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조회 : 1,039 추천 : 1 글자수 : 4,334 자 2022-09-09
‘으아, 너무 더워. 차라리 사우나가 낫지 이건 너무해.’
당장이라도 공룡 탈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룬은 주먹을 꽉 쥐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뭐야, 이 공룡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그 사이에 애들 몇 명이 와서 꼬리를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맞아, 티라노는 제일 사나운 육식공룡인데 왜 이래?”
급기야 아이들은 공룡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야야, 하지 마.”
룬이 뒤를 돌며 손을 휘저었지만, 짧은 앞발이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까르륵 웃음이 터졌다.
순간 룬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맞아, 이것도 훈련이고 다 경험이 되는 건데 열심히 해야지! 내가 생각이 너무 부족했어.’
방금까지 힘들어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지금 티라노다.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사냥꾼! 모두 다 잡아 먹어버릴 테다!’
“크아아앙!”
커다란 굉음을 낸 그는 최대한 발을 높게 들어 아이들을 향해 돌진했다.
“으으, 으아아아!”
“무서워, 엄마, 엄마!”
아이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도망가기 시작했지만, 룬은 그런 아이들을 구석으로 더 몰아갔다.
아이들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질수록 룬은 정말 자신이 공룡이라도 된 듯이 희열을 느꼈다.
‘이 맛에 연기 한다니까.’
그렇게 자신에게 도취 되어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 쓰고 있던 공룡 탈이 순풍 빠져나갔다.
“어?”
놀라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룬의 앞에 화가 잔뜩 난 여성이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당신 대체 뭐야!”
여성의 목소리가 칼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귀를 찔렀다.
그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티, 티라노 사우르스….”
룬의 대답을 들은 여성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당신이 왜 티라노야. 사람이지! 그럼 적당히 봐가면서 애들하고 놀아줄 일이지, 왜 울리고 난리야. 여기 책임자 어디 있어!”
여성의 고함과 주변의 소란스러움에 재빠르게 뛰어오는 행사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 뭐 이딴 사람을 애들 행사에 써요? 자기가 무슨 티라노라고 애들 잡아먹을 듯이 덮치는데 나 원 참. 내가 애들 울리자고 돈 내고 여기 들어왔겠어요? 당장 입장료 환불하고, 애들 겁먹은 거 어떻게 보상할 건지 말해봐요.”
관리소장의 눈길이 닿자 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사과드려!”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되려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왜요? 애들이 공룡처럼 해주길 원해서 나도 열심히 한 거라고요. 그리고 저 아줌마가 연기를 모르는 거죠. 티라노니까 티라노처럼…!”
퍽 소리와 함께 룬의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리팀장의 손에 들린 공룡 대가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지금 날 때렸어? 사과 강요도 갑질인 거 알지? 거기다가 폭력까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그에 반해, 관리팀장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놈. 네가 그러니까 여태 이 꼴인 거야. 너랑 같은 오디션 출신 중에 지금 제대로 일 못 하는 녀석은 네 놈뿐인 거 알지? 왜 그런지 이제 이유를 좀 알 것 같군.”
그때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호들갑을 떨며 룬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머머,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다 했더니…, 뭐였더라 이름이? 그래 이룬! 5년 전에 [오늘은 슈퍼스타]에 나왔던. 맞죠? 웬일이야, 나 그때 당신한테 투표했었는데.”
그녀는 룬을 위, 아래로 빠르게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랑은 뭔가 좀 다르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조금 전 관리팀장에게 맞았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되는 날카로운 아픔이 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이든 건 당신이겠지, 이 아줌마야.”
한껏 날을 세운 말에 여성의 얼굴은 불처럼 타올랐다.
“오디션 프로 할 때도 인성 문제로 말 많더니 진짜였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게 다 있어?”
