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새끼! 안나, 당장 헤어져!"
"......"
"뭘 고민해! 혹시, 그 자식 아직 사랑하니?"
"......언니, 모르겠어. 그냥 감정 제어가 안돼......"
"너 지금 우는 거야? 하아......"
"언니,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워......"
"망할 자식! 안나, 지금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당장 가방 싸서 여기로 와!"
전화기 너머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쌍둥이 언니 릴라.
***
이틀 전이다.
그날 토미의 생일 파티로 병원 동료들 모두 함께 근처 펍으로 갔다.
토미는 나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대학 동기이자 약혼자이다.
나와는 정반대로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주위가 환하게 빛났다.
대학 시절 힘든 학업으로 항상 도서관에만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운동, 파티, 그렇지만 학업 성적 또한 우수한 토미 윌리엄스.
잘생긴 데다 성격도 활발했던 토미는 친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킹스칼리지런던(King's College London)의 스타였다.
어릴 적 여자애들이 꿈꾸는 동화 속 왕자님의 모습이 토미가 아닐까?
황금 빛 머리칼과 두 눈은 풍덩 빠질 수 있을 만큼 파란 눈동자로 다정한 왕자님의 모습.
대학 졸업 후 같은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도 , 그는 내게 다정한 동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토미는 누구에게나 다정했으니까.
그런 그가 처음 내게 사귀자고 했을 때 나는 너무 뜻밖이라 당황스러웠다.
병원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정신이 없을 때 토미가 장례식부터 유품 정리까지 함께 해주었다.
어머니와 이혼 후 평생을 환자 진료만 해 오신 아버지.
내가 의사가 된 것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떠난 빈 자리를 ,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을 토미가 곁에 있어 이겨 낼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남들이 말하는 가슴 떨리는, 숨 막힐 듯한 사랑.
가슴 떨리지 않아도, 숨 막힐 듯 격정적이지 않아도 , 아니 사랑이 아니라 해도 토미와 함께 라면 남아있는 내 삶을 서로 믿고 의지하며 안정적으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안정적인 삶이라고?
생일 파티가 한창 흥겨워졌을 때 , 난 조금 취해서 비틀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바깥 날씨는 흐리고 눅눅했다.
좁은 보도가 이어졌고 보도 바로 옆에 주차장이 있었다.
나는 주차장 왼쪽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둑한 그림자가 보이는 듯 했다.
눈을 깜빡였다.
토미와 바네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양팔을 벌려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이마에, 귓불에, 눈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분명 깊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에 피가 몰려 맥박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눅눅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 왔다.
숨을 쉬는 것 만으로도 모래 속으로 가라 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 밤을 떠올릴 때마다 그랬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둡고, 뭐라 형언 할 수 없는 수렁.
나는 곧장 길을 따라 지하철 역으로 뛰었다.
***
다음날 병원 출근을 했을 때,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나를 보며 예약 환자에 대해 알려주는 친절한 간호사 바네사 폭스 역시.
바네사는 한 눈에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외모를 지녔다.
큰 키에, 볼륨 있는 몸매, 커다랗고 옅은 회색 눈동자, 도톰한 입술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했다.
금발이었고 광고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뻤다.
"어제 파티 끝나고 안보이셔서 모두들 걱정했어요."
그녀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우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그녀는 내게 미소 띈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오늘 10시에 밴티메이어 부인이 예약 되어 있군요. 사랑니 발취를 해야 하니까, 바로 준비해주세요."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컴퓨터 화면 만을 응시했다.
***
그날 하루 나는 바쁘게 환자를 진료하고, 가끔 병원 동료들의 이런저런 농담에 웃어주기도 하고, 토미와 함께 점심도 먹었다.
"어제 미안해. 먼저 간 것도 모르고. 좀 많이 마셨나 봐."
"......"
"안나, 화 난 거 아니지? 나도 어떻게 집에 도착 했는지 기억이 안나."
"......"
"아침에 눈 떴을 때,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어. 그래도 집에는 용케 제대로 찾아 왔나 봐."
나는 토미가 이야기 할 동안, 부지런히 포크만 움직였다.
입 속 가득 무엇을 넣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삼키고 또 삼켰다.
어느새 한 접시 가득했던 크림 스파게티가 깨끗이 비워졌다.
