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얼음대륙 위에 서다 (2)
조회 : 653 추천 : 0 글자수 : 4,625 자 2022-09-11
뭐? 싫으니까 멸망시켰다고?
그가 한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런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고 루멘의 사람들을 죽이고 이렇게 큰 피해를 입힌 거라니. 나는 그 대답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얼굴이지?”
“…….”
“그런 대접을 받았으면서도 루멘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게 오히려 놀랍군.”
“그런 대접이요?”
“하나뿐인 황녀를 버려진 탑에 감금시켜 놓고 방치하는 것.”
“…….”
할 말이 없었다. 하이에텔의 왕은 계속 전방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기억하는 자’라는 이유로 멸시받아 온 것.”
“‘기억하는 자’는 뭐죠?”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하이에텔의 말이지.”
‘재활용된 영혼’이라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은 말이었다.
하이에텔에서는 전생을 기억하는 게 흠이 아닌걸까?
내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하이에텔 왕은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만든 미소와는 다르게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다.
“정작 더러운 건 그 새끼들이건만.”
“새, 뭐라고요?”
“새끼.”
“…….”
왕이라기엔 상당히 입이 거친 사람이구나.
물론 욕을 했다고 겁을 먹은 건 아니지만 저 미소가 너무 무서웠는데 누구 하날 죽일 것 같은 미소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뒤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하이에텔의 왕은 돌아보지도, 속도를 줄이지도 않은 채 제 갈 길만 갔다. 하지만 그게 익숙한지 여성 역시 자신의 할 말을 이어서 했다.
“너무 빨리 가시는 거 아닙니까?”
“먼저 가 있겠다.”
“먼저 가시면 혼나는 건 또 저희입니다!”
“혼나고 치워.”
“폐하!”
여성의 우는 소리에도 이 젊은 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여성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렇게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한두번이 아닌 것 같았다.
‘보통 왕은 뒤에서 보호받지 않나?’
하이에텔은 루멘과는 조금 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의 허리춤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검이 보였고 저 검에 묻은 피를 생각하면…
그도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거겠지? 선봉에 선걸까?
“자칼.”
남자는 아까 말한 이름을 부르자 늑대는 더욱 속도를 냈다.
“여기가 하이에텔 군대가 있는 진지다.”
“…….”
성에서 나온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적진이라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루멘은 꽤 오랜기간동안 전쟁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빠르게 영토를 빼앗겼을 리 없다. 그때 내 머리 위에서 다시 한번 피리 소리가 들렸고 굳게 닫힌 나무 문 앞의 병사들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오셨다!”
“빨리 입구를 열어!”
“자칼이 점프하기 전에 빨리!”
점프? 아, 자칼이 이 늑대의 이름인가 보다.
문이 급하게 열리면서 우리는 그대로 빠르게 문을 통과했다. 그가 입에 물고 있던 피리에선 짧은소리가 났고 자칼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더니 이내 멈췄다.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고 주변 병사들의 복식에서 적의 진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전, 아니! 이제 황제 폐하라고 해야겠군요!”
“클라인 장군.”
갑자기 뒤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근육질의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처럼 검은색 가죽 갑옷이지만 생김새는 좀 더 화려했고 장식도 몇 개 달린 게 높은 계급인 장군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황제라니?
“폐하! 이야~ 이거 발음하기 좋군요.”
정말 활발하고 유쾌한 사람이네…….
하지만 클라인의 손자뻘로 보이는 이 젊은 왕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정식으로 제국이 된 것도 아니건만 다들 너무 조급히도 떠드는군.”
“하하하! 대륙통일을 이뤄내셨는데 이미 제국이죠!”
대륙…통일? 하이에텔이 그렇게 강했던가?
분명 다른 나라들과도 계속 전쟁을 해오긴 했지만 대륙을 통일할 정도의 힘은 없다고, 루멘에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그’가 말했었다.
“그렇게 좋나?”
왕이 차가운 얼굴로 되물어도 노인은 무섭지도 않은지 껄껄 웃더니만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웃는 얼굴로 왕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리아 포먼은 어디 갔습니까?”
“뒤에 있다.”
“없는데요?”
아리아 포먼? 아까 그 여자분인걸까?
클라인의 말을 들으며 그는 자칼의 위에서 내려왔다.
“병사들을 이끌러 갔나 보지.”
태연하게 말하면서 자칼의 위에 앉아 있던 날 어깨에 들쳐 맨 하이에텔의 왕을 보며 클라인은 펄쩍 뛰었다. 왕이 클라인을 지나쳐 걸어가니 노장은 뒤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또 혼자 오셨습니까?”
“자칼이 너무 빨라서.”
“…폐하!”
“잔소리는 넣어둬.”
“하지만!”
뒤로 홱 돌더니만 뭔가 외치려는 클라인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그가 말을 가로채듯 입을 열었다.
“적당히.”
“…네.”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장군도 카리스마로 제압하는 걸 보면 왕은 왕이구나…
이 냉기를 풍기는 왕은 날 들쳐 맨 채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엔 거대한 막사가 쳐져있었다.
아, 저기가 왕의 막사인 걸까?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날 한쪽에 마련된 간이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앗!”
“놀라긴.”