“말 다 했어?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중간에서 관리팀장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룬의 손은 하마터면 여성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그만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관리팀장은 여성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환불은 당연히 해드리고, 어린이 전용 놀이기구 자유이용권을 드릴 테니, 아이들 기분전환을 좀 하면 어떨까요? 이런 녀석과 계속 말을 하고 계시면 아이들에게 더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성은 뒤쪽의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고선 관리팀장이 내민 티켓을 낚아챘다.
“내가 애들 때문에 참아요. 그리고 이 사람 지금부터 내 눈에 띄게 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돌아서는 여성의 모습을 본 팀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룬을 향해 돌아섰다.
“넌 해고야. 나올 필요 없어.”
“말도 안 돼요. 한 달 계약이었잖아요, 이제 3일인데.”
“3일 치 일당은 계좌로 지급하지. 그리고 아까 연기 어쩌고 하던데 말이야, 놀이동산에서 고객이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연기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야.”
룬은 굳어진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표정을 보니 알아듣긴 한 것 같군. 때린 건 미안했네. 하지만 내 경험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간단히 끝나지도 않았을걸세. 그래도 분이 안 풀린다면 날 한 대 치던지, 고소해도 좋아.”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룬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됐어요. 뭘 때리고 고소 같은 걸 한다고…. 아저씨야 상관없겠지만, 난 유명해질 거니까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의 대답을 들은 관리팀장은 피식 웃었다.
“그래, 자네 유명해질 거야. 우리 딸도 그때 자네를 응원했거든. 그리고 이건 차비나 해.”
관리팀장은 룬의 손에 5만 원짜리 두 장을 쥐어 주고 돌아섰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는 게 연예인 걱정인 거 몰라요?”
하지만 관리팀장은 뒤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멀어져갔다.
“하아, 어쩐 담. 그래도 월세는 해결됐으니까….”
룬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공룡 대가리를 들고 터벅터벅 탈의실로 향했다.
“어머, 역시 그만두시는 거죠?”
그가 직원실로 들어서려는데, 데스크에 있던 여직원이 염려가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벌써 소문이 다 난 건가?’
조금 의아스럽긴 했지만, 룬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됐네요.”
“이해 해요. 소속사가 망했는데 계속 일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이제 어디 다른 소속사로 옮기는 건가요?”
“예?”
룬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LJ소속사 부도나서 소속 연예인들 다 나갔다던데 아니에요? 다들 벌써 다른 소속상랑 계약 맺었다던데.”
“누구한테 들었어요?”
창백해진 얼굴로 그가 묻자, 여직원은 핸드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여기 연예 기사에 엄청 크게 나왔는데. 설마 몰랐어요?”
“이 아저씨가 진짜!”
탈의실 안으로 뛰쳐 들어간 룬은 서둘러 캐비넷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애써 진정하려 했지만, 소속사 대표의 전화번호를 찾는 그의 손가락이 심하게 떨렸다.
몇 번의 실수 끝에 통화버튼을 겨우 눌렀다.
“대체 어떻게 된 ….”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룬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룬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설마 나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
[미안하다, 제니야.]
그녀는 몇 번이나 메모지를 앞뒤로 돌려보았다.
“이게 다야? 고작 미안하다는 한마디 써 놓고 간 거냐고.”
황당함이 앞서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돈 갚으라고 걸려 온 전화가 보이스피싱이 아니었어….’
눈앞의 광경과 아버지가 써놓은 메모를 보고 있으니 이제야 현실이 파악되었다.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제니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엘 언니!”
소속사 창립과 함께 한 그녀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얼마 전에 백억 넘는 빌딩도 구매했다고 했는데, 그 정도면 도와주고 남을지도 몰라.’
제니는 황금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듯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많이 놀랐지? 매니저가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길래 직접 왔어.”
친절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제니는 한결 마음이 안정되었다.
“네, 아빠는 여전히 연락이 안 되네요. 다른 언니, 오빠들은요?”
