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조회 : 1,115 추천 : 0 글자수 : 4,806 자 2022-09-18
“커피 고맙네.”
크라운 본가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헤밀프로닌 크라운은 서류에만 온통 시선을 집중했다. 커피를 집었다. 이후 커피를 홀짝인다.
“여전히 커피 맛이 좋군.”
별 볼 일 없는 메이드가 과찬에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인다.
헤밀 프로닌는 서류를 내려놓고 커피를 즐기다 커피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봐버렸다. 다크서클이 눈주름에 잔뜩여서는 수염도 너 지저분했다. 마지막으로 무덤덤한 표정뿐. 3일째 제대로 된 생활도 못 하고 집무실에 처박혀 있었으니 당연했다.
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메이드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 펠렌은 아카데미 생활 잘하고 있나?”
“입학시험에서 기권, 바람 마법학 1달 휴강. 정보를 토대로 말씀드린 것이니 곧이곧대로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긍하는 듯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서류에 집중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군···.”
-촤락 스스슥
깃펜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원래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운 법이지. 아직 제 갈 길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이니. 누군가가 지도 해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메이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차갑고도 냉혈 안인 그가 다름 아닌 원수지간인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 메이드는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존재다. 오죽하면 메이드 매뉴얼 첫 번째 수칙에 그것이 적혀 있을까. 일한 지가 어언 15년이나 된 배테랑이 그걸 잊어먹고 질문을 던진다.
“지금 펠렌을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흠, 나이가 드니 외로움을 타서 그런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펠렌이 떠오르네. ······ 자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않는가? 손으로 직접 버려 놓고는 제 아들을 찾다니.”
메이드가 갈피를 못 잡다 이네, 긍정적인 미소를 띠며 금세 다 마신 커피잔을 쟁반 위로 거뒀다.
“1달 뒤에 있을 등급 심사는 관전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메이드는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이지만 최대한의 조언을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가···.”
-사각사각
* * *
마젤라드 사의 미궁.
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 이곳은 가장 미스테리하면서 사람이 가장 많이 실종되고 죽기로 자자한 미궁이다. 입구부터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 지금 그 앞으로 발을 들인다.
거대한 크기의 동굴 그리고 아래로 나선형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계단 난간에 붙어 아래를 내려다 보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악마의 형상을 한 비석에서 불이 나와 램프 역할을 하고 계단을 비춘다.
-저벅저벅
여기는 신기하게 계단을 밟을 때마다 발소리가 울린다.
“사람이 없네요?”
“원래 계단은 조용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사람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말고 사적인 대화도 하지 마세요. 알겠죠?”
드윌란의 진심 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 눈치 없는 제나단은 꼭 이유를 들어야 했다.
“왜죠?”
“여기는 생각보다 어두운 곳이거든요. 평범한 인간 세상이라고 믿으면 곤란합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동료를 배신하고, 미끼로 쓰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냉혈 하게 버리고 도망치죠. 악마보다 더한 것들이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말이 길었네요.”
계단의 끝은 미궁 로비였다. 안쪽으로 더욱 들어가자 사람이 많아진다. 넓었다. 잡상인들이 밧줄이나 갈고리, 잡다한 무기를 팔기도 하고 거칠게 껄껄대며 주변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
천박하고 더러운 욕짓거리나 온갖 음담패설을 대화거리로 삼아 내뱉는 이들이 있고 왠지 모르게 남자들끼리 몸을 매만지는 것들도 있었다.
김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드윌란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나아간다. 드윌란의 표정에는 미소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증표였다.
주머니에서 의뢰지를 꺼내 들고 히페르나 길드의 간판이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옆으로는 다양한 길드가 간판을 걸고 늘어져 있었다. 눈앞에는 벽을 깊게 깎아서 만들어진 공간에 여자 직원이 있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카운터였다.
“어서 오세요.”
“3계층 고블린 처치 의뢰입니다.”
“잠시만요.”
의뢰를 훑은 카운터 직원은 도장을 찍은 뒤 의뢰지를 건네며 말했다.
