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좋아하나요? 27 화
조회 : 2,871 추천 : 4 글자수 : 6,359 자 2023-03-20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남자를 홱 끌어당겼다.
나는 상쾌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비틀비틀 일어나서 도망치려고 하다가 , 괴한의 지저분한 스웨터 뒷덜미를 잡고 있는 루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다.
그가 있다.
그가 지금 내 곁에 있다.
안도감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가요. 좀 있다 따라갈게요.""
루카스가 불빛이 비치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괴한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살인마처럼 번뜩였다.
"경찰 부를까요?"
남자라고도 할 수 없는 그 너절한 인간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다른 여자를 공격할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맨 먼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루카스가 두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얼른 가요."
나는 가로등 불빛이 따스하게 비추는 곳으로 얼른 도망쳤다.
이제 모든 게 안전하게 느껴졌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떨리는 손은 진정될 줄 몰랐다.
무언가에 부딪힌 부분을 만져보니 손에 피가 묻어 나왔다.
루카스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계속하다 보면 두 번 다시 잠들 수 없을 것이다.
왜 길을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을까?
이렇게 밤 늦게 다닐 거면 호신용 스프레이를 들고 있어야지......
런던에서는 항상 호신용 스프레이를 챙겨 다녔다.
밝은 길로만 다녔어야지......
어느 곳이든 심야에 귀가하는 여성들은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공포로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돌아보니 화가 나서 험상궂어진 루카스였다.
"괜찮아요?"
그가 나를 살피며 물었다.
아스팔트에 긁힌 내 손을 잡았다.
손톱 몇 개가 부러져 있었다.
"떨고 있네. 충격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루카스가 한쪽 팔로 감싸 안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낌이 어찌나 격렬한지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두 팔로 나를 끌어안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따뜻한 품에 안기자 마음이 놓였다.
그 안에 있으면 그 무엇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있잖아요."
그가 말했다.
"괜찮아. 이제 내가 있잖아요. "
***
내 뺨을 간질이는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루카스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에 도착하자 그가 침대에서 담요를 가져다 나를 돌돌 감싸고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몇 분 뒤에 그가 부엌에서 레드 와인을 반 잔 들고 나왔다.
"남기지 말고 마셔요."
그가 말했다.
"그럼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충격 때문에 떨리는 거니까."
그의 말처럼 내 몸은 계속 부들부들 떨렸다.
로봇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하자 점점 진정이 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집에 있다.
문은 잠겨 있고 루카스가 곁에 있다.
이제 괜찮아......
"괜찮겠어요?"
루카스가 물었다.
나는 살짝 긴장을 풀고 그의 보살핌을 충분히 누렸다.
그가 내 곁을 지키는 이유는 내가 괴한에게 당할 뻔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기 때문이야......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전혀 아무렇지 않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 말은 지금 축객령?"
"네?"
"나를 그렇게 금세 떼어낼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
"뭐 좀 가져 올게요. 최대한 빨리 다녀 올게요."
루카스는 30분 뒤에 종이 봉투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뭐가 들었는지는 보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내 와인 잔을 가득 채운 다음 욕조에 거품 입욕제를 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향긋한 물속에 충분히 몸을 담그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자기보다 나를 챙기는 사람을 만나다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토미에게 이런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었나?
토미는 항상 자신이 우선이었다.
나는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뜨끈해서 기분이 좋았고 편안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괴한의 흔적과 길거리의 흙먼지를 씻어버리고 싶어서 온 몸에 비누칠을 했다.
머리가 욱신거렸지만 심하게 찢어지지는 않았는지 피가 멎었다.
병원에 갈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공포가 다시 찾아오지 않도록 좀 전보다 쉽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할 수 있었다.
루카스는 지금 뭘 하는 중일까?
평소처럼 딱딱하게 예의를 따지지 않고 편안하게 그와 대화를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아무것도 넘겨짚지 않을 것이다.
그가 곁에 있다는 데, 그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다는 데 무조건 고마워할 것이다.
욕조에서 물이 빠지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스누피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스누피 잠옷을 절대 입지 않는데, 오늘 밤은 스누피 잠옷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스누피 잠옷을 입은 모습을 보았으니까......
나는 침실이라는 고치를 나서며 루카스에게 가서 이제 괜찮다고, 충격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키거나 그럴 일은 없으니 베이비시터처럼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려고 했다.
