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조회 : 1,670 추천 : 2 글자수 : 5,822 자 2022-09-01
머릿속으로 남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
앞에 거대한 짐 덩이와 마차 한 대가 보인다.
[글쎄 어떻게든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멋지게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왠지 모르게 속 시원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저 가문의 골칫거리 쓰레기였던 거다.
펠렌 크라운.
[아카데미에 가서 발버둥 쳐봐라.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모쪼록 힘내보게.]
정황상 이는 버려진 것이다. 1년 전 이별을 마지막으로 가문의 사람과는 얼굴도 목소리도 섞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다.
뒤죽박죽인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잔상처럼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이것들은 본래 이 몸뚱아리 주인의 기억이다. 살아온 17년의 인생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뼛속 깊이 남은 아픈 과거, 행복한 기억이 추억으로 변한 쓰라린 과거. 같은 가문의 또래 아이들에게 비교당하고 무시, 경멸, 핍박, 폭력. 그런 상태가 길게 지속되면 나타나는 생각들.
과거는 아프고
현재는 괴롭고
미래는 두렵다
죽고 싶다.
고통스러웠다. 억울하고 분하고 심장이 찢어질 듯했고 서러워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듯 쑤셔왔다.
힘이 없으면 버려진다.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고 재능을 개화하지 못하면 실망스런 눈빛과 함께 버려진다.
어두운 미래만을 앞둔 펠렌은 강해지기 위해서, 재능을 개화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노력해봤지만, 또래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비통함에 눈물이 흐른다. 동시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펠렌의 얼굴에 분노가 한 겹 씌워진다.
이것은 밝히지 않고 깊숙이 숨겨뒀던 펠렌이라는 소년의 과거이자 전부인 듯 보였다. 재능이 단 눈곱만큼도 없는 불쌍한 아이.
추억 하나 없이 압박 속에서 살아온 아이다. 명석한 두뇌도 없고 착해 빠져서는 검도 휘두를 줄 모르고 마법도 개화하지 못했다. 극악의 확률을 뚫고 최약체의 기질을 타고난 것이다. 눈이 떠진다.
김지원이 현실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앞의 모든 동체가 생생한데 어떤 멍청이가 꿈과 현실을 헷갈릴까.
낙엽이 바람의 저항을 받으며 천천히 떨어지고 몰린 인파의 숙덕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온다. 파란 하늘 한국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맑은 공기다.
천천히 주위 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미친··· 방금 평민이랑 귀족을 비교한 거야? 단단히 돌았네.”
“제 어디 가문이야?”
그 비난 섞인 목소리들은 전부 펠렌이라는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다.
흐릿한 시야를 다잡으니 김지원은 그 인파의 중심에 있었다.
‘어?’
김지원은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자기 손바닥을 줬다 폈다 하고는 지긋이 보다 다급히 고개를 앞으로 하며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 노려보는 소녀는 김지원을 향한 손바닥에 바람 마법을 장전하고 있었다. 바람이 굉음을 내며 압축하고 있다.
펠렌의 마지막 기억과 함께 빙의 전 대화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야, 길 막지 말고 비켜]
로벨리아라는 소녀가 펠렌을 강하게 밀쳤다. 당연히 펠렌 입장에서는 화날 수밖에 없다. 양옆으로 지나갈 공간이 충분한데 그게 귀찮아서 옆으로 밀친 것 아닌가.
개빡친 펠렌이 한 말 했다.
[평민만도 못한 벌레 새끼가 예의를 가문에다가 팔고 왔냐?]
아카데미 입학식장에서 벌어지는 가끔가다 등장한 이벤트 같은 일이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은 온실 속 화초에서 자란 한 성깔 하는 도련님과 아가씨다. 자존심은 더럽게 세면서 조금의 양보도 없는 개 싸가지들.
상황이 이해가 된다. 귀족한테 평민만도 못하다니 그보다 심한 욕이 있을까.
저 로벨라아라는 여자가 먼저 시비를 걸기는 했어도, 내가 잘 못 한 것은 아니어도 그래도 사과하자.
“사과할게.”
로벨리아가 콧방귀를 뀐다.
“허 사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 안 해?”
-꽈악
진짜 미친년.
