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조회 : 1,115 추천 : 0 글자수 : 5,469 자 2022-09-29
기본에서 한 단계를 초월한 것을 기술이라고 부른다. 기본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들은 기술이라는 이름뿐인 기교를 부리지.
지금 눈앞에 있는 레일라가 그러했다. 근력도 체력도 그리고 기본기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을 끌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완벽한 기본기에서부터 완벽한 기술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웃긴 짓을 하고 있었네. 저딴 게 페르난 가문의 수신류 검술?’
유한하게 흐르는 검은 결코 끊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공격에서 공격으로 검이 이어지며 상대방이 반격한다면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되는 공방일체가 이뤄져야 했다.
완벽한 자세와 기술들은 수신류 검술 내부에 구축되어 있을 터인데 레일라는 그것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활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오러가 검술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검신들은 분명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음에도 검술을 완성하여 틀을 잡고 오러를 접목했다.
검술보다는 오러가 더욱 위대하다는 현시대의 폐해다. 검술은 더욱 퇴화하여가고 있었으니 유감스러울 따름이었다.
“레일라 잘 봐. 이게 검술이라는 거고, 네 잘난 오러 보다도 더 대단한 거야.”
좌중이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란돈 페르난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수신류…!”
잃어버린 검술, 이제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수신류 검술의 본질이 펠렌이라는 아이에게 보였다. 도대체 저 아이는 정체가 뭐지?
푸른 기운, 무거운 공기.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했다. 검술은 일절 없이 기본기로 적을 상대했다. 마치 우리에게 뭔가를 암시하듯 말이다.
기류가 변하면서 뭔가가 나타나고 있었다. 거대한 중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레일라가 이체 서린, 떨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거, 거짓말… 네가 어떻게… 그걸…!”
김지원이 검을 잡으며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 순간 김지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벽을 허물고 아득히 벗어난 검술. 기술의 극치.
모두의 눈동자가 펠렌의 경이로움에 인식을 거부했다.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수십, 수백 푸른 유체의 잔상이 시야를 뒤덮고 있었으며 전부 한 곳으로 걸어가 펠렌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거대한 바다가 보였었다. 바닷속에 숨겨진 물의 진의, 부드러움, 유한함이 방금 짧은 0.01 몇 초 사이에 보였다.
펠렌이 검을 검집에 넣었을 때는 이미 레일라가 쓰러진 뒤였다.
헤밀프로닌 크라운도 그란돈 페르난도 모두 당황했다.
교수들도, 심판들도, 관중들도, 하늘도, 멀리 세계의 진실들도.
학장이 흥미로운 얼굴로 씨익 웃고 있었다. 해설자가 마이크를 꽉 잡으며 말했다.
“올해의 첫 우승자는! 펠렌 크라운!!”
관중들이 환호한다. 이전의 몇 배,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하늘을 날던 새가 환호성에 깜짝 놀라며 우회했다.
““와아아아!!!””
“미쳤어! 저런 거 나 처음 봐! 펠렌 뭐 하는 놈이냐!!”
“로드마린 제국의 장래가 밝습니다! 저런 인재가 있으니!”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사이 몇몇은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들 일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펠렌 크라운이라는 자에 대한 토의를 시작했다.
헤밀프로닌은 당장 관중석에서 벗어나 펠렌을 만나러 갔다. 그란돈 페르난도 똑같았다.
찰나 과거 몰락한 가문을 일으킨 검신 아벨의 모습이 보였다. 자존심?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수신류 검술의 본질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웃기지 않는가? 수신류 검술을 가문 대대로 이어온 가주가 난생처음 보는 17살 꼬맹이한테 수신류 검술의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니.
그란돈의 눈앞에 펠렌이 보였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기숙사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1위라는 성적으로 마무리했음에도 무덤덤한 저 여유로움은 그란돈의 마음속에서 작게 자리 잡고 있던 의구심을 확신으로 돌려놨다. 그는 자신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페, 펠렌!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나랑 대화를!”
