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이 멸망했다.
조회 : 1,017 추천 : 0 글자수 : 5,006 자 2022-09-01
1. 세상이 멸망했다.
“이도건 씨? 김선자 씨 보호자 되시죠? 여기 성모병원이에요.”
“네. 어제 병원비 입금했는데……요.”
도건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혹시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병원에 도착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뗐다.
마지막 남은 가족이자 도건의 하나뿐인 친구였던 할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도건의 유일한 세상은 그렇게 멸망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지켜야 할 사람도, 가족도 없으니까. 세상에 맞추려고 했던 노력들을 더 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도건은 그냥 생긴대로 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퇴사를 해버렸다.
그런데 사직서를 구두로 제출하고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조문을 왔다.
사람 쫓아내기로 유명한 유진 연구원.
유진은 우리 팀원들을 모두 쫓아내다시피 한 능력자 동료이자(여러모로), 도건이 회사를 그만두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반가울 리가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유진은 남의 장례식장에 와서 다짜고짜 헛소리를 늘어놨다.
“이 대리! 퇴사하면 안 됩니다.”
“네.”
헛소리엔 영혼 없는 대답이 국룰이지.
“정말입니다. 세상이 멸망… 좀비들이… 그러니까 나타날 겁니다.”
“그렇구나. ……네?”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어 쳐다보니 유진이 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개발한 신약이 그 병을 예방하는 백신이란 말입니다.”
“다이어트 변비약이요?”
풉. 도건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웃으려고 한 게 아니……진 않군요. 네. 솔직히 웃겼습니다. 연구원님, 이번에 꼭 인센티브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파이팅!”
“이 사람이 정말. 진짜예요. 위험하다고요. 우리 팀에 이 대리하고 나밖에 없잖습니까. 도와주세요. 돈 필요하지 않습니까? 달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유진은 모바일 뱅킹을 열어 계좌까지 보여줬다.
미친놈, 갑자기 계좌를 까고…….
역시 미친 짓도 다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공이 몇 개야. 100억? 역시 미친놈이다. 저 돈으로 일을 왜 해. 놀아야지.
도건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유진은 한 번 더 강조했다.
“필요한 만큼 드리죠.”
필요한 만큼이라….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돈 많이 필요해요….
물론 돈은 있으면 좋다. 좋은데… 좀비라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거 보니, 유진 이자식 기어이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게 틀림없다. 그런 사람을 등쳐먹었다간 후환이 남겠지. 역시 괜히 얽혀서 좋은 일 없을 사람이다.
“…됐고요. 오셨으니까 육개장이나 드시고 가세요.”
“내 말 믿게 될 겁니다. 난 회사로 갑니다. 회사로 신약이 오고 있어서…. 상황 파악되면 그리 오세요.”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 ‘개평 줘라’ ‘못 준다’ 흔한 장례식 풍경을 멍하니 구경하는 데 문자가 하나 왔다. 재난 알림 문자였다.
이 시간에?
‘긴급 재난 경보.
위험한 전염병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감염자와 접촉을 피하시고
외부와 차단된 안전한 공간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염병? 이미 인류는 코로나 이후 수많은 감염병을 겪었다.
바이러스가 나타나고 치료 약이 나오고 내성이 생긴 더 강한 바이러스가 나오고 더 독한 치료 약이 나오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일상이었는데 새삼스럽게?
아무래도 선거철 다가오니까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 윗 대가리들 하는 게 다 그렇지.
그때였다.
누군가 창밖을 가리켰다.
“어? 저게 뭐야?”
목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사람이었다.
목에 저렇게 피를 흘리는데 어떻게 걷지? 이상하던 찰나, 누군가 피를 보고 놀라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이 구하려던 이에게 목을 물어 뜯겼다.
너무나 당혹스럽고 처참한 광경.
체격 좋은 청년 몇이 재빨리 물어뜯는 남자를 잡고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섰다.
마약중독자인가?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다.
