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좋은 꿈 꾸세요, 나의 주군.
조회 : 882 추천 : 1 글자수 : 5,263 자 2022-09-03
2화.
"황녀님, 황제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이리 주렴."
황제가 서신을 보냈다.
혹시 일기에 등장한 '그'가 황제인 건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오늘 오후 2시, 나와 티타임 약속이 잡혀있는 건 잊지 않았겠지. 늘 그랬듯이, 단정히 입고 나오너라.-
오늘, 오후 2시.
일기에 따르면 오늘, '그'가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또한, 내가 어딘가에 복귀해야 한다는 말 역시도 적혀 있었다. 꽤나 공교로운 타이밍이다.
"왠지 꺼림칙한데."
이전 추리물 소설에서 탐정으로 활약했던 촉이 발동했다. 편지 내용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무적으로 대화하는 건조한 부녀 관계는 사실 로판 세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으니까. 황족일 경우 더더욱. 하지만 수상한 일기를 보아서일까.
빙의 첫 날부터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골이 다 지끈거리네."
해피 엔딩을 결심한지 얼마나 됐다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문구를 보고.
최애를 조심하라는 메모 덕에 의문만 커지고.
그런 와중에 '그'가 당최 누구인지도 모르겠는 혼란 속에서 황제와의 티타임을 위해 당장 준비를 해야 하는.
그래서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황녀님,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이 능숙한 손길로 날 앉혀둔 채 분을 바르고 치장을 도왔다.
"장신구는 늘 하시던 걸로 할게요, 황녀님."
아까 내가 청소를 시켰던 시녀가 내 목에 감촉이 다소 까슬한 무언가를 매어주었다. 거울로 보니 정중앙에 토파즈가 박힌 화려한 목걸이였다.
"그래."
무대에 오르기 전 아이돌 메이크업을 받는 기분.
황제가 뭐라고, 헤어부터 코디까지 모두가 만반의 준비를 했다.
30분만에 사람을 이렇게까지 탈바꿈시킬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시간이 되었다. 가는 게 좋겠어."
시녀들 몇 명을 대동해 황제와의 첫 대면에 나섰다.
굳이 티타임을 경치 좋은 야외 테라스 놔두고 황제의 집무실에서 갖겠다니.
의문을 품으며 걸음을 옮겼다.
**
"왔느냐. 이사벨."
"폐하를 뵙습니다."
드라마에서 봤던 대로,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다행히 예법에 맞게 한 것인지 황제는 내 행동을 크게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그래, 어서 앉거라."
황제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으, 떫어.
무슨 차를 우린 거야.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져 각설탕을 넣어서 미각을 소생시켰다.
"아직도 입맛이 어리구나."
넌지시 핀잔을 주고는 그가 본론을 꺼냈다.
"이제 복귀할 때가 되었다, 이사벨."
복귀.
일기에서 보았던 그 단어가 등장했다.
"무엇에 대한 복귀를 말씀하시는지요?"
"2년 휴가는 끝났으니, 결사대 단장으로 복귀하라는 말이다."
2년, 휴가, 결사대?
나는 모르는 정보들이 흘러들어왔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있자 황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또 기억을 잃었나. 이래서 마나 회로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건데..."
그가 책상 밑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읽어보아라."
<-사건 번호 004. 데스 게임->
사건 개요 :
흑마법사 세력 '에반게리온'이 만든 것으로 추정
백성들을 꾀어 아공간에 가두고, 데스 게임을 실시해 그들끼리 유흥을 즐기는 것으로 보임
피해 정도 :
사망 확인 2,300명
실종 인원 수 1,600명
확보된 증언 없음.
<정보> '에반게리온'은 흉악 범죄를 여럿 일으킨... (중략)
"이걸 제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데스 게임.
데스 게임이라 함은, 원작 여주가 막대한 신성력을 뻗어 뿅!하고 흑마법사 세력 자체를 씨를 말려 실행조차 되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세계는 성녀 여주가 없지.
그래서 막지 못하고 있는 거구나.
보아하니 벌써 피해가 막심한 것 같은데, 누군가 해결을...
"네가 그 사건의 해결을 맡아라."
푸웁.
입에 댔던 차를 뿜고 말았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보고 해결하라고?
"...황녀답게, 차는 우아하게 마시도록."
황제가 오만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이 얼빵해진 걸 보니 네가 또 기억을 잃은 듯 하군. 일깨워주마."