루카스의 관능적인 노랫소리와 그가 서랍을 여닫고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뭘 하고 있는 걸까?
요리?
문설주에 기대고 서서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을 살펴보았다.
어떤 남자가 어깨에 행주를 걸치고 내 부엌, 아니 릴라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에도 100만 번쯤 이 집에 온 적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하긴 어제 저녁도 같이 요리를 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또 다시 어제 일이 떠올랐다.
안돼!
안나 델레바인!
난 애써 생각을 멈췄다.
"이제 좀 괜찮아요?"
루카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훨씬요. 고마워요. 정말로......이제 그만......"
나는 조리대를 향해 손을 저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그가 말했다.
"앉아서 내가 요리하는 동안 얘기나 들려줘요. 배가 든든해야 잠을 푹 잘 수 있는데, 오늘 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그거니까."
나는 식탁으로 건너가서 그를 지켜보았다.
천장에 달린 전등이 희미하게 루카스의 검은 머리칼을 비추는 가운데, 그가 너무 사뿐사뿐하게 움직여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내가 꿈 속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생각보다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가 보다.
"긴장이 풀릴 거예요."
루카스가 주는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뭉쳐 있던 어깨가 풀렸다.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자연스럽게 보이네요."
"요트에 개인 요리사를 두고 뭐든 먹고 싶은 대로 주문해 먹는 줄 알았어요?"
그는 씩웃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양파를 달달 볶고 마늘을 썰고 냄비를 젓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 달리 '집돌이'인 모양이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음......그런 식일 줄 알았죠."
나는 살짝 뉘우치는 투로 말했다.
이런저런 냄비와 프라이팬을 다루는 솜씨로 보았을 때 초보자가 아니었다.
"당신에게 주특기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게 요리인 줄은 몰랐어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집을 제외하고 이렇게 뭐가 많은 부엌에서 요리한 적은 별로 없어요. 이 호텔, 저 호텔 옮겨 다니면서 지내다 보니 그럴 만한 기회가 많지 않아요. 알죠?"
"아......맞아요......"
또 잊고 있었다.
그는 날 릴라로 알고 있다는 걸.
"요리는 당신이 더 잘하는 것 같던데?"
"네?"
"지난번 당신이 해 준 아침,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아......그래요......"
"사실 난 당신이 요리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완벽하게 주방을 갖추어 놓고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으니까. 특히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안 그래요?"
"아......맞아요. 대부분 그렇죠......"
거짓말쟁이......
안나 델레바인......
조리대는 밀가루로 뒤덮였고 그의 뺨에는 손자국이 남았다.
그는 팔을 구부려서 유리그릇을 감싸고 결사적으로 반죽을 저었다.
다른 생에 우리 둘이 이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말도 안되는 착각을 와인으로 씻어 내렸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옮겨 다니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힘들지 않아요?"
"하다 보니까 익숙해졌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아......뭐.......그렇죠."
"1년에 몇 주는 산골짜기 통나무집에서 지내요. 등산도 하고 보트도 타면서. 보트가 BMW보다 작긴 하지만, 그런 충분한 시간이 다시 전장으로 복귀 할 수 있게 만들어주죠."
나는 그의 이목구비를 살피며 그곳에서 지내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어딘지 모를 숲 속에 있고, 강물이 단순한 일상의 특이한 배경 역할을 하는, 그의 훈훈한 통나무집을.
혼자 지내며 그 몇 주를 침묵으로 일관할까?
아니면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줄을 설까?
헉!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여자들이 줄을 서다니!
안나 델레바인, 정말 안되겠다!
"친구라고는 구슬프게 울부짖는 늑대밖에 없으니 가끔 외로워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아요."
루카스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 들고 온 먹을거리는 충분하고,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니까.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게 제일 신기해요. 꼭 어긋났던 부분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긋났던 부분들?
뭘까?
올리비아?
나는 팔짱을 꼈다.
왠지 몸속에서 바늘로 콕콕 찌르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런 시간을 좀 더 늘려야 할 것처럼 들리는데요? 거기에서 어긋났던 부분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좀 더 자주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긋났던 부분을 바로 잡는다?"
"네, 좋은 쪽으로 바꾼다고요."
"아, 그렇죠."
그는 맞장구를 치고, 그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럴까?
영화배우로서의 삶이 힘든 건가?
