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 얼음대륙 위에 서다 (4)
조회 : 849 추천 : 0 글자수 : 4,836 자 2022-09-16
그 말을 끝으로 아체는 옆에 있는 아리아라고 칭한 붉은 머리의 여기사에게 나를 데리고 막사로 들어가라며 명했다. 나는 힘이 쭉 빠지는 느낌에 휘청거렸고 그녀는 나를 붙잡아 천천히 이동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이…….’
난 눈을 꼭 감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괜찮으세요?”
“……”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아리아가 나를 데려간 곳은 다른 빈 천막이었다. 상당히 지저분한 공간이었는데 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리를 잘 못 하는지라……”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날 아체 곁에 두지 않아 줘서요.”
내 말에 아리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지저분하게 널부러진 쓰레기들을 발로 치웠고 만들어진 빈공간에 의자를 가져와 날 앉힐 뿐이었다. 한참을 나도 그녀도 말이 없었다.
내가 그녀를 향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차를 준비할까요?”
“…….”
“먼저 하이에텔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요?”
“아체 전하의 살육을 막고 싶으신 듯해서요.”
그거와 내가 하이에텔로 떠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그런지 머릿속이 멍-했다. 머리 회전이 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그냥 생각 자체를 하기 싫었다.
“전하는 오직 이아님을 위해서만 움직이십니다.”
“루멘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절 위한 건가요?”
“네. 복수하셨을 뿐입니다.”
“…복수요?”
복수라니? 날 위해 복수를 했다고? 설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과 관련 있는 걸까?
하지만 전생은 전생이다. 옛날 일은 현재까지 끌고 와서 이런 비극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복수는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전쟁의 명분이 필요해서 그런 말을 한 걸지도 모른다고… 난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아.”
천막 밖에서 아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아까의 그 살육의 현장이 떠올라서 화들짝 놀랐다. 몸이 굳은 채로 있다가 내 손에 묻은 피를 인지하니 그제야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는 건 전생에도 몇 번 본적 없다. 나는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네, 전하.”
아리아가 천막 입구를 열자 그 틈 사이로 아체의 몸이 조금 보였는데 아까와는 다른 옷자락이다.
옷을 갈아입은 걸까?
아체가 아리아에게 뭔가를 건네주면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 같았다. 아체에게 목례를 한 아리아는 천막 안으로 들어왔고 아체에게 받아온 것을 옆에 있는 어질러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아님, 옷 갈아입는 걸 돕겠습니다.”
“…왜 갈아입어야 하죠?”
아리아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떨리는 시선으로 내 옷을 확인하니 확실히 갈아입는 게 정신적으로도 좋을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난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이에텔 양식의 옷은 처음이실 테니 혼자 입기 힘드실지도 모릅니다.”
“…….”
싫었다. 이 드레스가 루멘과 나를 이어주는 마지막 흔적이라고 느껴졌다. 이걸 벗게 되면 난 더 이상 루멘의 사람이 아니게 될 것 같았고, 루멘을 배신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 마차를 준비하겠다고 고했습니다.”
“…….”
“그에 이아님과 함께 먼저 하이에텔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루멘의 사람들을 죽인 그와 함께 가야 한다고?
끔찍했다. 처음엔 에체테라고 해서 내심 반갑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확실히… 그를 다시 만나 기뻤다. 사랑한 사람을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만났다는 기쁨의 색채는 선명했으니까. 하지만 그 아름다운 색채의 감정이 피로 얼룩져 혐오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아님.”
아리아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나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금빛 눈은 아체와는 대조적으로 따스한 빛을 담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하께서 하시는 게 좋을 듯하여 저는 깊이 설명을 드릴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이것만은 꼭 알아주십시오.”
“…….”
“전하는 정말로… 이아님만을 위해 살아오셨습니다.”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자신의 주군을 감싸주려는 걸까?
“이아님이 환생하셨을 거라고 그렇게 굳게 믿으셨고, 그 믿음 하나로 버티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 버텼단 말인 걸까?
나에게 그를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듯한 아리아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패전국의 황녀이며 나라를 잃은 사람이다. 그가 어떤 성장 과정을 겪어왔는지 이젠 알고 싶지 않아졌다. 그를 동정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동정할 여지조차 만들지 않을 거야.’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리자.
그를 옹호하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나는 느리게 질문했다.
“아리아는 여자잖아요…?”
“네.”
“그런데 어째서 검을…….”
“그야 제가 기사니까요.”
“여자가 기사가… 된다고요?”