김지원은 쳐 날아올지 모르는 마법을 생각하니 절로 감정이 조절되었다. 차분히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
-파앙!!
로벨리아라는 소녀의 손에서 마법이 가차 없이 발사됐다. 압축된 공기가 터지듯 격음이 울리며 마법은 곧장 쇄도해 김지원의 복부에 적중하였다. 눈으로 마법 구체를 봤음에도 김지원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퍼억!
“커헉!”
프로 야구 선수의 강속구보다 몇 배는 더 빠른 것 같다. 그리고 복싱 선수가 풀파워도 복부를 때려도 분명 이보다 약할 것이다.
-쾅!
숨은 안 쉬어지고 몸은 하늘에 뜨며 멀리까지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벽에 강하게 부딪힌 김지원은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소녀는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소녀는 양손을 꼬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 몰려 있던 인파도 상황이 종료되자 분해되기 시작했다.
“끝났네.”
“이거 너무 싱거운데?”
김지원이 아픈 몸을 뒤로하며 멀리 걸어가는 로벨리아를 바라봤다.
“끄윽··· 저··· 저··· 미친 또라이···년.”
김지원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억울함에 머리가 벙찌고 말문이 막힐 뿐이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하지 않았으면 마법에 턱이 날아갔을 것이다. 진짜, 진짜로 뒤질 뻔했다.
‘별 이유 없이 마법을 쏴 재껴? 융통성이 없는 건가?’
마법에 처맞은 덕분인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한 층 더 실감 난다. 머리가 띵하다. 사고방식이 멈춘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평민이 뭐가 어때서. 평민이 어째서 싫은 건데.
-꽈악
괜히 가만히 있다 화를 입은 김지원은 2차로 억울함이 밀려왔다.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데 여기 사람들은 그다지 융통성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억울해봤자 울며 겨자 먹기지.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고 김지원은 애써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날 뿐이었다.
“······.”
몸이 생각 외로 튼튼한 탓에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단 정리해보자. 당황스럽긴 하지만 펠렌이라는 놈에 빙의한 모양이다.
이곳은 지구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존재하기에 단정할 수 있었다.
간지 작살나는 드래곤이 불을 쏴 재끼고 초일류 마법사가 마법을 쓰면 운석이 떨어져 산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다.
현실성 없는 마법에 현실성 없는 화려한 검술. 엘프라던가 키 작은 드워프라던가. 펠렌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이 사실을 모두 입증해줬다.
판타지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렌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이미 재능 없고 열등감만 가득한 똥 대가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꽉 막혀 막막할 뿐이다. 헬조선에서 쓰디쓴 인생을 살아본 것만으로 족하단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능 없으면 나락인 세상에서 재능이 눈에 낀 눈곱만큼도 없는 극악 난이도 인생? 심지어 난 죽지도 않았어. 자고 일어나니까 여기라고.
시발 억울하다.
소설에서 보면 빙의한 주인공들이 말도 안 되게 강하다거나, 재능, 치트 급 스킬들로 날로 먹는 개꿀 인생 라이프를 즐긴다.
근데 시팔 그건 작가 놈들의 망상이고 여기는 그런 망상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이다.
빙판길을 걷다 넘어져서 죽고, 번개에 감전당해 죽고, 갑자기 건물이 폭삭 가라앉아 죽고, 심장 마비가 와서 죽을 확률이 도사리는 그런 현실.
갑자기 내게 없던 슈퍼 파워가 생긴다거나 깨달음을 얻고 재능을 개화한다는 망상은 소설에나 나오지, 현실에는 없다는 소리다.
김지원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프릴 아카데미 입학 증명서를 펼쳐봤다.
웃긴 건 이걸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더 웃긴 건 뭔지 아는가? 나는 한국에 미련이 없다. 되려 지겨울 뿐이다. 부모님을 일찍이 떠나보내고 어떻게든 혼자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나름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내 옆에는 응원해주는 사람도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쓸쓸히 타이어를 등에 묶고 나아갈 코피 터지는 평생의 지옥 주일 뿐이다.