황제가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툭툭 건들더니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의 오른손 검지에 끼인 반지에서 주홍 불빛이 번쩍거리며 내 목걸이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참아라."
빛이 나를 겨누는 동안 오그라들었던 심장이 터질 것같이 빠르게 뛰었다.
목이 조여드는 감각이 익숙치 않아 가쁜 숨을 토해냈다. 몸은 고통스러운데, 정신은 맑아지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몸소 겪었다.
이사벨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은 황녀.
'살려주세요...'
목숨의 위협 앞에 구원을 바라던 모습.
'명심하도록. 네 목숨은 내게 달려있다.'
자신의 딸을 한낱 장기말로 바라보던 황제의 눈빛.
기억 속 이사벨은 황제의 명을 따라 결사대 단원들과 던전을 토벌하기도 하고, 흉악 범죄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피해와 희생이 있었다.
이사벨은 숨기고 있었다.
지독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과거를.
그녀는 출생부터 아주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이르는, 극도로 꼬인 마나 회로를 가지고 태어나서 수시로 기억 상실 증상을 보였고-
그 사실을 유일한 마나 회로 치유 능력을 가진 황제에게 들키고, 그대로 약점이 잡혀버린 것이었다.
"이제 얼핏 기억이 나는 모양인데."
그의 손짓 한 번에 온몸이 깨부숴질 듯한 통증이 간헐적으로 일었다.
반지에서 나오는 마력이 나를 좌지우지하는 모양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도 내게 협조해라, 이사벨. 난 네 유능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단다. 2년간의 휴가를 받아들여준 것도 많이 양보한 거야."
"...그 결사대는, 대체 무얼 하는 조직입니까."
"제국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나랏일을 처리하는 조직이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스러운 일이, 흑마법사 세력들을 처리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일인가.
"보상은 있습니까."
"네 목숨이 보장된다는 게 바로 보상이다."
그가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정리하자면, 내겐 선택지 따위가 없었다.
'그의 명령을 거역해선 안 돼.'
그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나.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 바로 죽게 된다는.
"5년간 단장으로서 수고해 주었지. 휴가도 끝났으니 제국을 위해 더 수고하거라."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은 전혀 없는 듯 그가 비뚜름한 웃음을 내보였다.
"데스 게임... 이름부터 살벌합니다만. 이번 일로 제가 죽음에 이른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쩔 수 없는 게지. 내가 나서서 널 보호라도 해주길 바라나? 굴려먹기 편한 유능한 인재가 사라져서 아쉽긴 하겠지만."
황제는 이사벨의 목숨을 아주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느 로판 속 딸바보 아버지로 변할 가능성은 극히 제로에 수렴할 것 같았다.
어떡하지. 나 이번 빙생은 망한 것 같아.
"지켜보고 있을 테니... 꼭 데스 게임에 잠입해서 백성들을 구출하고, 에반게리온도 가능하면 소탕하거라."
황제는 홀로 사뿐하게 말을 붙였다.
"용건은 끝났으니, 가보아도 좋다."
**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 한 켠에 앉았다.
혼자 궁상을 떨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밤을 훌쩍 넘겨 새벽이었다.
"어떡하지..."
울컥.
눈물이 샘솟았다.
빙의한지 하루만에 아버지라는 작자한테 목숨을 위협받았다. 심지어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난 그냥... 론이랑... 행복하게 살면 됐는데. 그거면 됐는데..."
복잡한 생각없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힐링물 로판. 내가 꿈꾸고 동경했던 로맨틱한 세계.
그러나 이사벨의 삶은 힐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황녀라는 태생과 소드 마스터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쥐뿔도 없었단 말이다.
자신을 장기말로 바라보는 황제.
뭘하고 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남주들.
막막해진 미래와 위협받는 목숨.
"하아..."
착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똑똑-
마냥 한숨만 내쉬던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같은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여니 검은 형체가 훌쩍 뛰어올라 창틀에 걸터앉았다.
...사람? 이 새벽에?
혹시 자객인 걸까.
불길한 생각이 들어 몸을 피하려는 순간,
"황녀님, 왜 울고 계세요."
고운 손이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누구야."
내 질문에 눈앞의 사람이 로브를 벗었다.
"접니다, 론이요."
**
희멀건한 달빛 아래 녹색 머리카락이 영롱하게 빛났다.
이런 걸 기시감이라고 하던가.
