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막처럼보이는여관
조회 : 1,022 추천 : 0 글자수 : 4,768 자 2022-09-15
5. 주막처럼보이는여관
한참 밖까지 술 마시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최소 동네 맛집이다.
‘주막처럼보이는여관’
가게 가까이 도착하자 작은 입간판이 보였다.
여관이면서 주막인가? 갑자기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해졌다.
아직 무일푼이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화수분도 있으니까. 선불만 아니면 되는데, 산 입에 거미줄 칠까.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위장이 원하는 건 확실했다.
‘딸랑’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코가 벌게서 술을 마시는 아저씨들,
테이블에 놓인 빈 그릇, 술잔을 스캔하고 확신했다.
크. 맛집이구나. 제대로 왔다.
긴장감 속에 묻혀있던 허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여기 식사 되나요?”
“…….”
“자리는 그냥 앉아도 되는지?”
“…….”
가게 안이 싸늘했다.
주인처럼 보이는 사내는 물고 있던 육포까지 떨어뜨렸다.
머쓱해져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넋을 잃고 나를 바라봤다.
넋을 잃고 볼 정도로 내가 잘생기거나 못 볼 꼴은 아니지 않나…. 다른 지구에서 온 게 티가 나는 건가? 아니면 옷이 좀 더러워서 그런가. 오만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혹시 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내가 못 알아듣고 있나 고민할 지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게 주인이 달려왔다.
“아!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이, 손님이 올 줄 몰라서. 자고 가실 거죠? 아 식사부터? 뭐 보시고 오신 건 있으시고?… 아차 없겠구나. 여긴 처음이시라. 잠깐잠깐 메뉴를 여보 메뉴판이 어디 있죠?”
허둥지둥 달려온 주인장이 다시 허둥지둥 사라지려는 찰나,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메뉴 볼 시간이 어딨나요. 지금.
“뭐든 제일 잘 나가는 식사 메뉴로. 아니 가장 빨리 나오는 거로. 양 많은 거. 부탁합니다.”
정말 다급하고 불쌍하고 빈티 나는 멘트였다.
“아이고, 급하시구먼. 그래요, 그래도 어디 아무거나 내올 수 있나. 여기 식사… 안주 말고 식사 어디 보자.”
주인장이 급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주인이 흘린 씹다만 육포에 자꾸 시선이 갔다. 저거 주워 먹으면 쪽팔려서 오늘 여기서 못 잔다. 뻗어나가려는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
“아 머리야.”
진한 숙취 속에서 눈을 떴다.
여기 주막은 막걸리가 일품이었다. 너무 신나서 주전자 2개를 싹 다 비웠더니 간밤에 어떻게 방에 올라왔는 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누가 내 뇌를 꺼내 믹서기로 갈아서 다시 넣어놓은 기분.
탁자 옆에 있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어제 막걸리를 들이부어 주던 사장은 고오달이라고 했던 것.
이 나라는 ‘발린’ 황제가 다스리는데 한글을 쓰고 한국말을 해서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아마 그래서 유진이 우리나라에 왔던 거겠지).
마을 주민들이 따뜻하게 반겨주었던 것들이 기억이 났다.
그래도 우선 뭘 먹어야 해장을 할 것 같아 기어가듯 1층에 내려가니 고오달이 아침상을 내주었다.
뱃속에 음식을 밀어 넣고 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어르신 혹시 여기 지도나 안내 책자 같은 걸 구할 수 있을까요?”
“아휴 안 그래도 내가 그런 비슷한 걸 하나 찾아놨네. 좀 오래됐긴 한데 여기 비고산맥에 잘 나와 있어.”
고오달이 꺼내놓은 뽀얗게 먼지가 앉은 책자.
[2000년도 특별기획!
발린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특별부록 비고산맥 해부]
가게 안 달력에는 2032년이라는데? 지금이 2032년인데 2000년도 책자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거저거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
책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당분간은 발린에 대해 알아볼 겸, 이 마을에 있을 요량이었다. 그러려면 마을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알아야겠지.
