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조회 : 837 추천 : 0 글자수 : 5,660 자 2022-09-16
·········
······
···
·
·
여기는 어디지?
어두컴컴한 이곳은 비옥하지도 사막처럼 건조하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형의 공간 같았다.
바람의 숨결이나, 온도라는 개념이 없는 공간, 그러며 온통 어두웠다.
이곳은 어디일까.
아무도 없는 어두운 세계에 홀로 놓인 아델은 따갑게 쿡쿡 쑤시는 손바닥을 뒤집어 확인했다.
손바닥에 생긴 수두룩한 굳은살은 여기저기 찢어지며 피가 흐르고 있었고 때가 잔뜩 탄 손가락 끝은 지문이 안 보일 정도로 까매져 있었다.
이것은 정확히 3일 전 아델의 몸이다.
회귀하기 전 검만을 휘두르고 성이 풀릴 때까지 마법을 미친 듯이 퍼부어대던 몸 말이다.
아델은 돌연 심장 고동이 크게 울리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원래 나의 몸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왠지 다급히 천으로 된 흰 웃옷을 들춰봤다.
복부에는 다부진 근육과 크고 작은, 보는 순간 섬뜩해지는 흉터 들이 있었다. 대검에 검에 베인 자국도 있었고 세검이 깊이 찔린 자국도 있었으며 거대한 맹수의 발톱에 피부가 세 갈래로 찢긴 자국도 있었다.
도대체 여태껏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당 채 이해할 수 없는 아델의 흉터였다.
곧 사태를 파악한 아델의 눈동자는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
-주륵
아델의 코에서 맑은 정혈이 주륵-하고 흘렀다.
동시에 식은땀도 같이 흘렀다.
전까지 느끼던 모든 것은 주마등이고 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로 온 것이다. 돌연 공포가 엄습해온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홀로 남은 아델이 처음 느낀 것은 적막함, 그리고 그 뒤로는 오로지 공포와 슬픔뿐이었다.
혹시 지옥이 아닐까.
아델의 눈동자에는 회귀 직후 보였던 당황스러움이 다시 한번 묻어났다.
눈물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지자. 주위로 검은 기운들이 세게 비산하였다.
아델의 눈동자에 비친 기운들은 똬리 모양으로 회전하며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소용돌이가 걷어지자 한가지 형태의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다.
바닥에 박혀있는 검은 예전 아델의 검이었다.
손 마디마디에 정교한 떨림이 느껴졌다.
일정한 힘으로 일정한 속도로 움찔대는 손가락의 감각이 극도로 올라갔다.
검을 잡았을 때의 딱딱하고도 특유의 투박한 감촉이 아델의 손에서 재현된 것이었다.
자신이 동굴 속에서 수백만 번 휘두른 검이다.
날은 이미 닳아버릴 대로 닳았고 잔 기스들은 물론, 음각을 새긴 듯 여기저기 움푹 파인 자국들도 수두룩했다.
검을 두 손으로 꽉 잡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닥에서 검을 뽑아냈다.
-훙!
검의 감촉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아름다웠다.
아델은 주위에 휘날리는 검은 기운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검을 휘둘렀다.
정갈하게 완벽한 자세를 추구하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후웅! 후웅! 후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아델의 귓가를 찌를 때마다.
아델은 자신이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잊어가는 것을 느꼈다.
검을 휘두르면 뭐든지 잊을 수 있었다.
예전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자신은 강해지고 있다 느끼며 예전 나약한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잘못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긴장도 모조리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른 아델은 속으로 자신이 미웠다.
이런 형태로밖에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던 그때 누군가가 아델에게로 걸어왔다.
인기척을 느낀 아델은 하던 짓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본 아델은 눈을 크게 뜨며 들고 있는 검을 놓치듯 스르륵 놔버렸다.
-챙그랑! 훙!
이곳이 만일 지옥이라면 2일간 겪었던 순간들이 전부 주마등 같은 일시적인 것이라면 아델은 겸허히 포기하며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저 검도 그러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줄 알았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삶이 있는 것이었다. 잠깐 회귀해본 삶.
하지만 아니었다. 아델은 이곳이 지옥이 아님을 확신했다. 애초에 회귀 전 자신은 죽지도 않았다.