녹발에 푸른 눈, 마치 어떤 그림에서 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사람이...
아니, 내가 돈 주고 받은 어떤 커미션 결과물과도, 웹에서 본 삽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미(美) 미(美)한 남자가...
"미친."
내 앞에, 떡하니, 서있었다.
처음엔 입을 떡 벌렸다.
자세히 보니 그냥 조각상 같기도.
미켈란젤로가 빚어낸 희대의 역작임이 분명해.
그러다 현실을 인지했다.
그는 조각상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와 대화를 나누었고,
지금 그는 숨을 내쉬니까.
"지, 진짜 론...?"
"네, 진짜 론입니다, 황녀님."
그가 푸스스 웃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행운이람.
황제와 대면했을 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간질거렸다.
"오늘 밤은 고단하실 듯해 찾아왔습니다."
그가 나지막이 흘리는 중저음 목소리가 내게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사대 복귀일이니까요. 늘 황제 폐하와 충돌이 잦으셨으니 오늘도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생각했을 뿐입니다."
론도 오늘이 복귀일임을 알고 있구나.
아까 떠올린 이사벨의 과거 기억 속 결사대 단원에 론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기에서 같은 단원을 왜 조심하라고 한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론이 이렇게 이사벨을 찾아오는 걸 보면 사이가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폐하께서 새로운 일을 하명하셨어."
"들었습니다. 데스 게임에 참가하라더군요."
론이 덤덤하게 답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두렵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론은 그저, 부드럽게 미소만 지었다.
"저도 사람인지라 두렵기는 합니다. 막연히 다 잘 되리라 믿을 뿐이죠."
"황제가 나쁜 놈이지, 정말..."
이사벨을 결사대 단장으로 만든 것처럼, 아마 황제는 론의 치명적인 약점도 쥐고 있으리라.
나도 나지만, 내 최애도 마음 고생을 시키다니.
은근한 분노가 차올랐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슬쩍 넘겨주었다.
"그럼, 반란이라도 꾀해 볼까요."
"황녀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제 주군은 오직 황녀님뿐입니다. 지금의 황제 폐하가 아니라요."
그가 말을 마치자,
새벽 3시가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황녀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언제나 광명이 가득할 겁니다."
론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좋은 꿈 꾸세요. 나의 주군."
"황녀님, 황제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이리 주렴."
황제가 서신을 보냈다.
혹시 일기에 등장한 '그'가 황제인 건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오늘 오후 2시, 나와 티타임 약속이 잡혀있는 건 잊지 않았겠지. 늘 그랬듯이, 단정히 입고 나오너라.-
오늘, 오후 2시.
일기에 따르면 오늘, '그'가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또한, 내가 어딘가에 복귀해야 한다는 말 역시도 적혀 있었다. 꽤나 공교로운 타이밍이다.
"왠지 꺼림칙한데."
이전 추리물 소설에서 탐정으로 활약했던 촉이 발동했다. 편지 내용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무적으로 대화하는 건조한 부녀 관계는 사실 로판 세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으니까. 황족일 경우 더더욱. 하지만 수상한 일기를 보아서일까.
빙의 첫 날부터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골이 다 지끈거리네."
해피 엔딩을 결심한지 얼마나 됐다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문구를 보고.
최애를 조심하라는 메모 덕에 의문만 커지고.
그런 와중에 '그'가 당최 누구인지도 모르겠는 혼란 속에서 황제와의 티타임을 위해 당장 준비를 해야 하는.
그래서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황녀님,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이 능숙한 손길로 날 앉혀둔 채 분을 바르고 치장을 도왔다.
"장신구는 늘 하시던 걸로 할게요, 황녀님."
아까 내가 청소를 시켰던 시녀가 내 목에 감촉이 다소 까슬한 무언가를 매어주었다. 거울로 보니 정중앙에 토파즈가 박힌 화려한 목걸이였다.
"그래."
무대에 오르기 전 아이돌 메이크업을 받는 기분.
황제가 뭐라고, 헤어부터 코디까지 모두가 만반의 준비를 했다.
30분만에 사람을 이렇게까지 탈바꿈시킬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시간이 되었다. 가는 게 좋겠어."
시녀들 몇 명을 대동해 황제와의 첫 대면에 나섰다.
굳이 티타임을 경치 좋은 야외 테라스 놔두고 황제의 집무실에서 갖겠다니.
의문을 품으며 걸음을 옮겼다.