“행운의 여신 티케가 함께하길.”
카운터 여자가 나를 힐끔 보고는 싱긋 웃는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마정석으로 움직이는 승강기에 탑승했다.
“다들 처음이니까 1계층에서 미궁 환경에 적응해 보도록 해요. 바깥이랑은 많이 다를 거예요.”
말투는 흡사 유치원 선생님이다. 하지만 여기 공간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지워진다.
-철컹! 스으으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고 그에 따라 뭔가 환경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중력이 느껴진다. 거대한 중력.
“으윽···.”
“익···.”
나와 제나단이 동시에 당황하며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풀린 듯 힘이 잘 안 들어갔다.
“몸이 무겁죠? 마왕의 저주에 걸린 거예요. 용사의 각인 없이 미궁에 침입하면 저주에 걸리게 되는 거죠. 그래도 조금씩 적응하면 견딜만 할 거예요. 3계층은 더 심하니까. 알아두세요.”
김지원은 무릎을 땅에서 떼며 몸을 일으켰다.
-띵
승강기에서 알림음이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초록 색채가 펼쳐진 공간. 높은 천장에는 태양 아닌 태양도 있었다.
제나단이 놀란다.
“우와.”
벌목하는 사람도 있고 농사짓는 사람도 있다. 마을이 있고 꽃이 있으며 나비가 있다. 물이 흐르는 맑은 계곡, 호수도 보였다. 시야에 그것들이 한 번에 들어오니 절경이다.
“원래 미궁이 이런 데였어요?”
사의 미궁이 맞나 싶다. 다시 봐도 평화로운 마을로 밖에는 안 보인다.
“책에서 나온 내용이랑은 조금 다르죠? 일부로 미궁에 못 들어가도록 거짓으로 적어둔 책도 많아요. 미궁은 위험하니까요.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함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실종된 모험가가 많다고 적혀 있지만 이곳에는 터를 놓고 사는 모험가가 늘어서 그런 걸 수도 있죠.”
드윌란이 첫발을 떼며 승강기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나와서 걸어보세요~.”
드윌란의 미소가 왠지 모르게 달라 보인다.
걷기부터 시작해서 달리기, 100m를 헤엄쳐 수영한다던가. 검을 1000번 휘두른다던가. 3계층으로 가기 위해 몸을 확실히 단련해두는 것으로 일정이 빡빡했다. 이는 저주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끄응.”“더 깊게 휘두르세요. 그걸로는 천쪼가리도 벨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막론해도 될 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신체가 약해진 지금 이곳에서 얻은 경험치는 미궁을 벗어나 저주가 풀린 내 육체에 그대로 적용된다.
미궁 밖의 내 육체 레벨을 10레벨이라고 치자. 미궁에 들어오며 저주에 의해서 레벨 1이 되었다. 나는 원래 힘을 되찾기 위해 미궁을 나가지 않고 강해지며 10레벨을 달성 이후 미궁을 나간다.
쇠약 저주가 풀리면 현재 레벨에 쇠약 저주 이전의 레벨이 더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저주받기 전 10레벨에 미궁 내에서 얻은 레벨이 그대로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왠걸? 20레벨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훨씬 효율적으로 레벨업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웃긴 건 이 사실을 일부만 알고 있다는 거다. 대부분이 알고 있어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강함을 위한 무식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건 꼼수니, 뭐니 하며 기껏 엄청난 걸 알려줬더니 신념에 거절하는 자들도 있고.
“허억··· 허억··· 교수님 그만··· 이대로 가면 죽어요···.”
제나단이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애절하게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복창하며 우리 1000번만 더 휘둘러봅시다. 할 수 있어요~.”
드윌란이 찬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에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제나단의 몸에 뿌려주었다.
“나를··· 죽이지··· 못··· 으아아!!”
제나단이 복창하는가 싶더니 미친 건가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저러다 쓰러지겠지 싶어 힐끔힐끔 제나단을 엿본다.