아델의 눈앞에 있는 환상의 존재는 로벨리아였다.
하지만 로벨리아가 아니었다.
절대로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그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델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서며 씨익 웃어 보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가진 로벨리아가 이번에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 같잖은 연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뭘 알려주고 싶은 건지.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고 싶은 건지.
아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미소를 보자니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저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음에도 아델의 마음은 그녀를 향했다.
바닥에 떨어트린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아···.
저건 같잖은 연극이다. 가짜다. 진짜가 아니다. 날 보며 웃을 리 없다.
-화아아아악
그때 한참을 잠잠하던 검은 기운들이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며 로벨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가 어둠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은 황급히 바닥에서 발을 뗐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점점 다급해지는 발걸음.
“···!!”
아델의 표정에는 균열이 일어났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 몸이라면 가능할 것이라 은연중 확신하며, 몸에 남아 있는 모든 오라를 압축시켜 땅을 세게 박찼다.
-파앙!!!
포탄이 격발되는 격음이 아델의 발바닥에서 울렸다.
로벨리아를 잡기 위해 음속에 달하는 속도로 쇄도했다.
하지만 이내. 순간 뭔가가 아델을 천천히 느려지게 만들었다.
물속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지금 아델의 몸에서 느껴졌다.
아무리 달려도 아무리 오라를 터트려도 한 발자국 밖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델은 점점 로벨리아와 멀어지고 있었다.
곧 어둠 속에 천천히 잠식당하던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쿵쾅쿵쾅!
-와락!!
아델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꿈에서 깰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린 아델은 바들바들 떨리는 시야를 뒤로 한 채 다급히 자신의 손바닥을 시야에 들였다.
손에는 굳은살도 지문에 때가 타 있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평범한 손이다.
그래 꿈이었다.
회귀한 후 3일이 지난 어두운 날이었다.
아델은 지옥도 천국도 아닌 꿈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했다.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원했는지를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강함이었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강함.
지금 아델이 가진 유일한 트라우마는 나약함이었다.
다시 한번 자신이 나약하다고 느낀 순간 아델은 본인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 확신했다.
아델은 가라앉는 고동 소리에 다시 침대로 쓰러지듯 털썩하고 누웠다.
미열을 가라앉히려 차가운 손등을 이마에 올린 아델은 손등을 눈 밑에까지 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흘러봤자. 고작 1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철컥
아델은 나약한 생각들을 없애기 위해 기숙사 문을 열며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그렇게 30분쯤 달리던 아델은 조금씩 어지럽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 잊어야 하는 내용이라 생각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꿈속 내용은 다 잊자. 끌려다닐 필요 없어 강해지는 것이 급선무다.
아델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문이 열려있는 연무장 입구에 다다랐다.
문이 열려있는 건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아델은 지금 시간대에 아무도 있을 리 없는 연무장 안을 들여다봤다.
-화아아아···.
그 안에는 키 작은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분명 저 소녀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 것이다. 나처럼 복잡한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연무장에서 봤던 붉은 머리에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아델은 눈앞에 보이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익숙지 않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곧 그녀가 검술을 선보임에 따라.
-푸웅! 후웅! 화아악!
아델은 그녀가 누군지 떠올랐다.
엘리나.
대륙 4개의 검술 명가 중 풍신에 태어난 그녀는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파멸이 문이 열리는 조건에 중 하나에 해당한 그녀는 왕가와 귀족들의 무력에 처참히 패배하여 영혼을 압수당한 것으로 인생의 종지부를 맞이했다.
엘리나는 분명 아카데미내 서열
50위권에 들어가는 괴물이었던 걸로 알고 기억한다.
그런 그녀의 힘도 압도적인 귀족의 무력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델은 그녀가 이곳으로 온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함, 그리고 가문으로부터의 압박에서 해방되고자 선택한 도주로였다.
이대로 4대 검술 가문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잘라내고 그녀는 자신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다시 가문의 이름을 달고 나타났다. 그것이 정확히 어느 시간대인지는 모르겠다.
아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을 떼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만일 내가 파멸의 문을 진심으로 막을 생각이라면 이번에 엘리나와의 접점을 만들어야 했다.
