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얼음대륙 위에 서다 (3)
조회 : 830 추천 : 0 글자수 : 4,411 자 2022-09-15
아체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우선 내 의문을 하나씩 해결하고자 입을 열었다.
“아체테 경…”
“이젠 아첼레란도 노스 하이에텔이야.”
“…전하, 어째서 전생을 그렇게 끝내신 거죠?”
내 물음에 그는 “편하게 아체라고 부르라니까…”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가만히 나를 지켜보다가 날 천천히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떠난 그대가 없는 삶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
아체의 물음에 나는 의아해졌다.
그렇게 떠나다니?
나는 내가 어떻게 삶을 끝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그에게 되물었다.
“제가 어떻게 죽은 건지 기억이 안 나요.”
“…….”
내 말에 그는 날 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으나 따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나는 내 전생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고 그래서 전생에 대한 애착은 크게 없었다. 난 평범한 약제사였으니 약초를 캐러 갔다가 사고사했거나 병을 옮아 병사했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알아 봤자… 좋을 건 없어.”
“혹시 내 전생이 당신을 이렇게 망가트린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피식 웃고는 날 소중한 보석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뺨을 쓸었다.
아체테 레이너. 루멘의 명망 높은 기사이며 선하고 다정하며 정의감 넘치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이런 차가운 얼굴을 하게 된 건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미안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대가 왜 사과를 하지?”
“나라는 존재가 당신을 죽게 했…….”
“아니야!”
아체는 큰소리로 내 말을 가로막더니만 잔뜩 굳은 얼굴로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건 분노였다. 서늘하고 광적인 분노. 그는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래, 그대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래서 원망하기도 했어.”
“네?”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사랑한 당신은 그런 여성이니까.”
“…말해주세요.”
“뭘?”
“내가 어떻게 죽은 건지.”
내 말에 아체의 미소가 조금 굳어버렸다. 한참을 말을 고르는 듯 했으나 결국 튀어나온 대답은 삐딱했다.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당신을 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하! 그럼 지금 그대의 눈에 비치는 내가 어떤 모습인지부터 말하지 그래?”
“1년 안에 당신을 사랑할 자신이 없는 모습이죠.”
내가 너무 겁 없이 말한 걸까?
아체의 미소 온도가 사정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더니 내 손목을 강하게 쥐며 말했다.
“내가 아체테였다고 겁을 완전히 상실한 건가?”
“…….”
“날 사랑할 자신이 없는 모습이라고? 괜찮아. 난 과거처럼 그대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을 거니까.”
“무슨 말이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대를 안아도 아무도 내게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는 예전엔 이런 사람이 분명 아니었다. 사랑을 구걸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쓰게 된 걸까.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린 걸까. 안타깝지만 한편으론 두려웠다. 차가운 목소리는 짐승의 위협처럼 느껴져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겁박하는 건가요?”
“겁박이라… 이렇게 안 하면 내걸 만들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뿐이야.”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는 당신이 완전히 가질 수 있는 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이번엔 안타깝지만 이아. 그대가 틀렸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가운 얼굴로 날 밀어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내가 똑바로 바라보니 두 팔 안에 날 가두고는 얼굴을 점점 가까이 가져왔다.
“눈 감아.”
낮은 목소리가 무서웠다. 은빛 눈은 마치 예전 동화책에서 읽었던 눈이라는 것이 쌓여 떨어진 온도로 느껴졌다. 눈을 감아야 할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를 계속 지켜보았다. 내 눈을 한참 보던 그는 한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무서우면… 아니, 그냥 그대는 그대로 있어.”
“뭘 말하고 싶은…거죠?”
“전생을 기억해내라고 하려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서.”
“……?”
“그대에겐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이 나을 거니까.”
뒤를 돌아나가다가 문득 입구에 서서 날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신이라는 놈이 존재한다면 그의 안배가 그대와 함께하는군.”
신? 그런 게 있다면 날 이렇게 태어나게 해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했기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은 없어요.”
아체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라며 중얼거리곤 밖으로 나가며 경고했다.
“도망쳐봤자 그대가 갈 곳은 없으니 얌전히 누워있어.”
나는 아체의 말에 얌전히 있기로 했다. 나라마저 넘어가 버린 상황에서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막사 안을 둘러보았는데 별다른 특이점은 없는 삭막한 풍경이었다.
“아악!!”
갑자기 귀를 뚫고 들어오는 남자의 고통 어린 비명에 나는 놀라 벌떡 일어났고 입구로 조심조심 다가가 입구 틈으로 슬쩍 바깥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바닥에는 루멘 성의 사용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쓰러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출혈량이나 움직이지 않는 모양새를 보아 죽은 것 같았다.
