 불빛 쪽으로 밀어내고는 다시 숲속으로 휙 달려나갔다.
“비, 비루야!”
아무리 불러도 개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됐다.
하지만 살아있다. 그러니 걷는 수밖에.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있네.
딱 봐도 성격 더러워 보이는데 이무기가 너만 죽이고 집에 가겠냐?
당연히 나를 쫓겠지?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하나라도 전력이 더 있는 지금이 기회다.
지금 이무기를 죽여야 한다.
망설이지 않고 망치를 이무기에게 겨냥했다.
“리터너나 이무기나 대가리 깨지면 죽는 거지.”
한방이다. 한방만 제대로 들어가면 된다.
유진이 힐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망치질은 소화기질보다 잘할 수 있습니까?”
당연한 소리.
“그립감이 다르지 않습니까.”
유진이 허여멀건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실드를 만들면서 왼손을 들어 이무기의 미간 정중앙에 빛을 쏘았다.
“저기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실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한계라서….”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아닙니까. 저거만 맞추면 됩니까?”
그륵그륵 하던 이무기가 다시 한번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무기도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듯 사력을 다하는 게 느껴졌다.
이무기의 왼쪽 눈동자에서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쏟아졌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망치를 뒤로 젖혔다.
이무기의 눈동자 색이 변하던 찰나, 젖먹던 힘을 다해 망치를 던졌다.
‘제발. 맞아라. 맞아라.’
이번만큼은 운이 따라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망치의 궤적이 아주 살짝 빗나갔다. 젠장.
역시 운이라곤 따라준 적 없는 인생.
이대로는 이무기의 오른쪽 눈썹 뼈를 때리겠지.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유진이 실드를 만들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더는 기회가 없다.’
유진은 생명력까지 쥐어짰다.
망치의 궤적이 미세하게 수정됐다.
빠각.
망치가 정확히 이무기 미간 정중앙을 때렸다.
쩌어억.
이무기의 미간 정중앙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무기는 살아있는 생명체라기보다 거대한 도자기처럼 온몸이 갈라졌다. 유진이 남겼던 살점을 베어낸 자상과는 다른, 완전한 깨어짐이었다.
막 불을 토해내려던 찰나였기에 데미지는 더 컸다. 거대한 불이 몸속으로 쏘아졌다.
훅.
전신에 퍼진 금 사이로 불이 새어 나왔다. 순간이었지만 우리가 있는 곳까지 어마어마한 열기가 몰아쳤다.
크어어억.
망치에 외상을, 자신의 불에 내상을 입은 이무기가 몸을 미친 듯이 틀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하나 남은 눈을 천천히 감으며 추락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으며, 이무기가 떨어진 숲 쪽을 바라봤다.
“이제… 된 겁니까?”
대답이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이미 피가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흥건한 피, 그 위에 쓰러진 사람.
의학적 지식이 없지만,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구원님!!!”
달려가 유진의 상체를 일으켰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
“이 백신 배낭, 화수분입니다. 한번 넣은 것은 무한대로 꺼낼 수 있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는 유진이 옆에 놓인 백신 배낭을 가리켰다.
“다만 약간의 조정을 좀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백신을 먹일 때마다… 원하는 것을 꺼낼 수 있도록.”
“네? 아니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똑똑한 양반이 설명을 그것밖에 못 합니까? 치료하고… 우선 치료부터 하고 천천히 설명해주십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으름장을 놨다.
사람이 있으면 어딘가 병원도 있겠지.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병원, 병원이 대체 어디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북쪽 빙하 지역에 가서… 폴투를 찾으세요. 리터너에 대한 답을 줄 겁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유진의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깜짝 놀라 유진을 붙잡으려던 순간, 하얀빛이 유진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사라졌다.
“뭐야? 연구원님! 야 유진 이 자식아!”
허공에 손을 뻗은 채로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옆에는 화수분이라고 했던 백신 배낭이 덩그러니 남았다.
뺨을 힘껏 내리쳤다. 이건 꿈이야. 꿈이어야지. 꿈이어야 돼.
짜악.
더럽게 아팠다. 꿈이 아닌가….
“하아……. 살려주려고 했으면 좀 안전한 데 데려다 놓던가.”
맥이 풀렸다. 이무기가 사람을 공격하고 어딘가 리터너가 있을 이런 곳에 혼자 남았다.
유진은 마법 뭐 그런 것도 하니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살 수 있을까?
…살아야지. 이대로 넋 놓고 죽을 순 없으니까.
근데,
“이럴 거면 주차장에서도 힘 좀 쓰지…… 개새끼가.”
우선 더 깊은 숲속, 이무기와 망치가 떨어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는 그립감 좋은 무기가 가장 중요하니까. 망치부터 확보해야 한다.
다행인지 탄내가 온 숲에 진동했다. 길을 헤매지도 않고, 탄내를 따라 이무기와 망치를 찾았다.
이무기는 온몸에 금이 간 그대로 죽어있었다.
탄내는 사체 안에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강한 불의 기운 때문인지 맹수들조차 근처에 오지 않았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크네.’
옆에 떨어져 있는 망치를 잡고 이무기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까 집채만 한 온몸에 금이 가던 장면이 너무 충격이었다.
정말 생명체가 맞는지 AI 도자기 로봇 같은 건 아닌지 지극히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이무기와 접촉한 손에 갑자기 검은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야?”
당황해 멈칫하는 순간, 일렁임이 커졌다. 주위에 알 수 없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황급히 손을 떼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이무기 안쪽에서부터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서서히 몸이 떠올랐다.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뭐야, 이렇게 이무기와 공중부양을 한다고?
