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달콤한 정적
조회 : 699 추천 : 1 글자수 : 3,282 자 2022-09-10
-
부우우우-
익숙한 뱃고동 소리가 바다를 온통 메웠다. 그 울림이 어찌나 요란하던지, 술잔에 아슬아슬하게 채워진 물이 부르르 떨리며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져 갑판을 뒹굴었다. 원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참 이상했다. 저가 보고 있는 술잔은 제가 서있는 곳 보다도 두 걸음 정도가 멀게 있는데, 톡, 하며 자신의 볼에 떨어진 액체가 술잔의 물은 아닐 터였다. 여전히 술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원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이제 내려와 쉬어도 된다! 그렇게 목 놓아 불지 않아도 된다 하지 않았더냐.’
문을 열고 나와 유쾌하게 웃으며 소리치는 태운이었다. 피곤하지도 않은 지, 그는 아침부터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고 있다. 뱃고동을 분 뒤 지치는지 고개를 숙이고 헐떡이던 선원이 고개를 들며 웃어 보였다. 그 선원은 왜 인지 늘 같은 시간에 뱃고동을 울린다. 아마도 이른 아침 아침잠이 많은 선원들을 깨우기 위함이리라. 그에게 마주 웃어주던 태운은 고개를 돌려 원을 보았다.
‘원아!’
원은 저에게 다가오는 태운을 보고는 웃어 보였다. 태운은 원에게 미소를 마주 지으며 자신의 엄지로 원의 볼을 스윽- 쓸었다. '그래, 원아.' 선원에게 소리치던 유쾌한 말투와는 다른, 어딘가 깊어진 듯한 그의 목소리에 원은 눈을 맞추었다. 조금의 정적 후, 태운은 말을 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눈물을 흘린 연유는 무엇이냐.’
아, 볼에 떨어졌던 액체는 눈물 이였는가 보다. 원은 그리 생각했다.
자신의 가족, 친구, 동료 모두를 잃고 이 선에 올라 탄지 보름, 눈물 한 방울 흐른 대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아무것도 없던 자신을 기꺼이 거두어 준 태운에게 어찌 과거를 그리워한다 말할 수 있을까. 둘러댈 말을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여는 순간, 툭-. 태운의 어깨 위에 크고 흰 손이 얹어졌다.
“태운장. 바람이 점점 세지는 것 같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원들을 깨워 정비를 시작하시게.”
아직 원의 답을 듣지 못한 태운은, 잠시 망설이다 원을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중에라도 답을 듣겠다는 일종의 신호였는데, 원은 그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운을 향해 함께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돌아선 태운 앞에는 우현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태운은 우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명 받았습니다, 우현 장군.’
우현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이만 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은 못내 아쉬운 듯 느리게 돌아선 태운을 확인하고는 원 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원은 저 에게도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우현을 보곤 조금 놀랐다.
원을 내려다보는 우현의 큰 눈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는 어쩐지 입을 열지 않은 채 원을 유심히 보고만 있었다.
계속되는 정적에 불편함을 느낀 원이 목례를 한 뒤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우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질문하지.”
고개를 돌리던 원은 멈칫했다. 태운이 하려던 질문을 뜻하는 것인지, 우현은 태운과 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듯했다.
무언가 들킨 듯한 기분이 든 원은 고개를 푹 숙였고, 그런 원을 보며 우현은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
“아, 아니, 그대들의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네. 뱃고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나오려던 참에 우연히 듣게 된 것 뿐이야.”
우현은 여전히 숙이고 있는 원의 얼굴을 조심히 들어 보였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에게 눈을 맞추어 주지 않는 원에게 말을 이어가는 우현이다.
“울었는가?”
-………….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눈물을 어찌 울음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우현의 질문에 반기를 들려던 원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품을 해도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나온다. 눈에 먼지가 잘못 들어가도. 모두 눈물이지만, 울음 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흐르는 지 알지도 못한 눈물이었음에도, 그 안에는 울음의 이유가 가득 들어차 있었기에. 그것은 울음이었다. 명백한 울음이었다.
-보름 전-
굵은 빗줄기가 주변을 온통 적셨다. 원의 옆에는 열 다섯이 채 안된 남동생이 어설프게 검을 잡으며 떨고 있었다.