마을은 평범했다. 색바랜 지붕 아래 먼지가 잔뜩 쌓인 돌벽. 오랜 세월을 버텨온 단단하고 튼튼한 집들이 숲과 어우러졌다.
“안녕하세요!”
꼬마 둘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라 신기했는가 보다.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아이들을 보며 조금은 음흉한 미소를 띄워 보냈다.
“아저씨 사탕 있는데 먹어볼래?”
“오!! 사탕? 사탕!”
금세 초롱초롱해지는 아이들의 눈빛. 아주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거 그냥 꿀떡 삼키는 거야.”
아이들이 백신을 잘 삼키는 걸 보고 나서야 배낭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잡아 꺼냈다.
“우와 금화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 반짝이는 금화 두 개가 나왔다.
“예쁘다.”
“응. 반짝반짝 빛나.”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금화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처음 보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한국으로 치면 수표쯤 되려나?
어쨌든 돈을 생각하니 금화가 나왔다는 게 중요하겠지?
금화보단 금괴나 채권 이런 게 좋은데….
이곳의 화폐 단위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그새 돈은 잊고 배낭만 빤히 쳐다봤다.
“아저씨 사탕이 안 달아요. 너무 빨리 삼켰나 봐요.”
“하나 더 먹어보면 알 것 같은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약인데 너무 과용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미안, 얘들아.
“얘들아. 혹시 여기 옷 가게가 어딘지 아니?”
“옷 가게요? 우리 마을엔 없고 저기 아래 호수마을에 있어요.”
“호수마을엔 없는 게 없어요.”
“오늘 호수마을에 장이 서는 날인데. 아저씨 장에 가봤어요? 사탕도 팔아요!”
“아저씨 근데 옷이 너무 더러워요. 집이 가난해요? 금화도 있는데 이상하다.”
아이들이 옷에 묻은 피를 가리켰다. …지나치게 솔직한 아이들.
“그 옷 가게 있는 호수마을 말인데 거기 많이 머니?”
“네. 말 타고 가야 해요.”
“응? 말? 버스나 차는……?”
“그게 뭐예요?”
“……아니야 아무것도.”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의심의 눈초리로 바뀐다.
“…… 아저씨 가난한데 바보이기도 한가 봐.”
“이그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면 어떡해. 그거 나쁜 거야.”
끄응.
버스도 차도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하나.
“아저씨, 아랫마을 가고 싶어요?”
“어? 응.”
“오늘 우리 아빠 아랫마을 간댔어요. 주말에 언니가 와서 오늘 장에 돼지 팔러 가신댔거든요.”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그래? 혹시 아저씨도 같이 갈 수 있을까?”
“음, 뭐 한번 말씀드려볼게요.”
이게 웬 떡인가.
“그런데요.”
“응? 왜?”
“올 때 사탕……. 아까 그거 말고. 큰 거”
“나는 쪼코렛…….”
아…! 아이들은 계산이 명확했다. 이 나라의 장래가 밝구나….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사오기로 약속하고 아이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아이 아버지가 수레를 끌고 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휴우.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응? 같이 가고 싶다고?”
“가능할까요?”
“아! 자네 그 사람이구만? 주막 투숙객. 그러슈. 나 배이차요.”
“아, 감사합니다. 기언입니다.”
배이차가 손을 내밀었다. 투박하지만 정직한 손. 그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배이차의 웃는 눈이 선했다.
“고오달이 자네 덕분에 아주 신이 났더라고. 그래 이쪽으로 앉으슈. 궁뎅이 좀 아플 텐데 괜찮수? 방석이 하나뿐이라.”
“하하. 괜찮습니다. 매우 튼튼합니다.”
호수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엉덩이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방석도 꼭 사야겠다.
“그럼 물건 사서 여기로 오슈. 돌아갈 거는 맞소?”
“네!”
흔쾌히 답하자 배이차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고오달 막걸리 맛이 참 좋지. 호수마을에서도 그거 먹으러 우리 마을까지 온다니까.”
배이차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이따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확실히 호수마을은 장날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북적 생기가 돌았다.