“여보세요? 아 112죠. 여기 성모병원 장례식장인데요. 어떤 사람이 목에 피를 흘리면서 나타났는데 다른 사람을… 네? 잠시만요. 감염자? 대피하라고요?”
쓰러졌던 사람이 몸을 괴기스럽게 뒤틀더니 일어났다.
장례식장이 조용해졌다.
순식간이었다. 물고 물리고, 한 무더기의 사람이 피 흘리며 쓰러졌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쓰러졌던 청년이 몸을 이상하게 뒤틀며 일어설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청년은 동공이 사라진 이상한 눈으로 식장 안을 바라봤다.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도망쳤다.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소화기를 들고 뛰었다.
생각해야 해 생각. 생각. 생각.
긴급 재난. 감염병. 대피. …유진!
유진 그 자식은 뭔가 알고 있었다.
한참 달리다 급한 대로 쓰레기통 안에 몸을 던졌다.
지독한 냄새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지만, 우선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염자, 아니 유진 연구원 말에 의하면 리터너였지. 아무튼 그들을 피해야 했다.
‘최악의 감염병 리턴 바이러스… 전세계 동시다발적 발생’
‘군 “데프콘 3 발령… 데프콘 2 격상 논의 중”’
쓰레기통 안에서 기사 몇 개를 훑었다. 이곳만이 아니었구나.
대체 유진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결벽증이 있고, 히스테리를 부려서 그렇지, 없는 소리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제 조금 더 귀 기울여 들어볼걸. 자책했다.
유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일ㄹ단 회사로. 회사에서 군’
급하게 친 건지 오타가 난 문자는 뒷부분이 잘려져 있었다.
‘연구원님, 신약이 예방만 도비니까?’
‘군부대가 회사로 온다ㄱ고요?’
‘야이. 답을 하라고.’
오타 수정할 새도 없이 메시지를 연속으로 계속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젠장. 군부대가 회사로 온다는 건가?
군이 회사로 온다면 회사가 가장 안전하다. 돈도 준다고 했고.
젠장 돈. 세상이 쫄딱 망하게 생겼는데 돈이 중요할까? 아냐.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 10억만 달라고 해볼까.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1/10 정도는 내 목숨값으로 받을 만한 거 아냐?
우선 여기가 경찰서 앞 사거리니까 30분만 더 뛰면 회사다.
경찰서엔 총이 있을 거고. 그래 총을 얻으면 살 수 있다. 리터너 무리가 지나가면 무기부터 얻자.
“… 번 말씀드립니다. 지… 모… 련이 아닌… 니다. …장 긴… 치이… 치이이익.”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과 방송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살짝 쓰레기통 문을 열자 빛이 들어왔다.
잠깐.
순간 멈칫했다. 옆에 누군가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옆에 누가 있는 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소화기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애써 힘을 풀며 생각했다. 리터너였다면 벌써 나를 물었을 거야.
“누구…?”
“아저씨 살려주세요.”
아이였다. 12살이나 됐을까. 핏자국은 없었다. 다행이다. 확실히 감염자는 아니다.
“괜찮니? 왜 혼자야?”
“옆집 아저씨가 갑자기 와서… 엄마가 나 먼저 나가라고… 그랬는데 어떤 형이 여기 들어가라고.”
드문드문 이야기하는 아이.
낭패다. 어떻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지… 하지만 여기에 두고 가는 건 아이를 죽이고 가는 것보다 잔인한 짓이겠지.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쓰레기통에서 나와 아이를 집에 보내기로 했다. 가족이나 친지가 데리러 올 수도 있을 테니까.
“저기 골목만 돌면… 아… 아저씨.”
아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불길한 예감에 소화기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옆집…… 옆집 아저씨.”
옆집 아저씨라고 불린 남자는 아까 장례식장에서 우릴 쳐다보던 청년처럼 동공이 없었다. 리터너였다.
이미 누군가의 목을 뜯었는지 입가엔 피가 묻어 있었다.
그으으억.