“다른 언니, 오빠? 아, 걔네는 딱 어제까지가 계약일이어서 다 이적했지. 몰랐어?”
“네….”
제니의 고개를 다시 수그러들었다.
순간 일전에 아리엘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 사이에 계약 기간이 뭐가 필요해요. 전 사장님이랑 끝까지 가요.]
제니의 가슴 속에 희망이 피어났다.
‘일당백이라고 아리엘 언니 한 명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존재야.’
“그러고 보니 언니는 따로 계약 기간 없잖아요. 맞죠?”
사무실을 돌아보던 아리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지난번에 재계약할 때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건데 말이야.”
“죄송해요.”
‘바보 같아. 어쩌면 나보다 언니가 더 힘든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찰나였지만, 아리엘의 도움을 바랐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넌 이쪽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리엘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난 마음이 너무 여려서 문제라니까. 어릴 때부터 널 봐와서 그런지 나가라는 소리를 못하겠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잘 들어. 여기 소속사랑 그리고 네가 오늘까지 살았던 그 집은 이제 내 꺼야.”
그녀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있자, 아리엘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니까 대표님이 사무실과 집을 내게 위자료로 줬다고.”
“아빠가 왜 언니한테 위자료를 줘요?”
“왜냐니 당연하지. 네가 몰라서 그런가 본데, 하기로 했던 미국투어도 다 어그러졌고, 정산도 3달이나 밀려서 내 돈으로 다 메꾸고 있었어. 못 믿겠으면 여기 서류 확인해 봐.”
아리엘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언니 말이 다 맞는데, 그래도 이렇게 이곳이 사라지는 건 아깝잖아요. 언니가 돈을 좀 빌려주면 그걸로 대출금 갚고, 조금만 더 활동하면….”
“야.”
서늘한 외마디에 제니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이제 보니까 너 양심이 없구나? 내가 왜 돈을 빌려줘? 지금까지 네가 먹고 쓴 돈이 다 누가 벌어다 준 건데? 너 지금까지 내 덕에 아주 공주같이 살았던 거 몰라?”
당장이라도 공룡 탈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룬은 주먹을 꽉 쥐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뭐야, 이 공룡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그 사이에 애들 몇 명이 와서 꼬리를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맞아, 티라노는 제일 사나운 육식공룡인데 왜 이래?”
급기야 아이들은 공룡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야야, 하지 마.”
룬이 뒤를 돌며 손을 휘저었지만, 짧은 앞발이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까르륵 웃음이 터졌다.
순간 룬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맞아, 이것도 훈련이고 다 경험이 되는 건데 열심히 해야지! 내가 생각이 너무 부족했어.’
방금까지 힘들어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지금 티라노다.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사냥꾼! 모두 다 잡아 먹어버릴 테다!’
“크아아앙!”
커다란 굉음을 낸 그는 최대한 발을 높게 들어 아이들을 향해 돌진했다.
“으으, 으아아아!”
“무서워, 엄마, 엄마!”
아이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도망가기 시작했지만, 룬은 그런 아이들을 구석으로 더 몰아갔다.
아이들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질수록 룬은 정말 자신이 공룡이라도 된 듯이 희열을 느꼈다.
‘이 맛에 연기 한다니까.’
그렇게 자신에게 도취 되어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 쓰고 있던 공룡 탈이 순풍 빠져나갔다.
“어?”
놀라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룬의 앞에 화가 잔뜩 난 여성이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당신 대체 뭐야!”
여성의 목소리가 칼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귀를 찔렀다.
그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티, 티라노 사우르스….”
룬의 대답을 들은 여성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당신이 왜 티라노야. 사람이지! 그럼 적당히 봐가면서 애들하고 놀아줄 일이지, 왜 울리고 난리야. 여기 책임자 어디 있어!”