“뭐야, 갑자기 왜요. 여기는 외부인 출입 금지니까. 돌아가세요.”
“펠렌 군이 어떻게 수신류 검술을 배웠는지 묻지 않겠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러니 제발…. 수신류 검술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게…! 과거에는 그 해답이 적혀 있지 않았어…! 그대는 알고 있는 거지?”
경비병이 순식간에 나타나 그란돈의 양팔을 포박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그란돈 페르난.”
페르난 가문이라는 말에 펠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발… 재산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처절한 어조였다. 대대로 이어온 검술을 조금씩 잊어가며 가문의 색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가주의 마음을 펠렌이 알 리 없지만, 펠렌은 왠지 모르게 그란돈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해주기로 했다.
“지금껏 품고 있는 고정 관념을 비틀어요. 수신류는 항상 유한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때로는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휘몰아쳐야 할 때가 있고 어떨 때는 잔잔한 시냇물처럼 부드럽게 흘러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멈춰 있는 검술은 시대에 뒤떨어져요.”
펠렌이 뒤돌았다.
“그게 무슨… 검신 아벨의 가르침을 버리라는 소리인가?”
“왜 검술의 해답을 과거에서 찾으려 하세요? 검신이라는 이명이 붙어서 창시자를 뭐 거의 신으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걔도 그냥 사람이야 사람. 운 좋게 신체에서 오러를 발현하고 운 좋게 수신류 검술을 만든 사람. 완성해 나가라는 소리입니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뒤처지는 수신류 검술을 더욱 완벽하게.”
벙쩠다. 매일 같이 검신 아벨에게 꿈속에 나타나 가르침을 주길 기도하는 자신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거의 신으로 칭송하던 아벨이 한낮 인간이라는 말에 조금 화났다. 40년 인생의 노력이 헛되었다는 것인가? 17세 소년이 뭘 안다고?
반박 거리를 찾으려던 그때다.
“직접 검술의 단점을 보완하고 갈구하며 수정해서 퍼즐을 맞춰 나가요. 수신류 검술을 만질 자격이 충분한 것 같은데 왜 과거에 연연하는지 모르겠네.”
“그게 사실일 리가!! 아벨은 완벽한 존재!”
“귓구멍이 쳐 막혔어요? 그럼 시발 너는 왕국 하나 날려버릴 메테오 마법 막을 방법을 과거 마법 서적에서 찾을 거냐? 그 시절에는 네 *만 한 화염 구체가 존나게 짱 쎈 시절이었어. 그거 막는 방어 마법 개발하려 전전긍긍했는데 메테오 막을 방어 마법이 300년 전 과거에 있겠어? 당연히 마법이 발전한 현시대에 있지. 검술도 마찬가지야. 제발 부탁인데 과거에서 뭐 좀 찾으려 하지 마. 과거는 그냥 지금의 인간이 되기까지의 발자취야. 여기까지 오기 위한 노력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눈 뜨고 현실을 봐봐. 현재까지 생겨난 수십, 수백 개의 검술 중 어떤 검술이 수신류 검술에 취약한지. 어떤 검술이 수신류 검술을 뚫을 수 있는지. 그런 거를 먼저 보라고. 병신같이 매번 기도해서 날로 먹을 생각하지 말고 진심으로 책상에 앉아서 연구하라고 알겠냐? 이 병신 머저리 새끼야.”
어느 순간 펠렌은 반말을 찍찍 내뱉고 있었다. 반말했다는 사실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란돈은 경비병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펠렌이 한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를 보라는 말이.
김지원은 한숨을 내뱉으며 기숙사로 걸어갔다.
“븅신 가르침을 달라면서 반박하고 지랄이네 그럴 거면 왜 쳐 물어본 거야. 지 *대로 하지 그냥.”
그때다.
“아들아…!!”
이번에는 왠 벌레가 꼬인 모양이다. 목소리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펠렌을 버린 아버지라는 작자.
헤밀프로닌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전부 잘못했네… 그러니 제발 다시 돌아와다오…. 아들아….”
