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조회 : 1,027 추천 : 0 글자수 : 4,489 자 2022-09-10
당장이라도 비가 올 듯 불길한 징조를 보이는 하늘 아래.
“······.”
로벨리아는 눈앞 거대한 동굴을 두고 깊게 고민했다.
그렇게 긴 시간의 고민 끝에 로벨리아는 발을 뗐다.
-저벅저벅
-후웅!
동굴 안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로벨리아의 귀를 꿰뚫었다.
곧 무거운 공기의 중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아델이었다.
-후웅! 후웅! 후웅!
중년이라기에는 애매한 20대 중반의 아델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본 아델의 턱에는 짧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고 긴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듯 이리저리 엉키며 짐승 털처럼 꼬여 있었다.
생기를 잃은 메마른 눈동자 속에는 빈 그릇처럼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후웅! 후웅!
로벨리아는 아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아델의 훈련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
1시간, 2시간, 3시간.
죄책감이라는 족쇄가 아델을 이렇게 만들었다. 단 하나지만 오늘은 꼭 풀어주리라 다짐해 로벨리아는 이곳까지 왔다.
-뚝뚝뚝
그때 마침 소리가 끊겼다. 멈춘 아델의 머리카락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아델은 침체된 눈으로 로벨리아를 훑어보며 검을 바닥에 툭- 하고 버리듯 떨궜다.
묵직한 철음이 울렸다.
-챙그랑!
아델은 로벨리아를 신경 쓰지 않는 듯 천으로 된 웃옷을 벗고 하의를 탈의하였다.
땀을 닦는다.
“후우···.”
로벨리아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움직임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아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아델은 때 탄 천 옷에서 말끔한 면으로 색 입혀진 옷으로 갈아입으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 과정이 끝난 후에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왔어?”
“······글쎄요. 제가 왜 왔을까요.”
“뻔하지. 나보고 나가자 말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딴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아무 말고 돌아가.”
로벨리아는 아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아델 당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꼭 말해야겠어요.”
아델의 목소리가 한 층 더 차가워졌다.
“돌아가. 로벨리아.”
그의 서리 낀 목소리를 들은 로벨리아의 입이 순간 꾹 다물어졌다.
내가 알던 아델은 이제 없구나. 그 사이에 아델이 얼마나 변했는지 느껴졌다.
그랬기에 로벨리아는 물러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델의 족쇄를 풀어버리리라.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표정을 굳히며 벽에 손을 댄 체 아델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델··· 그런다고 죽은 친구는 돌아오지 않아요.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현실을 보고 이제는 좀 인정하세요. 언제까지 멜만 생각하며 살아갈 거예요.”
“로벨리아. 너는 한 번도 남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생각해본 적 없어. 가엽기도 하지.”
아델의 차가운 목소리가 로벨리아의 가슴을 쑤셨다.
“······.”
로벨리아는 저주로 인해 앞을 볼 수 없었다. 아델은 알면서도 로벨리아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로벨리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로벨리아 네 말이 전부 맞아. 처음부터 끝까지 반박할 틈을 못 찼겠어.”
아델은 천천히 걸어 로벨리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곧 상체를 숙여 로벨리아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멜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
입을 열려던 로벨리아의 입이 꽉 막혔다. 머릿속에서는 멜의 위태로운 숨결이 들렸고 멜의 차갑게 식은 손바닥의 온기가 손에 재현되었다.
불연 떠오르는 기억.
로벨리아는 멜이 죽는 그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민감하게 재생되었다.
죽기 싫다는 목소리도, 옅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생명이 점점 죽어가는 모습에 로벨리아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델이 목숨을 걸고 힘겹게 전장에서 싸울 때 멜을 지키지 못한 건 로벨리아였다.
“허, 허억···.”
안색이 창백해지고 심장이 돌연 뛰기 시작했다. 아델은 로벨리아를 더욱 밀어붙였다.
어쩌면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걸지도 모르겠다. 아델은 멈출 줄 모르는 주둥아리를 나불댔다.