“오···.”
가히 엄청난 속도다 초마다 1번씩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10초, 20초 점점 빨라진다. 이후 제나단은 쓰러졌다.
“하, 하얗게 불태웠다···.”
흑백 컬러로 변하는 특수 효과가 보이는 것 같다.
드윌란은 제나단을 나무 그늘진 장소로 옮겨주며 수통에 담긴 물을 한 바가지 퍼서 건넸다.
“감사합니다.”
“펠렌군은 어떤가요?”
“조금씩 견딜 만한 것 같아요.”
“적응하는 게 빠르네요. 저도 이 정도까지는 빨리 적응 못했는데. 변수네요···.”
“변수라고요?”
* * *
20일 뒤.
“머리가 많이 자랐네. 넘기고 다녀야 하나.”
괜히 손으로 가위질해본다. 물론 잘릴 리가 없다. 오라가 있었다면 모를까.
[뛰어난 적응의 재능]
이것 덕분에 저주에 쉽게 버텨낼 수 있었다. 첫날에도 힘들지 않았던 이유가 저주에 쉽게 적응하고 저주 저항력이 생겼기 때문이라 드윌란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20일 빠짐없이 매번 뛰고 헤엄치고 온몸에 힘을 전부 빼낼 때까지 근력 운동을 반복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하루와 다르게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 근육이 붙고 5일 뒤 1계층에 완벽히 적응하며 2계층으로 훈련 장소를 옮겼다.
2계층부터는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신기한 생명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니나 웹툰에서나 보던 슬라임이 이곳에 나온 것 아닌가.
몸의 탄성을 이용해 뛰어다니다 가끔가다 자신의 몸을 앞으로 굴려 굴러다니기도 했다.
제나단과 나는 놈들을 잡았다. 또다시 10일 이후 3계층에 도달했다.
“2계층은 마을 주민이 다녀도 안전한 중립지역이지만 3계층부터는 다릅니다. 몬스터들이 외부인을 적대하고 경계할 겁니다. 슬라임이랑은 차원이 다르죠. 여기가 본편입니다. 제가 지켜준다고는 하나 다들 정신 바짝 차리세요.”
““네.””
제나단과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3계층으로 향하는 승강기가 멈췄다.
“눈앞에 결계가 보이시나요? 몬스터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몬스터 전용 결계를 펼쳐둔 겁니다. 아무튼 오늘은 퀘스트를 클리어할 겁니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블린 퀘스트를 클리어할 겁니다.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말이죠. 충분히 미궁에 적응하고 기본기가 갖춰졌다고 판단했습니다. 더이상의 검술 훈련은 무의미. 실전 그리고 실전뿐이죠.”
고블린 퀘스트 의뢰를 해결한단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할까. 분명 위험하다고 혼자 클리어한다고 했을 텐데 말이지?
‘고블린 퀘스트 그거 위험해서 같이 못 깨요. 몽둥이 한 대 맞으면 갈비뼈가 혁명적으로 부러질걸요?’
요즘 들어 부쩍 김지원의 말투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드윌란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확인차 물었을 때도 드윌란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퀘스트 안 깬다며.
그런데 이제와서 뭐시라? 이 양반이 미쳤나?
“저는 한 번 내뱉은 말을 꼭 지킵니다. 다들 그렇게 알아두세요.”
“드윌란은 소중이를 떼셔야겠네요. 한 번 정한 약속을 어기-”
드윌란이 펠렌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다들 따라오세요.”
김지원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고는 드윌란의 뒤를 따랐다.
제나단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최근 들어 가장 열정적으로 훈련한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 열정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고블린을 베어낸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지성이 있는 생명을 상대하는 것이기에 큰 각오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힘든 트라우마가 따를 것이다.
“미궁으로 들어오기 전 제가 처음으로 했던 말들이 기억나나요? 저는 분명 학생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강해지는 이유는 전부 제각각이겠지만, 첫 번째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의 실전 연습은 나중에 여러분의 목숨을 구할 정도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세요. 알겠죠?”