여성의 고함과 주변의 소란스러움에 재빠르게 뛰어오는 행사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 뭐 이딴 사람을 애들 행사에 써요? 자기가 무슨 티라노라고 애들 잡아먹을 듯이 덮치는데 나 원 참. 내가 애들 울리자고 돈 내고 여기 들어왔겠어요? 당장 입장료 환불하고, 애들 겁먹은 거 어떻게 보상할 건지 말해봐요.”
관리소장의 눈길이 닿자 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사과드려!”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되려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왜요? 애들이 공룡처럼 해주길 원해서 나도 열심히 한 거라고요. 그리고 저 아줌마가 연기를 모르는 거죠. 티라노니까 티라노처럼…!”
퍽 소리와 함께 룬의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리팀장의 손에 들린 공룡 대가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지금 날 때렸어? 사과 강요도 갑질인 거 알지? 거기다가 폭력까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그에 반해, 관리팀장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놈. 네가 그러니까 여태 이 꼴인 거야. 너랑 같은 오디션 출신 중에 지금 제대로 일 못 하는 녀석은 네 놈뿐인 거 알지? 왜 그런지 이제 이유를 좀 알 것 같군.”
그때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호들갑을 떨며 룬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머머,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다 했더니…, 뭐였더라 이름이? 그래 이룬! 5년 전에 [오늘은 슈퍼스타]에 나왔던. 맞죠? 웬일이야, 나 그때 당신한테 투표했었는데.”
그녀는 룬을 위, 아래로 빠르게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랑은 뭔가 좀 다르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조금 전 관리팀장에게 맞았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되는 날카로운 아픔이 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이든 건 당신이겠지, 이 아줌마야.”
한껏 날을 세운 말에 여성의 얼굴은 불처럼 타올랐다.
“오디션 프로 할 때도 인성 문제로 말 많더니 진짜였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게 다 있어?”
“말 다 했어?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중간에서 관리팀장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룬의 손은 하마터면 여성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그만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관리팀장은 여성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환불은 당연히 해드리고, 어린이 전용 놀이기구 자유이용권을 드릴 테니, 아이들 기분전환을 좀 하면 어떨까요? 이런 녀석과 계속 말을 하고 계시면 아이들에게 더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성은 뒤쪽의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고선 관리팀장이 내민 티켓을 낚아챘다.
“내가 애들 때문에 참아요. 그리고 이 사람 지금부터 내 눈에 띄게 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돌아서는 여성의 모습을 본 팀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룬을 향해 돌아섰다.
“넌 해고야. 나올 필요 없어.”
“말도 안 돼요. 한 달 계약이었잖아요, 이제 3일인데.”
“3일 치 일당은 계좌로 지급하지. 그리고 아까 연기 어쩌고 하던데 말이야, 놀이동산에서 고객이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연기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야.”
룬은 굳어진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표정을 보니 알아듣긴 한 것 같군. 때린 건 미안했네. 하지만 내 경험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간단히 끝나지도 않았을걸세. 그래도 분이 안 풀린다면 날 한 대 치던지, 고소해도 좋아.”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룬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됐어요. 뭘 때리고 고소 같은 걸 한다고…. 아저씨야 상관없겠지만, 난 유명해질 거니까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의 대답을 들은 관리팀장은 피식 웃었다.
“그래, 자네 유명해질 거야. 우리 딸도 그때 자네를 응원했거든. 그리고 이건 차비나 해.”
관리팀장은 룬의 손에 5만 원짜리 두 장을 쥐어 주고 돌아섰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는 게 연예인 걱정인 거 몰라요?”
하지만 관리팀장은 뒤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멀어져갔다.
“하아, 어쩐 담. 그래도 월세는 해결됐으니까….”
룬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공룡 대가리를 들고 터벅터벅 탈의실로 향했다.
“어머, 역시 그만두시는 거죠?”
그가 직원실로 들어서려는데, 데스크에 있던 여직원이 염려가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벌써 소문이 다 난 건가?’