“오지 마세요. 오면 칩니다. 오지 마세요.”
아이와 함께라 도망가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남자에게 소화기를 휘둘렀다.
빠각.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 피가 튀었다. 그러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오른손에 든 소화기로 남자의 뒤통수를 감정 없는 기계처럼 계속 후려치고 있었다. 후각을 마비시킬 듯한 피 냄새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만…그만 해요. 아저씨.”
아이가 내 왼손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아이의 축축한 눈물.
아. 그래.
사람을 죽이고 있었지.
손이 자꾸 떨려서 소화기를 놓칠까 봐 힘을 꽉 쥐었다.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아.”
물론 괜찮지 않다. 그저 희망사항.
“집이 어디라고 했지? 가자, 바래다줄게.”
그때, 맞은편 도로에서 누군가 외쳤다.
“재민아!”
“엄마!”
엄마 목소리를 알아들은 아이가 엄마에게로 달렸다.
부디 살아남으렴. 눈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난 아직 더 가야 했다.
다음에 마주친 사람은 복부에서 피가 쏟아지던 경찰이었다.
손에 총을 들고 전신주에 기대앉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괜찮습니까?”
다급하게 다가서는데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남자는 바닥으로 총을 밀어주었다.
“…난 이제… 필요 없어서.”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라고, 살 수 있다고 희망을 품으라고 할 수 없었다.
“…한 명이라도 살아…. 부디….”
남자의 숨이 끊어졌다.
그르르르.
남자가 금세 리터너로 변했다.
총을 줍고 남자가 일어나기 전에 소화기를 내려쳤다.
남자의 얼굴 뼈가 함몰됐다. …이번엔 눈물이 핑 돌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피를 머금은 소화기가 갈수록 무거워지는 듯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상황은 모의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 긴급 대피하십시오.”
고장 난 앵무새처럼 방송이 되풀이됐다.
회사로 향하는 동안 리터너 몇을 더 만났지만, 생존자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부디 어딘가 잘 숨어있는 것이기를, 다 죽은 게 아니기를 바랐다.
‘어디? 지금 약 챙겨서 1층’
기다렸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아. 살아있었구나.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다행이다. 그래, 그냥 죽을 놈은 아니지. 악역은 쉽게 죽지 않는 법.
유진은 이미 오래전에 이 병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백신까지 만들었겠지. 만나서 묻자. 돈 받아 대출금도 갚고, 군에 보호도 요청하자, 안 되겠다 싶으면 도로 입대하지 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약 넣은 가방입니다. 메요.”
회사에 도착하자 유진은 다짜고짜 신약 가방부터 건넸다.
“군은요. 어디 있습니까?”
군부대가 어디 수색 중인가 해서 좌우를 살폈다.
“수도방위사령부까지 갑시다. 이 약을 사령부에 전달할 수만 있다면 바이러스의 확산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물려서 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
“아니, 우리 둘이? 야, 이….”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애초에 우리가 백신 만든 걸 군이 어떻게 알고 오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잠깐 그러면 어떻게 이 병을 알고 백신을 만든 겁니까?”
유진이 고민하다 입을 뗐다.
“리턴 바이러스입니다.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했던 문제이고, 전 그 솔루션을 위해 어떤 권력에 의해 여기에 배정받은 거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배정? 위장취업이다 그런 겁니까?”
“…비슷하죠?”
그게 말이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저런 좀비 같은 것들이 나돌아다니는 현상도 말이 안 되긴 매한가지였다.
“언제부터? 어디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건 저도 잘, 그저 저는 미션을 받아 여기 온 게 답니다.”
하아. 모르는 건지, 설명하기 싫은 건지.
“백신 효과는 확실합니까?”
“네, 임상실험 마쳤습니다.”
“임상실험까지 했다고요?”
“네, 실험체 A와 B 모두 멀쩡하더군요.”
유진이 손가락으로 유진과 나를 가리켰다.
……이제 하다 하다 허락도 없이 생체실험도 했다고? 그래서 그렇게 간곡하게 회사에 돌아오라 했구나. 개새끼 진짜.