역겨운 크라운 가문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말의 의미에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돌아가라니 뭔 개소리지? 이 양반이 낮술을 했나?
이제는 끝내야 한다. 역겨운 가문에서 나갈 기회가 왔으니 말이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어도, 과거를 반성하고 있어도 소용없다.
“거 아저씨. 복권이라도 당첨된 양 정신이 오락가락한 모양인데. 나 이제 당신 아들 아니야. 반성하고 있으면 당장 호적에서 팔 생각이나 해. 역겨워서 뭔 대화를 못 하겠네. 버릴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눈 비비고 보니까 다시 아들로 보이나 보지? 그전까지는 아들도 아니었으면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너무 멀어졌어.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거지. 그대로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썩어줬으면 좋겠네. 물론 그 죄책감도 얼마 안 가 잊어버리겠지만.”
김지원은 무릎을 꿇은 그를 차갑게 무시하고 뒤돌았다.
헤밀프로닌의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음의 진위가 굉장히 안타깝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아니긴… 쯧.”
안타깝긴 하나 이 몸에 남아 있는 펠렌의 잔해가 울부짖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라는 놈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반성하는 듯 보였으니 김지원은 참회를 받아들이고 평범한 부자지간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이 육체는 아니었나 보다.
나는 편하게 육체의 우선권을 보장받았으니 그에 걸맞게 이 육체에 남아 있는 원한을 풀어줘야 한다. 그것이 옳게 된 것이고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이유라고 생각됐으니까.
그것이 분노하고 있는 이 육체를 위해서도 항상 가슴 한켠이 답답해 미치겠는 나를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말이 맞았듯 육체에는 더 이상의 여한이 없어 보였다. 가문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답답하고 꽉 막힌 느낌이 들지 않고 뻥 뚫린 것 같다.
펠렌 크라운이 이걸 원했다. 난 너의 아들이 아니라 내뱉길 간절히 소망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에 누군가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그게 우연히 나였고 보란 듯이 해냈으니까 이게 맞는 거겠지.
김지원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이 육체를 나와 현생으로 돌아가는 건가? 펠렌의 몸속에서 임무를 완수했고 그러면 모두 끝난 것이다. 더 할 게 남아 있다면 지금 당장 낮잠을 때리는 게 전부지.
이대로 잠을 자면 현실로 돌아갈까?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까 사실 전부 꿈 이런 거 아닐까?
내 뜻대로 온 것이 아니니 돌아가는 것도 분명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김지원은 기숙사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 옆으로 평범하게 대화하는 학생 무리가 스쳐 지나갔다.
“꺄하핳 진짜야?”
“어! 그래서 걔가-”
“…….”
뭔가 허무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름 삶의 목표가 있었는데 그걸 잃어버린 기분?
미궁에 있을 때는 그래도 나름 생과 사를 오가서 짜릿짜릿했었다.
제나단은 아파서 병실에 누워있고 드윌란 그냥 꼴도 보기 싫었다. 레일라에 대한 복수고 끝났고 아버지라는 작자와의 인연도 잘라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주위에 남은 건.
“펠렌~!”
로벨리아였다.
그녀가 오랜만에 보는 나를 보고는 잔뜩 신나 달려왔다. 폴짝폴짝 뛰어오는 게 귀엽다. 그런데 날 보는 게 그렇게 신날 일인가?
로벨리아가 옆에 붙고는 몸을 앞으로 삐죽 숙이며 내 눈동자를 바라봤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너 없는 동안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그랬어? 나는 별로 안 심심했는데.”
김지원의 말에 살짝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치…. 너, 너는 주위에 사람이 많잖아. 나는 한 명도 없다고.”
“그래?”
로벨리아가 친구가 없다는 건 알게 모르게 의외였다. 파탄난놈이어도 저 이쁘장한 얼굴이면 충분히 커버 되고도 남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가문도 빵빵하고.
“너 정도 얼굴이면 주위에 사람이 없을 리 없는데 또 뭔 짓 했냐?”
