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니면 안 돼
조회 : 791 추천 : 1 글자수 : 4,849 자 2022-09-24
“미안해, 설마 카드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제니가 사과를 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룬은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룬의 팔을 잡아 세운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알아, 아는데. 갑자기 돈 나가는 게 유쾌한 상황은 아니니까.”
“카드 값은 걱정하지 마, 사진만 찍고 내가 바로 가서 환불 할게. 응? 그러니까 표정 좀 풀어.”
잔뜩 찡그려져 있던 그의 미간이 가까스로 펴졌다.
“환불 하지 마.”
“응?”
“환불 하지 말라고. 어쩌면... 시상식에서 입을지도 모르잖아.”
다른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을 하는 그를 향해 제니는 얼른 되받아쳤다.
“아니야! 너 돈 없잖아."
제니는 그의 집에서 보았던 고지서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무리할 필요 없어, 시상식 옷은 내가 나중에.”
“야.”
화가 나는 듯 그의 음성에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떡해, 진짜 화났나 봐. ’
제니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넌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냐? 나도 내가 쓸 것 정도는 벌어. 그리고 어차피 내 옷인데 내가 왜 너 때문에 무리를 해?”
“그, 그렇지. 그냥 미안하고 걱정돼서 한 말이야.”
내려간 눈썹과 우물거리는 입술을 보고 있자니, 룬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저래 가지고 누굴 매니지먼트 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나 진짜 화 안 났어. 그리고 내가 유명해지면 여기서 제일 비싼 옷 사줄게. 그러니까 너야말로 저 안에서 있었던 일 마음에 두지 마.”
"정말? 진짜 사주는 거야?"
단번에 활짝 핀 얼굴로 고개를 드는 그녀를 본 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와, 이제 보니 너 완전 속물이구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제니는 그제야 사르륵 얼굴이 풀렸다.
"속물이 아니라 솔직한 거지. 사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
"아무튼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머리랑 메이크업은 스튜디오 가서 하면 되는 거야?"
"아, 으응. 나만 따라 와."
약간 망설이긴 했지만, 제니는 금방 자신 있는 얼굴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저 쪽인데 어딜 가는 거지?"
그녀의 뒷모습을 갸웃거리며 쳐다보던 룬은 이내 그녀를 뒤쫓았다.
"어디가, 나가려면 저 쪽이야."
하지만 제니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듯이 코너를 돌아 복도 깊숙이 들어갔다.
"대체 어디로...."
룬은 자신의 앞에 쓰여진 안내판을 보고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파우더룸]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 하냐?"
"장난 아니야. 그리고 여기 한 해 화장품 구매 금액이 300만 원은 되어야 쓸 수 있는 공간 이야. 안에 들어가면 온갖 브랜드 화장품이 다 있다고, 어중간한 샵보다는 훨씬 나을 걸?"
"그래도 네가 하겠다는 거 아니야. 나 그냥 갈게."
룬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가지마."
제니는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직 나랑 뭘 해 보지도 않았잖아. 내키지 않아도 조금만 더 날 믿고 따라줘."
"대체 나의 뭘 보고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이 바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렇게 회사를 살리고 싶으면 나 같은 중고 신인보다 새로운 사람을 찾아보는 게 너한테도 더 좋을 거야."
그의 무미건조한 말에 제니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하는데, 더 말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입을 못 열겠어.'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미처 그 생각은 못 한 모양이네."
룬은 자신의 팔을 꽉 붙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발길을 돌렸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놓치면 안될 것 같은 마음에 제니는 목에 힘을 주고 외쳤다.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제발 돌아봐 줘.'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인지, 룬은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어째서 나야?"
"아빠가 선택했으니까. 나는 그 선택을 믿어. 당신은 분명히 최고이고, 다른 사람도 그걸 알아볼 수 있게 내가 만들 거야."
당당하게 말했지만, 그녀 자신도 느낄 만큼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제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꿀꺽 삼켰다.
"너 그 약속 꼭 지켜."
마침내 그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응!"