“이도건 씨? 김선자 씨 보호자 되시죠? 여기 성모병원이에요.”
“네. 어제 병원비 입금했는데……요.”
도건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혹시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병원에 도착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뗐다.
마지막 남은 가족이자 도건의 하나뿐인 친구였던 할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도건의 유일한 세상은 그렇게 멸망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지켜야 할 사람도, 가족도 없으니까. 세상에 맞추려고 했던 노력들을 더 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도건은 그냥 생긴대로 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퇴사를 해버렸다.
그런데 사직서를 구두로 제출하고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조문을 왔다.
사람 쫓아내기로 유명한 유진 연구원.
유진은 우리 팀원들을 모두 쫓아내다시피 한 능력자 동료이자(여러모로), 도건이 회사를 그만두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반가울 리가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유진은 남의 장례식장에 와서 다짜고짜 헛소리를 늘어놨다.
“이 대리! 퇴사하면 안 됩니다.”
“네.”
헛소리엔 영혼 없는 대답이 국룰이지.
“정말입니다. 세상이 멸망… 좀비들이… 그러니까 나타날 겁니다.”
“그렇구나. ……네?”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어 쳐다보니 유진이 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개발한 신약이 그 병을 예방하는 백신이란 말입니다.”
“다이어트 변비약이요?”
풉. 도건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웃으려고 한 게 아니……진 않군요. 네. 솔직히 웃겼습니다. 연구원님, 이번에 꼭 인센티브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파이팅!”
“이 사람이 정말. 진짜예요. 위험하다고요. 우리 팀에 이 대리하고 나밖에 없잖습니까. 도와주세요. 돈 필요하지 않습니까? 달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유진은 모바일 뱅킹을 열어 계좌까지 보여줬다.
미친놈, 갑자기 계좌를 까고…….
역시 미친 짓도 다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공이 몇 개야. 100억? 역시 미친놈이다. 저 돈으로 일을 왜 해. 놀아야지.
도건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유진은 한 번 더 강조했다.
“필요한 만큼 드리죠.”
필요한 만큼이라….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돈 많이 필요해요….
물론 돈은 있으면 좋다. 좋은데… 좀비라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거 보니, 유진 이자식 기어이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게 틀림없다. 그런 사람을 등쳐먹었다간 후환이 남겠지. 역시 괜히 얽혀서 좋은 일 없을 사람이다.
“…됐고요. 오셨으니까 육개장이나 드시고 가세요.”
“내 말 믿게 될 겁니다. 난 회사로 갑니다. 회사로 신약이 오고 있어서…. 상황 파악되면 그리 오세요.”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 ‘개평 줘라’ ‘못 준다’ 흔한 장례식 풍경을 멍하니 구경하는 데 문자가 하나 왔다. 재난 알림 문자였다.
이 시간에?
‘긴급 재난 경보.
위험한 전염병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감염자와 접촉을 피하시고
외부와 차단된 안전한 공간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염병? 이미 인류는 코로나 이후 수많은 감염병을 겪었다.
바이러스가 나타나고 치료 약이 나오고 내성이 생긴 더 강한 바이러스가 나오고 더 독한 치료 약이 나오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일상이었는데 새삼스럽게?
아무래도 선거철 다가오니까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 윗 대가리들 하는 게 다 그렇지.
그때였다.
누군가 창밖을 가리켰다.
“어? 저게 뭐야?”
목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사람이었다.
목에 저렇게 피를 흘리는데 어떻게 걷지? 이상하던 찰나, 누군가 피를 보고 놀라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이 구하려던 이에게 목을 물어 뜯겼다.
너무나 당혹스럽고 처참한 광경.
체격 좋은 청년 몇이 재빨리 물어뜯는 남자를 잡고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섰다.
마약중독자인가?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다.