남은 자몽 에이드를 단숨에 들이켜고 일어섰다.
"오후에도 예약 환자가 많아서 먼저 일어 날 게."
"같이 가. 나도 다 먹었으니까. 안나, 넌 참 볼 때마다 신기해. 이렇게 많이 먹는데 칼로리가 다 어디로 가는지. 넌 너무 말랐어. 나중에 우리 결혼해서 아기 낳으려면 살 좀 쪄야 하는데. 걱정이다. 이렇게 약해서."
토미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으며 윙크했다.
내 뱃속이 요동쳤다.
갑자기 급하게 먹은 스파게티와 욕지기가 함께 올라왔다.
도톰한 바네사의 입술과 풍만한 몸매가 떠올랐다.
토하고 싶다.
***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일이 끝나고 토미의 차를 타고 집까지 왔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 나는 졸린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 속은 끝없는 혼자만의 질문에 엉망이었다.
바네사와의 관계는 언제 부터였을까?
바네사는 왜 아무렇지 않은 척 날 대하는 걸까?
토미는 바네사를 사랑하는 걸까?
왜 내게 결혼하자고 했을까?
토미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날 사랑하는 걸까?
"안나, 일어나. 집에 도착했어."
도로를 달리던 새빨간 스포츠쿠페를 집 앞 진입로에 주차하며 토미가 말했다.
피어오른 먼지가 열어 놓은 내 쪽 창문을 넘어서 곧장 들어 왔다.
나는 빠르게 두근대는 심장을 달래며 한 손을 목 위에 얹고 토미를 바라 보았다.
"토미, 혹시 내게 할 말 없어?"
"무슨? 아......사랑해."
나쁜 놈.
지옥에나 떨어져라!
분노가 내 몸을 관통했고 손이 떨려서 다리 밑으로 집어 넣어야 했다.
"바네사......"
상반된 감정이 나를 갈가리 찢었다.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걸까?
아니면 아무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은 걸까?
"바네사? 우리 병원?"
토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생일 파티......바네사와 함께 있는 거 봤어......밖에서......"
"하아......"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다.
"언제 부터야? 바네사랑 사귄 거."
나는 숨을 참으며 물었다.
"사귄다니? 누가? 내가? 바네사와?"
토미는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
나는 헉 소리를 냈다.
"토미, 분명하게 말할게. 그날 두 사람이 키스하는 거 똑똑히 봤어. 넌, 아무하고나 그렇게 키스하니?"
"안나, 오해야! 아무튼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바네사와는...... 사귀지 않아. 그럴 만한 여자가 못 돼."
토미가 내 얼굴 위로 바짝 몸을 숙였다.
눈동자가 아찔한 파란색이다.
그의 준수한 외모에 여자들이 어떤 식으로 넘어가는 지 알 것 같았다.
토미가 내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꿈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자는 어떤 여자야?"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내가 깨끗이 정리 할 게."
"토미, 난 정말 너무 혼란스러워. 오늘 하루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알아?"
"......"
"병원 사람들 모두 우리가 곧 결혼 할 거라고 알고 있어. 바네사도 물론 제대로 알고 있고."
"미안해, 사랑해, 안나.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내가 결혼 하고 싶은 사람도 너밖에 없어."
토미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토미, 난 모르겠어. 내가 널 사랑하는지도, 너와 결혼하고 싶은 지도."
"일단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봐. 내가 다 정리 할게. 바네사와의 일은 신경 쓰지마. 알겠지?"
난 왜 내게 이런 일을 겪게 하느냐고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냥 어서 빨리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 나고 싶을 뿐.
빨리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자고 일어 나면 모든 게 없었던 일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
결국 난 밤새 뒤척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났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커피는 평상시처럼 진했고, 버터가 많이 들어간 스콘은 고소하고,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흔들리는 무성한 나뭇가지와 건너편 카페에서 주인 아저씨가 한가롭게 걸레로 먼지를 털며 시작하는, 온 사방이 고요한 아침이다.
달라진 것은 방문 뒤편에 놓인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었고, 연한 녹색 눈동자에는 스트레스가 묻어 있었고,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허수아비같은 금색 곱슬머리는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푸석거렸다.
나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전화기를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 후, 언니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