호박엿 장수가 가위질 치며 돌아다니고 뻥튀기 장수도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딜 봐서 발린인가, 충북 제천 어디쯤이라고 해도 믿겠구먼….
먼저 옷 가게에 들렀다. 옷에 큰 욕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피 묻은 옷을 입고 다니면 아무래도 거부감을 줄 테니까.
당장 입을 옷가지와 추울 때 입을 옷과 더울 때 입을 옷을 한 가지씩 더 골랐다. 이건 한국의 다이내믹한 기후변화를 경험한 자의 선구안.
옷값으로 금화를 내밀자 종업원이 아래위로 한번 보더니만 뒤돌아 슬쩍 금화를 깨물었다. …내가 정말 거지꼴이긴 하지. 확인(?)을 끝낸 종업원이 은화와 동전 몇 닢을 거슬러줬다.
탈의실에서 옷부터 갈아입고 잡화점에 들렀다. 사탕하고 초콜릿을 담고 방석도 하나 골랐다. 잡화점 물건들은 저렴해서 동전 몇 닢으로 충분했다. 무엇이든 다있소 느낌.
그리고 무기상에 들렀다.
유진의 망치가 있긴 하지만 내게 가장 편한 무기는 따로 있다.
“여기 활도 있나요?”
주인은 내 손을 한번 쓰윽 보더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관상용으로 보이는 활을 꺼내왔다.
“아, 전 이것보다 좀 더 튼튼한 게 좋습니다.”
“선물용 아니오? 활을 오래 쉰 손인데?”
“다시 하려고요. 제가 연습할 활이 필요합니다.”
“…그러슈. 어떻게 마나는 좀 쓸 줄 알고?”
주인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네?”
“마법사용 찾는지 일반 궁사용 찾는지 묻는 거잖아.”
옆에서 구경 중이던 짧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대신 대답했다.
“아, 제가 마나를 쓸 줄 몰라서요.”
여자가 고개를 들고 나를 스캔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많은데?”
응?
여자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마나가 그렇게 많은데 써먹을 수 있음 좋지. 마법 겸용 기본으로 사서 연습해. 급한 대로 실전에서 쓰기 나쁘지 않을 거야. 더 고급형으로 가려면 도성 대장간에서 주문 제작하시고.”
“아,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진짜 마나를 아직…….”
여자가 안쪽 서책 코너를 눈짓했다.
“기본서는 저기.”
뭐라도 더 묻고 싶었지만, 여자는 금방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여자가 일러준 서책 코너에서 이곳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책과 마나 수련에 관한 책을 집었다. 욕심껏 다 담지는 못했다. 금화가 풍족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혹시 몰라 금은방에도 들렸는데 금괴는 금화 천 닢이라고 했다. 천 닢, 천 닢이라니. 제발 유진이 배낭에 금괴를 넣었었기를…. 매우 간절하게 바랐다.
“응? 뭐 안 샀어?”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난 배이차가 내가 그냥 배낭 하나만 메고 있자 놀란 듯했다.
그저 씨익 웃었다.
“가방 안에 넣었습니다.”
어제 자기 전 실험을 해본 결과 이 화수분 배낭은 한 번이라도 들어갔던 물건은 무한대로 꺼낼 수 있다는 것 말고도 몇 가지 특징이 더 있었다.
먼저 물건을 넣었다 꺼내는 경우, 즉 화수분이 물건을 복제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백신 횟수 제한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것처럼 배낭에 물건이 무한정 들어갔는데, 무게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행자 배낭에 시급히 도입해야 하는 기술이었다.
반면 배이차의 수레는 온갖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집에서 잔치하시나 봐요?”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묻자 배이차는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거저거 담다 보니… 좀 있으면 결혼한 큰딸이 집에 들르거든 미리 준비 좀 하려고.”
잡화점에서 산 방석을 깔고 수레에 올랐다. 막 호수마을을 벗어날 즈음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익.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우당탕탕탕.
꺄아아아아아악.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건물 안으로 골목 구석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레를 끌던 배이차는 재빨리 말을 좁은 골목 가게 그늘로 몰았다.
