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럼 내가... 엑스트라라고?
조회 : 1,082 추천 : 1 글자수 : 4,884 자 2022-09-03
1화
“언니!! 나 여기 빙의시켜줘!!”
나는 유승아. 대한민국의 장르를 불문한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 유승연의 동생!
그 동생인 나는 현재 초흥분 상태이다!
“승아야, 조용히 하고 먹자.”
“알았어...”
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해 생일상으로 케이크가 나왔지만, 나는 소설 속 여주로 빙의한 이후의 일을 상상하느라 바빠서 케이크의 맛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도 하고 싶다, 성녀...”
언니가 연재 중인 웹소설 <여주는 성녀가 하고 싶어>는 눈치 없고 맹한 성녀 여주가 4인의 잘생긴 남자들과 찐한 사랑을 하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추리소설 광팬이던 나는 아예 다른 장르인 로판물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호기심에 읽어보았다가 위기에 처한 여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서브 남주 론에게 치여...
언니의 소설 속 여주로 빙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렸다.
['제 삶의 이유는 언제나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저는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울지 마세요-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고서,
그는 부서질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대신해서 죽는 게 정말 행복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가식 하나 없는 진실한 모습.
오직 나에게만 보여주던 햇살같은 그의 미소가
점점 피로 얼룩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은 내게 영겁의 시간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여주인공 한정으로 다정하고, 가식적이지 않은 서브남 론은 언제나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평민이었지만 제국 제일의 상단주였고, 신분 차이를 능력으로 극복해냈으며,
흔치 않은 초록머리 캐릭터로서 1부 표지의 메인을 장식하던- 그야말로 완벽한 입덕몰이상 캐릭터.
‘105화- 찬란한 작별인사-(삽화 포함)’
“론, 진짜 잘생겼다...”
론이 죽음을 맞이하는 105화의 마지막은
가련하게 눈물을 흘리는 여주와
그런 여주의 눈물을 닦아주는 론의 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댓글]
론남주제발 (BEST): 우리 론... 너무 찌통이잖아... 벤츠 짓만 했는데 여주는 신성력 봉인돼서 론 살리지도 못하고 마음도 안 알아주고...
킹크랩 (BEST):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작가님? 빨리 문 좀 열어봐요 쾅쾅))
유승아(BEST): 내가 이 소설 빙의하는 게 낫겠다 론 당장 살려내...
모두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내 댓글은 어느새 베스트 댓글에 올라있었다.
“우리 론 어떡해..."
마음이 아프다 못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론은 몸과 마음을 다 가져다 바쳤는데, 여주는 론의 죽음을 며칠 슬퍼하다가 잊어버렸지.
그러고선 다혈질 공자님이 그렇게나 좋다고 결혼까지 골인해버린다!
아무리 봐도 남자 주인공은 론이 제격인데.
여주인공 옆에서 웃는 건 론이어야 했는데!
최애의 허무한 죽음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 전개를 뜯어고치라고 할 수는 없겠지.
빙의해서 남주들과 사랑도 나눌 겸, 독자의 사명으로 최애도 살리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언니는 혈육에 한정해서, 자신이 쓴 작품에 사람을 빙의시킬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의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
듣기로는 우연히 소설에 빙의했던 전전전대 조상이 마법사의 힘을 빌려 만들었다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이 컴퓨터는 집안 대대로 가보로 내려와... 현재 우리 가족 장녀인 언니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이세계 빙의를 좋아하는 나는,
캐릭터에 입체성을 불어넣기 위해 빙의해 달라는 언니의 제안을 수락하여
이전 연재작이었던 추리물 소설의 주인공으로 대차게 활약하고 온 바 있었다.
“승아야, 꼭 여기에 빙의를 해야겠어?”
너 로맨스는 영 꽝이잖아-만년 짝사랑만 하던 나를 꼬집으며 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언니, 앞으로 내용 전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느라 3달씩이나 휴재 공지 냈잖아."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주인공이 되어서 언니 일도 도울 겸, 잘생긴 남주들도 볼 겸,
원작대로 행동하되 론만 살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
언니는 못 말리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위험한 일 생기면 내가 개입하겠지만... 개연성 타격 입으면 안 되니까, 왠만해선 네 선에서 해결해야 돼. 알고 있지?"
"걱정 마. 소설 내용도 다 외웠으니까."
한 번 빙의하면 중간에 나올 수 없고, 소설의 끝까지 살아남아서 엔딩을 봐야 한다.
빙의한 세계에서 죽으면 현실의 나 역시도 죽게 된다 라는 위험성이 있지만...
에이, 뭐 별 일 있겠어?