크라운 본가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헤밀프로닌 크라운은 서류에만 온통 시선을 집중했다. 커피를 집었다. 이후 커피를 홀짝인다.
“여전히 커피 맛이 좋군.”
별 볼 일 없는 메이드가 과찬에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인다.
헤밀 프로닌는 서류를 내려놓고 커피를 즐기다 커피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봐버렸다. 다크서클이 눈주름에 잔뜩여서는 수염도 너 지저분했다. 마지막으로 무덤덤한 표정뿐. 3일째 제대로 된 생활도 못 하고 집무실에 처박혀 있었으니 당연했다.
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메이드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 펠렌은 아카데미 생활 잘하고 있나?”
“입학시험에서 기권, 바람 마법학 1달 휴강. 정보를 토대로 말씀드린 것이니 곧이곧대로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긍하는 듯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서류에 집중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군···.”
-촤락 스스슥
깃펜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원래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운 법이지. 아직 제 갈 길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이니. 누군가가 지도 해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메이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차갑고도 냉혈 안인 그가 다름 아닌 원수지간인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 메이드는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존재다. 오죽하면 메이드 매뉴얼 첫 번째 수칙에 그것이 적혀 있을까. 일한 지가 어언 15년이나 된 배테랑이 그걸 잊어먹고 질문을 던진다.
“지금 펠렌을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흠, 나이가 드니 외로움을 타서 그런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펠렌이 떠오르네. ······ 자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않는가? 손으로 직접 버려 놓고는 제 아들을 찾다니.”
메이드가 갈피를 못 잡다 이네, 긍정적인 미소를 띠며 금세 다 마신 커피잔을 쟁반 위로 거뒀다.
“1달 뒤에 있을 등급 심사는 관전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메이드는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이지만 최대한의 조언을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가···.”
-사각사각
* * *
마젤라드 사의 미궁.
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 이곳은 가장 미스테리하면서 사람이 가장 많이 실종되고 죽기로 자자한 미궁이다. 입구부터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 지금 그 앞으로 발을 들인다.
거대한 크기의 동굴 그리고 아래로 나선형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계단 난간에 붙어 아래를 내려다 보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악마의 형상을 한 비석에서 불이 나와 램프 역할을 하고 계단을 비춘다.
-저벅저벅
여기는 신기하게 계단을 밟을 때마다 발소리가 울린다.
“사람이 없네요?”
“원래 계단은 조용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사람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말고 사적인 대화도 하지 마세요. 알겠죠?”
드윌란의 진심 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 눈치 없는 제나단은 꼭 이유를 들어야 했다.
“왜죠?”
“여기는 생각보다 어두운 곳이거든요. 평범한 인간 세상이라고 믿으면 곤란합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동료를 배신하고, 미끼로 쓰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냉혈 하게 버리고 도망치죠. 악마보다 더한 것들이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말이 길었네요.”
계단의 끝은 미궁 로비였다. 안쪽으로 더욱 들어가자 사람이 많아진다. 넓었다. 잡상인들이 밧줄이나 갈고리, 잡다한 무기를 팔기도 하고 거칠게 껄껄대며 주변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
천박하고 더러운 욕짓거리나 온갖 음담패설을 대화거리로 삼아 내뱉는 이들이 있고 왠지 모르게 남자들끼리 몸을 매만지는 것들도 있었다.
김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드윌란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나아간다. 드윌란의 표정에는 미소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증표였다.
주머니에서 의뢰지를 꺼내 들고 히페르나 길드의 간판이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옆으로는 다양한 길드가 간판을 걸고 늘어져 있었다. 눈앞에는 벽을 깊게 깎아서 만들어진 공간에 여자 직원이 있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카운터였다.
“어서 오세요.”
“3계층 고블린 처치 의뢰입니다.”
“잠시만요.”
의뢰를 훑은 카운터 직원은 도장을 찍은 뒤 의뢰지를 건네며 말했다.