그래서 고3 시절에, 다 때려치우고 야간에는 알바하며 남은 시간에는 게임을 했다. 레벨업하고, 성장하고 진짜 정말 존나게 재밌었다. 그리고 여기가 그 판타지 세상이다. 개똥 망캐로 빙의했지만 흘러가는 대로 사는 김지원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젠장 알 생각해보니 너무 설렌다. 아무 이유 없이 이곳으로 끌려온 건 더럽지만 말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마법을 개화할 재능이랑 검술을 다룰 재능이 없다고 해도 여기는 판타지 세계다.
그것만으로 너무 설렜기에 이곳에서 인생을 좆 박아도 계속 설렐 것이다.
망가진 머리를 손으로 휘저으며 대충 다듬은 뒤 앞으로 걸어갈 찰나였다.
[메인 퀘스트Ⅰ 발생]
<진행하시겠습니까?>
(네) or (아니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직사각형 스크린이 눈앞에 나타났다.
“···?”
마법의 일종인가? 김지원이 당황하며 빠르게 고개를 돌려본다. 펜렐의 기억에도 없던 이 신기한 현상에 놀랍도록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김지원은 헛기침을 시선을 끌고는 걸어가는 남자 학생 입학생 옆으로 가까이 붙어봤다.
또래 남자가 나를 1초 정도 짧게 쳐다보다 무관심하게 앞을 보고는 다시 걸어갔다.
혹시 그 건가?
이거 나한테만 보이는? 그거?
≪메인 퀘스트Ⅰ (진행 중)≫
<복수1>
입학시험에서 로벨리아에게 복수하고 승리를 쟁취해오세요.
[보상:천재적인 재능 선택권]
이거 그거다. 매번 소설에 밥 먹듯이 나오고 웹툰에 나오는 그것. 게임에서 나오는 그것!
플레이어 성장 시스템!
“미친···.”
떴다. 이 개 같은 하드코어 난이도에서 살아남을 희망이 어둠 속에서 빛을 보이기 시작한다.
희비가 교차한다.
찌뿌둥한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게 번졌다.
그래 말도 안 되지.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 덩그러니 던져 놓고 그냥 살아가라니.
김지원은 확신했다.
이건 게임이라고. 아니면 판타지 소설 속 어딘가라고.
씨익.
묘하게 자신감이 생겼다.
나 김지원. 그렇게 나약한 인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호랑이의 기운을 가진 자랑스런 한국인이란 말이다.
겜창 인생 20년, 목숨 하나짜리 하드코어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일단은 해볼 만하다.
나라면 분명 마우스를 잡을 것이다. 그 뒤에 개 같은 망겜이라고 욕을 하든 말든 게임을 삭제하든 말든 할 것이다.
그래 개똥 쓰레기 캐릭터로 빙의해도 일단 게임 진행은 가능하다는 소리니까.
다른 학생들과 함께 레드카펫과 천장에 샹들리에가 있는 복도를 거닐고 문으로 들어가며 남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마음을 다잡듯 김지원도 마음을 다잡았다.
“해보자.”
* * *
“에르젠 제국을 이끌어갈 꿈나무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프릴 아카데미 총책임자이자 학장인 리보르나 세레린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저도 반갑네요. 학장님.’
학장님의 외모가 심상치 않다. 하얀 피부색에 고운 외모 그렇다고 몸은 여리여리하지 않다. 양복을 걸쳐 입었지만 다부진 육체가 엿보였으니.
분명 마법으로 얼굴을 뜯어고쳤다. 마법적 지식이 없어도 이질적인 모습에 김지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앞으로에 대해서 편하게 고민했다. 학장의 말이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 오고 김지원도 이들 따라 박수 쳤다.
학장이 10초 동안 뒷짐 지고 가만히 있다, 이내 손을 들며 끊이지 않는 박수 소리를 중재했다.
그리고 외모로 하여금 다시금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교육의 질과 수준 면에서 우리 프릴 아카데미는 오늘날까지 탁월한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오늘의 시작이 여러분의 성장에 대한 위대한 도전이 되고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짝짝짝짝.
‘감사합니다.’
김지원은 속으로 그리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나 했는데 저 멀리 날이 바짝 선 로벨리아가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처참히 날려놓고도 화가 덜 풀린 건지. 평민이랑 자신이랑 비교한 게 어지간히도 화났나 보다.