먼치킨 여주인공에 빙의하는데.
궁중 암투 없음, 고구마 구간 없음.
사이다 전개로 유명한 이 소설에서 곤란할 만한 건
남주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 정도려나.
위험한 일이 만에 하나 생긴다 해도,
이 세계의 창조주인 우리 언니가 날 현실로 복귀시켜줄 터였다. 개연성 타격으로 그 세계가 피해를 입는다는 페널티가 있지만.
나름 빙의도 여러 번 해본지라,
이제는 그저 빙의가 스릴있는 게임 정도로 느껴졌다.
배드 엔딩이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해피 엔딩이면 좋은 거고.
딱 그 정도의 생각으로 늘 임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최애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해피 엔딩을 볼 생각이었다.
‘내가 여주인공에 빙의만 하면, 론을 꼭 살려낼 거야!’
그렇게 패기넘치게 컴퓨터를 조작해 이 소설 속에 빙의했으나...
나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웬 엑스트라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
시작은 눈을 뜨니 침대 위라는 뻔한 클리셰였다.
화장대 앞 거울에 부드럽게 굽이치는 백발의 여인이 비춰졌다.
백발? 원작 여주는 금발인데.
자세히 보니 눈동자 색도 원작 여주와 다르게 새하얬다.
처음엔 안일하게 생각했다.
여주가 변신 물약이라도 사서 마셨나보다, 하고 말이다.
하지만 방 안을 둘러보고 이내 생각을 고쳤다.
곳곳에 하이엔드 황가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그려져있었으니까.
몰락한 남작가 출신 성녀가 황궁 안 침대에 눕는 게 가능할 리가.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때마침 청소가 덜 된 구석이 눈에 띄어 이걸 구실로 말을 걸 생각이었다.
주근깨가 있는 주홍 머리의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너, 내가 누군지 읊어봐."
"3황녀 전하이십니다."
"다시. 이름까지 붙여서."
"이사벨 폰 하이엔드 3황녀 전하이십니다!"
"그래, 방금 말한 대로 난 하이엔드 황가를 빛내는 황녀지. 그런데 왜 그 황녀의 방에 먼지가 가득할까?"
"죄, 죄송합니다. 바로 청소 마무리하겠습니다!"
임기응변으로 어떤 의심도 사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시녀가 청소를 하는 사이 머릿속으로 원작을 빠르게 훑었다.
이상하네, 웬만한 인물들은 내가 다 꿰고 있는데.
이 소설에 그런 이름의 황녀가 있었나?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열불나게 찾다보니 발견할 수 있었다.
분량이 글자 수 20만자를 족히 넘어가는 소설 속 단 두 줄짜리로 등장한, 조연급에도 못 미치는 그녀의 먼지만한 존재감을.
"그럼 내가... 엑스트라라고?"
하하하. 꿈이겠지?
단 한 번도 주인공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는데,
설마 내가 조연도 아니고 엑스트라가 됐겠어.
빙의하기 전에 내가 잠이라도 들었나 보지.
볼을 꼬집어보았다.
감각이 느껴졌다.
"망할."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 나는 가만히 서서 말도 안 돼를 연발했다.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다, 곧이어 초연해졌다.
유승아, 정신 차리자.
차분히 생각이란 걸 해보자고.
나는 엑스트라고,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건 내가 아닌 여주인공이다.
그럼 뭐부터 해야 하지?
여주인공을 찾아야지.
"너, 성녀 다프네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 찾아서 고해."
친해져서 불확실한 엑스트라의 목숨줄 좀 붙들고.
최애인 론을 어떻게든 살려주고.
기왕이면 ... 썸도 좀 타고! 연애도 하고!
뭐, 그러면 되는 것 아니겠어?
...라는 마음으로 시녀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왜인지 그녀가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성녀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신지 올해로 200년째입니다만..."
"뭐?"
눈살을 찌푸리니 시녀가 다시 한 번 대답했다.
"현재 실존하는 성녀님은 없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지금쯤이면 여주가 성녀로 이름을 떨치고 있어야 하는데?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오늘은 제국력 3000년 3월 1일.
약간의 오차도 없이, 원작 초반부와 날짜가 동일했다.
원작에서는 이미 여주가 성녀라는 사실이 공공연히 퍼져 있는 채로 소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저 시녀는 내게 여주가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프네라는 이름의 신관도 없어?"
"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만..."
충격적이었다.
빙의할 때 뭔가 오류가 있었던 걸까?
내가 엑스트라가 된 걸로도 모자라서, 여주인공 자체가 없다니.
그렇게 여주한테 붙어서 해피엔딩을 도모해보려던 플랜 B가 무너졌다.