“행운의 여신 티케가 함께하길.”
카운터 여자가 나를 힐끔 보고는 싱긋 웃는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마정석으로 움직이는 승강기에 탑승했다.
“다들 처음이니까 1계층에서 미궁 환경에 적응해 보도록 해요. 바깥이랑은 많이 다를 거예요.”
말투는 흡사 유치원 선생님이다. 하지만 여기 공간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지워진다.
-철컹! 스으으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고 그에 따라 뭔가 환경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중력이 느껴진다. 거대한 중력.
“으윽···.”
“익···.”
나와 제나단이 동시에 당황하며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풀린 듯 힘이 잘 안 들어갔다.
“몸이 무겁죠? 마왕의 저주에 걸린 거예요. 용사의 각인 없이 미궁에 침입하면 저주에 걸리게 되는 거죠. 그래도 조금씩 적응하면 견딜만 할 거예요. 3계층은 더 심하니까. 알아두세요.”
김지원은 무릎을 땅에서 떼며 몸을 일으켰다.
-띵
승강기에서 알림음이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초록 색채가 펼쳐진 공간. 높은 천장에는 태양 아닌 태양도 있었다.
제나단이 놀란다.
“우와.”
벌목하는 사람도 있고 농사짓는 사람도 있다. 마을이 있고 꽃이 있으며 나비가 있다. 물이 흐르는 맑은 계곡, 호수도 보였다. 시야에 그것들이 한 번에 들어오니 절경이다.
“원래 미궁이 이런 데였어요?”
사의 미궁이 맞나 싶다. 다시 봐도 평화로운 마을로 밖에는 안 보인다.
“책에서 나온 내용이랑은 조금 다르죠? 일부로 미궁에 못 들어가도록 거짓으로 적어둔 책도 많아요. 미궁은 위험하니까요.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함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실종된 모험가가 많다고 적혀 있지만 이곳에는 터를 놓고 사는 모험가가 늘어서 그런 걸 수도 있죠.”
드윌란이 첫발을 떼며 승강기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나와서 걸어보세요~.”
드윌란의 미소가 왠지 모르게 달라 보인다.
걷기부터 시작해서 달리기, 100m를 헤엄쳐 수영한다던가. 검을 1000번 휘두른다던가. 3계층으로 가기 위해 몸을 확실히 단련해두는 것으로 일정이 빡빡했다. 이는 저주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끄응.”“더 깊게 휘두르세요. 그걸로는 천쪼가리도 벨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막론해도 될 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신체가 약해진 지금 이곳에서 얻은 경험치는 미궁을 벗어나 저주가 풀린 내 육체에 그대로 적용된다.
미궁 밖의 내 육체 레벨을 10레벨이라고 치자. 미궁에 들어오며 저주에 의해서 레벨 1이 되었다. 나는 원래 힘을 되찾기 위해 미궁을 나가지 않고 강해지며 10레벨을 달성 이후 미궁을 나간다.
쇠약 저주가 풀리면 현재 레벨에 쇠약 저주 이전의 레벨이 더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저주받기 전 10레벨에 미궁 내에서 얻은 레벨이 그대로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왠걸? 20레벨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훨씬 효율적으로 레벨업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웃긴 건 이 사실을 일부만 알고 있다는 거다. 대부분이 알고 있어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강함을 위한 무식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건 꼼수니, 뭐니 하며 기껏 엄청난 걸 알려줬더니 신념에 거절하는 자들도 있고.
“허억··· 허억··· 교수님 그만··· 이대로 가면 죽어요···.”
제나단이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애절하게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복창하며 우리 1000번만 더 휘둘러봅시다. 할 수 있어요~.”
드윌란이 찬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에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제나단의 몸에 뿌려주었다.
“나를··· 죽이지··· 못··· 으아아!!”
제나단이 복창하는가 싶더니 미친 건가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저러다 쓰러지겠지 싶어 힐끔힐끔 제나단을 엿본다.
“오···.”