**
"왔느냐. 이사벨."
"폐하를 뵙습니다."
드라마에서 봤던 대로,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다행히 예법에 맞게 한 것인지 황제는 내 행동을 크게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그래, 어서 앉거라."
황제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으, 떫어.
무슨 차를 우린 거야.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져 각설탕을 넣어서 미각을 소생시켰다.
"아직도 입맛이 어리구나."
넌지시 핀잔을 주고는 그가 본론을 꺼냈다.
"이제 복귀할 때가 되었다, 이사벨."
복귀.
일기에서 보았던 그 단어가 등장했다.
"무엇에 대한 복귀를 말씀하시는지요?"
"2년 휴가는 끝났으니, 결사대 단장으로 복귀하라는 말이다."
2년, 휴가, 결사대?
나는 모르는 정보들이 흘러들어왔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있자 황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또 기억을 잃었나. 이래서 마나 회로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건데..."
그가 책상 밑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읽어보아라."
<-사건 번호 004. 데스 게임->
사건 개요 :
흑마법사 세력 '에반게리온'이 만든 것으로 추정
백성들을 꾀어 아공간에 가두고, 데스 게임을 실시해 그들끼리 유흥을 즐기는 것으로 보임
피해 정도 :
사망 확인 2,300명
실종 인원 수 1,600명
확보된 증언 없음.
<정보> '에반게리온'은 흉악 범죄를 여럿 일으킨... (중략)
"이걸 제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데스 게임.
데스 게임이라 함은, 원작 여주가 막대한 신성력을 뻗어 뿅!하고 흑마법사 세력 자체를 씨를 말려 실행조차 되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세계는 성녀 여주가 없지.
그래서 막지 못하고 있는 거구나.
보아하니 벌써 피해가 막심한 것 같은데, 누군가 해결을...
"네가 그 사건의 해결을 맡아라."
푸웁.
입에 댔던 차를 뿜고 말았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보고 해결하라고?
"...황녀답게, 차는 우아하게 마시도록."
황제가 오만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이 얼빵해진 걸 보니 네가 또 기억을 잃은 듯 하군. 일깨워주마."
황제가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툭툭 건들더니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의 오른손 검지에 끼인 반지에서 주홍 불빛이 번쩍거리며 내 목걸이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참아라."
빛이 나를 겨누는 동안 오그라들었던 심장이 터질 것같이 빠르게 뛰었다.
목이 조여드는 감각이 익숙치 않아 가쁜 숨을 토해냈다. 몸은 고통스러운데, 정신은 맑아지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몸소 겪었다.
이사벨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은 황녀.
'살려주세요...'
목숨의 위협 앞에 구원을 바라던 모습.
'명심하도록. 네 목숨은 내게 달려있다.'
자신의 딸을 한낱 장기말로 바라보던 황제의 눈빛.
기억 속 이사벨은 황제의 명을 따라 결사대 단원들과 던전을 토벌하기도 하고, 흉악 범죄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피해와 희생이 있었다.
이사벨은 숨기고 있었다.
지독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과거를.
그녀는 출생부터 아주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이르는, 극도로 꼬인 마나 회로를 가지고 태어나서 수시로 기억 상실 증상을 보였고-
그 사실을 유일한 마나 회로 치유 능력을 가진 황제에게 들키고, 그대로 약점이 잡혀버린 것이었다.
"이제 얼핏 기억이 나는 모양인데."
그의 손짓 한 번에 온몸이 깨부숴질 듯한 통증이 간헐적으로 일었다.
반지에서 나오는 마력이 나를 좌지우지하는 모양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도 내게 협조해라, 이사벨. 난 네 유능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단다. 2년간의 휴가를 받아들여준 것도 많이 양보한 거야."
"...그 결사대는, 대체 무얼 하는 조직입니까."
"제국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나랏일을 처리하는 조직이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스러운 일이, 흑마법사 세력들을 처리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일인가.
"보상은 있습니까."
"네 목숨이 보장된다는 게 바로 보상이다."
그가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정리하자면, 내겐 선택지 따위가 없었다.
'그의 명령을 거역해선 안 돼.'
그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나.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 바로 죽게 된다는.
"5년간 단장으로서 수고해 주었지. 휴가도 끝났으니 제국을 위해 더 수고하거라."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은 전혀 없는 듯 그가 비뚜름한 웃음을 내보였다.
