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곳은 죽은 자들의 바다요?
조회 : 596 추천 : 1 글자수 : 3,393 자 2022-09-12
푸욱-
동생의 촉촉한, 커다란 눈망울이 빛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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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제 희망은 죽었다. 죽어버렸다. 이제 원은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체격 차이가 다분히 나는 적과 일 대 일로 칼질을 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다. 차라리 항복한 뒤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원에게는 안전할 터였다. 하지만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 없던 원은, 동생의 원혼이라도 달래어줄 심산으로 소리를 지르며 덤볐다.
눈에 초점을 잃은 듯한 군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칼만 세차게 휘둘렀다. 붉은 피와 널려 있는 시신들에, 정신병에 걸린 듯했다. 원 또한 그를 상대로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다가, 어느 순간 차가운 금속이 제 어깨를 스침을 느꼈다. 울컥, 하고 어깨에서 뜨거운 액체의 느낌이 느껴지는 순간, 원은 그를 베었다.
제 정신이 아니던 그는 허공을 보며 천천히 쓰러졌고, 원은 그 눈빛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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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두 끝났다. 언제부터 인지 거세게 내리우던 빗방울은 멈춘 지 오래였다.
공허한 눈빛으로 주변을 빙- 둘러보던 원은 눈도 감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보았다. 어쩐지 그들과 눈이 마주친 듯 해 속이 울렁였다. 차마 그들의 시신 위에는 토악질을 할 수 없어, 원은 비틀거리며 배의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간신히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터져 나오는 것은 토사물이 아닌 울음이었다. 원은 고요한 바다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울음이 멎은 원은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는 어깨를 움켜쥐고 시신들 사이를 걸었다. 어쩐지 시야가 조금 흐릿한 것도 같다. 원은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으며 날이 선 칼을 찾았다. 내 사람들을 수도 없이 베어버린 적의 칼이었다. 원은 조용히 그 칼을 내려다보았다. 마을사람들의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자꾸 떠오르는 그들의 얼굴을 삼켜낸 뒤, 원은 부들거리는 팔로 칼을 들어올렸다.
원의 처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순간 위태롭던 배는 바람을 만나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것이, 결국은 어떻게든 살아있기를 갈망하는 것인지, 스스로를 해하려던 원은 초인적인 힘으로 부서진 갑판들 중 큰 조각에 꾸역꾸역 올라탔다. 아, 아직 난 살아있기를 원하는 것인가. 원은 생각했다. 이 배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의 목숨을, 내 손으로 끊을 수 있었을까… 자책이 섞인 궁금증을 뒤로한 채, 원은 그대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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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오, 정신이 좀 드시오?’
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리게 보이는 하늘에는 보름달이 크게 떠 있었다. 제 몸을 세차게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려보니 저를 유심히 내려다 보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이 허리춤에 찬 칼이 눈에 들어온 원은 벌떡 일어나 저에게서 시선을 뗀 사내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냈다. 순식간에 무기를 빼앗긴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의 동료로 보이던 나머지 다섯의 사내는 부리나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빼앗은 칼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는 원을 본 그들은 이내 허리춤에 가져가던 손을 황급히 빼내어 원을 저지했다.
순식간에 큰 소란이 벌어지자 자고 있던 선원들도 하나, 둘 깨어 나와 상황을 보기 시작하였고, 그들 사이로 머리를 덥수룩하게 자른, 뱃사람 답지 않은 하얀 피부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무언 일이냐,”
선원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원을 내려다보고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사내…? 아니, 여인이.”
군복 차림이 무색하게도, 원을 사내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 나라의 군인들이 전쟁 속에서 총알받이라도 필요했기에 모른 척 한 것인지, 정말 난리통에 정신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든 정신이 멀쩡한 이가 원을 본다면 그녀가 여인이란 사실은 명백할 터였다.
“여인이 군복을 입고, 대체 어찌하다 이리 되었는가?”
원은 자신의 고개를 들어올리는 조심스러운 손짓에 텅 빈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몇 분 동안의 정적이 지나고 나서야 원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이곳은, 죽은 자들의 바다요?
“………..”