가히 엄청난 속도다 초마다 1번씩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10초, 20초 점점 빨라진다. 이후 제나단은 쓰러졌다.
“하, 하얗게 불태웠다···.”
흑백 컬러로 변하는 특수 효과가 보이는 것 같다.
드윌란은 제나단을 나무 그늘진 장소로 옮겨주며 수통에 담긴 물을 한 바가지 퍼서 건넸다.
“감사합니다.”
“펠렌군은 어떤가요?”
“조금씩 견딜 만한 것 같아요.”
“적응하는 게 빠르네요. 저도 이 정도까지는 빨리 적응 못했는데. 변수네요···.”
“변수라고요?”
* * *
20일 뒤.
“머리가 많이 자랐네. 넘기고 다녀야 하나.”
괜히 손으로 가위질해본다. 물론 잘릴 리가 없다. 오라가 있었다면 모를까.
[뛰어난 적응의 재능]
이것 덕분에 저주에 쉽게 버텨낼 수 있었다. 첫날에도 힘들지 않았던 이유가 저주에 쉽게 적응하고 저주 저항력이 생겼기 때문이라 드윌란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20일 빠짐없이 매번 뛰고 헤엄치고 온몸에 힘을 전부 빼낼 때까지 근력 운동을 반복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하루와 다르게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 근육이 붙고 5일 뒤 1계층에 완벽히 적응하며 2계층으로 훈련 장소를 옮겼다.
2계층부터는 몬스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신기한 생명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니나 웹툰에서나 보던 슬라임이 이곳에 나온 것 아닌가.
몸의 탄성을 이용해 뛰어다니다 가끔가다 자신의 몸을 앞으로 굴려 굴러다니기도 했다.
제나단과 나는 놈들을 잡았다. 또다시 10일 이후 3계층에 도달했다.
“2계층은 마을 주민이 다녀도 안전한 중립지역이지만 3계층부터는 다릅니다. 몬스터들이 외부인을 적대하고 경계할 겁니다. 슬라임이랑은 차원이 다르죠. 여기가 본편입니다. 제가 지켜준다고는 하나 다들 정신 바짝 차리세요.”
““네.””
제나단과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3계층으로 향하는 승강기가 멈췄다.
“눈앞에 결계가 보이시나요? 몬스터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몬스터 전용 결계를 펼쳐둔 겁니다. 아무튼 오늘은 퀘스트를 클리어할 겁니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블린 퀘스트를 클리어할 겁니다.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말이죠. 충분히 미궁에 적응하고 기본기가 갖춰졌다고 판단했습니다. 더이상의 검술 훈련은 무의미. 실전 그리고 실전뿐이죠.”
고블린 퀘스트 의뢰를 해결한단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할까. 분명 위험하다고 혼자 클리어한다고 했을 텐데 말이지?
‘고블린 퀘스트 그거 위험해서 같이 못 깨요. 몽둥이 한 대 맞으면 갈비뼈가 혁명적으로 부러질걸요?’
요즘 들어 부쩍 김지원의 말투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드윌란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확인차 물었을 때도 드윌란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퀘스트 안 깬다며.
그런데 이제와서 뭐시라? 이 양반이 미쳤나?
“저는 한 번 내뱉은 말을 꼭 지킵니다. 다들 그렇게 알아두세요.”
“드윌란은 소중이를 떼셔야겠네요. 한 번 정한 약속을 어기-”
드윌란이 펠렌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다들 따라오세요.”
김지원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고는 드윌란의 뒤를 따랐다.
제나단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최근 들어 가장 열정적으로 훈련한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 열정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고블린을 베어낸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지성이 있는 생명을 상대하는 것이기에 큰 각오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힘든 트라우마가 따를 것이다.
“미궁으로 들어오기 전 제가 처음으로 했던 말들이 기억나나요? 저는 분명 학생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강해지는 이유는 전부 제각각이겠지만, 첫 번째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의 실전 연습은 나중에 여러분의 목숨을 구할 정도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세요. 알겠죠?”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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