“여보세요? 아 112죠. 여기 성모병원 장례식장인데요. 어떤 사람이 목에 피를 흘리면서 나타났는데 다른 사람을… 네? 잠시만요. 감염자? 대피하라고요?”
쓰러졌던 사람이 몸을 괴기스럽게 뒤틀더니 일어났다.
장례식장이 조용해졌다.
순식간이었다. 물고 물리고, 한 무더기의 사람이 피 흘리며 쓰러졌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쓰러졌던 청년이 몸을 이상하게 뒤틀며 일어설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청년은 동공이 사라진 이상한 눈으로 식장 안을 바라봤다.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도망쳤다.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소화기를 들고 뛰었다.
생각해야 해 생각. 생각. 생각.
긴급 재난. 감염병. 대피. …유진!
유진 그 자식은 뭔가 알고 있었다.
한참 달리다 급한 대로 쓰레기통 안에 몸을 던졌다.
지독한 냄새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지만, 우선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염자, 아니 유진 연구원 말에 의하면 리터너였지. 아무튼 그들을 피해야 했다.
‘최악의 감염병 리턴 바이러스… 전세계 동시다발적 발생’
‘군 “데프콘 3 발령… 데프콘 2 격상 논의 중”’
쓰레기통 안에서 기사 몇 개를 훑었다. 이곳만이 아니었구나.
대체 유진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결벽증이 있고, 히스테리를 부려서 그렇지, 없는 소리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제 조금 더 귀 기울여 들어볼걸. 자책했다.
유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일ㄹ단 회사로. 회사에서 군’
급하게 친 건지 오타가 난 문자는 뒷부분이 잘려져 있었다.
‘연구원님, 신약이 예방만 도비니까?’
‘군부대가 회사로 온다ㄱ고요?’
‘야이. 답을 하라고.’
오타 수정할 새도 없이 메시지를 연속으로 계속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젠장. 군부대가 회사로 온다는 건가?
군이 회사로 온다면 회사가 가장 안전하다. 돈도 준다고 했고.
젠장 돈. 세상이 쫄딱 망하게 생겼는데 돈이 중요할까? 아냐.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 10억만 달라고 해볼까.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1/10 정도는 내 목숨값으로 받을 만한 거 아냐?
우선 여기가 경찰서 앞 사거리니까 30분만 더 뛰면 회사다.
경찰서엔 총이 있을 거고. 그래 총을 얻으면 살 수 있다. 리터너 무리가 지나가면 무기부터 얻자.
“… 번 말씀드립니다. 지… 모… 련이 아닌… 니다. …장 긴… 치이… 치이이익.”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과 방송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살짝 쓰레기통 문을 열자 빛이 들어왔다.
잠깐.
순간 멈칫했다. 옆에 누군가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옆에 누가 있는 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소화기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애써 힘을 풀며 생각했다. 리터너였다면 벌써 나를 물었을 거야.
“누구…?”
“아저씨 살려주세요.”
아이였다. 12살이나 됐을까. 핏자국은 없었다. 다행이다. 확실히 감염자는 아니다.
“괜찮니? 왜 혼자야?”
“옆집 아저씨가 갑자기 와서… 엄마가 나 먼저 나가라고… 그랬는데 어떤 형이 여기 들어가라고.”
드문드문 이야기하는 아이.
낭패다. 어떻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지… 하지만 여기에 두고 가는 건 아이를 죽이고 가는 것보다 잔인한 짓이겠지.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쓰레기통에서 나와 아이를 집에 보내기로 했다. 가족이나 친지가 데리러 올 수도 있을 테니까.
“저기 골목만 돌면… 아… 아저씨.”
아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불길한 예감에 소화기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옆집…… 옆집 아저씨.”
옆집 아저씨라고 불린 남자는 아까 장례식장에서 우릴 쳐다보던 청년처럼 동공이 없었다. 리터너였다.
이미 누군가의 목을 뜯었는지 입가엔 피가 묻어 있었다.
그으으억.
“오지 마세요. 오면 칩니다. 오지 마세요.”