“로벨리아. 너는 항상 멜의 옆에 있었잖아. 눈이 없어서 멜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거 아니냐?”
“뭐라고···요?”
“그래서 네가 가족들한테 버림받은 거야. 미안한데 다시는 오지 마. 너는 나를 평생 이해할 수 없고 너도 나를 평생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델에게 사라지라는 통보를 받은 로벨리아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액체를 흘렸다.
분노도 조금 담긴 것 같고 억울함도 조금 담긴 것 같으며 배신감이 가장 크게 담긴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꼴인가. 아델을 설득하는 것 아니었나. 어째서 아델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 거지? 언제 말실수를 했나?
로벨리아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저 바보같이 눈물만 흘렸다.
평소라면 아델의 뺨을 후리며 지금 뭐라 말했냐 소리쳤을 것이다. 버림받았다는 말을, 그것도 아델에게 들어 더욱 충격이었다.
눈가에 쌓인 눈물은 무거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흐르며 바닥에 뚝-하고 떨어졌다.
어째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델. 너는 그런 놈이 아니잖아.
“흐으윽···!”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아델이 아니다.
로벨리아는 도망치듯 동굴을 빠져나갔다.
-탁탁탁탁!
평소 자신이 느끼던 어리숙한 냄새가 아닌 어엿한 사람의 냄새가 났다. 이제는 차분하게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더욱 꽉 막혀 버렸다.
-탁탁탁탁···
로벨리아는 그렇게 빗소리가 쏟아지듯 들리는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
“······.”
아델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로벨리아의 말에 크게 동의했지만 결국 스스로가 부정했다.
아델은 정말로 나쁜 쓰레기다.
멜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면도 겉면도 모든 것이 그대로 변하지 않은 채 묻어나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멜이 죽고 난 후 자신의 약함과 썩어빠진 생각들이 그건 아니라 말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멜을 살릴 수 있었다. 내 나약했던 과거가 멜을 죽인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강해지겠다고 다짐한 것이.
인간의 유일한 속성이 변화와 적응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델은 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변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아델을 180도 돌려버렸다.
이제 나약한 아델은 세상에 없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을 주절대며 떠들기를 좋아하던 아델은 죽었다.
그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과 단절한 채 강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전부 하늘에서 보고 있을 멜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었다.
멜은 가족이 없는 아델에게 형제라 칭하며 형제는 짐도 나누는 사이라 했다. 아델은 약자였고 멜은 강자였다.
그때 당시 아델은 자신이 견디기에는 평민이라는 족쇄가 너무나도 무겁다고 느꼈다.
이것도 변명이다.
아델은 노력도 안 하는 쓰레기였다. 그런 과거가 흔적으로 남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후회되었고 바뀌려 노력하지 않았던 과거가 치욕스러웠다. 그런 아델은 또다시 그런 과거를 없애기 위해 도망쳤다.
도망치고 회피하고 무시하고 그것의 연속이었던 인생이다.
도망치고 부정하고 깨닫고 그 깨달음마저도 부정해 버렸다.
3년 전 그때부터다.
파멸의 문이 열리고 어느 정도 사태가 무마되어 갈 때 아델은 이곳 동굴에서 오로지 검술과 마법만을 극한으로 단련했다. 그 누구도 범주지 못할 경지까지 한 틈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자신도 알아버렸던 거다. 내가 나약해서 도망친 거라고 나 자신의 약함이 이런 부정적인 나를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
그렇게 아델은 그토록 원하던 강함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뻔한 얘기에 아델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런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니 너무 많은 것을 놓쳐버린 건가.
존재 가치 유무를 찾을 수 없었다.
스스로 변화하려 무엇이든 했다. 멜이 죽었고 멜의 숭고한 죽음으로 깨달은 것은 내 약함을 비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상 죄책감 속에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죽어라. 검만 휘둘러야 했던 참담한 심정을 마법으로 잊어버렸다.
그렇게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죄책감은 되려 커져만 갔다.