“젠장.”
배이차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무슨 일입니까?”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쉿, 이무기네.”
한참 밖까지 술 마시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최소 동네 맛집이다.
‘주막처럼보이는여관’
가게 가까이 도착하자 작은 입간판이 보였다.
여관이면서 주막인가? 갑자기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해졌다.
아직 무일푼이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화수분도 있으니까. 선불만 아니면 되는데, 산 입에 거미줄 칠까.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위장이 원하는 건 확실했다.
‘딸랑’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코가 벌게서 술을 마시는 아저씨들,
테이블에 놓인 빈 그릇, 술잔을 스캔하고 확신했다.
크. 맛집이구나. 제대로 왔다.
긴장감 속에 묻혀있던 허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여기 식사 되나요?”
“…….”
“자리는 그냥 앉아도 되는지?”
“…….”
가게 안이 싸늘했다.
주인처럼 보이는 사내는 물고 있던 육포까지 떨어뜨렸다.
머쓱해져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넋을 잃고 나를 바라봤다.
넋을 잃고 볼 정도로 내가 잘생기거나 못 볼 꼴은 아니지 않나…. 다른 지구에서 온 게 티가 나는 건가? 아니면 옷이 좀 더러워서 그런가. 오만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혹시 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내가 못 알아듣고 있나 고민할 지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게 주인이 달려왔다.
“아!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이, 손님이 올 줄 몰라서. 자고 가실 거죠? 아 식사부터? 뭐 보시고 오신 건 있으시고?… 아차 없겠구나. 여긴 처음이시라. 잠깐잠깐 메뉴를 여보 메뉴판이 어디 있죠?”
허둥지둥 달려온 주인장이 다시 허둥지둥 사라지려는 찰나,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메뉴 볼 시간이 어딨나요. 지금.
“뭐든 제일 잘 나가는 식사 메뉴로. 아니 가장 빨리 나오는 거로. 양 많은 거. 부탁합니다.”
정말 다급하고 불쌍하고 빈티 나는 멘트였다.
“아이고, 급하시구먼. 그래요, 그래도 어디 아무거나 내올 수 있나. 여기 식사… 안주 말고 식사 어디 보자.”
주인장이 급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주인이 흘린 씹다만 육포에 자꾸 시선이 갔다. 저거 주워 먹으면 쪽팔려서 오늘 여기서 못 잔다. 뻗어나가려는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
“아 머리야.”
진한 숙취 속에서 눈을 떴다.
여기 주막은 막걸리가 일품이었다. 너무 신나서 주전자 2개를 싹 다 비웠더니 간밤에 어떻게 방에 올라왔는 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누가 내 뇌를 꺼내 믹서기로 갈아서 다시 넣어놓은 기분.
탁자 옆에 있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어제 막걸리를 들이부어 주던 사장은 고오달이라고 했던 것.
이 나라는 ‘발린’ 황제가 다스리는데 한글을 쓰고 한국말을 해서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아마 그래서 유진이 우리나라에 왔던 거겠지).
마을 주민들이 따뜻하게 반겨주었던 것들이 기억이 났다.
그래도 우선 뭘 먹어야 해장을 할 것 같아 기어가듯 1층에 내려가니 고오달이 아침상을 내주었다.
뱃속에 음식을 밀어 넣고 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어르신 혹시 여기 지도나 안내 책자 같은 걸 구할 수 있을까요?”
“아휴 안 그래도 내가 그런 비슷한 걸 하나 찾아놨네. 좀 오래됐긴 한데 여기 비고산맥에 잘 나와 있어.”
고오달이 꺼내놓은 뽀얗게 먼지가 앉은 책자.
[2000년도 특별기획!
발린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특별부록 비고산맥 해부]
가게 안 달력에는 2032년이라는데? 지금이 2032년인데 2000년도 책자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거저거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
책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당분간은 발린에 대해 알아볼 겸, 이 마을에 있을 요량이었다. 그러려면 마을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알아야겠지.
마을은 평범했다. 색바랜 지붕 아래 먼지가 잔뜩 쌓인 돌벽. 오랜 세월을 버텨온 단단하고 튼튼한 집들이 숲과 어우러졌다.
