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리터너가 있는데 이무기도 있는 지구
조회 : 639 추천 : 0 글자수 : 4,609 자 2022-09-08
3. 리터너가 있는데 이무기도 있는 지구
유진이 최대한 옆으로 차를 붙여왔다. 그러면서도 귀신같이 속도를 유지했다. 운전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옵니까? 내일 오는 줄 알았…악!…잖아요.”
숨이 턱까지 차서는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뒤쪽의 달리는 리터너 무리 속에서 푸른 원피스의 리터너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왼발을 붙잡고 늘어지며 입을 크게 벌렸다.
이빨이 발에 닿기 직전 두 팔로 문을 강하게 잡고 체중을 오른발에 실었다.
퍽.
온 힘을 다해 리터너를 찼다. 신발에 걸린 리터너의 이가 우수수수 떨어져 나갔다. 리터너도 함께 떨어져 땅을 굴렀다.
“부디 치아 보험 들으셨기를!”
재빨리 문을 닫았다. 창밖으로 방금 몸싸움에 휘말렸던 리터너들이 몸을 뒤틀며 다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갑시다!”
유진의 핸들링은 기가 막혔다. 전직 마을버스 운전기사였다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대체 부산 시내 운전을 얼마나 자주 한 겁니까?”
“쉬는 날마다?”
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 운전 좀 한다 할 수 있지.
유진은 부산의 택시 드라이버와 같은 현란한 운전 솜씨를 선보였다.
리터너들을 모두 피해 건물 밖으로 차가 빠져나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유진이 비어있는 내 손을 힐끗 보았다.
“뒷좌석 아래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 한번 보시죠.”
“왜요?”
“거기 묠니르가 있습니다.”
“응? 토르 망치?”
그게 무슨….
“제 망치예요. 단언컨대 망치 계의 명품입니다. 특별 제작한 건데 이렇게 쓸 줄이야.”
유진이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멸망한 세계에선 그립감 좋은 무기가 최고 아닙니까?”
아… 그건 맞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난 절대 그 묠……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그립감 좋은 무기는 매우 중요하니까. 후려치는 데는 망치가 소화기보다는 낫지.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소화기가 타격감은 좋지만 뭔가를 박살내는 용도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설렌 마음을 안고 뒷좌석을 향해 몸을 틀었다.
끼이이이이익.
그런데 갑자기 유진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쿵.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뒷좌석 아래에 머리를 박았다.
눈앞에 별이 보였다.
……혹시 엿 먹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뭡니…와이 씨…….”
소리를 지르며 앞을 봤다. 일순 말을 잃었다.
교차로 앞 2층 광역 버스, 멸망한 세계의 만원 버스에서 승객들이 하차를 준비 중이었다.
버스 안 리터너들은 최소 하루는 갇혀 있었던 것 같았다.
서로를 뜯어먹었는지 모두 군데 군데 살점이 떨어져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창밖에 싱싱한 찬거리들이 도망 다니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봤던 모양이다.
그러니 약이 오를 대로 올랐을 텐데 여기 싱싱한 도시락이 다시 나타났으니…….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굶고 야식으로 치킨을 배달시킨 것 같은 기분이랑 비슷할까?
흥분한 승객 리터너들이 미친 듯이 버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만원 버스.
뒤쪽으로도 탈출할 수는 없었다. 뒤쪽 도로는 이미 움직이는 차를 따라 쉼 없이 달려오는 리터너들로 가득했으니까.
‘이대로는 여기 고립된다.’
리터너로 가득한 이곳에서의 고립은 죽음을 의미했다.
어떻게든 길을 뚫어야 한다.
“버스 앞 사거리로 좌회전합시다.”
재빨리 뒷좌석으로 넘어가 백신 배낭을 다시 메고 망치를 꺼냈다.
유진은 액셀을 밟았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머뭇거린 짧은 시간 동안,
흥분한 리터너 승객들은 원하는 만큼 버스를 흔들었다.
콰콰쾅.
유진의 차가 사거리에서 좌회전하기 직전, 기어이 버스가 옆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깨져 나가는 버스의 창.
리터너 승객들은 과격하게 몸부림치며 버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유진은 끝까지 핸들을 붙잡고 돌파구를 찾았지만, 리터너들은 너무 많았고 무척 빨랐다.
무작정 달려든 리터너들이 한꺼번에 앞바퀴 밑에 깔리자 차가 들리며 멈춰 섰다.
리터너들은 곧장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창에, 천장 위에 달라붙었다. 때맞춰 뒤쪽의 리터너 떼도 속속 도착했다.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한 파티였다.
