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얼음대륙 위에 서다 (1)
조회 : 954 추천 : 0 글자수 : 4,348 자 2022-09-11
창밖의 붉은 단풍과도 같이 붉은 피를 잔뜩 머금은 검날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아, 난 이대로 죽는 걸까.’
나의 허망하고도 아무것도 없는 삶에서 나타난 최초의 자극은 너무도 큰 두려움과 살고자 하는 욕구를 끌어올렸다. 애초에 나는 이 첨탑에서 뛰어내릴 용기도 없어 20년 가까이 살아왔으니 그 긴 세월로 살고자 하는 욕구는 충분히 증명해냈지만 말이다. 내 앞에 있는 흑발의 가진 남자는 겨울의 낮달과도 같은 시린 은빛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날 내려다보았다.
“이아 윈터 루멘인가?”
듣기 싫고 무서운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듣기 좋을 만큼의 중저음이 귓속에 파고들었다. 어쩌면 애정을 담았다고도 착각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현실은 지독히도 차가운 물음이었기에 그래서 지금 상황과 그의 표정, 목소리가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네, 맞아요.”
나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고 그러자 보인 건 검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핏방울이었다.
무서워. 또 죽고 싶지 않아.
낡은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고 그 손이 공포에 파르르 떨리는 걸 내 앞에 있는 남자도 봤겠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검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나?”
“모릅니다.”
“정말 누군지 모르나?”
“피 묻은 검을 들고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남자분인 건 알겠네요.”
내 대답에 남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아 황녀. 그대는 이곳에서 죽어야 하는 걸 아나?”
“…….”
“루멘은, 그대의 나라는 멸망했다.”
아아, 역시.
나는 예상했던 말이 나와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들린 병사들의 비명과 연기. 루멘 황궁의 외진 곳에 있을지라도 이곳은 황궁이건만 그런 소리를 듣고 창밖의 광경을 본다면 아무리 지금 배운 게 없는 나라도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나라가 졌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전쟁에서 지면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죽이거나 노예로 만든다고 했던가.
“이아 황녀. 하지만 난 그대를 죽일 생각이 없다.”
“네?”
내 앞에 있는 남자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나를 살려준다는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뭔가 말하려니 남자의 뒤로 병사 몇명이 다가왔고 남자는 차갑게 말했다.
“끌고 가라.”
“네.”
검은 가죽 갑옷의 병사들이 나에게 척척 다가오더니 내 양팔을 결박하듯 잡았고 나는 어깨를 비트는 고통에 인상을 썼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내 표정에도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방 안을 훑을 뿐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며 고개를 떨궜다. 나라가 멸망했다. 전생에도 나는 루멘 제국의 사람이었고 현생은 이 남쪽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루멘 제국의 황녀였다.
‘비록 전생은 가난한 약제사였고 현생은 버림받은 황녀지만…….’
이 나라에게 좋은 대접도, 복지 혜택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태어난 나라였고 내가 사랑한 사람과 일생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 이 나라가 하루아침에 멸망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계단을 강제로 내려가는데 발걸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20년 가까이 갇혀 있던, 그토록 나가고 싶었던 지긋지긋한 이 낡은 첨탑에서 드디어 벗어나건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계단이 짧았나?’
이 첨탑은 상당히 높아서 건강한 성인들도 다 올라오면 헐떡거리는 높이라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았고 작은 불빛조차 없이 깜깜해 어릴 땐 아래로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내려가도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그냥 힘들여서 내려갈 생각도 안 들었지만. 그런데도 이 계단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건 왜 그럴까.
‘그나저나 우습네…….’
이런 식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이 날 다시 받아주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는데 그 가족과 나라가 사라져야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허망하고 우스웠다. 난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진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유만으로 갇혀 지내야 했다는 이야기니까.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땅에 발을 딛자 느낌이 이상했다. 묵직한 느낌이 발에 느껴졌다고 하면 모두가 웃을까? 거기다가 시야가 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왜 들었는지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늘 굳게 잠겨있던 철문이 뜯겨 나가 바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밖에서 탄내를 담은 선선한 바람이 탑 안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내 연한 하늘색 드레스 자락과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바람 때문에 감았던 눈을 뜨고 본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맙소사…….”