그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더니만 내 어깨를 잡아 눌렀고 나는 그의 강한 힘에 못 이겨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버렸다. 그러자 그는 당연한 듯이 내 위에 올라탔다. 내 위에 드리워진 그늘과 몸을 누르는 무게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이아 황ㄴ…”
“전하, 아니지. 폐하!”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데 클라인이 막사 천막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막사 입구 쪽을 보았고 클라인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파악을 하다가 한 손을 올려 헛기침을 했다.
“크흠, 폐하. 아직 날이 밝습니다.”
“그래서?”
“찾으시던 분이라고 해도 여자를 안기에는 조금 이른…”
그런 말에도 그는 내 위에서, 오로지 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런 것까지 장군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나?”
“그건 아니죠.”
클라인은 그렇게 대답하고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했다. 그에 하이에텔 왕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나가.”
당장 나가지 않으면 클라인의 목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검으로 베어버릴 것 처럼 목소리가 살벌하지 그지없었다.
“하지만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중요한 겁니다.”
“…젠장.”
클라인의 말에 하이에텔 왕은 몸을 일으키곤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표정이 상당히 험악했기에 클라인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도망가면 다리를 자를 테니 그리 알아.”
날 향해 돌아보며 으르렁거리듯 험악한 말을 남긴 그는 클라인을 따라 막사에서 나갔다.
“무서웠어…….”
어찌나 무서웠는지 몸을 일으키자마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는 두 팔을 교차해 내 몸을 감싸듯 안았다. 무릎을 세워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무릎에 파묻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 남자가 날 끌고 온 건 잠자리 노예로 쓰려는 이유였던 걸까?
저 사람이 돌아오면 난… 다리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칠까?
침대에서 내려갈까 생각하는 순간 막사문이 열리면서 그가 돌아왔다.
“저, 저기…….”
도망치려고 생각했던 걸 들킬까 무서워 뭔가 말하려니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왕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때리려는 걸까?
무서워 눈을 꼭 감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고 거친 피부의 감촉이 내 눈 아래를 쓸었다. 눈물을 닦아 준 것 같았다.
“왜 울지?”
“…….”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내 옆에 털썩 앉더니만 한동안 아무런 말도 안 했다. 그게 괜히 더 무서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내 눈물을 힐끔 보더니만 두 손을 올려 내 뺨을 감싸더니만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아체.”
“네?”
“내 이름이라고. 아첼레란도 노스 하이에텔.”
아까 뭐라고 했지? ‘아체’라고 말하지 않았나?
익숙한 애칭에 계속 흐르던 눈물이 언제 마구 흘렀냐는 듯 멈췄다. 내가 멍하니 자신을 보는 게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니면 ‘아체테 레이너’. 이쪽이 익숙하려나?”
아체, 아체테 레이너라고?
“어떻게 그 이름을…….”
“그대도 ‘기억하는 자’이듯 나 역시 ‘기억하는 자’거든.”
기억…하는 자라고?
분명 재활용된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었다. 그 말은 하이에텔의 왕 역시 나처럼 전생을 기억한다는 말인데 아까 자신을 아테체 레이너라고 가리켰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 남자의 전생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있을 테니까!
“믿기 힘든가?”
“당연하죠! 왜냐하면…”
“그래, 전생의 내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은 40대 중반이었을 테니까.”
그가 태평하게 꺼낸 말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순간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가 날 붙잡았고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남자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손이, 아니 몸이 떨렸다. 나는 내가 죽고 바로 태어난 건지 마지막 기억인 대륙력 262년, 즉 22년 전에 태어났다. 그러니 아체테가 살아있다면 그가 말했듯 40대 중반일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럴 리 없어요…….”
자신을 아체라고 말한 남자의 눈에 비친 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건만 그의 얼굴은 정말로 평안해 보였다. 어떠한 동요도 없는 그 모습에는 거짓이라곤 비춰지지 않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이 죽었다고?
“믿기 힘들어도 사실이야. 그대가 죽고 2년 뒤에 나도 죽었거든.”
2년 뒤에 죽었다고? 아체테가? 루멘의 황실 기사인 아체테가 왜 죽지? 뭐가 부족해서?
저 사람이 날 속이는 게 아닐까? 그래! 한 나라의 왕이잖아. 뭐든 알려고 하면 알지도… 아냐, 오히려 한 나라의 왕이 어떻게 일개 기사의 이름을 알겠어.
“왜 그런 얼굴이지?”
“네?”
아체라고 말한, 아니 아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이 남자는 한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올려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차갑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다시 만난 게 전혀 기쁘지 않은가 보군?”
“그건…!”
“아체테는 그대가 사무치게 그리워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는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무슨 이유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까.
아체테와는 너무도 다른 그의 말투와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는 날 향해 아체는 씩 웃었다.
“뭐, 상관없어.”
그는 내 손을 낚아채더니만 얼굴을 나에게 바짝 가져오며 시린 은빛 눈에 내 푸른 눈을 담았다. 내 기억속의 갈색 머리카락에 다정한 녹색 눈의 따뜻한 인상을 주는 아체테가 아닌 겨울같이 날카롭고 차가운 아텔레란도가 되어버린 아체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니까.”
뭘?
그의 말이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1년.”
아체는 사형선고라도 내리는 사람처럼 냉정하고 차갑게 나에게 속삭였다.
“1년 안에 다시 날 사랑해.”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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