이 나라의 백성인 것이 죄였다. 원은 유일하게 남겨진 제 가족인 어린 동생을 홀로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다. 관청에 찾아가 제 발로 전쟁터에 나간다며 아무리 간청하여도 그들은 응해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어린 것은 억지로 끌고 가면서, 저는 여인이라는 이유로 전쟁터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원은 곱게 땋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묶었다. 어린 남동생의 저고리는 원에게 마치 제 것인 양 꼭 맞았다.
작은 키에 곱상한 얼굴. 남장을 한다고는 했지만, 원은 누가 보아도 여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 난리통에 남장을 의심하는 사람 따윈 없었다. 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동생의 손을 붙잡고 군선에 몸을 실었다.
머리를 너무 세게 올려 묶었는지, 자꾸 지끈거렸다.
-
이 배에는 모두 안면이 있던 사람들 뿐이다. 정사에는 관심도 없던 정부 탓에, 미리 훈련도 받지 못한 민간인들이 떼로 군선에 실렸다. 뱃멀미에 구토를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들이 총알받이라는 것은 원의 어린 남동생도 알 정도였다.
원은 이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남동생을 어떻게든 보호하겠다는 일념 뿐 이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외세의 침략은 수전에서 승리한 뒤로 더욱 심해졌다. 남아나는 배가 없어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진 배들은 위태롭지 않을 수 없었다. 삐걱대는 갑판을 내려다보던 원은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적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붉은 피가 바다를 물들였다. 광이 나는 외세의 총칼은, 오랫동안 갈지 않아 무뎌진 그들의 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남장한 저를 눈감아 주겠다며 개구지게 웃던 오랜 친구가, 그 친구의 아비가, 또 그 아비의 친구가 붉은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원은 충격 탓에 기절한 동생을 숨겨둔 채 그 앞을 지켰고, 누군가가 그 주변이라도 온다면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적의 피로 흠뻑 적셔진 원의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자신이 살인을 하고 있다는 자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제 손에 쥐여진 것을 마구 휘두를 뿐 이였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길이 없는 액체가 원의 볼을 타고 흘러, 피와 함께 입 속으로 들어가 비릿한 맛이 났다.
.
.
.
핏빛 빗물이 튀기는 사이,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던 원이 동생을 향해 돌아보던 때였다. 적군이 올라탄 뒤로 계속해 덜컹거리던 배에서 순식간에 닻이 내려지더니, 배가 급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부실공사의 결과였다.
얼마 남지 않은 민간인들과 외세의 군사들까지도 당황을 금치 못한 채,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각자 기우는 배의 한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누군가 이 전쟁을 잠시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원은 배가 침몰할 듯했던 그 짧은 순간이, 어쩐지 평화롭다 느꼈다.
여기저기 기울던 배가 전장을 이탈해 엉뚱한 곳으로 멀리 쓸려 가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멈추었다. 원은 뒤에 있던 동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행히도 제 옆에서 작은 기둥을 붙잡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원이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쯤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다시 피가 튀기기 시작했다.
정말 짧고도 짧았던 평화의 순간이 깨짐에 절망하던 원은 배 주변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전장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으니 더 이상 이 배에 올라탈 적은 없다. 지금 이 배 안에 남아있는 적들만 해치우면…끝이다.' 생각을 마친 원은 더욱 격렬하게 칼을 휘둘렀다.
원은 의외로 칼부림에 소질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재주라니, 그다지 축복받은 재주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조상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정신없이 싸우다 제 앞의 적군을 무딘 칼로 푹, 찌른 원은 그제야 주변이 조용해짐을 느꼈다. 고요하다. 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겹쳐져 나뒹구는 마을 사람들과 적군의 시신을 지나서야, 원은 조용히 동생에게 접근하던 적군을 보았다.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동생과 너무 멀어진 탓이다. 잔뜩 겁을 먹은 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칼을 엉성하게 잡고 부들대는 동생을 제 눈으로 보기 힘들었다. 힘겹게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숨을 죽이며 적군을 향해 다가가던 원은 '헉-' 하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푸욱-
동생의 촉촉한, 커다란 눈망울이 빛을 잃었다.