눈이 마주치고 김지원의 시선을 확인한 로벨리아가 제 목을 엄지로 그었다.
죽일 기세가 아니라 죽이겠다는 예고였다.
<복수1>
입학시험에서 로벨리아에게 복수하고 승리하세요.
로벨리아와의 결투에서 승리 0/1
(보상:천재적인 재능 선택권)
100번 양보해 제대로 선처를 구하고 싶지만 이걸 보니 그럴 마음이 싹 가셨다.
천재적인 재능 선택권? 말 그대로 날 천재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 아닌가.
애초에 욕먹을 짓을 하지 말던가. 니들이 욕하고 가축과 저울질하는 평민이랑 생물학적으로 다를 바 없는데 뭘 삐딱 서고, 자빠졌나.
이럴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저년도 그리 착하지 않다.
이 세상은 착해빠지면 착해빠진 놈이 잘못된 세상 아닌가.
김지원은 로벨리아에게 중지를 들어 보였다. 이미 학교에 입학했고 아카데미 내부에서의 폭력은 중죄로써 퇴학으로 처리된다.
로벨리아의 얼굴에 분노가 부글거린다. 피식 비웃으며 통쾌하게 앞을 보던 차 김지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자리 잡았다.
나는 이미 프릴 아카데미 입학 증명서를 가지고 있다.
아카데미에 근무하고 있는 교수들이 차례로 걸어 나오며 한마디씩 덕담과 함께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인사했다. 본질은 환영 인사였다. 그래 나는 이미 입학한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 입학시험에서 로벨리아를 이기라 하는 건가.
입학시험은 본래 입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지원자들을 평가하는 것 아닌가.
스토리의 치명적인 오류?
20분가량 더 흘렀을까.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갑작스럽게 입학식을 시작한다는 안내가 전해졌다.
학생들은 이미 숙지한 사항이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 사람과 원수라도 되는 양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김지원은 그제야 입학식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흔히 열등반이나 우등반을 나누지 않는가. 다른 의미로 알파(Aleph)와 베타(Beta).
로벨리아와의 결투에서 승리 0/1
퀘스트의 내용으로 예상컨대 아무래도 이 게임은 망겜이 맞는 것 같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
앞에 거대한 짐 덩이와 마차 한 대가 보인다.
[글쎄 어떻게든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멋지게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왠지 모르게 속 시원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저 가문의 골칫거리 쓰레기였던 거다.
펠렌 크라운.
[아카데미에 가서 발버둥 쳐봐라.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모쪼록 힘내보게.]
정황상 이는 버려진 것이다. 1년 전 이별을 마지막으로 가문의 사람과는 얼굴도 목소리도 섞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다.
뒤죽박죽인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잔상처럼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이것들은 본래 이 몸뚱아리 주인의 기억이다. 살아온 17년의 인생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뼛속 깊이 남은 아픈 과거, 행복한 기억이 추억으로 변한 쓰라린 과거. 같은 가문의 또래 아이들에게 비교당하고 무시, 경멸, 핍박, 폭력. 그런 상태가 길게 지속되면 나타나는 생각들.
과거는 아프고
현재는 괴롭고
미래는 두렵다
죽고 싶다.
고통스러웠다. 억울하고 분하고 심장이 찢어질 듯했고 서러워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듯 쑤셔왔다.
힘이 없으면 버려진다.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고 재능을 개화하지 못하면 실망스런 눈빛과 함께 버려진다.
어두운 미래만을 앞둔 펠렌은 강해지기 위해서, 재능을 개화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노력해봤지만, 또래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비통함에 눈물이 흐른다. 동시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펠렌의 얼굴에 분노가 한 겹 씌워진다.
이것은 밝히지 않고 깊숙이 숨겨뒀던 펠렌이라는 소년의 과거이자 전부인 듯 보였다. 재능이 단 눈곱만큼도 없는 불쌍한 아이.
추억 하나 없이 압박 속에서 살아온 아이다. 명석한 두뇌도 없고 착해 빠져서는 검도 휘두를 줄 모르고 마법도 개화하지 못했다. 극악의 확률을 뚫고 최약체의 기질을 타고난 것이다. 눈이 떠진다.
김지원이 현실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앞의 모든 동체가 생생한데 어떤 멍청이가 꿈과 현실을 헷갈릴까.