-제 동생은, 어디 있소? 분명 여기 있을 것이오.
“………..아,”
-그 작은 아이가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요. 어서, 어서 찾아 주시오.
아, 그리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너는 산 사람이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않은 채 원에게 네가 살아있음을 말한 그는, 절망하는 원의 표정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제 남동생과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런 원에게 저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혼자 남았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절망한 표정으로 말문을 잃은 원을 본 그는 한숨을 휴-하고 쉬었다.
“…우선 몸에 묻어있는 핏물부터 닦아야겠네.
태운장, 목욕물을 데워 놓으라 하라.”
그가 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하였다. 원을 빤히 바라보는 큰 눈은 깊었다. 훌쩍이는 원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그는 어설프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산 사람의 이름은 알아야지. 너는 이름이 무어냐?”
허공을 하릴없이 떠돌던 원의 눈동자가 그제야 멈추었다.
-영…원 입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여쁜 이름이구나.
심우현, 나의 이름이다. 우현이라 불러다오.”
원의 떨리던 몸이 점점 멈추었다. 그 끔찍한 기억이, 외로움이, 어쩐지 멀리 있는 듯했다. 가까스로 제 정신이 돌아온 원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를 다시 한번 천천히 뜯어보았다. 투박하게 자른 듯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에 대한 효를 저버린 사람인 것일까, 원은 생각했다.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내려 그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당황한 듯한 그의 눈동자는 제 어깨를 향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원을 조용히 관찰하던 우현은 유난히 붉은 색으로 가득 젖어 있는 그녀의 어깨를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혈흔이 이렇게도 짙은데 어찌 이리 멀쩡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아문 상처인 것일까. 원의 어깨 주변을 유심히 보던 우현이 그리 생각한 찰나, 원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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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었는가?”
그의 물음에 보름 전의 기억이 스친 원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우현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촉촉하게 젖어든 원의 눈가는 처음 그녀를 마주했던 날의 그 처절한 눈빛과 닮아 있어, 우현은 마음이 쓰였다.
-아직,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원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현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휴- 하고 작은 숨을 쉬었다. 드디어 입을 여는구나, 원아.
사실 원을 처음 마주했던 그 날 이후, 보름 동안 벙어리인 마냥 입을 열지 않는 원에 갑갑했던 우현이었다. 그에게도, 제 동생을 찾아 달라 절절히 간청하며 눈물을 흘리던 원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무어가 그리 괴로워 아직도 떨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우현은 조용히 손을 들어 원의 머리를 쓸었다.
“그래. 기억이 멀어지기에 보름이라는 시간은 가히 짧다.”
어쩐지 다시금 편해지는 듯한 기분에 원의 떨림이 멈추었다. 저를 쓰다듬어주는 우현의 눈을 보며 원은, 어쩐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모양이 궁금했다. 원을 지그시 쳐다보던 우현은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리며 원의 마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나 역시도, 멀어지기엔 많은 시간이 걸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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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아!’
제 생각을 읽은 듯 한 우현의 말에 놀란 원이 뒤를 돌아본 곳에는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후후- 내쉬고 있는 태운이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정비를 모두 끝냈는가 보다. 올려 묶은 머리가 못나게 헝클어진 태운을 본 원은 웃었다. 곱게 휘어지는 원의 두 눈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들었다.
낮지 않은 직위의 태운이 정신없이 뛰어가는 모습을 본 선원들 중 몇은 의문을 품고 눈으로 그를 좇았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 하지도 않은 채 바보같이 웃어 보이는 태운에게 미소를 지은 우현이 입을 뗐다.
“무어가 그리 좋다고 바보같이 웃고 있는가?”
‘정비를 이리 빠르게 끝낸 것은 처음이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운은, 정비를 빠르게 끝내어 하여금 원을 마주치게 된 것이 기쁜 것이라는 말은 삼가했다.
주변으로 모인 선원들을 둘러본 우현은, 미소를 걷히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랫것들이 보고 웃네.”
‘웃는 것이 무어가 잘못이랍니까? 너도, 나도 좋으면 웃는 것이지.’
제 말에 끝까지 호탕하게 답하는 태운을 보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보이는 우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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