우린 그 파티의 메인요리였다.
어떻게든 차 밖으로 나갈 기회를 잡아 보려고 창밖을 봤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아쉬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망치를 제대로 못 써본 거라고 답할 것 같다.
“그립감이 얼마나 좋은지 느껴보고 싶었는데.”
운전 한번 못 해본 수퍼카를 헐값에 강매당한 기분.
우지끈.
차 천장이 내려앉았다. 이제 차는 리터너들에게 완전히 가려졌다. 햇빛조차 보이지 않았고, 산소까지 부족한 느낌이었다.
압사의 공포가 스멀스멀 뇌를 장악했다.
천장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퍽.
차창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급박한 상황에 유진이 물었다.
“살 수 있다면 다른 지구라도 가겠습니까?”
다른 지구? 살 수만 있다면 혹성이라도 갈 판인데 지구면 땡큐지.
허탈한 웃음이 새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답니다. 살 수 있으면 당연히 가야죠.”
끼기긱.
마침내 차창이 모두 깨지면서 천장이 내려앉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주마등처럼 지난 삶이,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잊지 않으려고 수백 번 수천 번 꺼내 봤던 부모님 사진,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이제 자기랑 살자고 따스하게 맞잡아주던 할머니의 손,
돈 몇 푼이 급해서 팔아야 했던 활,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던 대출금,
그리고…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있던 할머니의 모습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던 인생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삶을 연민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내 생은 더없이 불쌍하고 안타깝다.
연애는 무슨, 친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인생.
……억울하다. 10억, 내가 한 번도 쥐어 본 적 없는 그 큰돈을 처음 만져보게 생겼는데. 나도 이제 사람도 만나고 사는 것처럼 살아보나 했는데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생만 하다 간다고?
꿈에 그리던 편안한 노후가 코앞인데….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진짜 악착같이 살아서 그 돈 다 쓰고 죽고 싶다!”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다.
유진도 무엇인가를 외쳤다.
기이한 빛이 유진과 나를 감쌌다. 작았던 빛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서울 한복판이 아닌 깊은 산속에 있었다.
그리고 잠깐 정신을 잃었다.
**
“이주임! 눈 뜨세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왔다. 어렴풋이 눈꺼풀을 올렸다가 기겁을 하며 일어났다.
“유진? 유진 연구원?”
분명 방금 전까지 자동차에 있지 않았나? 리터너는?…….
아닌가? 역시 다 꿈인가? 정말 개 같은 꿈이었나?
어리둥절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앞에 선 유진이 피투성이였다.
내상으로 피를 토해낸 것처럼 입가에 잔뜩 피가 묻어 있었다.
지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왔나?
눈앞이 아찔했다.
유진은 양손을 앞으로 뻗어 힘겹게 푸른색의 어떤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아니 우선 피부터…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연구원님 몸에 피가… 피가 무슨….”
리터너를 처치할 때조차 자기한테 피 한 방울 튈까 칠색 팔색을 하며 깔끔떨던 유진이었다.
“긴말할 시간 없습니다. 지금 버티고 서 있는 것도 영역의 힘 덕분입니다. 이마저도 다 끌어 썼으니 곧 실드가 깨질 겁니다.”
“네? 영역의 힘? 실드?”
이게 무슨… 실드?
장르가 뭐야…. 히어로물이야 판타지야….
“지금 위에 이무기 보이십니까?”
“뭐?”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동양풍 만화에서나 봤던 용하고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정신없이 머리가 돌아갔다.
아, 그래 이무기는 용이 되기 직전 단계를 말했지.
정말 저게 이무기라고?
유진과의 전투가 거셌는지, 이무기는 내 눈에도 많이 피로해 보였다. 온몸에 긴 자상이 여러 군데 있었고, 그 상처로 피가 새어 나왔다. 무엇보다 압권은 얼굴이었다.
이마엔 아마도 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언가 부러진 자국이 있었고, 오른쪽 눈은 좌우로 길게 베여 피가 아래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유진이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머리에 집중 공격을 퍼부은 모양이었다.
“대체 왜?”
아니 대체 왜 리터너도 아니고 이무기와 싸우고 있는 건데?
왜? 여기가 어딘데? …혹성?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체 여긴 어딥니까?”
“제 지구입니다. 다른 지구죠. 주임님의 새로운 고향이 될 곳이고요.”
“네?”
회사 사람들이 항상 저세상 또라이라고 수군거렸는데… 정말 다른 세상 또라이였다고? 알아듣게 말해라 진쯔.
고오오오오오.
이무기가 용틀임을 했다.