단순한 삶이 그리운 건가?
누구나 편안해지는 공간과 감정과 시간에 끌리는 건 본능인데......더 이상 관여하지 말자.
"루카스, 저기, 오늘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그가 올 수 있었을까?
그가 항상 내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이유가 뭘까?
그는 행주에 손을 닦으며 눈빛으로 내 생각을 읽었다.
"당신 친구, 헤일리가 내게 전화했어요. 급히 일이 생겨 당신 혼자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혹시 내가 시간이 되면 같이 가 줄 수 있는지."
"네? 어떻게 ?"
"아, 내 휴대전화 번호 그녀에게 알려 줬어요. 어제 파티 일도 있고, 우리가 키스까지 한 걸 봤으니까. 오늘 당신 친구에게 내가 연락했어요. "
"아......"
"혹시 당신에게 무슨 일 있으면, 내게 연락하라고 했죠. 당신이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아서"
"아, 그래서 오늘......"
"그녀가 당신이 밤이라 혹시 길을 헤맬지도 모른다고 연락 와서, 마침 나도 근처에 있었고."
"그랬군요......"
"미안해요, 내가 좀 더 일찍 갔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젠장, 서두르느라 길을 잃었나 봐요. 밤이어서 그런가 골목길들이 미로 같아서. 모퉁이를 돌려는데 근처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그 자식을 끌어낸 다음에야 당신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그때가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당신이 등장해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정말 그가 운명처럼 느껴졌다.
1분만 늦었어도......
"그 남자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을까요?"
나는 괴한이 어느 쪽에서 걸어왔는지, 골목의 어느 쪽에 숨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면?
앞으로 이곳에서 외출할 때마다 두려움에 떨고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걱정 말아요. 어찌 한번 해보려던 술꾼이었으니까. 당신이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등장하니까 이때다 싶었던 거죠."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작성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전후 상황을 알렸고, 그쪽에서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는 턱에 힘을 주고 시선을 돌렸다.
"아무 처벌 없이 풀려나지는 않겠죠? 나는 다치지 않았고 그렇게 끝이 나서 다행이지만 , 그 남자가 숨어서 다른 여자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요."
"내 말 믿어요. 그 자는 두 번 다시 어떤 여자도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루카스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춤을 추었다.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나는 상쾌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비틀비틀 일어나서 도망치려고 하다가 , 괴한의 지저분한 스웨터 뒷덜미를 잡고 있는 루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다.
그가 있다.
그가 지금 내 곁에 있다.
안도감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가요. 좀 있다 따라갈게요.""
루카스가 불빛이 비치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괴한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살인마처럼 번뜩였다.
"경찰 부를까요?"
남자라고도 할 수 없는 그 너절한 인간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다른 여자를 공격할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맨 먼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루카스가 두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얼른 가요."
나는 가로등 불빛이 따스하게 비추는 곳으로 얼른 도망쳤다.
이제 모든 게 안전하게 느껴졌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떨리는 손은 진정될 줄 몰랐다.
무언가에 부딪힌 부분을 만져보니 손에 피가 묻어 나왔다.
루카스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계속하다 보면 두 번 다시 잠들 수 없을 것이다.
왜 길을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을까?
이렇게 밤 늦게 다닐 거면 호신용 스프레이를 들고 있어야지......
런던에서는 항상 호신용 스프레이를 챙겨 다녔다.
밝은 길로만 다녔어야지......
어느 곳이든 심야에 귀가하는 여성들은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공포로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돌아보니 화가 나서 험상궂어진 루카스였다.
"괜찮아요?"
그가 나를 살피며 물었다.
아스팔트에 긁힌 내 손을 잡았다.
손톱 몇 개가 부러져 있었다.
"떨고 있네. 충격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루카스가 한쪽 팔로 감싸 안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낌이 어찌나 격렬한지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두 팔로 나를 끌어안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따뜻한 품에 안기자 마음이 놓였다.
그 안에 있으면 그 무엇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있잖아요."
그가 말했다.
"괜찮아. 이제 내가 있잖아요. "
***
내 뺨을 간질이는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루카스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에 도착하자 그가 침대에서 담요를 가져다 나를 돌돌 감싸고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몇 분 뒤에 그가 부엌에서 레드 와인을 반 잔 들고 나왔다.
"남기지 말고 마셔요."
그가 말했다.