"데스 게임... 이름부터 살벌합니다만. 이번 일로 제가 죽음에 이른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쩔 수 없는 게지. 내가 나서서 널 보호라도 해주길 바라나? 굴려먹기 편한 유능한 인재가 사라져서 아쉽긴 하겠지만."
황제는 이사벨의 목숨을 아주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느 로판 속 딸바보 아버지로 변할 가능성은 극히 제로에 수렴할 것 같았다.
어떡하지. 나 이번 빙생은 망한 것 같아.
"지켜보고 있을 테니... 꼭 데스 게임에 잠입해서 백성들을 구출하고, 에반게리온도 가능하면 소탕하거라."
황제는 홀로 사뿐하게 말을 붙였다.
"용건은 끝났으니, 가보아도 좋다."
**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 한 켠에 앉았다.
혼자 궁상을 떨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밤을 훌쩍 넘겨 새벽이었다.
"어떡하지..."
울컥.
눈물이 샘솟았다.
빙의한지 하루만에 아버지라는 작자한테 목숨을 위협받았다. 심지어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난 그냥... 론이랑... 행복하게 살면 됐는데. 그거면 됐는데..."
복잡한 생각없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힐링물 로판. 내가 꿈꾸고 동경했던 로맨틱한 세계.
그러나 이사벨의 삶은 힐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황녀라는 태생과 소드 마스터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쥐뿔도 없었단 말이다.
자신을 장기말로 바라보는 황제.
뭘하고 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남주들.
막막해진 미래와 위협받는 목숨.
"하아..."
착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똑똑-
마냥 한숨만 내쉬던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같은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여니 검은 형체가 훌쩍 뛰어올라 창틀에 걸터앉았다.
...사람? 이 새벽에?
혹시 자객인 걸까.
불길한 생각이 들어 몸을 피하려는 순간,
"황녀님, 왜 울고 계세요."
고운 손이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누구야."
내 질문에 눈앞의 사람이 로브를 벗었다.
"접니다, 론이요."
**
희멀건한 달빛 아래 녹색 머리카락이 영롱하게 빛났다.
이런 걸 기시감이라고 하던가.
녹발에 푸른 눈, 마치 어떤 그림에서 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사람이...
아니, 내가 돈 주고 받은 어떤 커미션 결과물과도, 웹에서 본 삽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미(美) 미(美)한 남자가...
"미친."
내 앞에, 떡하니, 서있었다.
처음엔 입을 떡 벌렸다.
자세히 보니 그냥 조각상 같기도.
미켈란젤로가 빚어낸 희대의 역작임이 분명해.
그러다 현실을 인지했다.
그는 조각상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와 대화를 나누었고,
지금 그는 숨을 내쉬니까.
"지, 진짜 론...?"
"네, 진짜 론입니다, 황녀님."
그가 푸스스 웃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행운이람.
황제와 대면했을 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간질거렸다.
"오늘 밤은 고단하실 듯해 찾아왔습니다."
그가 나지막이 흘리는 중저음 목소리가 내게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사대 복귀일이니까요. 늘 황제 폐하와 충돌이 잦으셨으니 오늘도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생각했을 뿐입니다."
론도 오늘이 복귀일임을 알고 있구나.
아까 떠올린 이사벨의 과거 기억 속 결사대 단원에 론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기에서 같은 단원을 왜 조심하라고 한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론이 이렇게 이사벨을 찾아오는 걸 보면 사이가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폐하께서 새로운 일을 하명하셨어."
"들었습니다. 데스 게임에 참가하라더군요."
론이 덤덤하게 답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두렵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론은 그저, 부드럽게 미소만 지었다.
"저도 사람인지라 두렵기는 합니다. 막연히 다 잘 되리라 믿을 뿐이죠."
"황제가 나쁜 놈이지, 정말..."
이사벨을 결사대 단장으로 만든 것처럼, 아마 황제는 론의 치명적인 약점도 쥐고 있으리라.
나도 나지만, 내 최애도 마음 고생을 시키다니.
은근한 분노가 차올랐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슬쩍 넘겨주었다.
"그럼, 반란이라도 꾀해 볼까요."
"황녀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제 주군은 오직 황녀님뿐입니다. 지금의 황제 폐하가 아니라요."
그가 말을 마치자,
새벽 3시가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황녀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언제나 광명이 가득할 겁니다."
론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좋은 꿈 꾸세요. 나의 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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