자, 이쯤에서 상기해 보자고.
소설에서 엑스트라는 어떤 존재일까요?
정답! 언제든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사벨은 말 그대로 존재감 없는 황녀고,
황후의 딸이라 적통이라는 것 외에는 별 볼 일 없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당황스러워도 나는 살아서 엔딩을 봐야 한다.
그러니 내게는 이사벨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다 정확히 파악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는, 역시 빙의 전 존재가 써둔 일기를 확인하는 것이겠지.
"혹시 내 일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네. 다이어리를 가져올까요?"
"응. 부탁할게."
말을 마치자 시녀가 곧바로 다이어리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이제 그만 나가보렴."
방 안에 나 혼자만 남은 것을 확인한 뒤,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올렸다.
모던한 표지 뒤 속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멋드러진 필기체가 너울거렸다.
일기장이 있으리라 확신한 것은 n번째 소설 빙의를 즐긴 덕에 생긴 내 나름대로의 촉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참 부지런하단 말이지.
나같은 빙의자 보라고 일기도 열심히 쓰고.
아주 좋아.
찬찬히 내용들을 훑어보았다.
일기의 8할은 연회에 갔다든가, 티타임에 초대받았다든가. 평범한 영애의 일상에 대한 것이었다.
눈에 띄는 내용은 딱히 없는 것 같아 다이어리를 덮으려는 순간- 이상한 경고가 눈에 띄었다.
<론을 조심해.>
"음?"
론이라 함은, 내 최애이지 않은가.
론을 위해서 빙의까지 했는데, 조심하라고?
의아해져 문구 위 작은 글씨로 적힌 일기를 읽었다.
[2988년 3월 1일]
2년 뒤에는 복귀해야 한다
3000년 3월 1일
그가 명령을 내리겠지
점점 ......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
이 글을 읽을 때면
2년이 지났으려나
명심하렴
그의 명령을 거역해서는 안 돼
절대로.
"이게 뭐야."
내용의 일부는 종이가 찢어져있어서 확인할 수 없었고, 마지막 마침표 옆에는 피가 묻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일기라기보단 내게 주는 경고에 가까워보이는 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불안감이 마구 치솟았다.
론을 조심하라는 건 무슨 뜻이며, 이사벨이 말하는 '그'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위해 이런 글을 남겼는가.
나, 무탈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언니!! 나 여기 빙의시켜줘!!”
나는 유승아. 대한민국의 장르를 불문한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 유승연의 동생!
그 동생인 나는 현재 초흥분 상태이다!
“승아야, 조용히 하고 먹자.”
“알았어...”
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해 생일상으로 케이크가 나왔지만, 나는 소설 속 여주로 빙의한 이후의 일을 상상하느라 바빠서 케이크의 맛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도 하고 싶다, 성녀...”
언니가 연재 중인 웹소설 <여주는 성녀가 하고 싶어>는 눈치 없고 맹한 성녀 여주가 4인의 잘생긴 남자들과 찐한 사랑을 하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추리소설 광팬이던 나는 아예 다른 장르인 로판물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호기심에 읽어보았다가 위기에 처한 여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서브 남주 론에게 치여...
언니의 소설 속 여주로 빙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렸다.
['제 삶의 이유는 언제나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저는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울지 마세요-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고서,
그는 부서질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대신해서 죽는 게 정말 행복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가식 하나 없는 진실한 모습.
오직 나에게만 보여주던 햇살같은 그의 미소가
점점 피로 얼룩져가는 것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은 내게 영겁의 시간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여주인공 한정으로 다정하고, 가식적이지 않은 서브남 론은 언제나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평민이었지만 제국 제일의 상단주였고, 신분 차이를 능력으로 극복해냈으며,
흔치 않은 초록머리 캐릭터로서 1부 표지의 메인을 장식하던- 그야말로 완벽한 입덕몰이상 캐릭터.
‘105화- 찬란한 작별인사-(삽화 포함)’
“론, 진짜 잘생겼다...”
론이 죽음을 맞이하는 105화의 마지막은
가련하게 눈물을 흘리는 여주와
그런 여주의 눈물을 닦아주는 론의 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댓글]
론남주제발 (BEST): 우리 론... 너무 찌통이잖아... 벤츠 짓만 했는데 여주는 신성력 봉인돼서 론 살리지도 못하고 마음도 안 알아주고...
킹크랩 (BEST):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작가님? 빨리 문 좀 열어봐요 쾅쾅))
유승아(BEST): 내가 이 소설 빙의하는 게 낫겠다 론 당장 살려내...