"그럼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충격 때문에 떨리는 거니까."
그의 말처럼 내 몸은 계속 부들부들 떨렸다.
로봇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하자 점점 진정이 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집에 있다.
문은 잠겨 있고 루카스가 곁에 있다.
이제 괜찮아......
"괜찮겠어요?"
루카스가 물었다.
나는 살짝 긴장을 풀고 그의 보살핌을 충분히 누렸다.
그가 내 곁을 지키는 이유는 내가 괴한에게 당할 뻔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기 때문이야......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전혀 아무렇지 않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 말은 지금 축객령?"
"네?"
"나를 그렇게 금세 떼어낼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
"뭐 좀 가져 올게요. 최대한 빨리 다녀 올게요."
루카스는 30분 뒤에 종이 봉투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뭐가 들었는지는 보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내 와인 잔을 가득 채운 다음 욕조에 거품 입욕제를 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향긋한 물속에 충분히 몸을 담그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자기보다 나를 챙기는 사람을 만나다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토미에게 이런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었나?
토미는 항상 자신이 우선이었다.
나는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뜨끈해서 기분이 좋았고 편안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괴한의 흔적과 길거리의 흙먼지를 씻어버리고 싶어서 온 몸에 비누칠을 했다.
머리가 욱신거렸지만 심하게 찢어지지는 않았는지 피가 멎었다.
병원에 갈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공포가 다시 찾아오지 않도록 좀 전보다 쉽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할 수 있었다.
루카스는 지금 뭘 하는 중일까?
평소처럼 딱딱하게 예의를 따지지 않고 편안하게 그와 대화를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아무것도 넘겨짚지 않을 것이다.
그가 곁에 있다는 데, 그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다는 데 무조건 고마워할 것이다.
욕조에서 물이 빠지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스누피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스누피 잠옷을 절대 입지 않는데, 오늘 밤은 스누피 잠옷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스누피 잠옷을 입은 모습을 보았으니까......
나는 침실이라는 고치를 나서며 루카스에게 가서 이제 괜찮다고, 충격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키거나 그럴 일은 없으니 베이비시터처럼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려고 했다.
루카스의 관능적인 노랫소리와 그가 서랍을 여닫고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뭘 하고 있는 걸까?
요리?
문설주에 기대고 서서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을 살펴보았다.
어떤 남자가 어깨에 행주를 걸치고 내 부엌, 아니 릴라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에도 100만 번쯤 이 집에 온 적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하긴 어제 저녁도 같이 요리를 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또 다시 어제 일이 떠올랐다.
안돼!
안나 델레바인!
난 애써 생각을 멈췄다.
"이제 좀 괜찮아요?"
루카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훨씬요. 고마워요. 정말로......이제 그만......"
나는 조리대를 향해 손을 저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그가 말했다.
"앉아서 내가 요리하는 동안 얘기나 들려줘요. 배가 든든해야 잠을 푹 잘 수 있는데, 오늘 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그거니까."
나는 식탁으로 건너가서 그를 지켜보았다.
천장에 달린 전등이 희미하게 루카스의 검은 머리칼을 비추는 가운데, 그가 너무 사뿐사뿐하게 움직여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내가 꿈 속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생각보다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가 보다.
"긴장이 풀릴 거예요."
루카스가 주는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뭉쳐 있던 어깨가 풀렸다.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자연스럽게 보이네요."
"요트에 개인 요리사를 두고 뭐든 먹고 싶은 대로 주문해 먹는 줄 알았어요?"
그는 씩웃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양파를 달달 볶고 마늘을 썰고 냄비를 젓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 달리 '집돌이'인 모양이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음......그런 식일 줄 알았죠."
나는 살짝 뉘우치는 투로 말했다.
이런저런 냄비와 프라이팬을 다루는 솜씨로 보았을 때 초보자가 아니었다.
"당신에게 주특기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게 요리인 줄은 몰랐어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집을 제외하고 이렇게 뭐가 많은 부엌에서 요리한 적은 별로 없어요. 이 호텔, 저 호텔 옮겨 다니면서 지내다 보니 그럴 만한 기회가 많지 않아요. 알죠?"
"아......맞아요......"
또 잊고 있었다.
그는 날 릴라로 알고 있다는 걸.
"요리는 당신이 더 잘하는 것 같던데?"
"네?"
"지난번 당신이 해 준 아침,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아......그래요......"