너무 미안했다. 멜에게 죽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빚졌다. 언젠간 갚겠다 다짐한 순간부터 본인은 글러 먹은 것이다. 이젠 갚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인정해 버리니 자신이 너무나도 하찮고 볼품없어졌다.
그 사실을 이제, 와서 깨달아 버린 것이다. 글러 먹은 새끼.
-쏴아아아
“······.”
변하고 싶다. 멜에게 갚아야 했다. 그리고 로벨리아에게는 사과해야 했다.
아델은 알면서도 지금껏 부정해온 사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하려 하지 않았다.
로벨리아의 말이 전부 맞았다.
내게 필요한 건 모든 사실을 긍정하는 마음가짐 그것 단 하나뿐이었다.
아델은 하나씩 인정해 나갔다.
아델의 내면에 걸려있는 자물쇠를 풀어나갔다. 하나둘씩 철컥하고 풀렸다.
동굴에서 나가지 않고 수련한지 어언 3년.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다.
-저벅저벅
발이 점점 가벼워졌다. 걷고 걸으니 몸에 걸린 무거운 족쇄가 하나씩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변할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힘입어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델은 발을 움직였다.
모든 것을 사과하자 만나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동굴에 숨는 것밖에 못 해서 미안하다고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제는 만나지 못하는 멜의 묘지로 가서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자.
-철퍽
걷고 걸어 동굴 밖 출구 앞에 다다른 아델은 멀리 보이는 로벨리아를 잡기 위해 마지막 발을 내디뎠다.
-쿠웅!
발이 땅바닥에 직전 전.
-화아아아악!
시야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색채들이 점점 아델의 시야를 채워나갔다. 주황빛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고 알 수 없는 푹신한 침대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어···?”
당황함에서 묻어나온 첫 마디는 굵직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들려서는 안 되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린 나의 목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짹짹짹
동굴에서 몇 번이고 외치던 바람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꾸고 싶다. 나약한 자신을 비틀고 뜯어고치고 싶다. 멜에게 갚지 못한 빚을 모조라 갚아 주고 싶다. 수백 수천 번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게··· 무슨···.”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모든 것이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왔다.
8년 전 아카데미를 다닐 무렵으로.
“······.”
로벨리아는 눈앞 거대한 동굴을 두고 깊게 고민했다.
그렇게 긴 시간의 고민 끝에 로벨리아는 발을 뗐다.
-저벅저벅
-후웅!
동굴 안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로벨리아의 귀를 꿰뚫었다.
곧 무거운 공기의 중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아델이었다.
-후웅! 후웅! 후웅!
중년이라기에는 애매한 20대 중반의 아델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본 아델의 턱에는 짧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고 긴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듯 이리저리 엉키며 짐승 털처럼 꼬여 있었다.
생기를 잃은 메마른 눈동자 속에는 빈 그릇처럼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후웅! 후웅!
로벨리아는 아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아델의 훈련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
1시간, 2시간, 3시간.
죄책감이라는 족쇄가 아델을 이렇게 만들었다. 단 하나지만 오늘은 꼭 풀어주리라 다짐해 로벨리아는 이곳까지 왔다.
-뚝뚝뚝
그때 마침 소리가 끊겼다. 멈춘 아델의 머리카락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아델은 침체된 눈으로 로벨리아를 훑어보며 검을 바닥에 툭- 하고 버리듯 떨궜다.
묵직한 철음이 울렸다.
-챙그랑!
아델은 로벨리아를 신경 쓰지 않는 듯 천으로 된 웃옷을 벗고 하의를 탈의하였다.
땀을 닦는다.
“후우···.”
로벨리아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움직임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아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아델은 때 탄 천 옷에서 말끔한 면으로 색 입혀진 옷으로 갈아입으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 과정이 끝난 후에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왔어?”
“······글쎄요. 제가 왜 왔을까요.”
“뻔하지. 나보고 나가자 말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딴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아무 말고 돌아가.”
로벨리아는 아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뇨 ······아델 당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꼭 말해야겠어요.”
아델의 목소리가 한 층 더 차가워졌다.
“돌아가. 로벨리아.”