아델은 연무장에 발을 들였고 순간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엘리나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검 끝에는 희미하게 살기가 담겨 있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나.
-화아아악!!
아델은 측면으로 자연스레 상체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검 끝을 흘려냈다.
그리고 오라를 이용해 순간 마찰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손바닥에 붙은 검을 아래로 내려치는 것으로 움직임 완벽히 봉쇄했다.
-탁!
검 날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엘리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말투로 곱씹으려는 듯 말했다.
“너 누구야. 뭔데 남의 훈련을 훔쳐봐!”
“말은 똑바로 해야지 여기는 공용 연무장이야.”
“그래서 안 훔쳐봤다는 거야?”
아델은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대듯 말했다.
“그런 볼품없는 검술은 봐도 손해지. 뭘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네.”
“뭐라고!?”
“다짜고짜 검부터 내지르는 네 수준에 이 검술은 너무나도 과분하다는 소리야.”
엘리나는 순간 욱한 얼굴로 아델을 노려봤지만 이내 차분해진 표정으로 검을 거뒀다.
그리고는 아델에게 말했다.
“그렇게 잘난 듯이 말하는 걸 보니까 실력에 자신이 있나 봐? 개싸가지.”
“내가 너만 하겠냐.”
엘리나의 차분한 포커페이스가 또다시 무너졌다.
“이게 진짜! 방금 말 취소해!”
“미안,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델은 통 안에서 레이피어를 꺼내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비 걸지 말고 할 거 해.”
“······.”
엘리나는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말 하나하나가 엘리나의 심장을 노리고 요격했으니 어찌 대응할 수 있을까.
아델은 엘리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팩트로 꽂히는 카운터였다.
입학시험 2일 남은 상황에서 자신의 검술을 보여주기 싫은 것은 이해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아무도 없을 이른 시간대 연무장으로 온 것이겠다만 그런 가상한 노력이 조금 곁들려 진다고 해서 이 연무장이 혼자의 것이 아님은 본인이 알아야 했다.
고집불통에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행동을 한다면 주먹보다 검 먼저 들이대는 광녀가 바로 엘리나였다.
아델은 엘리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떼며 검술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오라를 곁들인 검술 훈련이었다.
멜도 분명 오라를 사용할 줄 알았다. 대련할 때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지만, 멜 본인도 모르는 세에 중간중간 폭발적인 속도로 아델을 당황 시킨 게 한둘이 아니었다.
-후웅!
아델은 흔들리는 호흡을 느끼며 움직임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후우···.”
오라를 사용하니 단순한 검격에도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지금은 겨우 20초를 운영하는 것이 최대였다.
그 20초를 압축해서 1초로 만든다면 아까 엘리나가 보였던 말도 안 되는 속도가 나오는 것이다.
엘리나는 가볍게 날린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옆에 괴물을 두고 훈련하니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본 아델은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가지 아까 내가 했던 말 취소하고 싶어?”
검을 휘두르던 엘리나가 발끈한다.
“그니까 싸가지 아니라고! 엘리나다! 엘리나! 엘리나!”
“뭐 이름은 어찌 됐든 좋아.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고.”
“이게 진짜!”
엘리나는 아까와 다르게 검을 잡고 달려들지 않았다. 나름 달려들라고 도발하는 건데 말이다.
아델은 엘리나에게 검을 겨뤘다.
“다시 물을게 아까 말 취소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
“내가 엘리나 레드샤론에게 대련을 신청한다. 방금 말 취소하고 싶으면 내 대련을 순순히 받아라. 다만 내가 이긴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겠어.”
아델은 능글스러운 말투로 엘리나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잠깐 너 내 이름을! 그것보다 내가 왜 니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하는 건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니 우동 사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이해 못 하니까. 그리고 4대 검술 명가의 외동딸 되는 분이. 평민에게 겁먹은 건가?”
엘리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꽉 잡으며 오라를 극한의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엘리나의 목소리가 싸늘히 식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기면 알려줄게.”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맘에 안 들어. 이름을 꼭 들어줘야지 속이 풀리겠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래? 다행이네 나도 그런데.”