“으음….”
로벨리아가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하긴 저 성격에 1달을 무사히 넘기는 건 힘들겠지.
웬만해서는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괜히 질문을 툭 던져 물어봤다.
“뭔데 말 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가능한 선에서 전부 도와줄게.”
로벨리아는 이 말을 기대했나 보다. 곧바로 말을 꺼냈다.
“그게 있잖아? 그… 제4 왕자님의 청혼을 거절했어.”
김지원의 뇌가 사고를 멈췄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상황을 이해하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다.
왕자님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것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일단 알겠어, 그래서?”
“그… 일단 아무 이유 없이 거절한 건 아니거든? 근데 내가 왕자님의 자존심에 크게 칼을 찌른 거 같아. 주위에서는 날 안 좋게 보고 있어, 뭔가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필요한데 혹시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나랑 사귀는 사이로 해줄 수 있어?”
“지랄 청혼을 했으면 거절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왕자 새끼가. 존나 추하네…….”
마지막 말이 뭔가 이상했던 것 같다.
“너 마지막에 뭐라고 했냐?”
“그… 나랑 사귀는 사이로 해줘….”
부끄러운지 얼굴도 붉힌다.
지랄, 절대로 안 할 거다. 사귀는 사이라니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로벨리아를 로미오라 부르고 로벨리아는 나를 달링이라고 부를 거다. 숲을 보다 글귀가 떠오르면 적어서 편지를 보내거나 앞에서 직접 떠들라는 소리다. 소녀, 소년 귀족들의 연애가 그러니 그러라는 강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싫은데? 내가 귀찮게 왜 그래야 해.”
김지원은 바로 앞에 자신의 기숙사가 보이는 걸 확인하고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 징징대며 달라붙을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럼 나중에 봐.”
웬일인지 로벨리아는 더 따라붙지 않았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 부끄러운 듯 소리쳤다.
“사, 사실 이미 너랑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 버렸어…!!”
거리를 뛰어넘어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진다. 진실이라는 거다.
김지원의 발이 우뚝 멈췄다. 순간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랐다.
“시발 진짜로?”
지금 눈앞에 있는 레일라가 그러했다. 근력도 체력도 그리고 기본기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을 끌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완벽한 기본기에서부터 완벽한 기술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웃긴 짓을 하고 있었네. 저딴 게 페르난 가문의 수신류 검술?’
유한하게 흐르는 검은 결코 끊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공격에서 공격으로 검이 이어지며 상대방이 반격한다면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되는 공방일체가 이뤄져야 했다.
완벽한 자세와 기술들은 수신류 검술 내부에 구축되어 있을 터인데 레일라는 그것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활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오러가 검술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검신들은 분명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음에도 검술을 완성하여 틀을 잡고 오러를 접목했다.
검술보다는 오러가 더욱 위대하다는 현시대의 폐해다. 검술은 더욱 퇴화하여가고 있었으니 유감스러울 따름이었다.
“레일라 잘 봐. 이게 검술이라는 거고, 네 잘난 오러 보다도 더 대단한 거야.”
좌중이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란돈 페르난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수신류…!”
잃어버린 검술, 이제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수신류 검술의 본질이 펠렌이라는 아이에게 보였다. 도대체 저 아이는 정체가 뭐지?
푸른 기운, 무거운 공기.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했다. 검술은 일절 없이 기본기로 적을 상대했다. 마치 우리에게 뭔가를 암시하듯 말이다.
기류가 변하면서 뭔가가 나타나고 있었다. 거대한 중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레일라가 이체 서린, 떨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거, 거짓말… 네가 어떻게… 그걸…!”
김지원이 검을 잡으며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 순간 김지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벽을 허물고 아득히 벗어난 검술. 기술의 극치.
모두의 눈동자가 펠렌의 경이로움에 인식을 거부했다.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수십, 수백 푸른 유체의 잔상이 시야를 뒤덮고 있었으며 전부 한 곳으로 걸어가 펠렌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거대한 바다가 보였었다. 바닷속에 숨겨진 물의 진의, 부드러움, 유한함이 방금 짧은 0.01 몇 초 사이에 보였다.