그의 서리 낀 목소리를 들은 로벨리아의 입이 순간 꾹 다물어졌다.
내가 알던 아델은 이제 없구나. 그 사이에 아델이 얼마나 변했는지 느껴졌다.
그랬기에 로벨리아는 물러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델의 족쇄를 풀어버리리라.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표정을 굳히며 벽에 손을 댄 체 아델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델··· 그런다고 죽은 친구는 돌아오지 않아요.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현실을 보고 이제는 좀 인정하세요. 언제까지 멜만 생각하며 살아갈 거예요.”
“로벨리아. 너는 한 번도 남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생각해본 적 없어. 가엽기도 하지.”
아델의 차가운 목소리가 로벨리아의 가슴을 쑤셨다.
“······.”
로벨리아는 저주로 인해 앞을 볼 수 없었다. 아델은 알면서도 로벨리아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로벨리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로벨리아 네 말이 전부 맞아. 처음부터 끝까지 반박할 틈을 못 찼겠어.”
아델은 천천히 걸어 로벨리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곧 상체를 숙여 로벨리아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멜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
입을 열려던 로벨리아의 입이 꽉 막혔다. 머릿속에서는 멜의 위태로운 숨결이 들렸고 멜의 차갑게 식은 손바닥의 온기가 손에 재현되었다.
불연 떠오르는 기억.
로벨리아는 멜이 죽는 그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민감하게 재생되었다.
죽기 싫다는 목소리도, 옅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생명이 점점 죽어가는 모습에 로벨리아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델이 목숨을 걸고 힘겹게 전장에서 싸울 때 멜을 지키지 못한 건 로벨리아였다.
“허, 허억···.”
안색이 창백해지고 심장이 돌연 뛰기 시작했다. 아델은 로벨리아를 더욱 밀어붙였다.
어쩌면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걸지도 모르겠다. 아델은 멈출 줄 모르는 주둥아리를 나불댔다.
“로벨리아. 너는 항상 멜의 옆에 있었잖아. 눈이 없어서 멜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거 아니냐?”
“뭐라고···요?”
“그래서 네가 가족들한테 버림받은 거야. 미안한데 다시는 오지 마. 너는 나를 평생 이해할 수 없고 너도 나를 평생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델에게 사라지라는 통보를 받은 로벨리아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액체를 흘렸다.
분노도 조금 담긴 것 같고 억울함도 조금 담긴 것 같으며 배신감이 가장 크게 담긴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꼴인가. 아델을 설득하는 것 아니었나. 어째서 아델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 거지? 언제 말실수를 했나?
로벨리아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저 바보같이 눈물만 흘렸다.
평소라면 아델의 뺨을 후리며 지금 뭐라 말했냐 소리쳤을 것이다. 버림받았다는 말을, 그것도 아델에게 들어 더욱 충격이었다.
눈가에 쌓인 눈물은 무거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흐르며 바닥에 뚝-하고 떨어졌다.
어째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델. 너는 그런 놈이 아니잖아.
“흐으윽···!”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아델이 아니다.
로벨리아는 도망치듯 동굴을 빠져나갔다.
-탁탁탁탁!
평소 자신이 느끼던 어리숙한 냄새가 아닌 어엿한 사람의 냄새가 났다. 이제는 차분하게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더욱 꽉 막혀 버렸다.
-탁탁탁탁···
로벨리아는 그렇게 빗소리가 쏟아지듯 들리는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
“······.”
아델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로벨리아의 말에 크게 동의했지만 결국 스스로가 부정했다.
아델은 정말로 나쁜 쓰레기다.
멜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면도 겉면도 모든 것이 그대로 변하지 않은 채 묻어나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멜이 죽고 난 후 자신의 약함과 썩어빠진 생각들이 그건 아니라 말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멜을 살릴 수 있었다. 내 나약했던 과거가 멜을 죽인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강해지겠다고 다짐한 것이.
인간의 유일한 속성이 변화와 적응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델은 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변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아델을 180도 돌려버렸다.