“아체!”
“아체?”
나도 모르게 아체를 부르며 천막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변에 있던 다른 하이에텔 병사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지만 아체만은 피 묻은 검을 든 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얌전히 누워있으라고 했을텐데.”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생각이라는 게 없는 머리를 친히 분리하는 중인데.”
“그, 그러지 말아요!”
“내가 왜?”
아체는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으며 되물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대답을 머뭇거렸고 그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난 그대를 모욕한 자를 용서하지 않아.”
“모욕이라뇨?”
“그대를 더럽다느니 재활용된 영혼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게 둘 생각 없거든.”
그의 말에 내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날 위해 저 사람을 벤 거라고?
하지만 살인은 옳지 않았고 그가 아체테라면 더더욱 그의 손에 더 이상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피가 흐르는 칼날을 보며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아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혐오나 생각하는 머리는 필요가 없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너무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그를 말리고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움직여 아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행동에 아체는 피가 튄 얼굴로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비켜.”
“못 비켜요.”
“비키라고 했어.”
“나는 루멘의 황녀고 이들은 내 제국민들이에요. 내가 지킬…”
“차라리 죽여라.”
뒤에서 들린 중년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크게 당황해서 돌아봤다.
“이봐요! 그게 무슨…….”
“재활용된 더러운 영혼에게 보호받을 바에야 여신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건만 주위에선 다들 말리지 않고 자신들 역시 죽이라며 하나둘 외치기 시작했다. 그 외침들 사이로 날 혐오하는 말도 튀어나왔다. 그에 나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해달라고 그들에게 말하려 했지만 끝내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소원대로 해주마.”
바로 뒤에서 들린 아체의 목소리와 얼굴에 튄 액체, 눈 앞에 펼쳐지는 붉은빛의 향연과 사람들의 마지막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아체를 시작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루멘의 포로들에게 휘둘렀다.
“그만둬요!”
“…….”
“제발! 제발 그만!”
나는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쓰러진 한 여성의 몸을 끌어안았고 그녀가 흘린 피로 손이 축축해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 속이 거북해졌다. 토할 것 같아. 눈물이,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기절이라도 해버리면 좋을텐데……!
“옷이 더러워졌군.”
“옷을 준비해두겠습니다.”
“황녀의 것도 준비해라. 더러워졌다.”
“네.”
아체와 누군가의 대화가 귓가에 웅웅거리며 울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사람을 그렇게 죽여놓고 옷을 이야기하는 거야?
나는 이가 갈렸고 치가 떨렸다.
“당신은 아체테가 아니야!”
“뭐?”
“아체가, 아체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나는 악에 받쳐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주위에 서 있던 병사중 하나가 발끈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전하께 무슨 무례한!”
“조용.”
아체가 그를 말렸고 나는 품에 안긴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옷을 보아하니 성의 시녀였던 것 같았고 얼굴이 너무도 앳된 것이 갓 성인이 되어 들어온 것 같았다.
“그대가 생각하는 아체테는 뭐지?”
“뭐?”
“그대 안의 아체테 레이너는 뭐냐고 물었다.”
“적어도 이렇게… 당신처럼 무분별하게 사람을 죽이진 않을 거야!”
내 말에 아체의 무표정에 금이 갔다. 그는 검을 바닥으로 던졌고 내 팔을 잡아 올리며 강제로 일으켰다. 고통에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면서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후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두 팔로 안고 있던 여자를 강제로 떼어놓고는 날 자신의 뒤로 잡아끌며 시체 더미에서 멀어지게 했다.
“미안하지만 그대는 세 가지를 틀렸어.”
“…….”
“첫 번째, 아체테 레이너는 전쟁에 투입되어 무분별한 살인을 한 적이 있다.”
뭐? 내 기억에는 그런 게 없는데…?
내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아체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벗어 바닥에 툭 던져버리곤 깨끗한 맨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
“그대가 그랬지. 전생의 기억이 얼마 없다고.”
주변이 조용해서 그런지 아체의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대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 뿐. 난 전쟁을 치룬 적이 있어.”
그는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아체테 레이너의 환생이 확실하다.”
“…….”
“그게 아니면 내가 그대에게 느끼는 이 모든 감정과 머리 속에 떠오르는 기억을 설명할 길이 없지.”
아체의 표정에 아픔이 아주 잠깐 스쳐갔다.
뭐지?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지어?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고 그는 손을 내리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가라 앉은 인빛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난 아체가 맞아. 하지만 그대가 말하는 아체테가 아닌…”
그는 천천히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고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조용하고 나긋나긋하지만 살벌하기 그지없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하이에텔의 왕, 아첼레란도 노스 하이에텔이지.”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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