아찔했다.
순간적으로 망치를 높이 들었다.
이무기든 내 손이든 박살을 내서라도 분리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패착이었다.
들어 올린 망치 위로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묠니르라더니 진짜 번개 먹는 망치였냐….
온몸에 찌릿찌릿 전류가 흘렀다. 땅으로 거세게 떨어졌다.
**
깨질듯한 두통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사방이 어두웠다.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몸 어딘가에서 낯선 감각이 콕콕 찔러왔다.
이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무기가 쓰러졌던 곳의 수풀이 듬성듬성 눌리고 망가지지 않았다면 정말 귀신에라도 씌었나 싶었을 것이다.
다만 뱃속이 이상하게 그륵그륵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인가? 배가 고파 그런가?
배낭과 망치를 챙겼다.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움직여야 했다.
리터너에 이무기에 번개까지. 오늘은 더럽게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한시라도 빨리 오늘 하루를 마감하고 싶었다.
한참 숲을 헤집었다. 이 놈의 숲은 흔한 등산로 하나가 없어?
이러다 여기서 죽겠다 싶을 즈음 작은 오솔길 하나를 발견했다.
장정 둘이 함께 걸으면 어깨를 계속 부딪쳐야 할 만큼 좁은 길이었지만 분명 누군가 다져놓은 길이었다.
어딘가 사람 사는 곳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걸으며 생각했다.
유진이 보여줬던 힘과 이무기.
그것은 유리겔라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이나 네스호의 괴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 마법이었고, 위험한 괴수였다.
괴수가 날아다니고 괴수를 쓰러뜨리는 마법이 난무하는 데다 무시무시한 감염병까지 있는 위험한 세계.
그런 세계에 홀로 내던져졌다. 내가 살아남을 확률? 피식 실소가 터졌다. 적어도 너무 적다.
유진이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 그건 누군가가 데려간 것이었다.
그렇게 데려갈 능력이면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유진을 다시 만나 한국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든, 여기서 살 방도를 찾든 하려면 어쨌든 북쪽으로 가서 유진의 지인을 만나야 겠지?
폴투라고 했던가. 그 사람을 찾자.
…그런데 뭘 하든 우선 이 숲을 벗어나야 하는데.
걸어도 걸어도 적막한 숲은 끝이 없었다.
적막한 숲?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숲이 조용하다고? 숲은 조용할 수가 없다.
산짐승이든 날짐승이든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요란할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수풀을 헤치고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먹고 울고 자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세상에 알리는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숲이다.
그런데 조용하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최상위 포식자의 등장.
숲을 조용하게 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아직 보지 못한 최상위 포식자의 들숨과 날숨이 벌써 목덜미에 와 닿는 것 같았다.
대체 이 지독한 하루는 언제 끝나……. 죽어야 끝나려나.
이젠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 망치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리터너도 보고 이무기도 만났다. 그럼에도 살아있다.
포기는 없다.
망치는 한번 내려치고 나면 회수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무조건 한 방이다. 한 방을 노려야 한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걸음마를 처음 배운 아이처럼 한 발씩 천천히 내디뎠다.
사삭.
수풀이 움직였다. 뒤쪽인가?
삭.
이번엔 왼쪽 수풀이 살짝 움직였다. 언제든 풀스윙을 당길 준비를 했다.
수풀이 확 젖혀졌다.
컹!
수풀에서 검은 물체가 뛰어올랐다.
컹이라고?
스윙을 날릴 새도 없이 개가 매달려 왔다. 검은 개.
순식간에 내 몸에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실어 왔다.
이 상태로 망치를 휘둘러봤자 내 갈비뼈만 후려치게 될 텐데, 그 전에 떼어내야 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개가 먼저 내 뺨을 핥았다. 꺼칠하지만 따뜻한 개의 혀가 뺨에 닿았다.
오랜만에 만난 반려인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몸짓. 당황스러웠다.
“뭐야?”
고개를 저으며 개를 내려다봤다. 개는 비루와 닮아 있었다.
같이 장승 앞에서 마을을 지키고, 산을 헤집고 놀았던 동네 개 비루.
동네 사람들은 그 떠돌이 개를 멍멍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비루라고 불렀다.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올 때면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게 속상해서 어디 가서 맞고 오지 말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부디 ‘범 무서운지 모르는 비루먹은 개’처럼 되라고.
그런 비루가 내가 읍내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홀연히 사라졌다.
한동안은 열심히 비루를 찾았다. 하지만 팍팍한 인생에 집 나간 개 한 마리를 오래 담을 여유가 없었다. 비루는 그렇게 흐지부지 잊혔다.
그런데 지금 여기, 다른 지구에서 비루와 너무 비슷한 개를 만나다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 너였으면 좋겠다. 비루야.”
두 손에 힘을 주어 개를 꽉 안았다. 개는 내 눈가를 연신 핥았다. 산에 올라가 남몰래 울 때마다 비루가 그랬던 것처럼.
개는 신기하게도 어디 가지도 않고 내 곁을 지켰다. 너무 지쳐서 주저앉을 만하면 멈춰선 다리를 머리로 밀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등불.
작지만 확실한 문명의 흔적이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나를 따라 개도 헥헥거렸다.
하지만 등불 쪽으로 방향을 잡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서서 개를 기다렸다. 같이 가자고.
그런데 개는 반대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더니 머리로 나의 다리를 불빛 쪽으로 밀어내고는 다시 숲속으로 휙 달려나갔다.
“비, 비루야!”
아무리 불러도 개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됐다.
하지만 살아있다. 그러니 걷는 수밖에.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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