아델이 자세를 잡는 것으로 대련은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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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어디지?
어두컴컴한 이곳은 비옥하지도 사막처럼 건조하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형의 공간 같았다.
바람의 숨결이나, 온도라는 개념이 없는 공간, 그러며 온통 어두웠다.
이곳은 어디일까.
아무도 없는 어두운 세계에 홀로 놓인 아델은 따갑게 쿡쿡 쑤시는 손바닥을 뒤집어 확인했다.
손바닥에 생긴 수두룩한 굳은살은 여기저기 찢어지며 피가 흐르고 있었고 때가 잔뜩 탄 손가락 끝은 지문이 안 보일 정도로 까매져 있었다.
이것은 정확히 3일 전 아델의 몸이다.
회귀하기 전 검만을 휘두르고 성이 풀릴 때까지 마법을 미친 듯이 퍼부어대던 몸 말이다.
아델은 돌연 심장 고동이 크게 울리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원래 나의 몸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왠지 다급히 천으로 된 흰 웃옷을 들춰봤다.
복부에는 다부진 근육과 크고 작은, 보는 순간 섬뜩해지는 흉터 들이 있었다. 대검에 검에 베인 자국도 있었고 세검이 깊이 찔린 자국도 있었으며 거대한 맹수의 발톱에 피부가 세 갈래로 찢긴 자국도 있었다.
도대체 여태껏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 당 채 이해할 수 없는 아델의 흉터였다.
곧 사태를 파악한 아델의 눈동자는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
-주륵
아델의 코에서 맑은 정혈이 주륵-하고 흘렀다.
동시에 식은땀도 같이 흘렀다.
전까지 느끼던 모든 것은 주마등이고 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로 온 것이다. 돌연 공포가 엄습해온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홀로 남은 아델이 처음 느낀 것은 적막함, 그리고 그 뒤로는 오로지 공포와 슬픔뿐이었다.
혹시 지옥이 아닐까.
아델의 눈동자에는 회귀 직후 보였던 당황스러움이 다시 한번 묻어났다.
눈물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지자. 주위로 검은 기운들이 세게 비산하였다.
아델의 눈동자에 비친 기운들은 똬리 모양으로 회전하며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소용돌이가 걷어지자 한가지 형태의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다.
바닥에 박혀있는 검은 예전 아델의 검이었다.
손 마디마디에 정교한 떨림이 느껴졌다.
일정한 힘으로 일정한 속도로 움찔대는 손가락의 감각이 극도로 올라갔다.
검을 잡았을 때의 딱딱하고도 특유의 투박한 감촉이 아델의 손에서 재현된 것이었다.
자신이 동굴 속에서 수백만 번 휘두른 검이다.
날은 이미 닳아버릴 대로 닳았고 잔 기스들은 물론, 음각을 새긴 듯 여기저기 움푹 파인 자국들도 수두룩했다.
검을 두 손으로 꽉 잡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닥에서 검을 뽑아냈다.
-훙!
검의 감촉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아름다웠다.
아델은 주위에 휘날리는 검은 기운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검을 휘둘렀다.
정갈하게 완벽한 자세를 추구하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후웅! 후웅! 후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아델의 귓가를 찌를 때마다.
아델은 자신이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잊어가는 것을 느꼈다.
검을 휘두르면 뭐든지 잊을 수 있었다.
예전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자신은 강해지고 있다 느끼며 예전 나약한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잘못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긴장도 모조리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른 아델은 속으로 자신이 미웠다.
이런 형태로밖에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던 그때 누군가가 아델에게로 걸어왔다.
인기척을 느낀 아델은 하던 짓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본 아델은 눈을 크게 뜨며 들고 있는 검을 놓치듯 스르륵 놔버렸다.
-챙그랑! 훙!
이곳이 만일 지옥이라면 2일간 겪었던 순간들이 전부 주마등 같은 일시적인 것이라면 아델은 겸허히 포기하며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저 검도 그러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줄 알았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삶이 있는 것이었다. 잠깐 회귀해본 삶.
하지만 아니었다. 아델은 이곳이 지옥이 아님을 확신했다. 애초에 회귀 전 자신은 죽지도 않았다.