펠렌이 검을 검집에 넣었을 때는 이미 레일라가 쓰러진 뒤였다.
헤밀프로닌 크라운도 그란돈 페르난도 모두 당황했다.
교수들도, 심판들도, 관중들도, 하늘도, 멀리 세계의 진실들도.
학장이 흥미로운 얼굴로 씨익 웃고 있었다. 해설자가 마이크를 꽉 잡으며 말했다.
“올해의 첫 우승자는! 펠렌 크라운!!”
관중들이 환호한다. 이전의 몇 배,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하늘을 날던 새가 환호성에 깜짝 놀라며 우회했다.
““와아아아!!!””
“미쳤어! 저런 거 나 처음 봐! 펠렌 뭐 하는 놈이냐!!”
“로드마린 제국의 장래가 밝습니다! 저런 인재가 있으니!”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사이 몇몇은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들 일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펠렌 크라운이라는 자에 대한 토의를 시작했다.
헤밀프로닌은 당장 관중석에서 벗어나 펠렌을 만나러 갔다. 그란돈 페르난도 똑같았다.
찰나 과거 몰락한 가문을 일으킨 검신 아벨의 모습이 보였다. 자존심?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수신류 검술의 본질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웃기지 않는가? 수신류 검술을 가문 대대로 이어온 가주가 난생처음 보는 17살 꼬맹이한테 수신류 검술의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니.
그란돈의 눈앞에 펠렌이 보였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기숙사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1위라는 성적으로 마무리했음에도 무덤덤한 저 여유로움은 그란돈의 마음속에서 작게 자리 잡고 있던 의구심을 확신으로 돌려놨다. 그는 자신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페, 펠렌!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나랑 대화를!”
“뭐야, 갑자기 왜요. 여기는 외부인 출입 금지니까. 돌아가세요.”
“펠렌 군이 어떻게 수신류 검술을 배웠는지 묻지 않겠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러니 제발…. 수신류 검술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게…! 과거에는 그 해답이 적혀 있지 않았어…! 그대는 알고 있는 거지?”
경비병이 순식간에 나타나 그란돈의 양팔을 포박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그란돈 페르난.”
페르난 가문이라는 말에 펠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발… 재산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처절한 어조였다. 대대로 이어온 검술을 조금씩 잊어가며 가문의 색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가주의 마음을 펠렌이 알 리 없지만, 펠렌은 왠지 모르게 그란돈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해주기로 했다.
“지금껏 품고 있는 고정 관념을 비틀어요. 수신류는 항상 유한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때로는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휘몰아쳐야 할 때가 있고 어떨 때는 잔잔한 시냇물처럼 부드럽게 흘러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멈춰 있는 검술은 시대에 뒤떨어져요.”
펠렌이 뒤돌았다.
“그게 무슨… 검신 아벨의 가르침을 버리라는 소리인가?”
“왜 검술의 해답을 과거에서 찾으려 하세요? 검신이라는 이명이 붙어서 창시자를 뭐 거의 신으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걔도 그냥 사람이야 사람. 운 좋게 신체에서 오러를 발현하고 운 좋게 수신류 검술을 만든 사람. 완성해 나가라는 소리입니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뒤처지는 수신류 검술을 더욱 완벽하게.”
벙쩠다. 매일 같이 검신 아벨에게 꿈속에 나타나 가르침을 주길 기도하는 자신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거의 신으로 칭송하던 아벨이 한낮 인간이라는 말에 조금 화났다. 40년 인생의 노력이 헛되었다는 것인가? 17세 소년이 뭘 안다고?
반박 거리를 찾으려던 그때다.
“직접 검술의 단점을 보완하고 갈구하며 수정해서 퍼즐을 맞춰 나가요. 수신류 검술을 만질 자격이 충분한 것 같은데 왜 과거에 연연하는지 모르겠네.”