너무 기쁜 나머지 룬이 걸어오기도 전에, 제니가 먼저 뛰어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꼭 지킬게."
"으윽, 야 떨어져. 무슨 여자애가 아무한테 막 안기냐?"
"미안, 너무 좋아서. 그리고 넌 아무나 아니잖아."
"됐고, 얼른 들어가서 시작하자."
룬은 그녀를 제쳐 놓고 성큼 성큼 걸어서 파우더 룸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어라? 정말 생각보다 괜찮네.'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방안에는 오렌지 빛 조명이 설치 된 화장대가 있었고, 그 위로 수 많은 메이크업 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휘둥그레 해진 눈으로 서 있는 그의 등 뒤로 제니가 다가섰다.
"저기 의자에 앉아 봐."
"너, 할 수 있는 거 맞아? 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잘해야 해."
한숨을 쉰 제니는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에서 큰 브러쉬 파우치를 꺼내어 들었다.
"내가 자격증만 없지, 해외 유명 브랜드에서 메이크업 수업도 수료한 사람이야. 내 얼굴에 화장해 본 것만 천 번은 넘는다고."
룬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그럼 앞머리는 핀으로 고정 시킬 게. 눈 감아."
"응."
제니는 이마를 가리고 있던 그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걷어서 작은 집게 핀으로 고정 시켰다.
'이마가 드러나니까 훨씬 좋은데? 드라이 할 때 옆으로 넘겨줘야겠어.'
"이제 시작한다.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그런 거 없으니까 다른 사람 오기 전에 빨리 해."
"알겠어."
팔을 걷어붙인 그녀는 보라색 베이스를 손등에 덜어냈다.
'막상 하려 하니까 너무 떨려!"
스펀지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소리 없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스펀지를 갖다 댈 수 있었다.
'조명 때문인가? 이렇게 보니까 엄청 예쁘게 생겼잖아.'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지?"
갑자기 움직인 그의 입술 때문에 제니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깜짝이야, 갑자기 말하면 어떡해!"
"말도 못해?"
"내가 다 끝났다고 할 때까지 말도 하지 마. 눈 화장할 때 갑자기 얼굴 근육 움직이면 눈이 짝짝이 될지도 모르잖아."
룬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그녀는 얼른 손가락으로 눈썹을 잡았다.
"얼굴 찡그리지 마, 주름 생기잖아."
"어이쿠, 아주 아티스트 나셨네."
말은 빈정거렸지만, 룬은 순순히 입을 다물고 그녀의 지시대로 따랐다.
'요즘 제일 인기 많은 타입으로 하는 거야. 잘 모르면 따라가야지.'
그가 잠잠해지자 제니의 손놀림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라인과 섀도우, 블러셔, 쉐딩, 틴트... 수 개의 화장품들이 겹겹이 그의 얼굴 위로 올라가서 안착했다.
'너무... 과한가?'
가까이에선 분명 괜찮은 것 같았는데, 한 발 떨어져서 보니 무언가 좀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이라인이 너무 두꺼운가? 아냐 눈 뜨면 얇아질 거야. 그럼 뭐가 문제지?'
"다 됐어?"
룬은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웅얼거리며 말했다.
"어? 자, 잠깐만! 아직 눈 뜨지 마."
그녀는 얼른 피그먼트 파우더 펄을 집어서 그의 눈가에 스윽 묻혔다.
"되, 됐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룬이 번쩍 눈을 떴다.
"비켜봐."
"왜?"
"거울이 안 보이잖아."
"아, 으응."
제니가 옆으로 비켜서자, 커다란 거울에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룬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다시피 바싹 화장대 앞으로 붙어 섰다.
"왜? 그게 최신 트렌드야. 내가 밤새 너튜브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가 고개를 획 돌려서 노려보자, 제니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음악 방송 나가?"
"그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지 나중에라도 나가게 될 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배우 얼굴은 도화지 같아야 해, 어떤 역할이든 변할 수 있도록. 그러려면 차라리 노 메이크업의 증명사진이 낫지 이건 뭐... 하아."
그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어쩌지, 지우는 것도 꽤 걸릴 것 같은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룬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 내 손은 왜 잡으려는 거지?'