그리고 그륵그륵 무언가를 토해내듯 몸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해태를 호출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진짜 위험하네요.”
유진이 입가의 피를 살짝 닦으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해태는 또 누군데…. 환장하겠네.
“옵니다.”
이무기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빛냈다. 눈동자의 색이 노랗게 변했다. 순식간에 이무기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실드가 뜨거운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일순간 크게 진동하며 수명이 다한 전등처럼 깜박였다. 다행히 금세 안정은 됐지만, 색이 옅어졌다.
고오오오오오오아,
회심의 한방으로 실드 색이 옅어진 걸 보고 만족했다는 듯이 이무기가 몸을 뒤틀며 포효했다.
“주임님, 우선 배낭을……챙기십시오. 북쪽 빙하 지역으로 가세요…. 배낭 안의 예방약 그게 이곳을 지킬 겁니다.”
울컥.
붉은 핏덩이를 토해낸 유진이 입가를 스윽 닦았다.
“…설명 개떡 같습니다. 그렇게 앞뒤 자르면 어떻게 알아듣지? 그리고 예방약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른 지구라면서요. 설마 여기…… 여기도 있습니까? 리터너가?”
“네, 죄송합니다. 있네요. 리터너가. 여기에도.”
하아. 리터너가 있는데, 이무기도 있다고?
……그냥 죽을걸.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실드를 살짝 벗어난 유진의 망치가 눈에 띄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망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순간 실드에서 내 팔이 빠져나가자 이무기가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빠른 속도로 꼬리를 쳐 내렸다. 정말 빠른 속도였다.
우리 집 인터넷이 저 정도만 됐어도 내가 정말 행복했겠지…….
채찍처럼 늘어난 이무기의 꼬리가 순식간에 내 팔을 잘라내기 직전. 유진이 한 손을 뻗더니 실드 밖으로 나간 내 팔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실드를 키웠다.
크기가 커진 실드 색은 옅어졌지만, 팔은 아슬아슬하게 실드 안에 담겼다.
엄청난 기세로 쏘아진 이무기의 꼬리가 실드를 때렸다.
퍼버벅.
실드에 금이 갔다. 유진이 또 한 번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유진의 눈에 초점이 흐려졌다. 실드는 이제 거의 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제가…… 얼마 더 못 버틸 것 같습니다.…… 어서 배낭 가지고 가십시오.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유진이 최대한 옆으로 차를 붙여왔다. 그러면서도 귀신같이 속도를 유지했다. 운전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옵니까? 내일 오는 줄 알았…악!…잖아요.”
숨이 턱까지 차서는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뒤쪽의 달리는 리터너 무리 속에서 푸른 원피스의 리터너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왼발을 붙잡고 늘어지며 입을 크게 벌렸다.
이빨이 발에 닿기 직전 두 팔로 문을 강하게 잡고 체중을 오른발에 실었다.
퍽.
온 힘을 다해 리터너를 찼다. 신발에 걸린 리터너의 이가 우수수수 떨어져 나갔다. 리터너도 함께 떨어져 땅을 굴렀다.
“부디 치아 보험 들으셨기를!”
재빨리 문을 닫았다. 창밖으로 방금 몸싸움에 휘말렸던 리터너들이 몸을 뒤틀며 다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갑시다!”
유진의 핸들링은 기가 막혔다. 전직 마을버스 운전기사였다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대체 부산 시내 운전을 얼마나 자주 한 겁니까?”
“쉬는 날마다?”
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 운전 좀 한다 할 수 있지.
유진은 부산의 택시 드라이버와 같은 현란한 운전 솜씨를 선보였다.
리터너들을 모두 피해 건물 밖으로 차가 빠져나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유진이 비어있는 내 손을 힐끗 보았다.
“뒷좌석 아래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 한번 보시죠.”
“왜요?”
“거기 묠니르가 있습니다.”
“응? 토르 망치?”
그게 무슨….
“제 망치예요. 단언컨대 망치 계의 명품입니다. 특별 제작한 건데 이렇게 쓸 줄이야.”
유진이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멸망한 세계에선 그립감 좋은 무기가 최고 아닙니까?”
아… 그건 맞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난 절대 그 묠……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그립감 좋은 무기는 매우 중요하니까. 후려치는 데는 망치가 소화기보다는 낫지.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소화기가 타격감은 좋지만 뭔가를 박살내는 용도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설렌 마음을 안고 뒷좌석을 향해 몸을 틀었다.
끼이이이이익.
그런데 갑자기 유진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쿵.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뒷좌석 아래에 머리를 박았다.