모두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내 댓글은 어느새 베스트 댓글에 올라있었다.
“우리 론 어떡해..."
마음이 아프다 못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론은 몸과 마음을 다 가져다 바쳤는데, 여주는 론의 죽음을 며칠 슬퍼하다가 잊어버렸지.
그러고선 다혈질 공자님이 그렇게나 좋다고 결혼까지 골인해버린다!
아무리 봐도 남자 주인공은 론이 제격인데.
여주인공 옆에서 웃는 건 론이어야 했는데!
최애의 허무한 죽음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 전개를 뜯어고치라고 할 수는 없겠지.
빙의해서 남주들과 사랑도 나눌 겸, 독자의 사명으로 최애도 살리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언니는 혈육에 한정해서, 자신이 쓴 작품에 사람을 빙의시킬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의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
듣기로는 우연히 소설에 빙의했던 전전전대 조상이 마법사의 힘을 빌려 만들었다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이 컴퓨터는 집안 대대로 가보로 내려와... 현재 우리 가족 장녀인 언니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이세계 빙의를 좋아하는 나는,
캐릭터에 입체성을 불어넣기 위해 빙의해 달라는 언니의 제안을 수락하여
이전 연재작이었던 추리물 소설의 주인공으로 대차게 활약하고 온 바 있었다.
“승아야, 꼭 여기에 빙의를 해야겠어?”
너 로맨스는 영 꽝이잖아-만년 짝사랑만 하던 나를 꼬집으며 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언니, 앞으로 내용 전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느라 3달씩이나 휴재 공지 냈잖아."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주인공이 되어서 언니 일도 도울 겸, 잘생긴 남주들도 볼 겸,
원작대로 행동하되 론만 살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
언니는 못 말리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위험한 일 생기면 내가 개입하겠지만... 개연성 타격 입으면 안 되니까, 왠만해선 네 선에서 해결해야 돼. 알고 있지?"
"걱정 마. 소설 내용도 다 외웠으니까."
한 번 빙의하면 중간에 나올 수 없고, 소설의 끝까지 살아남아서 엔딩을 봐야 한다.
빙의한 세계에서 죽으면 현실의 나 역시도 죽게 된다 라는 위험성이 있지만...
에이, 뭐 별 일 있겠어?
먼치킨 여주인공에 빙의하는데.
궁중 암투 없음, 고구마 구간 없음.
사이다 전개로 유명한 이 소설에서 곤란할 만한 건
남주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 정도려나.
위험한 일이 만에 하나 생긴다 해도,
이 세계의 창조주인 우리 언니가 날 현실로 복귀시켜줄 터였다. 개연성 타격으로 그 세계가 피해를 입는다는 페널티가 있지만.
나름 빙의도 여러 번 해본지라,
이제는 그저 빙의가 스릴있는 게임 정도로 느껴졌다.
배드 엔딩이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해피 엔딩이면 좋은 거고.
딱 그 정도의 생각으로 늘 임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최애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해피 엔딩을 볼 생각이었다.
‘내가 여주인공에 빙의만 하면, 론을 꼭 살려낼 거야!’
그렇게 패기넘치게 컴퓨터를 조작해 이 소설 속에 빙의했으나...
나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웬 엑스트라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
시작은 눈을 뜨니 침대 위라는 뻔한 클리셰였다.
화장대 앞 거울에 부드럽게 굽이치는 백발의 여인이 비춰졌다.
백발? 원작 여주는 금발인데.
자세히 보니 눈동자 색도 원작 여주와 다르게 새하얬다.
처음엔 안일하게 생각했다.
여주가 변신 물약이라도 사서 마셨나보다, 하고 말이다.
하지만 방 안을 둘러보고 이내 생각을 고쳤다.
곳곳에 하이엔드 황가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그려져있었으니까.
몰락한 남작가 출신 성녀가 황궁 안 침대에 눕는 게 가능할 리가.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때마침 청소가 덜 된 구석이 눈에 띄어 이걸 구실로 말을 걸 생각이었다.
주근깨가 있는 주홍 머리의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너, 내가 누군지 읊어봐."
"3황녀 전하이십니다."
"다시. 이름까지 붙여서."
"이사벨 폰 하이엔드 3황녀 전하이십니다!"
"그래, 방금 말한 대로 난 하이엔드 황가를 빛내는 황녀지. 그런데 왜 그 황녀의 방에 먼지가 가득할까?"
"죄, 죄송합니다. 바로 청소 마무리하겠습니다!"
임기응변으로 어떤 의심도 사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시녀가 청소를 하는 사이 머릿속으로 원작을 빠르게 훑었다.