조금 떨어진 루멘의 상징과도 같은 하얀 본궁에서 불꽃이 보였다. 깃발에도 불이 붙어 타들어 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하는 마음에 이상하게도 눈물이 흘렀다.
“정말… 멸망한 거구나.”
“뭐라고 했습니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날 끌고 가던 병사 중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내가 아무 대답이 없으니 그 역시 따로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여자들은 낡은 감옥형 마차 안에, 남자들은 병사들의 감시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노예로 끌려가는 궁인들…인 걸까?’
내가 근처까지 끌려오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가 이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내는 경멸의 눈빛과 명백히 느껴지는 혐오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그들을 감시하던 병사들이 조용히 하라며 큰소리로 위협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저들과 함께 가야 하는 걸까?
나는 순순히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췄고 그에 날 끌고 가던 병사들도 멈췄다.
“왜 그럽니까?”
“저들과 같이…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나는 병사들이 방향을 틀기에 속으로 조금은 안도했다.
“더러운 재활용 된 영혼 같으니.”
남자 무리를 스쳐 지나가는데 작게 그런 소리가 들려 흠칫 몸을 떨었다.
재활용된 영혼. 이는 루멘에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로 루멘 사람들이 믿는 봄의 여신이 새로 만든 깨끗한 영혼이 아닌 자로 내 전생의 삶에서부터 그 혐오는 뿌리가 깊었다.
‘전생에는 환생에 관해 믿지 않았지만…….’
약제사였던 나의 전생의 삶에서 극히 드물게 전생을 기억하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우리 마을에 없을뿐더러 대부분 단명했다고 해서 본 적은 없었지.’
단명의 원인은 모르지만 사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이유 모를 병, 자살 그리고 사형. 대부분은 맨 마지막 이유로 죽었는데 이상하게도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 범죄자가 많았고 그래서 그들에 대한 모두의 혐오가 더욱 깊어졌다.
어째서 범죄를 저지른 걸까?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내가 모든 기억을 가진 게 아니라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런 혐오를 받고 지낸다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다.
“여기 타면 됩니다.”
“네?”
내 상념을 찢고 들려온 병사의 목소리에 정면을 똑바로 보니 그곳엔 사람보다 한참 커다랗고 윤기 나는 검은 털을 가진 늑대로 추정되는 짐승이 보였다.
여기에 어떻게 타?
내 황망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사들은 나에게 빨리 올라타라고 말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가까이 가니 그 검은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는데 심기가 많이 불편한가 보다. 금방이라도 날 물어뜯을 듯 위협적으로 구는 늑대를 보니 몸이 바짝 얼어붙었고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어쩌면 이거 새로운 처형법은 아닐까?
“자칼.“
뒤에서 들린 차가운 목소리에 모두가 돌아오며 한 손을 심장부에 얹고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목소리에 검은 늑대는 으르렁거리는 걸 멈추고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폐하. 오셨습니까.”
폐하라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내가 아까 탑 위에서 들은 목소리였는데 날 찾아와서 검으로 협박한 남자가 하이에텔의 왕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왕이 되기엔 나보다 어려 보이던 사람인데…….’
나에게 다가온 남자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시선을 나에게 옮기더니만 대뜸 자신의 오른팔에 내 허리를 감싸고는 품으로 끌어당겼다. 190cm는 넘어 보이는 큰 키 덕분에 150을 겨우 넘긴 작은 체구의 나는 하이에텔 왕의 팔에 매달리듯 달랑 들렸다. 시야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나는 늑대 위에 하이에텔의 왕과 앉아 있었다. 내 옆에 있는 마차 정도의 높이를 자랑하는 이 커다란 늑대는 꼬리를 느리게 흔들며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이에텔의 왕은 안장의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는 모두를 향해 외쳤다.
“하이에텔로 돌아간다!”
“네!”