“안녕하세요!”
꼬마 둘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라 신기했는가 보다.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아이들을 보며 조금은 음흉한 미소를 띄워 보냈다.
“아저씨 사탕 있는데 먹어볼래?”
“오!! 사탕? 사탕!”
금세 초롱초롱해지는 아이들의 눈빛. 아주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거 그냥 꿀떡 삼키는 거야.”
아이들이 백신을 잘 삼키는 걸 보고 나서야 배낭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잡아 꺼냈다.
“우와 금화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 반짝이는 금화 두 개가 나왔다.
“예쁘다.”
“응. 반짝반짝 빛나.”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금화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처음 보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한국으로 치면 수표쯤 되려나?
어쨌든 돈을 생각하니 금화가 나왔다는 게 중요하겠지?
금화보단 금괴나 채권 이런 게 좋은데….
이곳의 화폐 단위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그새 돈은 잊고 배낭만 빤히 쳐다봤다.
“아저씨 사탕이 안 달아요. 너무 빨리 삼켰나 봐요.”
“하나 더 먹어보면 알 것 같은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약인데 너무 과용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미안, 얘들아.
“얘들아. 혹시 여기 옷 가게가 어딘지 아니?”
“옷 가게요? 우리 마을엔 없고 저기 아래 호수마을에 있어요.”
“호수마을엔 없는 게 없어요.”
“오늘 호수마을에 장이 서는 날인데. 아저씨 장에 가봤어요? 사탕도 팔아요!”
“아저씨 근데 옷이 너무 더러워요. 집이 가난해요? 금화도 있는데 이상하다.”
아이들이 옷에 묻은 피를 가리켰다. …지나치게 솔직한 아이들.
“그 옷 가게 있는 호수마을 말인데 거기 많이 머니?”
“네. 말 타고 가야 해요.”
“응? 말? 버스나 차는……?”
“그게 뭐예요?”
“……아니야 아무것도.”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의심의 눈초리로 바뀐다.
“…… 아저씨 가난한데 바보이기도 한가 봐.”
“이그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면 어떡해. 그거 나쁜 거야.”
끄응.
버스도 차도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하나.
“아저씨, 아랫마을 가고 싶어요?”
“어? 응.”
“오늘 우리 아빠 아랫마을 간댔어요. 주말에 언니가 와서 오늘 장에 돼지 팔러 가신댔거든요.”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그래? 혹시 아저씨도 같이 갈 수 있을까?”
“음, 뭐 한번 말씀드려볼게요.”
이게 웬 떡인가.
“그런데요.”
“응? 왜?”
“올 때 사탕……. 아까 그거 말고. 큰 거”
“나는 쪼코렛…….”
아…! 아이들은 계산이 명확했다. 이 나라의 장래가 밝구나….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사오기로 약속하고 아이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아이 아버지가 수레를 끌고 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휴우.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응? 같이 가고 싶다고?”
“가능할까요?”
“아! 자네 그 사람이구만? 주막 투숙객. 그러슈. 나 배이차요.”
“아, 감사합니다. 기언입니다.”
배이차가 손을 내밀었다. 투박하지만 정직한 손. 그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배이차의 웃는 눈이 선했다.
“고오달이 자네 덕분에 아주 신이 났더라고. 그래 이쪽으로 앉으슈. 궁뎅이 좀 아플 텐데 괜찮수? 방석이 하나뿐이라.”
“하하. 괜찮습니다. 매우 튼튼합니다.”
호수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엉덩이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방석도 꼭 사야겠다.
“그럼 물건 사서 여기로 오슈. 돌아갈 거는 맞소?”
“네!”
흔쾌히 답하자 배이차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고오달 막걸리 맛이 참 좋지. 호수마을에서도 그거 먹으러 우리 마을까지 온다니까.”
배이차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이따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확실히 호수마을은 장날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북적 생기가 돌았다.
호박엿 장수가 가위질 치며 돌아다니고 뻥튀기 장수도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딜 봐서 발린인가, 충북 제천 어디쯤이라고 해도 믿겠구먼….