부우우우-
익숙한 뱃고동 소리가 바다를 온통 메웠다. 그 울림이 어찌나 요란하던지, 술잔에 아슬아슬하게 채워진 물이 부르르 떨리며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져 갑판을 뒹굴었다. 원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참 이상했다. 저가 보고 있는 술잔은 제가 서있는 곳 보다도 두 걸음 정도가 멀게 있는데, 톡, 하며 자신의 볼에 떨어진 액체가 술잔의 물은 아닐 터였다. 여전히 술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원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이제 내려와 쉬어도 된다! 그렇게 목 놓아 불지 않아도 된다 하지 않았더냐.’
문을 열고 나와 유쾌하게 웃으며 소리치는 태운이었다. 피곤하지도 않은 지, 그는 아침부터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고 있다. 뱃고동을 분 뒤 지치는지 고개를 숙이고 헐떡이던 선원이 고개를 들며 웃어 보였다. 그 선원은 왜 인지 늘 같은 시간에 뱃고동을 울린다. 아마도 이른 아침 아침잠이 많은 선원들을 깨우기 위함이리라. 그에게 마주 웃어주던 태운은 고개를 돌려 원을 보았다.
‘원아!’
원은 저에게 다가오는 태운을 보고는 웃어 보였다. 태운은 원에게 미소를 마주 지으며 자신의 엄지로 원의 볼을 스윽- 쓸었다. '그래, 원아.' 선원에게 소리치던 유쾌한 말투와는 다른, 어딘가 깊어진 듯한 그의 목소리에 원은 눈을 맞추었다. 조금의 정적 후, 태운은 말을 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눈물을 흘린 연유는 무엇이냐.’
아, 볼에 떨어졌던 액체는 눈물 이였는가 보다. 원은 그리 생각했다.
자신의 가족, 친구, 동료 모두를 잃고 이 선에 올라 탄지 보름, 눈물 한 방울 흐른 대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아무것도 없던 자신을 기꺼이 거두어 준 태운에게 어찌 과거를 그리워한다 말할 수 있을까. 둘러댈 말을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여는 순간, 툭-. 태운의 어깨 위에 크고 흰 손이 얹어졌다.
“태운장. 바람이 점점 세지는 것 같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원들을 깨워 정비를 시작하시게.”
아직 원의 답을 듣지 못한 태운은, 잠시 망설이다 원을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중에라도 답을 듣겠다는 일종의 신호였는데, 원은 그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운을 향해 함께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돌아선 태운 앞에는 우현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태운은 우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명 받았습니다, 우현 장군.’
우현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이만 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은 못내 아쉬운 듯 느리게 돌아선 태운을 확인하고는 원 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원은 저 에게도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우현을 보곤 조금 놀랐다.
원을 내려다보는 우현의 큰 눈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는 어쩐지 입을 열지 않은 채 원을 유심히 보고만 있었다.
계속되는 정적에 불편함을 느낀 원이 목례를 한 뒤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우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질문하지.”
고개를 돌리던 원은 멈칫했다. 태운이 하려던 질문을 뜻하는 것인지, 우현은 태운과 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듯했다.
무언가 들킨 듯한 기분이 든 원은 고개를 푹 숙였고, 그런 원을 보며 우현은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
“아, 아니, 그대들의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네. 뱃고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나오려던 참에 우연히 듣게 된 것 뿐이야.”
우현은 여전히 숙이고 있는 원의 얼굴을 조심히 들어 보였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에게 눈을 맞추어 주지 않는 원에게 말을 이어가는 우현이다.
“울었는가?”
-………….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눈물을 어찌 울음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우현의 질문에 반기를 들려던 원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품을 해도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나온다. 눈에 먼지가 잘못 들어가도. 모두 눈물이지만, 울음 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흐르는 지 알지도 못한 눈물이었음에도, 그 안에는 울음의 이유가 가득 들어차 있었기에. 그것은 울음이었다. 명백한 울음이었다.
-보름 전-
굵은 빗줄기가 주변을 온통 적셨다. 원의 옆에는 열 다섯이 채 안된 남동생이 어설프게 검을 잡으며 떨고 있었다.