그 말을 끝으로 목에 걸린 은색의 작은 피리를 불자 삐이- 하는 예쁜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늑대가 신이라도 난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승차감은 상당히 거칠고 금방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흔들림도 없이 편안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흔들림과 굉장한 속도감에서 스쳐 가는 바람이 무서워 나는 바짝 굳었고 왕은 내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더욱 주어 자신의 안으로 끌어당겼다.
‘하이에텔 인들의 이동 수단은 말이 아니라더니 늑대였구나.’
거대한 늑대는 눈앞의 거대한 성벽을 향해 돌진했고 박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냅다 펄쩍 뛰어넘는 게 아닌가.
“꺅!”
저절로 작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너무 무서워!
늑대가 뛸 때 떨어질까 두려워 나도 모르게 하이에텔 왕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땅에 착지한 늑대가 다시 신나게 달리길래 겨우 정신줄을 붙잡으니 위에서 하이에텔 왕의 피식 웃는 듯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웃지도 않을 것 같은 이 남자가 웃는 건가 싶어 힐끔 올려다봤지만 그런 적 없다는 듯 여전히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그런데 얼굴은 정말 잘생겼네.’
잘생겼다는 정의하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을 만큼 수려한 미모였는데 왼쪽 귀에 착용한 푸른빛의 귀걸이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귀걸이 같은데…….
내가 자신을 본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그가 말했다.
“할 말이라도 있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뭐지?”
“어째서 루멘을 멸망시키신 거죠?”
내 물음에 하이에텔의 왕은 입꼬리를 씩 올렸는데 기쁨의 미소는 아니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은빛 눈에는 분노를 담고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차가운 미소였다.
“그게 왜 궁금하지?”
“저는 루멘의 황녀니까요.”
“황녀인 그대를 핍박한 이 나라가 멸망해서 좋지 않나?”
“그럴리가요.”
내 대답에 하이에텔의 왕은 입꼬리가 점점 내려가 다시 차가운 얼굴이 되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늑대는 계속 달렸고 나는 왕의 눈치를 봤다.
어쩌지? 혹시 내가 말을 잘못해서 죽이는 건 아닐까?
불안함이 점점 올라올 때쯤 하이에텔의 왕은 차가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루멘이 싫으니까 멸망시켰는데. 문제 있나?”
‘아, 난 이대로 죽는 걸까.’
나의 허망하고도 아무것도 없는 삶에서 나타난 최초의 자극은 너무도 큰 두려움과 살고자 하는 욕구를 끌어올렸다. 애초에 나는 이 첨탑에서 뛰어내릴 용기도 없어 20년 가까이 살아왔으니 그 긴 세월로 살고자 하는 욕구는 충분히 증명해냈지만 말이다. 내 앞에 있는 흑발의 가진 남자는 겨울의 낮달과도 같은 시린 은빛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날 내려다보았다.
“이아 윈터 루멘인가?”
듣기 싫고 무서운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듣기 좋을 만큼의 중저음이 귓속에 파고들었다. 어쩌면 애정을 담았다고도 착각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현실은 지독히도 차가운 물음이었기에 그래서 지금 상황과 그의 표정, 목소리가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네, 맞아요.”
나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고 그러자 보인 건 검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핏방울이었다.
무서워. 또 죽고 싶지 않아.
낡은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고 그 손이 공포에 파르르 떨리는 걸 내 앞에 있는 남자도 봤겠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검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나?”
“모릅니다.”
“정말 누군지 모르나?”
“피 묻은 검을 들고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남자분인 건 알겠네요.”
내 대답에 남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아 황녀. 그대는 이곳에서 죽어야 하는 걸 아나?”
“…….”
“루멘은, 그대의 나라는 멸망했다.”
아아, 역시.
나는 예상했던 말이 나와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들린 병사들의 비명과 연기. 루멘 황궁의 외진 곳에 있을지라도 이곳은 황궁이건만 그런 소리를 듣고 창밖의 광경을 본다면 아무리 지금 배운 게 없는 나라도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나라가 졌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전쟁에서 지면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죽이거나 노예로 만든다고 했던가.
“이아 황녀. 하지만 난 그대를 죽일 생각이 없다.”
“네?”