아이와 함께라 도망가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남자에게 소화기를 휘둘렀다.
빠각.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 피가 튀었다. 그러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오른손에 든 소화기로 남자의 뒤통수를 감정 없는 기계처럼 계속 후려치고 있었다. 후각을 마비시킬 듯한 피 냄새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만…그만 해요. 아저씨.”
아이가 내 왼손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아이의 축축한 눈물.
아. 그래.
사람을 죽이고 있었지.
손이 자꾸 떨려서 소화기를 놓칠까 봐 힘을 꽉 쥐었다.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아.”
물론 괜찮지 않다. 그저 희망사항.
“집이 어디라고 했지? 가자, 바래다줄게.”
그때, 맞은편 도로에서 누군가 외쳤다.
“재민아!”
“엄마!”
엄마 목소리를 알아들은 아이가 엄마에게로 달렸다.
부디 살아남으렴. 눈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난 아직 더 가야 했다.
다음에 마주친 사람은 복부에서 피가 쏟아지던 경찰이었다.
손에 총을 들고 전신주에 기대앉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괜찮습니까?”
다급하게 다가서는데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남자는 바닥으로 총을 밀어주었다.
“…난 이제… 필요 없어서.”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라고, 살 수 있다고 희망을 품으라고 할 수 없었다.
“…한 명이라도 살아…. 부디….”
남자의 숨이 끊어졌다.
그르르르.
남자가 금세 리터너로 변했다.
총을 줍고 남자가 일어나기 전에 소화기를 내려쳤다.
남자의 얼굴 뼈가 함몰됐다. …이번엔 눈물이 핑 돌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피를 머금은 소화기가 갈수록 무거워지는 듯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상황은 모의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 긴급 대피하십시오.”
고장 난 앵무새처럼 방송이 되풀이됐다.
회사로 향하는 동안 리터너 몇을 더 만났지만, 생존자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부디 어딘가 잘 숨어있는 것이기를, 다 죽은 게 아니기를 바랐다.
‘어디? 지금 약 챙겨서 1층’
기다렸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아. 살아있었구나.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다행이다. 그래, 그냥 죽을 놈은 아니지. 악역은 쉽게 죽지 않는 법.
유진은 이미 오래전에 이 병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백신까지 만들었겠지. 만나서 묻자. 돈 받아 대출금도 갚고, 군에 보호도 요청하자, 안 되겠다 싶으면 도로 입대하지 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약 넣은 가방입니다. 메요.”
회사에 도착하자 유진은 다짜고짜 신약 가방부터 건넸다.
“군은요. 어디 있습니까?”
군부대가 어디 수색 중인가 해서 좌우를 살폈다.
“수도방위사령부까지 갑시다. 이 약을 사령부에 전달할 수만 있다면 바이러스의 확산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물려서 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
“아니, 우리 둘이? 야, 이….”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애초에 우리가 백신 만든 걸 군이 어떻게 알고 오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잠깐 그러면 어떻게 이 병을 알고 백신을 만든 겁니까?”
유진이 고민하다 입을 뗐다.
“리턴 바이러스입니다.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했던 문제이고, 전 그 솔루션을 위해 어떤 권력에 의해 여기에 배정받은 거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배정? 위장취업이다 그런 겁니까?”
“…비슷하죠?”
그게 말이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저런 좀비 같은 것들이 나돌아다니는 현상도 말이 안 되긴 매한가지였다.
“언제부터? 어디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건 저도 잘, 그저 저는 미션을 받아 여기 온 게 답니다.”
하아. 모르는 건지, 설명하기 싫은 건지.
“백신 효과는 확실합니까?”
“네, 임상실험 마쳤습니다.”
“임상실험까지 했다고요?”
“네, 실험체 A와 B 모두 멀쩡하더군요.”
유진이 손가락으로 유진과 나를 가리켰다.
……이제 하다 하다 허락도 없이 생체실험도 했다고? 그래서 그렇게 간곡하게 회사에 돌아오라 했구나. 개새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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