아델의 눈앞에 있는 환상의 존재는 로벨리아였다.
하지만 로벨리아가 아니었다.
절대로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그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델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서며 씨익 웃어 보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가진 로벨리아가 이번에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 같잖은 연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뭘 알려주고 싶은 건지.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고 싶은 건지.
아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미소를 보자니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저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음에도 아델의 마음은 그녀를 향했다.
바닥에 떨어트린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아···.
저건 같잖은 연극이다. 가짜다. 진짜가 아니다. 날 보며 웃을 리 없다.
-화아아아악
그때 한참을 잠잠하던 검은 기운들이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며 로벨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가 어둠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은 황급히 바닥에서 발을 뗐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점점 다급해지는 발걸음.
“···!!”
아델의 표정에는 균열이 일어났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 몸이라면 가능할 것이라 은연중 확신하며, 몸에 남아 있는 모든 오라를 압축시켜 땅을 세게 박찼다.
-파앙!!!
포탄이 격발되는 격음이 아델의 발바닥에서 울렸다.
로벨리아를 잡기 위해 음속에 달하는 속도로 쇄도했다.
하지만 이내. 순간 뭔가가 아델을 천천히 느려지게 만들었다.
물속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지금 아델의 몸에서 느껴졌다.
아무리 달려도 아무리 오라를 터트려도 한 발자국 밖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델은 점점 로벨리아와 멀어지고 있었다.
곧 어둠 속에 천천히 잠식당하던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쿵쾅쿵쾅!
-와락!!
아델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꿈에서 깰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린 아델은 바들바들 떨리는 시야를 뒤로 한 채 다급히 자신의 손바닥을 시야에 들였다.
손에는 굳은살도 지문에 때가 타 있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평범한 손이다.
그래 꿈이었다.
회귀한 후 3일이 지난 어두운 날이었다.
아델은 지옥도 천국도 아닌 꿈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했다.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원했는지를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강함이었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강함.
지금 아델이 가진 유일한 트라우마는 나약함이었다.
다시 한번 자신이 나약하다고 느낀 순간 아델은 본인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 확신했다.
아델은 가라앉는 고동 소리에 다시 침대로 쓰러지듯 털썩하고 누웠다.
미열을 가라앉히려 차가운 손등을 이마에 올린 아델은 손등을 눈 밑에까지 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흘러봤자. 고작 1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철컥
아델은 나약한 생각들을 없애기 위해 기숙사 문을 열며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그렇게 30분쯤 달리던 아델은 조금씩 어지럽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 잊어야 하는 내용이라 생각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꿈속 내용은 다 잊자. 끌려다닐 필요 없어 강해지는 것이 급선무다.
아델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문이 열려있는 연무장 입구에 다다랐다.
문이 열려있는 건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아델은 지금 시간대에 아무도 있을 리 없는 연무장 안을 들여다봤다.
-화아아아···.
그 안에는 키 작은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분명 저 소녀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 것이다. 나처럼 복잡한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연무장에서 봤던 붉은 머리에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아델은 눈앞에 보이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익숙지 않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곧 그녀가 검술을 선보임에 따라.
-푸웅! 후웅! 화아악!
아델은 그녀가 누군지 떠올랐다.
엘리나.
대륙 4개의 검술 명가 중 풍신에 태어난 그녀는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파멸이 문이 열리는 조건에 중 하나에 해당한 그녀는 왕가와 귀족들의 무력에 처참히 패배하여 영혼을 압수당한 것으로 인생의 종지부를 맞이했다.
엘리나는 분명 아카데미내 서열
50위권에 들어가는 괴물이었던 걸로 알고 기억한다.
그런 그녀의 힘도 압도적인 귀족의 무력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델은 그녀가 이곳으로 온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함, 그리고 가문으로부터의 압박에서 해방되고자 선택한 도주로였다.
이대로 4대 검술 가문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잘라내고 그녀는 자신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다시 가문의 이름을 달고 나타났다. 그것이 정확히 어느 시간대인지는 모르겠다.
아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을 떼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만일 내가 파멸의 문을 진심으로 막을 생각이라면 이번에 엘리나와의 접점을 만들어야 했다.