"사실 난 당신이 요리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완벽하게 주방을 갖추어 놓고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으니까. 특히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안 그래요?"
"아......맞아요. 대부분 그렇죠......"
거짓말쟁이......
안나 델레바인......
조리대는 밀가루로 뒤덮였고 그의 뺨에는 손자국이 남았다.
그는 팔을 구부려서 유리그릇을 감싸고 결사적으로 반죽을 저었다.
다른 생에 우리 둘이 이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말도 안되는 착각을 와인으로 씻어 내렸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옮겨 다니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힘들지 않아요?"
"하다 보니까 익숙해졌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아......뭐.......그렇죠."
"1년에 몇 주는 산골짜기 통나무집에서 지내요. 등산도 하고 보트도 타면서. 보트가 BMW보다 작긴 하지만, 그런 충분한 시간이 다시 전장으로 복귀 할 수 있게 만들어주죠."
나는 그의 이목구비를 살피며 그곳에서 지내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어딘지 모를 숲 속에 있고, 강물이 단순한 일상의 특이한 배경 역할을 하는, 그의 훈훈한 통나무집을.
혼자 지내며 그 몇 주를 침묵으로 일관할까?
아니면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줄을 설까?
헉!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여자들이 줄을 서다니!
안나 델레바인, 정말 안되겠다!
"친구라고는 구슬프게 울부짖는 늑대밖에 없으니 가끔 외로워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아요."
루카스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 들고 온 먹을거리는 충분하고,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니까.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게 제일 신기해요. 꼭 어긋났던 부분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긋났던 부분들?
뭘까?
올리비아?
나는 팔짱을 꼈다.
왠지 몸속에서 바늘로 콕콕 찌르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런 시간을 좀 더 늘려야 할 것처럼 들리는데요? 거기에서 어긋났던 부분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좀 더 자주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긋났던 부분을 바로 잡는다?"
"네, 좋은 쪽으로 바꾼다고요."
"아, 그렇죠."
그는 맞장구를 치고, 그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럴까?
영화배우로서의 삶이 힘든 건가?
단순한 삶이 그리운 건가?
누구나 편안해지는 공간과 감정과 시간에 끌리는 건 본능인데......더 이상 관여하지 말자.
"루카스, 저기, 오늘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그가 올 수 있었을까?
그가 항상 내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이유가 뭘까?
그는 행주에 손을 닦으며 눈빛으로 내 생각을 읽었다.
"당신 친구, 헤일리가 내게 전화했어요. 급히 일이 생겨 당신 혼자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혹시 내가 시간이 되면 같이 가 줄 수 있는지."
"네? 어떻게 ?"
"아, 내 휴대전화 번호 그녀에게 알려 줬어요. 어제 파티 일도 있고, 우리가 키스까지 한 걸 봤으니까. 오늘 당신 친구에게 내가 연락했어요. "
"아......"
"혹시 당신에게 무슨 일 있으면, 내게 연락하라고 했죠. 당신이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아서"
"아, 그래서 오늘......"
"그녀가 당신이 밤이라 혹시 길을 헤맬지도 모른다고 연락 와서, 마침 나도 근처에 있었고."
"그랬군요......"
"미안해요, 내가 좀 더 일찍 갔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젠장, 서두르느라 길을 잃었나 봐요. 밤이어서 그런가 골목길들이 미로 같아서. 모퉁이를 돌려는데 근처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그 자식을 끌어낸 다음에야 당신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그때가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당신이 등장해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정말 그가 운명처럼 느껴졌다.
1분만 늦었어도......
"그 남자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을까요?"
나는 괴한이 어느 쪽에서 걸어왔는지, 골목의 어느 쪽에 숨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면?
앞으로 이곳에서 외출할 때마다 두려움에 떨고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걱정 말아요. 어찌 한번 해보려던 술꾼이었으니까. 당신이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등장하니까 이때다 싶었던 거죠."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작성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전후 상황을 알렸고, 그쪽에서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는 턱에 힘을 주고 시선을 돌렸다.
"아무 처벌 없이 풀려나지는 않겠죠? 나는 다치지 않았고 그렇게 끝이 나서 다행이지만 , 그 남자가 숨어서 다른 여자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요."
"내 말 믿어요. 그 자는 두 번 다시 어떤 여자도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루카스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춤을 추었다.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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