얼어붙은 채로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그녀를 향해, 룬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티슈랑 면봉 없어?"
"아, 있어!"
제니는 서둘러 가방에서 티슈와 면봉을 꺼내서 그에게 전달했다.
"미안해."
덜덜 떨리는 티슈를 받아 드는 룬은 저도 모르게 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잡아 먹는 것도 아닌데 왜 매번 저렇게 벌벌 떠는 거야.'
얼굴에 티슈를 살살 눌러가며 색조 화장품을 덜어내던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도 베이스 화장은 잘 했어."
"정말?"
안절부절 못한 얼굴로 거울만 쳐다보던 제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 아이라인도 나쁘지 않아. 면봉으로 조금만 지우면 돼."
"고마워. 사실 피부가 좋아서 베이스는 많이 안 했어."
"어제 무려 2만원 짜리 팩을 올리고 잤거든."
말을 하는 도중에도 룬의 손놀림은 매우 능숙하게 움직였다.
브러쉬에 묻어 있는 파우더 가루를 손등에 쳐서 털어낸 그는 쉐딩과 하이라이트의 경계선을 묘하게 없애 나갔다.
눈가의 펄 파우더도 매우 자연스러워져서 언뜻 보면 반짝이는 눈물 같기도 했다.
"와,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많이 해 봤어?"
"데뷔 전부터 내 메이크업은 항상 직접 해 왔으니까."
"잠시만 그대로 있을래?"
제니가 그를 향해 핸드폰을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사진 찍으려고."
"싫어, 이런 걸 왜 찍어?"
그녀는 얼굴을 가리려는 그의 팔을 막았다.
"이런 것도 다 소통이야. 나중에 팬들이 보면 엄청 좋아할 걸?"
"그, 그럴까?"
"분명히."
"누가 딸 아니라고 할까 봐, 그 근거 없는 그 자신감은 대표님이랑 똑같네."
제니는 말 대신 빙그레 웃으며 핸드폰 카메라 초점을 조절했다.
'카메라에 비친 네 모습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제니가 사과를 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룬은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룬의 팔을 잡아 세운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알아, 아는데. 갑자기 돈 나가는 게 유쾌한 상황은 아니니까.”
“카드 값은 걱정하지 마, 사진만 찍고 내가 바로 가서 환불 할게. 응? 그러니까 표정 좀 풀어.”
잔뜩 찡그려져 있던 그의 미간이 가까스로 펴졌다.
“환불 하지 마.”
“응?”
“환불 하지 말라고. 어쩌면... 시상식에서 입을지도 모르잖아.”
다른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을 하는 그를 향해 제니는 얼른 되받아쳤다.
“아니야! 너 돈 없잖아."
제니는 그의 집에서 보았던 고지서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무리할 필요 없어, 시상식 옷은 내가 나중에.”
“야.”
화가 나는 듯 그의 음성에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떡해, 진짜 화났나 봐. ’
제니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넌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냐? 나도 내가 쓸 것 정도는 벌어. 그리고 어차피 내 옷인데 내가 왜 너 때문에 무리를 해?”
“그, 그렇지. 그냥 미안하고 걱정돼서 한 말이야.”
내려간 눈썹과 우물거리는 입술을 보고 있자니, 룬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저래 가지고 누굴 매니지먼트 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나 진짜 화 안 났어. 그리고 내가 유명해지면 여기서 제일 비싼 옷 사줄게. 그러니까 너야말로 저 안에서 있었던 일 마음에 두지 마.”
"정말? 진짜 사주는 거야?"
단번에 활짝 핀 얼굴로 고개를 드는 그녀를 본 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와, 이제 보니 너 완전 속물이구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제니는 그제야 사르륵 얼굴이 풀렸다.
"속물이 아니라 솔직한 거지. 사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
"아무튼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머리랑 메이크업은 스튜디오 가서 하면 되는 거야?"
"아, 으응. 나만 따라 와."
약간 망설이긴 했지만, 제니는 금방 자신 있는 얼굴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저 쪽인데 어딜 가는 거지?"