낙엽이 바람의 저항을 받으며 천천히 떨어지고 몰린 인파의 숙덕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온다. 파란 하늘 한국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맑은 공기다.
천천히 주위 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미친··· 방금 평민이랑 귀족을 비교한 거야? 단단히 돌았네.”
“제 어디 가문이야?”
그 비난 섞인 목소리들은 전부 펠렌이라는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다.
흐릿한 시야를 다잡으니 김지원은 그 인파의 중심에 있었다.
‘어?’
김지원은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자기 손바닥을 줬다 폈다 하고는 지긋이 보다 다급히 고개를 앞으로 하며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 노려보는 소녀는 김지원을 향한 손바닥에 바람 마법을 장전하고 있었다. 바람이 굉음을 내며 압축하고 있다.
펠렌의 마지막 기억과 함께 빙의 전 대화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야, 길 막지 말고 비켜]
로벨리아라는 소녀가 펠렌을 강하게 밀쳤다. 당연히 펠렌 입장에서는 화날 수밖에 없다. 양옆으로 지나갈 공간이 충분한데 그게 귀찮아서 옆으로 밀친 것 아닌가.
개빡친 펠렌이 한 말 했다.
[평민만도 못한 벌레 새끼가 예의를 가문에다가 팔고 왔냐?]
아카데미 입학식장에서 벌어지는 가끔가다 등장한 이벤트 같은 일이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은 온실 속 화초에서 자란 한 성깔 하는 도련님과 아가씨다. 자존심은 더럽게 세면서 조금의 양보도 없는 개 싸가지들.
상황이 이해가 된다. 귀족한테 평민만도 못하다니 그보다 심한 욕이 있을까.
저 로벨라아라는 여자가 먼저 시비를 걸기는 했어도, 내가 잘 못 한 것은 아니어도 그래도 사과하자.
“사과할게.”
로벨리아가 콧방귀를 뀐다.
“허 사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 안 해?”
-꽈악
진짜 미친년.
김지원은 쳐 날아올지 모르는 마법을 생각하니 절로 감정이 조절되었다. 차분히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
-파앙!!
로벨리아라는 소녀의 손에서 마법이 가차 없이 발사됐다. 압축된 공기가 터지듯 격음이 울리며 마법은 곧장 쇄도해 김지원의 복부에 적중하였다. 눈으로 마법 구체를 봤음에도 김지원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퍼억!
“커헉!”
프로 야구 선수의 강속구보다 몇 배는 더 빠른 것 같다. 그리고 복싱 선수가 풀파워도 복부를 때려도 분명 이보다 약할 것이다.
-쾅!
숨은 안 쉬어지고 몸은 하늘에 뜨며 멀리까지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벽에 강하게 부딪힌 김지원은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소녀는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소녀는 양손을 꼬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 몰려 있던 인파도 상황이 종료되자 분해되기 시작했다.
“끝났네.”
“이거 너무 싱거운데?”
김지원이 아픈 몸을 뒤로하며 멀리 걸어가는 로벨리아를 바라봤다.
“끄윽··· 저··· 저··· 미친 또라이···년.”
김지원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억울함에 머리가 벙찌고 말문이 막힐 뿐이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하지 않았으면 마법에 턱이 날아갔을 것이다. 진짜, 진짜로 뒤질 뻔했다.
‘별 이유 없이 마법을 쏴 재껴? 융통성이 없는 건가?’
마법에 처맞은 덕분인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한 층 더 실감 난다. 머리가 띵하다. 사고방식이 멈춘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평민이 뭐가 어때서. 평민이 어째서 싫은 건데.
-꽈악
괜히 가만히 있다 화를 입은 김지원은 2차로 억울함이 밀려왔다.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데 여기 사람들은 그다지 융통성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억울해봤자 울며 겨자 먹기지.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고 김지원은 애써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날 뿐이었다.
“······.”
몸이 생각 외로 튼튼한 탓에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단 정리해보자. 당황스럽긴 하지만 펠렌이라는 놈에 빙의한 모양이다.
이곳은 지구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존재하기에 단정할 수 있었다.