아델은 연무장에 발을 들였고 순간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엘리나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검 끝에는 희미하게 살기가 담겨 있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나.
-화아아악!!
아델은 측면으로 자연스레 상체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검 끝을 흘려냈다.
그리고 오라를 이용해 순간 마찰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손바닥에 붙은 검을 아래로 내려치는 것으로 움직임 완벽히 봉쇄했다.
-탁!
검 날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엘리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말투로 곱씹으려는 듯 말했다.
“너 누구야. 뭔데 남의 훈련을 훔쳐봐!”
“말은 똑바로 해야지 여기는 공용 연무장이야.”
“그래서 안 훔쳐봤다는 거야?”
아델은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대듯 말했다.
“그런 볼품없는 검술은 봐도 손해지. 뭘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네.”
“뭐라고!?”
“다짜고짜 검부터 내지르는 네 수준에 이 검술은 너무나도 과분하다는 소리야.”
엘리나는 순간 욱한 얼굴로 아델을 노려봤지만 이내 차분해진 표정으로 검을 거뒀다.
그리고는 아델에게 말했다.
“그렇게 잘난 듯이 말하는 걸 보니까 실력에 자신이 있나 봐? 개싸가지.”
“내가 너만 하겠냐.”
엘리나의 차분한 포커페이스가 또다시 무너졌다.
“이게 진짜! 방금 말 취소해!”
“미안,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델은 통 안에서 레이피어를 꺼내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비 걸지 말고 할 거 해.”
“······.”
엘리나는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말 하나하나가 엘리나의 심장을 노리고 요격했으니 어찌 대응할 수 있을까.
아델은 엘리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팩트로 꽂히는 카운터였다.
입학시험 2일 남은 상황에서 자신의 검술을 보여주기 싫은 것은 이해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아무도 없을 이른 시간대 연무장으로 온 것이겠다만 그런 가상한 노력이 조금 곁들려 진다고 해서 이 연무장이 혼자의 것이 아님은 본인이 알아야 했다.
고집불통에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행동을 한다면 주먹보다 검 먼저 들이대는 광녀가 바로 엘리나였다.
아델은 엘리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떼며 검술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오라를 곁들인 검술 훈련이었다.
멜도 분명 오라를 사용할 줄 알았다. 대련할 때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지만, 멜 본인도 모르는 세에 중간중간 폭발적인 속도로 아델을 당황 시킨 게 한둘이 아니었다.
-후웅!
아델은 흔들리는 호흡을 느끼며 움직임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후우···.”
오라를 사용하니 단순한 검격에도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지금은 겨우 20초를 운영하는 것이 최대였다.
그 20초를 압축해서 1초로 만든다면 아까 엘리나가 보였던 말도 안 되는 속도가 나오는 것이다.
엘리나는 가볍게 날린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옆에 괴물을 두고 훈련하니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본 아델은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가지 아까 내가 했던 말 취소하고 싶어?”
검을 휘두르던 엘리나가 발끈한다.
“그니까 싸가지 아니라고! 엘리나다! 엘리나! 엘리나!”
“뭐 이름은 어찌 됐든 좋아.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고.”
“이게 진짜!”
엘리나는 아까와 다르게 검을 잡고 달려들지 않았다. 나름 달려들라고 도발하는 건데 말이다.
아델은 엘리나에게 검을 겨뤘다.
“다시 물을게 아까 말 취소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
“내가 엘리나 레드샤론에게 대련을 신청한다. 방금 말 취소하고 싶으면 내 대련을 순순히 받아라. 다만 내가 이긴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겠어.”
아델은 능글스러운 말투로 엘리나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잠깐 너 내 이름을! 그것보다 내가 왜 니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하는 건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니 우동 사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이해 못 하니까. 그리고 4대 검술 명가의 외동딸 되는 분이. 평민에게 겁먹은 건가?”
엘리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꽉 잡으며 오라를 극한의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엘리나의 목소리가 싸늘히 식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기면 알려줄게.”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맘에 안 들어. 이름을 꼭 들어줘야지 속이 풀리겠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래? 다행이네 나도 그런데.”
아델이 자세를 잡는 것으로 대련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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