조금 의아스럽긴 했지만, 룬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됐네요.”
“이해 해요. 소속사가 망했는데 계속 일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이제 어디 다른 소속사로 옮기는 건가요?”
“예?”
룬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LJ소속사 부도나서 소속 연예인들 다 나갔다던데 아니에요? 다들 벌써 다른 소속상랑 계약 맺었다던데.”
“누구한테 들었어요?”
창백해진 얼굴로 그가 묻자, 여직원은 핸드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여기 연예 기사에 엄청 크게 나왔는데. 설마 몰랐어요?”
“이 아저씨가 진짜!”
탈의실 안으로 뛰쳐 들어간 룬은 서둘러 캐비넷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애써 진정하려 했지만, 소속사 대표의 전화번호를 찾는 그의 손가락이 심하게 떨렸다.
몇 번의 실수 끝에 통화버튼을 겨우 눌렀다.
“대체 어떻게 된 ….”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룬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룬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설마 나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
[미안하다, 제니야.]
그녀는 몇 번이나 메모지를 앞뒤로 돌려보았다.
“이게 다야? 고작 미안하다는 한마디 써 놓고 간 거냐고.”
황당함이 앞서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돈 갚으라고 걸려 온 전화가 보이스피싱이 아니었어….’
눈앞의 광경과 아버지가 써놓은 메모를 보고 있으니 이제야 현실이 파악되었다.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제니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아리엘 언니!”
소속사 창립과 함께 한 그녀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얼마 전에 백억 넘는 빌딩도 구매했다고 했는데, 그 정도면 도와주고 남을지도 몰라.’
제니는 황금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듯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많이 놀랐지? 매니저가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길래 직접 왔어.”
친절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제니는 한결 마음이 안정되었다.
“네, 아빠는 여전히 연락이 안 되네요. 다른 언니, 오빠들은요?”
“다른 언니, 오빠? 아, 걔네는 딱 어제까지가 계약일이어서 다 이적했지. 몰랐어?”
“네….”
제니의 고개를 다시 수그러들었다.
순간 일전에 아리엘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 사이에 계약 기간이 뭐가 필요해요. 전 사장님이랑 끝까지 가요.]
제니의 가슴 속에 희망이 피어났다.
‘일당백이라고 아리엘 언니 한 명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존재야.’
“그러고 보니 언니는 따로 계약 기간 없잖아요. 맞죠?”
사무실을 돌아보던 아리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지난번에 재계약할 때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건데 말이야.”
“죄송해요.”
‘바보 같아. 어쩌면 나보다 언니가 더 힘든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찰나였지만, 아리엘의 도움을 바랐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넌 이쪽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리엘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난 마음이 너무 여려서 문제라니까. 어릴 때부터 널 봐와서 그런지 나가라는 소리를 못하겠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잘 들어. 여기 소속사랑 그리고 네가 오늘까지 살았던 그 집은 이제 내 꺼야.”
그녀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있자, 아리엘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니까 대표님이 사무실과 집을 내게 위자료로 줬다고.”
“아빠가 왜 언니한테 위자료를 줘요?”
“왜냐니 당연하지. 네가 몰라서 그런가 본데, 하기로 했던 미국투어도 다 어그러졌고, 정산도 3달이나 밀려서 내 돈으로 다 메꾸고 있었어. 못 믿겠으면 여기 서류 확인해 봐.”
아리엘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언니 말이 다 맞는데, 그래도 이렇게 이곳이 사라지는 건 아깝잖아요. 언니가 돈을 좀 빌려주면 그걸로 대출금 갚고, 조금만 더 활동하면….”
“야.”
서늘한 외마디에 제니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이제 보니까 너 양심이 없구나? 내가 왜 돈을 빌려줘? 지금까지 네가 먹고 쓴 돈이 다 누가 벌어다 준 건데? 너 지금까지 내 덕에 아주 공주같이 살았던 거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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