이 나라의 백성인 것이 죄였다. 원은 유일하게 남겨진 제 가족인 어린 동생을 홀로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다. 관청에 찾아가 제 발로 전쟁터에 나간다며 아무리 간청하여도 그들은 응해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어린 것은 억지로 끌고 가면서, 저는 여인이라는 이유로 전쟁터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원은 곱게 땋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묶었다. 어린 남동생의 저고리는 원에게 마치 제 것인 양 꼭 맞았다.
작은 키에 곱상한 얼굴. 남장을 한다고는 했지만, 원은 누가 보아도 여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 난리통에 남장을 의심하는 사람 따윈 없었다. 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동생의 손을 붙잡고 군선에 몸을 실었다.
머리를 너무 세게 올려 묶었는지, 자꾸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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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에는 모두 안면이 있던 사람들 뿐이다. 정사에는 관심도 없던 정부 탓에, 미리 훈련도 받지 못한 민간인들이 떼로 군선에 실렸다. 뱃멀미에 구토를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들이 총알받이라는 것은 원의 어린 남동생도 알 정도였다.
원은 이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남동생을 어떻게든 보호하겠다는 일념 뿐 이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외세의 침략은 수전에서 승리한 뒤로 더욱 심해졌다. 남아나는 배가 없어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진 배들은 위태롭지 않을 수 없었다. 삐걱대는 갑판을 내려다보던 원은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적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붉은 피가 바다를 물들였다. 광이 나는 외세의 총칼은, 오랫동안 갈지 않아 무뎌진 그들의 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남장한 저를 눈감아 주겠다며 개구지게 웃던 오랜 친구가, 그 친구의 아비가, 또 그 아비의 친구가 붉은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원은 충격 탓에 기절한 동생을 숨겨둔 채 그 앞을 지켰고, 누군가가 그 주변이라도 온다면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적의 피로 흠뻑 적셔진 원의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자신이 살인을 하고 있다는 자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제 손에 쥐여진 것을 마구 휘두를 뿐 이였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길이 없는 액체가 원의 볼을 타고 흘러, 피와 함께 입 속으로 들어가 비릿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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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빗물이 튀기는 사이,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던 원이 동생을 향해 돌아보던 때였다. 적군이 올라탄 뒤로 계속해 덜컹거리던 배에서 순식간에 닻이 내려지더니, 배가 급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부실공사의 결과였다.
얼마 남지 않은 민간인들과 외세의 군사들까지도 당황을 금치 못한 채,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각자 기우는 배의 한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누군가 이 전쟁을 잠시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원은 배가 침몰할 듯했던 그 짧은 순간이, 어쩐지 평화롭다 느꼈다.
여기저기 기울던 배가 전장을 이탈해 엉뚱한 곳으로 멀리 쓸려 가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멈추었다. 원은 뒤에 있던 동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행히도 제 옆에서 작은 기둥을 붙잡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원이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쯤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다시 피가 튀기기 시작했다.
정말 짧고도 짧았던 평화의 순간이 깨짐에 절망하던 원은 배 주변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전장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으니 더 이상 이 배에 올라탈 적은 없다. 지금 이 배 안에 남아있는 적들만 해치우면…끝이다.' 생각을 마친 원은 더욱 격렬하게 칼을 휘둘렀다.
원은 의외로 칼부림에 소질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재주라니, 그다지 축복받은 재주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조상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정신없이 싸우다 제 앞의 적군을 무딘 칼로 푹, 찌른 원은 그제야 주변이 조용해짐을 느꼈다. 고요하다. 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겹쳐져 나뒹구는 마을 사람들과 적군의 시신을 지나서야, 원은 조용히 동생에게 접근하던 적군을 보았다.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동생과 너무 멀어진 탓이다. 잔뜩 겁을 먹은 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칼을 엉성하게 잡고 부들대는 동생을 제 눈으로 보기 힘들었다. 힘겹게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숨을 죽이며 적군을 향해 다가가던 원은 '헉-' 하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푸욱-
동생의 촉촉한, 커다란 눈망울이 빛을 잃었다.
작가의 말
꾸준히 연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