간지 작살나는 드래곤이 불을 쏴 재끼고 초일류 마법사가 마법을 쓰면 운석이 떨어져 산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다.
현실성 없는 마법에 현실성 없는 화려한 검술. 엘프라던가 키 작은 드워프라던가. 펠렌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이 사실을 모두 입증해줬다.
판타지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렌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이미 재능 없고 열등감만 가득한 똥 대가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꽉 막혀 막막할 뿐이다. 헬조선에서 쓰디쓴 인생을 살아본 것만으로 족하단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능 없으면 나락인 세상에서 재능이 눈에 낀 눈곱만큼도 없는 극악 난이도 인생? 심지어 난 죽지도 않았어. 자고 일어나니까 여기라고.
시발 억울하다.
소설에서 보면 빙의한 주인공들이 말도 안 되게 강하다거나, 재능, 치트 급 스킬들로 날로 먹는 개꿀 인생 라이프를 즐긴다.
근데 시팔 그건 작가 놈들의 망상이고 여기는 그런 망상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이다.
빙판길을 걷다 넘어져서 죽고, 번개에 감전당해 죽고, 갑자기 건물이 폭삭 가라앉아 죽고, 심장 마비가 와서 죽을 확률이 도사리는 그런 현실.
갑자기 내게 없던 슈퍼 파워가 생긴다거나 깨달음을 얻고 재능을 개화한다는 망상은 소설에나 나오지, 현실에는 없다는 소리다.
김지원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프릴 아카데미 입학 증명서를 펼쳐봤다.
웃긴 건 이걸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더 웃긴 건 뭔지 아는가? 나는 한국에 미련이 없다. 되려 지겨울 뿐이다. 부모님을 일찍이 떠나보내고 어떻게든 혼자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나름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내 옆에는 응원해주는 사람도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쓸쓸히 타이어를 등에 묶고 나아갈 코피 터지는 평생의 지옥 주일 뿐이다.
그래서 고3 시절에, 다 때려치우고 야간에는 알바하며 남은 시간에는 게임을 했다. 레벨업하고, 성장하고 진짜 정말 존나게 재밌었다. 그리고 여기가 그 판타지 세상이다. 개똥 망캐로 빙의했지만 흘러가는 대로 사는 김지원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젠장 알 생각해보니 너무 설렌다. 아무 이유 없이 이곳으로 끌려온 건 더럽지만 말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마법을 개화할 재능이랑 검술을 다룰 재능이 없다고 해도 여기는 판타지 세계다.
그것만으로 너무 설렜기에 이곳에서 인생을 좆 박아도 계속 설렐 것이다.
망가진 머리를 손으로 휘저으며 대충 다듬은 뒤 앞으로 걸어갈 찰나였다.
[메인 퀘스트Ⅰ 발생]
<진행하시겠습니까?>
(네) or (아니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직사각형 스크린이 눈앞에 나타났다.
“···?”
마법의 일종인가? 김지원이 당황하며 빠르게 고개를 돌려본다. 펜렐의 기억에도 없던 이 신기한 현상에 놀랍도록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김지원은 헛기침을 시선을 끌고는 걸어가는 남자 학생 입학생 옆으로 가까이 붙어봤다.
또래 남자가 나를 1초 정도 짧게 쳐다보다 무관심하게 앞을 보고는 다시 걸어갔다.
혹시 그 건가?
이거 나한테만 보이는? 그거?
≪메인 퀘스트Ⅰ (진행 중)≫
<복수1>
입학시험에서 로벨리아에게 복수하고 승리를 쟁취해오세요.
[보상:천재적인 재능 선택권]
이거 그거다. 매번 소설에 밥 먹듯이 나오고 웹툰에 나오는 그것. 게임에서 나오는 그것!
플레이어 성장 시스템!
“미친···.”
떴다. 이 개 같은 하드코어 난이도에서 살아남을 희망이 어둠 속에서 빛을 보이기 시작한다.
희비가 교차한다.
찌뿌둥한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게 번졌다.
그래 말도 안 되지.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 덩그러니 던져 놓고 그냥 살아가라니.
김지원은 확신했다.
이건 게임이라고. 아니면 판타지 소설 속 어딘가라고.
씨익.
묘하게 자신감이 생겼다.