먼저 옷 가게에 들렀다. 옷에 큰 욕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피 묻은 옷을 입고 다니면 아무래도 거부감을 줄 테니까.
당장 입을 옷가지와 추울 때 입을 옷과 더울 때 입을 옷을 한 가지씩 더 골랐다. 이건 한국의 다이내믹한 기후변화를 경험한 자의 선구안.
옷값으로 금화를 내밀자 종업원이 아래위로 한번 보더니만 뒤돌아 슬쩍 금화를 깨물었다. …내가 정말 거지꼴이긴 하지. 확인(?)을 끝낸 종업원이 은화와 동전 몇 닢을 거슬러줬다.
탈의실에서 옷부터 갈아입고 잡화점에 들렀다. 사탕하고 초콜릿을 담고 방석도 하나 골랐다. 잡화점 물건들은 저렴해서 동전 몇 닢으로 충분했다. 무엇이든 다있소 느낌.
그리고 무기상에 들렀다.
유진의 망치가 있긴 하지만 내게 가장 편한 무기는 따로 있다.
“여기 활도 있나요?”
주인은 내 손을 한번 쓰윽 보더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관상용으로 보이는 활을 꺼내왔다.
“아, 전 이것보다 좀 더 튼튼한 게 좋습니다.”
“선물용 아니오? 활을 오래 쉰 손인데?”
“다시 하려고요. 제가 연습할 활이 필요합니다.”
“…그러슈. 어떻게 마나는 좀 쓸 줄 알고?”
주인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네?”
“마법사용 찾는지 일반 궁사용 찾는지 묻는 거잖아.”
옆에서 구경 중이던 짧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대신 대답했다.
“아, 제가 마나를 쓸 줄 몰라서요.”
여자가 고개를 들고 나를 스캔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많은데?”
응?
여자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마나가 그렇게 많은데 써먹을 수 있음 좋지. 마법 겸용 기본으로 사서 연습해. 급한 대로 실전에서 쓰기 나쁘지 않을 거야. 더 고급형으로 가려면 도성 대장간에서 주문 제작하시고.”
“아,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진짜 마나를 아직…….”
여자가 안쪽 서책 코너를 눈짓했다.
“기본서는 저기.”
뭐라도 더 묻고 싶었지만, 여자는 금방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여자가 일러준 서책 코너에서 이곳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책과 마나 수련에 관한 책을 집었다. 욕심껏 다 담지는 못했다. 금화가 풍족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혹시 몰라 금은방에도 들렸는데 금괴는 금화 천 닢이라고 했다. 천 닢, 천 닢이라니. 제발 유진이 배낭에 금괴를 넣었었기를…. 매우 간절하게 바랐다.
“응? 뭐 안 샀어?”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난 배이차가 내가 그냥 배낭 하나만 메고 있자 놀란 듯했다.
그저 씨익 웃었다.
“가방 안에 넣었습니다.”
어제 자기 전 실험을 해본 결과 이 화수분 배낭은 한 번이라도 들어갔던 물건은 무한대로 꺼낼 수 있다는 것 말고도 몇 가지 특징이 더 있었다.
먼저 물건을 넣었다 꺼내는 경우, 즉 화수분이 물건을 복제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백신 횟수 제한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것처럼 배낭에 물건이 무한정 들어갔는데, 무게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행자 배낭에 시급히 도입해야 하는 기술이었다.
반면 배이차의 수레는 온갖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집에서 잔치하시나 봐요?”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묻자 배이차는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거저거 담다 보니… 좀 있으면 결혼한 큰딸이 집에 들르거든 미리 준비 좀 하려고.”
잡화점에서 산 방석을 깔고 수레에 올랐다. 막 호수마을을 벗어날 즈음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익.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우당탕탕탕.
꺄아아아아아악.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건물 안으로 골목 구석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레를 끌던 배이차는 재빨리 말을 좁은 골목 가게 그늘로 몰았다.
“젠장.”
배이차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무슨 일입니까?”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쉿, 이무기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