이제 나약한 아델은 세상에 없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을 주절대며 떠들기를 좋아하던 아델은 죽었다.
그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과 단절한 채 강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전부 하늘에서 보고 있을 멜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었다.
멜은 가족이 없는 아델에게 형제라 칭하며 형제는 짐도 나누는 사이라 했다. 아델은 약자였고 멜은 강자였다.
그때 당시 아델은 자신이 견디기에는 평민이라는 족쇄가 너무나도 무겁다고 느꼈다.
이것도 변명이다.
아델은 노력도 안 하는 쓰레기였다. 그런 과거가 흔적으로 남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후회되었고 바뀌려 노력하지 않았던 과거가 치욕스러웠다. 그런 아델은 또다시 그런 과거를 없애기 위해 도망쳤다.
도망치고 회피하고 무시하고 그것의 연속이었던 인생이다.
도망치고 부정하고 깨닫고 그 깨달음마저도 부정해 버렸다.
3년 전 그때부터다.
파멸의 문이 열리고 어느 정도 사태가 무마되어 갈 때 아델은 이곳 동굴에서 오로지 검술과 마법만을 극한으로 단련했다. 그 누구도 범주지 못할 경지까지 한 틈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자신도 알아버렸던 거다. 내가 나약해서 도망친 거라고 나 자신의 약함이 이런 부정적인 나를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
그렇게 아델은 그토록 원하던 강함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뻔한 얘기에 아델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런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니 너무 많은 것을 놓쳐버린 건가.
존재 가치 유무를 찾을 수 없었다.
스스로 변화하려 무엇이든 했다. 멜이 죽었고 멜의 숭고한 죽음으로 깨달은 것은 내 약함을 비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상 죄책감 속에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죽어라. 검만 휘둘러야 했던 참담한 심정을 마법으로 잊어버렸다.
그렇게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죄책감은 되려 커져만 갔다.
너무 미안했다. 멜에게 죽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빚졌다. 언젠간 갚겠다 다짐한 순간부터 본인은 글러 먹은 것이다. 이젠 갚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인정해 버리니 자신이 너무나도 하찮고 볼품없어졌다.
그 사실을 이제, 와서 깨달아 버린 것이다. 글러 먹은 새끼.
-쏴아아아
“······.”
변하고 싶다. 멜에게 갚아야 했다. 그리고 로벨리아에게는 사과해야 했다.
아델은 알면서도 지금껏 부정해온 사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하려 하지 않았다.
로벨리아의 말이 전부 맞았다.
내게 필요한 건 모든 사실을 긍정하는 마음가짐 그것 단 하나뿐이었다.
아델은 하나씩 인정해 나갔다.
아델의 내면에 걸려있는 자물쇠를 풀어나갔다. 하나둘씩 철컥하고 풀렸다.
동굴에서 나가지 않고 수련한지 어언 3년.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다.
-저벅저벅
발이 점점 가벼워졌다. 걷고 걸으니 몸에 걸린 무거운 족쇄가 하나씩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변할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힘입어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델은 발을 움직였다.
모든 것을 사과하자 만나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동굴에 숨는 것밖에 못 해서 미안하다고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제는 만나지 못하는 멜의 묘지로 가서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자.
-철퍽
걷고 걸어 동굴 밖 출구 앞에 다다른 아델은 멀리 보이는 로벨리아를 잡기 위해 마지막 발을 내디뎠다.
-쿠웅!
발이 땅바닥에 직전 전.
-화아아아악!
시야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색채들이 점점 아델의 시야를 채워나갔다. 주황빛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고 알 수 없는 푹신한 침대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어···?”
당황함에서 묻어나온 첫 마디는 굵직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들려서는 안 되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린 나의 목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짹짹짹
동굴에서 몇 번이고 외치던 바람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꾸고 싶다. 나약한 자신을 비틀고 뜯어고치고 싶다. 멜에게 갚지 못한 빚을 모조라 갚아 주고 싶다. 수백 수천 번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게··· 무슨···.”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모든 것이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왔다.
8년 전 아카데미를 다닐 무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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