내 앞에 있는 남자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나를 살려준다는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뭔가 말하려니 남자의 뒤로 병사 몇명이 다가왔고 남자는 차갑게 말했다.
“끌고 가라.”
“네.”
검은 가죽 갑옷의 병사들이 나에게 척척 다가오더니 내 양팔을 결박하듯 잡았고 나는 어깨를 비트는 고통에 인상을 썼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내 표정에도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방 안을 훑을 뿐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며 고개를 떨궜다. 나라가 멸망했다. 전생에도 나는 루멘 제국의 사람이었고 현생은 이 남쪽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루멘 제국의 황녀였다.
‘비록 전생은 가난한 약제사였고 현생은 버림받은 황녀지만…….’
이 나라에게 좋은 대접도, 복지 혜택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태어난 나라였고 내가 사랑한 사람과 일생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 이 나라가 하루아침에 멸망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계단을 강제로 내려가는데 발걸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20년 가까이 갇혀 있던, 그토록 나가고 싶었던 지긋지긋한 이 낡은 첨탑에서 드디어 벗어나건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계단이 짧았나?’
이 첨탑은 상당히 높아서 건강한 성인들도 다 올라오면 헐떡거리는 높이라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았고 작은 불빛조차 없이 깜깜해 어릴 땐 아래로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내려가도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그냥 힘들여서 내려갈 생각도 안 들었지만. 그런데도 이 계단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건 왜 그럴까.
‘그나저나 우습네…….’
이런 식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이 날 다시 받아주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는데 그 가족과 나라가 사라져야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허망하고 우스웠다. 난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진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유만으로 갇혀 지내야 했다는 이야기니까.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땅에 발을 딛자 느낌이 이상했다. 묵직한 느낌이 발에 느껴졌다고 하면 모두가 웃을까? 거기다가 시야가 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왜 들었는지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늘 굳게 잠겨있던 철문이 뜯겨 나가 바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밖에서 탄내를 담은 선선한 바람이 탑 안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내 연한 하늘색 드레스 자락과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바람 때문에 감았던 눈을 뜨고 본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맙소사…….”
조금 떨어진 루멘의 상징과도 같은 하얀 본궁에서 불꽃이 보였다. 깃발에도 불이 붙어 타들어 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하는 마음에 이상하게도 눈물이 흘렀다.
“정말… 멸망한 거구나.”
“뭐라고 했습니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날 끌고 가던 병사 중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내가 아무 대답이 없으니 그 역시 따로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여자들은 낡은 감옥형 마차 안에, 남자들은 병사들의 감시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노예로 끌려가는 궁인들…인 걸까?’
내가 근처까지 끌려오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가 이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내는 경멸의 눈빛과 명백히 느껴지는 혐오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그들을 감시하던 병사들이 조용히 하라며 큰소리로 위협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저들과 함께 가야 하는 걸까?
나는 순순히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췄고 그에 날 끌고 가던 병사들도 멈췄다.
“왜 그럽니까?”
“저들과 같이…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나는 병사들이 방향을 틀기에 속으로 조금은 안도했다.
“더러운 재활용 된 영혼 같으니.”
남자 무리를 스쳐 지나가는데 작게 그런 소리가 들려 흠칫 몸을 떨었다.
재활용된 영혼. 이는 루멘에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로 루멘 사람들이 믿는 봄의 여신이 새로 만든 깨끗한 영혼이 아닌 자로 내 전생의 삶에서부터 그 혐오는 뿌리가 깊었다.
‘전생에는 환생에 관해 믿지 않았지만…….’
약제사였던 나의 전생의 삶에서 극히 드물게 전생을 기억하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우리 마을에 없을뿐더러 대부분 단명했다고 해서 본 적은 없었지.’
단명의 원인은 모르지만 사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이유 모를 병, 자살 그리고 사형. 대부분은 맨 마지막 이유로 죽었는데 이상하게도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 범죄자가 많았고 그래서 그들에 대한 모두의 혐오가 더욱 깊어졌다.
어째서 범죄를 저지른 걸까?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내가 모든 기억을 가진 게 아니라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런 혐오를 받고 지낸다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다.