눈앞에 별이 보였다.
……혹시 엿 먹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뭡니…와이 씨…….”
소리를 지르며 앞을 봤다. 일순 말을 잃었다.
교차로 앞 2층 광역 버스, 멸망한 세계의 만원 버스에서 승객들이 하차를 준비 중이었다.
버스 안 리터너들은 최소 하루는 갇혀 있었던 것 같았다.
서로를 뜯어먹었는지 모두 군데 군데 살점이 떨어져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창밖에 싱싱한 찬거리들이 도망 다니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봤던 모양이다.
그러니 약이 오를 대로 올랐을 텐데 여기 싱싱한 도시락이 다시 나타났으니…….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굶고 야식으로 치킨을 배달시킨 것 같은 기분이랑 비슷할까?
흥분한 승객 리터너들이 미친 듯이 버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만원 버스.
뒤쪽으로도 탈출할 수는 없었다. 뒤쪽 도로는 이미 움직이는 차를 따라 쉼 없이 달려오는 리터너들로 가득했으니까.
‘이대로는 여기 고립된다.’
리터너로 가득한 이곳에서의 고립은 죽음을 의미했다.
어떻게든 길을 뚫어야 한다.
“버스 앞 사거리로 좌회전합시다.”
재빨리 뒷좌석으로 넘어가 백신 배낭을 다시 메고 망치를 꺼냈다.
유진은 액셀을 밟았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머뭇거린 짧은 시간 동안,
흥분한 리터너 승객들은 원하는 만큼 버스를 흔들었다.
콰콰쾅.
유진의 차가 사거리에서 좌회전하기 직전, 기어이 버스가 옆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깨져 나가는 버스의 창.
리터너 승객들은 과격하게 몸부림치며 버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유진은 끝까지 핸들을 붙잡고 돌파구를 찾았지만, 리터너들은 너무 많았고 무척 빨랐다.
무작정 달려든 리터너들이 한꺼번에 앞바퀴 밑에 깔리자 차가 들리며 멈춰 섰다.
리터너들은 곧장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창에, 천장 위에 달라붙었다. 때맞춰 뒤쪽의 리터너 떼도 속속 도착했다.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한 파티였다.
우린 그 파티의 메인요리였다.
어떻게든 차 밖으로 나갈 기회를 잡아 보려고 창밖을 봤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아쉬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망치를 제대로 못 써본 거라고 답할 것 같다.
“그립감이 얼마나 좋은지 느껴보고 싶었는데.”
운전 한번 못 해본 수퍼카를 헐값에 강매당한 기분.
우지끈.
차 천장이 내려앉았다. 이제 차는 리터너들에게 완전히 가려졌다. 햇빛조차 보이지 않았고, 산소까지 부족한 느낌이었다.
압사의 공포가 스멀스멀 뇌를 장악했다.
천장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퍽.
차창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급박한 상황에 유진이 물었다.
“살 수 있다면 다른 지구라도 가겠습니까?”
다른 지구? 살 수만 있다면 혹성이라도 갈 판인데 지구면 땡큐지.
허탈한 웃음이 새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답니다. 살 수 있으면 당연히 가야죠.”
끼기긱.
마침내 차창이 모두 깨지면서 천장이 내려앉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주마등처럼 지난 삶이,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잊지 않으려고 수백 번 수천 번 꺼내 봤던 부모님 사진,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이제 자기랑 살자고 따스하게 맞잡아주던 할머니의 손,
돈 몇 푼이 급해서 팔아야 했던 활,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던 대출금,
그리고…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있던 할머니의 모습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던 인생이었다.
세상에 자신의 삶을 연민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내 생은 더없이 불쌍하고 안타깝다.
연애는 무슨, 친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인생.
……억울하다. 10억, 내가 한 번도 쥐어 본 적 없는 그 큰돈을 처음 만져보게 생겼는데. 나도 이제 사람도 만나고 사는 것처럼 살아보나 했는데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생만 하다 간다고?
꿈에 그리던 편안한 노후가 코앞인데….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진짜 악착같이 살아서 그 돈 다 쓰고 죽고 싶다!”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다.
유진도 무엇인가를 외쳤다.
기이한 빛이 유진과 나를 감쌌다. 작았던 빛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서울 한복판이 아닌 깊은 산속에 있었다.
그리고 잠깐 정신을 잃었다.
**
“이주임! 눈 뜨세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왔다. 어렴풋이 눈꺼풀을 올렸다가 기겁을 하며 일어났다.
“유진? 유진 연구원?”
분명 방금 전까지 자동차에 있지 않았나? 리터너는?…….