“그게 사실일 리가!! 아벨은 완벽한 존재!”
“귓구멍이 쳐 막혔어요? 그럼 시발 너는 왕국 하나 날려버릴 메테오 마법 막을 방법을 과거 마법 서적에서 찾을 거냐? 그 시절에는 네 *만 한 화염 구체가 존나게 짱 쎈 시절이었어. 그거 막는 방어 마법 개발하려 전전긍긍했는데 메테오 막을 방어 마법이 300년 전 과거에 있겠어? 당연히 마법이 발전한 현시대에 있지. 검술도 마찬가지야. 제발 부탁인데 과거에서 뭐 좀 찾으려 하지 마. 과거는 그냥 지금의 인간이 되기까지의 발자취야. 여기까지 오기 위한 노력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눈 뜨고 현실을 봐봐. 현재까지 생겨난 수십, 수백 개의 검술 중 어떤 검술이 수신류 검술에 취약한지. 어떤 검술이 수신류 검술을 뚫을 수 있는지. 그런 거를 먼저 보라고. 병신같이 매번 기도해서 날로 먹을 생각하지 말고 진심으로 책상에 앉아서 연구하라고 알겠냐? 이 병신 머저리 새끼야.”
어느 순간 펠렌은 반말을 찍찍 내뱉고 있었다. 반말했다는 사실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란돈은 경비병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펠렌이 한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를 보라는 말이.
김지원은 한숨을 내뱉으며 기숙사로 걸어갔다.
“븅신 가르침을 달라면서 반박하고 지랄이네 그럴 거면 왜 쳐 물어본 거야. 지 *대로 하지 그냥.”
그때다.
“아들아…!!”
이번에는 왠 벌레가 꼬인 모양이다. 목소리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펠렌을 버린 아버지라는 작자.
헤밀프로닌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전부 잘못했네… 그러니 제발 다시 돌아와다오…. 아들아….”
역겨운 크라운 가문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말의 의미에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돌아가라니 뭔 개소리지? 이 양반이 낮술을 했나?
이제는 끝내야 한다. 역겨운 가문에서 나갈 기회가 왔으니 말이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어도, 과거를 반성하고 있어도 소용없다.
“거 아저씨. 복권이라도 당첨된 양 정신이 오락가락한 모양인데. 나 이제 당신 아들 아니야. 반성하고 있으면 당장 호적에서 팔 생각이나 해. 역겨워서 뭔 대화를 못 하겠네. 버릴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눈 비비고 보니까 다시 아들로 보이나 보지? 그전까지는 아들도 아니었으면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너무 멀어졌어.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거지. 그대로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썩어줬으면 좋겠네. 물론 그 죄책감도 얼마 안 가 잊어버리겠지만.”
김지원은 무릎을 꿇은 그를 차갑게 무시하고 뒤돌았다.
헤밀프로닌의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음의 진위가 굉장히 안타깝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아니긴… 쯧.”
안타깝긴 하나 이 몸에 남아 있는 펠렌의 잔해가 울부짖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라는 놈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반성하는 듯 보였으니 김지원은 참회를 받아들이고 평범한 부자지간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이 육체는 아니었나 보다.
나는 편하게 육체의 우선권을 보장받았으니 그에 걸맞게 이 육체에 남아 있는 원한을 풀어줘야 한다. 그것이 옳게 된 것이고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이유라고 생각됐으니까.
그것이 분노하고 있는 이 육체를 위해서도 항상 가슴 한켠이 답답해 미치겠는 나를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말이 맞았듯 육체에는 더 이상의 여한이 없어 보였다. 가문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답답하고 꽉 막힌 느낌이 들지 않고 뻥 뚫린 것 같다.
펠렌 크라운이 이걸 원했다. 난 너의 아들이 아니라 내뱉길 간절히 소망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에 누군가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그게 우연히 나였고 보란 듯이 해냈으니까 이게 맞는 거겠지.