“여기 타면 됩니다.”
“네?”
내 상념을 찢고 들려온 병사의 목소리에 정면을 똑바로 보니 그곳엔 사람보다 한참 커다랗고 윤기 나는 검은 털을 가진 늑대로 추정되는 짐승이 보였다.
여기에 어떻게 타?
내 황망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사들은 나에게 빨리 올라타라고 말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가까이 가니 그 검은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는데 심기가 많이 불편한가 보다. 금방이라도 날 물어뜯을 듯 위협적으로 구는 늑대를 보니 몸이 바짝 얼어붙었고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어쩌면 이거 새로운 처형법은 아닐까?
“자칼.“
뒤에서 들린 차가운 목소리에 모두가 돌아오며 한 손을 심장부에 얹고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목소리에 검은 늑대는 으르렁거리는 걸 멈추고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폐하. 오셨습니까.”
폐하라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내가 아까 탑 위에서 들은 목소리였는데 날 찾아와서 검으로 협박한 남자가 하이에텔의 왕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왕이 되기엔 나보다 어려 보이던 사람인데…….’
나에게 다가온 남자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시선을 나에게 옮기더니만 대뜸 자신의 오른팔에 내 허리를 감싸고는 품으로 끌어당겼다. 190cm는 넘어 보이는 큰 키 덕분에 150을 겨우 넘긴 작은 체구의 나는 하이에텔 왕의 팔에 매달리듯 달랑 들렸다. 시야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나는 늑대 위에 하이에텔의 왕과 앉아 있었다. 내 옆에 있는 마차 정도의 높이를 자랑하는 이 커다란 늑대는 꼬리를 느리게 흔들며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이에텔의 왕은 안장의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는 모두를 향해 외쳤다.
“하이에텔로 돌아간다!”
“네!”
그 말을 끝으로 목에 걸린 은색의 작은 피리를 불자 삐이- 하는 예쁜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늑대가 신이라도 난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승차감은 상당히 거칠고 금방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흔들림도 없이 편안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흔들림과 굉장한 속도감에서 스쳐 가는 바람이 무서워 나는 바짝 굳었고 왕은 내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더욱 주어 자신의 안으로 끌어당겼다.
‘하이에텔 인들의 이동 수단은 말이 아니라더니 늑대였구나.’
거대한 늑대는 눈앞의 거대한 성벽을 향해 돌진했고 박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냅다 펄쩍 뛰어넘는 게 아닌가.
“꺅!”
저절로 작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너무 무서워!
늑대가 뛸 때 떨어질까 두려워 나도 모르게 하이에텔 왕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땅에 착지한 늑대가 다시 신나게 달리길래 겨우 정신줄을 붙잡으니 위에서 하이에텔 왕의 피식 웃는 듯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웃지도 않을 것 같은 이 남자가 웃는 건가 싶어 힐끔 올려다봤지만 그런 적 없다는 듯 여전히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그런데 얼굴은 정말 잘생겼네.’
잘생겼다는 정의하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을 만큼 수려한 미모였는데 왼쪽 귀에 착용한 푸른빛의 귀걸이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귀걸이 같은데…….
내가 자신을 본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그가 말했다.
“할 말이라도 있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뭐지?”
“어째서 루멘을 멸망시키신 거죠?”
내 물음에 하이에텔의 왕은 입꼬리를 씩 올렸는데 기쁨의 미소는 아니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은빛 눈에는 분노를 담고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차가운 미소였다.
“그게 왜 궁금하지?”
“저는 루멘의 황녀니까요.”
“황녀인 그대를 핍박한 이 나라가 멸망해서 좋지 않나?”
“그럴리가요.”
내 대답에 하이에텔의 왕은 입꼬리가 점점 내려가 다시 차가운 얼굴이 되면서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늑대는 계속 달렸고 나는 왕의 눈치를 봤다.
어쩌지? 혹시 내가 말을 잘못해서 죽이는 건 아닐까?
불안함이 점점 올라올 때쯤 하이에텔의 왕은 차가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루멘이 싫으니까 멸망시켰는데. 문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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