이상하네, 웬만한 인물들은 내가 다 꿰고 있는데.
이 소설에 그런 이름의 황녀가 있었나?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열불나게 찾다보니 발견할 수 있었다.
분량이 글자 수 20만자를 족히 넘어가는 소설 속 단 두 줄짜리로 등장한, 조연급에도 못 미치는 그녀의 먼지만한 존재감을.
"그럼 내가... 엑스트라라고?"
하하하. 꿈이겠지?
단 한 번도 주인공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는데,
설마 내가 조연도 아니고 엑스트라가 됐겠어.
빙의하기 전에 내가 잠이라도 들었나 보지.
볼을 꼬집어보았다.
감각이 느껴졌다.
"망할."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 나는 가만히 서서 말도 안 돼를 연발했다.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다, 곧이어 초연해졌다.
유승아, 정신 차리자.
차분히 생각이란 걸 해보자고.
나는 엑스트라고, 이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건 내가 아닌 여주인공이다.
그럼 뭐부터 해야 하지?
여주인공을 찾아야지.
"너, 성녀 다프네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 찾아서 고해."
친해져서 불확실한 엑스트라의 목숨줄 좀 붙들고.
최애인 론을 어떻게든 살려주고.
기왕이면 ... 썸도 좀 타고! 연애도 하고!
뭐, 그러면 되는 것 아니겠어?
...라는 마음으로 시녀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왜인지 그녀가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성녀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신지 올해로 200년째입니다만..."
"뭐?"
눈살을 찌푸리니 시녀가 다시 한 번 대답했다.
"현재 실존하는 성녀님은 없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지금쯤이면 여주가 성녀로 이름을 떨치고 있어야 하는데?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오늘은 제국력 3000년 3월 1일.
약간의 오차도 없이, 원작 초반부와 날짜가 동일했다.
원작에서는 이미 여주가 성녀라는 사실이 공공연히 퍼져 있는 채로 소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저 시녀는 내게 여주가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프네라는 이름의 신관도 없어?"
"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만..."
충격적이었다.
빙의할 때 뭔가 오류가 있었던 걸까?
내가 엑스트라가 된 걸로도 모자라서, 여주인공 자체가 없다니.
그렇게 여주한테 붙어서 해피엔딩을 도모해보려던 플랜 B가 무너졌다.
자, 이쯤에서 상기해 보자고.
소설에서 엑스트라는 어떤 존재일까요?
정답! 언제든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사벨은 말 그대로 존재감 없는 황녀고,
황후의 딸이라 적통이라는 것 외에는 별 볼 일 없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당황스러워도 나는 살아서 엔딩을 봐야 한다.
그러니 내게는 이사벨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다 정확히 파악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는, 역시 빙의 전 존재가 써둔 일기를 확인하는 것이겠지.
"혹시 내 일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네. 다이어리를 가져올까요?"
"응. 부탁할게."
말을 마치자 시녀가 곧바로 다이어리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이제 그만 나가보렴."
방 안에 나 혼자만 남은 것을 확인한 뒤,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올렸다.
모던한 표지 뒤 속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멋드러진 필기체가 너울거렸다.
일기장이 있으리라 확신한 것은 n번째 소설 빙의를 즐긴 덕에 생긴 내 나름대로의 촉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참 부지런하단 말이지.
나같은 빙의자 보라고 일기도 열심히 쓰고.
아주 좋아.
찬찬히 내용들을 훑어보았다.
일기의 8할은 연회에 갔다든가, 티타임에 초대받았다든가. 평범한 영애의 일상에 대한 것이었다.
눈에 띄는 내용은 딱히 없는 것 같아 다이어리를 덮으려는 순간- 이상한 경고가 눈에 띄었다.
<론을 조심해.>
"음?"
론이라 함은, 내 최애이지 않은가.
론을 위해서 빙의까지 했는데, 조심하라고?
의아해져 문구 위 작은 글씨로 적힌 일기를 읽었다.
[2988년 3월 1일]
2년 뒤에는 복귀해야 한다
3000년 3월 1일
그가 명령을 내리겠지
점점 ......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
이 글을 읽을 때면
2년이 지났으려나
명심하렴
그의 명령을 거역해서는 안 돼
절대로.
"이게 뭐야."
내용의 일부는 종이가 찢어져있어서 확인할 수 없었고, 마지막 마침표 옆에는 피가 묻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일기라기보단 내게 주는 경고에 가까워보이는 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불안감이 마구 치솟았다.
론을 조심하라는 건 무슨 뜻이며, 이사벨이 말하는 '그'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위해 이런 글을 남겼는가.
나, 무탈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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