그녀의 뒷모습을 갸웃거리며 쳐다보던 룬은 이내 그녀를 뒤쫓았다.
"어디가, 나가려면 저 쪽이야."
하지만 제니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듯이 코너를 돌아 복도 깊숙이 들어갔다.
"대체 어디로...."
룬은 자신의 앞에 쓰여진 안내판을 보고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파우더룸]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 하냐?"
"장난 아니야. 그리고 여기 한 해 화장품 구매 금액이 300만 원은 되어야 쓸 수 있는 공간 이야. 안에 들어가면 온갖 브랜드 화장품이 다 있다고, 어중간한 샵보다는 훨씬 나을 걸?"
"그래도 네가 하겠다는 거 아니야. 나 그냥 갈게."
룬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가지마."
제니는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직 나랑 뭘 해 보지도 않았잖아. 내키지 않아도 조금만 더 날 믿고 따라줘."
"대체 나의 뭘 보고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이 바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렇게 회사를 살리고 싶으면 나 같은 중고 신인보다 새로운 사람을 찾아보는 게 너한테도 더 좋을 거야."
그의 무미건조한 말에 제니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하는데, 더 말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입을 못 열겠어.'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미처 그 생각은 못 한 모양이네."
룬은 자신의 팔을 꽉 붙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발길을 돌렸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놓치면 안될 것 같은 마음에 제니는 목에 힘을 주고 외쳤다.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제발 돌아봐 줘.'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인지, 룬은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어째서 나야?"
"아빠가 선택했으니까. 나는 그 선택을 믿어. 당신은 분명히 최고이고, 다른 사람도 그걸 알아볼 수 있게 내가 만들 거야."
당당하게 말했지만, 그녀 자신도 느낄 만큼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제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꿀꺽 삼켰다.
"너 그 약속 꼭 지켜."
마침내 그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응!"
너무 기쁜 나머지 룬이 걸어오기도 전에, 제니가 먼저 뛰어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꼭 지킬게."
"으윽, 야 떨어져. 무슨 여자애가 아무한테 막 안기냐?"
"미안, 너무 좋아서. 그리고 넌 아무나 아니잖아."
"됐고, 얼른 들어가서 시작하자."
룬은 그녀를 제쳐 놓고 성큼 성큼 걸어서 파우더 룸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어라? 정말 생각보다 괜찮네.'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방안에는 오렌지 빛 조명이 설치 된 화장대가 있었고, 그 위로 수 많은 메이크업 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휘둥그레 해진 눈으로 서 있는 그의 등 뒤로 제니가 다가섰다.
"저기 의자에 앉아 봐."
"너, 할 수 있는 거 맞아? 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잘해야 해."
한숨을 쉰 제니는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에서 큰 브러쉬 파우치를 꺼내어 들었다.
"내가 자격증만 없지, 해외 유명 브랜드에서 메이크업 수업도 수료한 사람이야. 내 얼굴에 화장해 본 것만 천 번은 넘는다고."
룬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그럼 앞머리는 핀으로 고정 시킬 게. 눈 감아."
"응."
제니는 이마를 가리고 있던 그의 앞머리를 조심스레 걷어서 작은 집게 핀으로 고정 시켰다.
'이마가 드러나니까 훨씬 좋은데? 드라이 할 때 옆으로 넘겨줘야겠어.'
"이제 시작한다.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그런 거 없으니까 다른 사람 오기 전에 빨리 해."
"알겠어."
팔을 걷어붙인 그녀는 보라색 베이스를 손등에 덜어냈다.
'막상 하려 하니까 너무 떨려!"
스펀지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소리 없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스펀지를 갖다 댈 수 있었다.
'조명 때문인가? 이렇게 보니까 엄청 예쁘게 생겼잖아.'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지?"
갑자기 움직인 그의 입술 때문에 제니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깜짝이야, 갑자기 말하면 어떡해!"
"말도 못해?"
"내가 다 끝났다고 할 때까지 말도 하지 마. 눈 화장할 때 갑자기 얼굴 근육 움직이면 눈이 짝짝이 될지도 모르잖아."