김지원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이 육체를 나와 현생으로 돌아가는 건가? 펠렌의 몸속에서 임무를 완수했고 그러면 모두 끝난 것이다. 더 할 게 남아 있다면 지금 당장 낮잠을 때리는 게 전부지.
이대로 잠을 자면 현실로 돌아갈까?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까 사실 전부 꿈 이런 거 아닐까?
내 뜻대로 온 것이 아니니 돌아가는 것도 분명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김지원은 기숙사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 옆으로 평범하게 대화하는 학생 무리가 스쳐 지나갔다.
“꺄하핳 진짜야?”
“어! 그래서 걔가-”
“…….”
뭔가 허무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름 삶의 목표가 있었는데 그걸 잃어버린 기분?
미궁에 있을 때는 그래도 나름 생과 사를 오가서 짜릿짜릿했었다.
제나단은 아파서 병실에 누워있고 드윌란 그냥 꼴도 보기 싫었다. 레일라에 대한 복수고 끝났고 아버지라는 작자와의 인연도 잘라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주위에 남은 건.
“펠렌~!”
로벨리아였다.
그녀가 오랜만에 보는 나를 보고는 잔뜩 신나 달려왔다. 폴짝폴짝 뛰어오는 게 귀엽다. 그런데 날 보는 게 그렇게 신날 일인가?
로벨리아가 옆에 붙고는 몸을 앞으로 삐죽 숙이며 내 눈동자를 바라봤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너 없는 동안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그랬어? 나는 별로 안 심심했는데.”
김지원의 말에 살짝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치…. 너, 너는 주위에 사람이 많잖아. 나는 한 명도 없다고.”
“그래?”
로벨리아가 친구가 없다는 건 알게 모르게 의외였다. 파탄난놈이어도 저 이쁘장한 얼굴이면 충분히 커버 되고도 남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가문도 빵빵하고.
“너 정도 얼굴이면 주위에 사람이 없을 리 없는데 또 뭔 짓 했냐?”
“으음….”
로벨리아가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하긴 저 성격에 1달을 무사히 넘기는 건 힘들겠지.
웬만해서는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괜히 질문을 툭 던져 물어봤다.
“뭔데 말 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가능한 선에서 전부 도와줄게.”
로벨리아는 이 말을 기대했나 보다. 곧바로 말을 꺼냈다.
“그게 있잖아? 그… 제4 왕자님의 청혼을 거절했어.”
김지원의 뇌가 사고를 멈췄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상황을 이해하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다.
왕자님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것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일단 알겠어, 그래서?”
“그… 일단 아무 이유 없이 거절한 건 아니거든? 근데 내가 왕자님의 자존심에 크게 칼을 찌른 거 같아. 주위에서는 날 안 좋게 보고 있어, 뭔가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필요한데 혹시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나랑 사귀는 사이로 해줄 수 있어?”
“지랄 청혼을 했으면 거절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왕자 새끼가. 존나 추하네…….”
마지막 말이 뭔가 이상했던 것 같다.
“너 마지막에 뭐라고 했냐?”
“그… 나랑 사귀는 사이로 해줘….”
부끄러운지 얼굴도 붉힌다.
지랄, 절대로 안 할 거다. 사귀는 사이라니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로벨리아를 로미오라 부르고 로벨리아는 나를 달링이라고 부를 거다. 숲을 보다 글귀가 떠오르면 적어서 편지를 보내거나 앞에서 직접 떠들라는 소리다. 소녀, 소년 귀족들의 연애가 그러니 그러라는 강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싫은데? 내가 귀찮게 왜 그래야 해.”
김지원은 바로 앞에 자신의 기숙사가 보이는 걸 확인하고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 징징대며 달라붙을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럼 나중에 봐.”
웬일인지 로벨리아는 더 따라붙지 않았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 부끄러운 듯 소리쳤다.
“사, 사실 이미 너랑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 버렸어…!!”
거리를 뛰어넘어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진다. 진실이라는 거다.
김지원의 발이 우뚝 멈췄다. 순간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랐다.
“시발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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