나 김지원. 그렇게 나약한 인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호랑이의 기운을 가진 자랑스런 한국인이란 말이다.
겜창 인생 20년, 목숨 하나짜리 하드코어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일단은 해볼 만하다.
나라면 분명 마우스를 잡을 것이다. 그 뒤에 개 같은 망겜이라고 욕을 하든 말든 게임을 삭제하든 말든 할 것이다.
그래 개똥 쓰레기 캐릭터로 빙의해도 일단 게임 진행은 가능하다는 소리니까.
다른 학생들과 함께 레드카펫과 천장에 샹들리에가 있는 복도를 거닐고 문으로 들어가며 남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마음을 다잡듯 김지원도 마음을 다잡았다.
“해보자.”
* * *
“에르젠 제국을 이끌어갈 꿈나무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프릴 아카데미 총책임자이자 학장인 리보르나 세레린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저도 반갑네요. 학장님.’
학장님의 외모가 심상치 않다. 하얀 피부색에 고운 외모 그렇다고 몸은 여리여리하지 않다. 양복을 걸쳐 입었지만 다부진 육체가 엿보였으니.
분명 마법으로 얼굴을 뜯어고쳤다. 마법적 지식이 없어도 이질적인 모습에 김지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앞으로에 대해서 편하게 고민했다. 학장의 말이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 오고 김지원도 이들 따라 박수 쳤다.
학장이 10초 동안 뒷짐 지고 가만히 있다, 이내 손을 들며 끊이지 않는 박수 소리를 중재했다.
그리고 외모로 하여금 다시금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교육의 질과 수준 면에서 우리 프릴 아카데미는 오늘날까지 탁월한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오늘의 시작이 여러분의 성장에 대한 위대한 도전이 되고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짝짝짝짝.
‘감사합니다.’
김지원은 속으로 그리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나 했는데 저 멀리 날이 바짝 선 로벨리아가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처참히 날려놓고도 화가 덜 풀린 건지. 평민이랑 자신이랑 비교한 게 어지간히도 화났나 보다.
눈이 마주치고 김지원의 시선을 확인한 로벨리아가 제 목을 엄지로 그었다.
죽일 기세가 아니라 죽이겠다는 예고였다.
<복수1>
입학시험에서 로벨리아에게 복수하고 승리하세요.
로벨리아와의 결투에서 승리 0/1
(보상:천재적인 재능 선택권)
100번 양보해 제대로 선처를 구하고 싶지만 이걸 보니 그럴 마음이 싹 가셨다.
천재적인 재능 선택권? 말 그대로 날 천재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 아닌가.
애초에 욕먹을 짓을 하지 말던가. 니들이 욕하고 가축과 저울질하는 평민이랑 생물학적으로 다를 바 없는데 뭘 삐딱 서고, 자빠졌나.
이럴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저년도 그리 착하지 않다.
이 세상은 착해빠지면 착해빠진 놈이 잘못된 세상 아닌가.
김지원은 로벨리아에게 중지를 들어 보였다. 이미 학교에 입학했고 아카데미 내부에서의 폭력은 중죄로써 퇴학으로 처리된다.
로벨리아의 얼굴에 분노가 부글거린다. 피식 비웃으며 통쾌하게 앞을 보던 차 김지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자리 잡았다.
나는 이미 프릴 아카데미 입학 증명서를 가지고 있다.
아카데미에 근무하고 있는 교수들이 차례로 걸어 나오며 한마디씩 덕담과 함께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인사했다. 본질은 환영 인사였다. 그래 나는 이미 입학한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 입학시험에서 로벨리아를 이기라 하는 건가.
입학시험은 본래 입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지원자들을 평가하는 것 아닌가.
스토리의 치명적인 오류?
20분가량 더 흘렀을까.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갑작스럽게 입학식을 시작한다는 안내가 전해졌다.
학생들은 이미 숙지한 사항이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 사람과 원수라도 되는 양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김지원은 그제야 입학식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흔히 열등반이나 우등반을 나누지 않는가. 다른 의미로 알파(Aleph)와 베타(Beta).
로벨리아와의 결투에서 승리 0/1
퀘스트의 내용으로 예상컨대 아무래도 이 게임은 망겜이 맞는 것 같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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