룬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그녀는 얼른 손가락으로 눈썹을 잡았다.
"얼굴 찡그리지 마, 주름 생기잖아."
"어이쿠, 아주 아티스트 나셨네."
말은 빈정거렸지만, 룬은 순순히 입을 다물고 그녀의 지시대로 따랐다.
'요즘 제일 인기 많은 타입으로 하는 거야. 잘 모르면 따라가야지.'
그가 잠잠해지자 제니의 손놀림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라인과 섀도우, 블러셔, 쉐딩, 틴트... 수 개의 화장품들이 겹겹이 그의 얼굴 위로 올라가서 안착했다.
'너무... 과한가?'
가까이에선 분명 괜찮은 것 같았는데, 한 발 떨어져서 보니 무언가 좀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이라인이 너무 두꺼운가? 아냐 눈 뜨면 얇아질 거야. 그럼 뭐가 문제지?'
"다 됐어?"
룬은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웅얼거리며 말했다.
"어? 자, 잠깐만! 아직 눈 뜨지 마."
그녀는 얼른 피그먼트 파우더 펄을 집어서 그의 눈가에 스윽 묻혔다.
"되, 됐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룬이 번쩍 눈을 떴다.
"비켜봐."
"왜?"
"거울이 안 보이잖아."
"아, 으응."
제니가 옆으로 비켜서자, 커다란 거울에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룬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다시피 바싹 화장대 앞으로 붙어 섰다.
"왜? 그게 최신 트렌드야. 내가 밤새 너튜브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가 고개를 획 돌려서 노려보자, 제니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음악 방송 나가?"
"그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지 나중에라도 나가게 될 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배우 얼굴은 도화지 같아야 해, 어떤 역할이든 변할 수 있도록. 그러려면 차라리 노 메이크업의 증명사진이 낫지 이건 뭐... 하아."
그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어쩌지, 지우는 것도 꽤 걸릴 것 같은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룬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 내 손은 왜 잡으려는 거지?'
얼어붙은 채로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그녀를 향해, 룬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티슈랑 면봉 없어?"
"아, 있어!"
제니는 서둘러 가방에서 티슈와 면봉을 꺼내서 그에게 전달했다.
"미안해."
덜덜 떨리는 티슈를 받아 드는 룬은 저도 모르게 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잡아 먹는 것도 아닌데 왜 매번 저렇게 벌벌 떠는 거야.'
얼굴에 티슈를 살살 눌러가며 색조 화장품을 덜어내던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도 베이스 화장은 잘 했어."
"정말?"
안절부절 못한 얼굴로 거울만 쳐다보던 제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 아이라인도 나쁘지 않아. 면봉으로 조금만 지우면 돼."
"고마워. 사실 피부가 좋아서 베이스는 많이 안 했어."
"어제 무려 2만원 짜리 팩을 올리고 잤거든."
말을 하는 도중에도 룬의 손놀림은 매우 능숙하게 움직였다.
브러쉬에 묻어 있는 파우더 가루를 손등에 쳐서 털어낸 그는 쉐딩과 하이라이트의 경계선을 묘하게 없애 나갔다.
눈가의 펄 파우더도 매우 자연스러워져서 언뜻 보면 반짝이는 눈물 같기도 했다.
"와,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많이 해 봤어?"
"데뷔 전부터 내 메이크업은 항상 직접 해 왔으니까."
"잠시만 그대로 있을래?"
제니가 그를 향해 핸드폰을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사진 찍으려고."
"싫어, 이런 걸 왜 찍어?"
그녀는 얼굴을 가리려는 그의 팔을 막았다.
"이런 것도 다 소통이야. 나중에 팬들이 보면 엄청 좋아할 걸?"
"그, 그럴까?"
"분명히."
"누가 딸 아니라고 할까 봐, 그 근거 없는 그 자신감은 대표님이랑 똑같네."
제니는 말 대신 빙그레 웃으며 핸드폰 카메라 초점을 조절했다.
'카메라에 비친 네 모습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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