아닌가? 역시 다 꿈인가? 정말 개 같은 꿈이었나?
어리둥절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앞에 선 유진이 피투성이였다.
내상으로 피를 토해낸 것처럼 입가에 잔뜩 피가 묻어 있었다.
지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왔나?
눈앞이 아찔했다.
유진은 양손을 앞으로 뻗어 힘겹게 푸른색의 어떤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아니 우선 피부터…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연구원님 몸에 피가… 피가 무슨….”
리터너를 처치할 때조차 자기한테 피 한 방울 튈까 칠색 팔색을 하며 깔끔떨던 유진이었다.
“긴말할 시간 없습니다. 지금 버티고 서 있는 것도 영역의 힘 덕분입니다. 이마저도 다 끌어 썼으니 곧 실드가 깨질 겁니다.”
“네? 영역의 힘? 실드?”
이게 무슨… 실드?
장르가 뭐야…. 히어로물이야 판타지야….
“지금 위에 이무기 보이십니까?”
“뭐?”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동양풍 만화에서나 봤던 용하고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정신없이 머리가 돌아갔다.
아, 그래 이무기는 용이 되기 직전 단계를 말했지.
정말 저게 이무기라고?
유진과의 전투가 거셌는지, 이무기는 내 눈에도 많이 피로해 보였다. 온몸에 긴 자상이 여러 군데 있었고, 그 상처로 피가 새어 나왔다. 무엇보다 압권은 얼굴이었다.
이마엔 아마도 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언가 부러진 자국이 있었고, 오른쪽 눈은 좌우로 길게 베여 피가 아래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유진이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머리에 집중 공격을 퍼부은 모양이었다.
“대체 왜?”
아니 대체 왜 리터너도 아니고 이무기와 싸우고 있는 건데?
왜? 여기가 어딘데? …혹성?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체 여긴 어딥니까?”
“제 지구입니다. 다른 지구죠. 주임님의 새로운 고향이 될 곳이고요.”
“네?”
회사 사람들이 항상 저세상 또라이라고 수군거렸는데… 정말 다른 세상 또라이였다고? 알아듣게 말해라 진쯔.
고오오오오오.
이무기가 용틀임을 했다.
그리고 그륵그륵 무언가를 토해내듯 몸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해태를 호출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진짜 위험하네요.”
유진이 입가의 피를 살짝 닦으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해태는 또 누군데…. 환장하겠네.
“옵니다.”
이무기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빛냈다. 눈동자의 색이 노랗게 변했다. 순식간에 이무기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실드가 뜨거운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일순간 크게 진동하며 수명이 다한 전등처럼 깜박였다. 다행히 금세 안정은 됐지만, 색이 옅어졌다.
고오오오오오오아,
회심의 한방으로 실드 색이 옅어진 걸 보고 만족했다는 듯이 이무기가 몸을 뒤틀며 포효했다.
“주임님, 우선 배낭을……챙기십시오. 북쪽 빙하 지역으로 가세요…. 배낭 안의 예방약 그게 이곳을 지킬 겁니다.”
울컥.
붉은 핏덩이를 토해낸 유진이 입가를 스윽 닦았다.
“…설명 개떡 같습니다. 그렇게 앞뒤 자르면 어떻게 알아듣지? 그리고 예방약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른 지구라면서요. 설마 여기…… 여기도 있습니까? 리터너가?”
“네, 죄송합니다. 있네요. 리터너가. 여기에도.”
하아. 리터너가 있는데, 이무기도 있다고?
……그냥 죽을걸.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실드를 살짝 벗어난 유진의 망치가 눈에 띄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망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순간 실드에서 내 팔이 빠져나가자 이무기가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빠른 속도로 꼬리를 쳐 내렸다. 정말 빠른 속도였다.
우리 집 인터넷이 저 정도만 됐어도 내가 정말 행복했겠지…….
채찍처럼 늘어난 이무기의 꼬리가 순식간에 내 팔을 잘라내기 직전. 유진이 한 손을 뻗더니 실드 밖으로 나간 내 팔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실드를 키웠다.
크기가 커진 실드 색은 옅어졌지만, 팔은 아슬아슬하게 실드 안에 담겼다.
엄청난 기세로 쏘아진 이무기의 꼬리가 실드를 때렸다.
퍼버벅.
실드에 금이 갔다. 유진이 또 한 번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유진의 눈에 초점이 흐려졌다. 실드는 이제 거의 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제가…… 얼마 더 못 버틸 것 같습니다.…… 어서 배낭 가지고 가십시오.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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