루멘에는 여자 기사가 없었는데, 여자에게는 어떠한 전투용 무기도 쥐어주지 않는 그런 나라였다. 여자가 쓸 수 있는 칼은 부엌칼 정도였고 전생에 약제사인 나는 약제를 자르는 작두의 사용까지도 금지당했었다.
‘그 덕에 남자 약제사가 다듬어 놓은 약제를 비싼 값에 사야 하는 방법으로 약방을 이어나가야 했지.’
그래서인지 아리아가 옆에 찬 검이 너무도 신기했다. 기사라고 말한 그녀가 너무도 굉장해 보였다.
“하이에텔은 대체…….”
“하이에텔에서는 여자도 뭐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습니다.”
“뭐든요?”
“네. 강하기만 하면 왕도 될 수 있죠.”
강하기만 하면 왕이 된다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왕이라는 자리는 신이 내린 혈족만이 가능한 게 아니었나?
“아리아 다 끝났나?”
“그게…….”
“이아 황녀가 안 갈아입나?”
“…….”
“…….”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침묵은 짧았고 아체가 이어서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갈아입혀 버릴까?”
“전하, 미치셨습니까?”
“폐하! 무슨 말입니까!!!”
앗, 클라인 장군의 목소리다. 아리아는 험악하게 말했고 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내 눈치를 봤다. 마치 곧 혼날 것을 예감한 어린아이 같은 눈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에 답하듯 밖에서 클라인의 노성이 이어졌다.
“폐하께 무슨 무례함이냐! 아리아 포먼!!!!!!”
“…망할 영감탱이.”
“내 이것을 당장…!”
“이아님 옷 갈아입으신다고요, 영감!”
“이익……!!!”
아리아는 나에게 옷을 입자는 듯 책상 위에 옷을 집어 펼쳤다. 하얀색이지만 웨딩드레스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소란스럽게 말싸움을 하며 보내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척이 안 느껴지는 것 같은데.”
“전하! 변태십니까?”
“폐하! 여성이 환복하는데 기척을 느끼고 그러면 안 되는… 아리아 포먼!!!”
“빨리 안 갈아입으면 정말로 내가 갈아입혀 버릴 테니 그리 알아.”
나에게 경고하듯 하는 아체의 말에 클라인이 “폐하!”하며 외쳤고, 아리아는 뛰어나가기까지 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여진 흰 드레스를 만지려다 멈칫했다. 손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피가 신경 쓰였다. 마치 루멘을 배신하지 말라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서 손을 거뒀다.
‘역시 갈아입지 말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소란스러운 밖을 보기 위해 천막의 천을 걷었다. 그러자 문 앞을 양팔로 철저히 막으며 방어하는 아리아도, 그 앞에 서서 삿대질하던 클라인도, 그 옆에 서 있던 아체도 날 바라보았다.
“…정말로 내가 갈아입히길 바라는 건가?”
“아뇨.”
“그런데 왜 그런 꼴로 나오지?”
“전 루멘의 황녀니까요. 이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내 말에 아체는 말없이 날 바라보며 조금 인상을 찡그렸는데, 풍기는 기세가 제법 흉흉해서 조금 흠칫했다.
“하이에텔로 절 끌고 가실 건가요?”
“끌고 간다라…. 어감이 별로군.”
아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처음엔 당신을 순순히 따라가려고 했어요.”
“처음엔?”
“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따라가기 싫다 이거군.”
“네.”
내 대답에 그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그대로 날 어깨에 들쳐맸다.그리곤 저벅저벅 어딘가로 향했다. 내 시야에 이마를 짚는 아리아와 한숨을 내쉬는 클라인이 보였다. 뭔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거칠게 안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체!”
나는 금방 일어나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를 마차 안에 내동댕이친 후 밖에서 문을 걸어 잠궈버린 듯했다. 창문 너머를 보니 아체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웃고 있었다.
“그대가 말하는 대로 끌고 가줄까 해서 말이지.”
“풀어줘요!”
“거절하지.”
“…….”
“혹여라도 자결을 생각한다면….”
아체는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그곳엔 다른 루멘 사용인들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삐딱한 미소를 유지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 죽여버릴 거야.”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다 죽인 게 아니야…?
밖에는 시체 한 구조차 보이지 않았고 살아남은 이들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에 참 간사하게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까의 비참함과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금세 표정이 폈군. 그래?”
“…….”
아체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는 살려둔 사람이 있다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러면서 왜 저 사람들을 살려둔 걸까?
“…왜 저들을 살려줬어요?”
“…….”
“다 죽인 줄… 알았어요.”
내 말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문 쪽에 손을 뻗었고 찰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마차 문이 열렸다.
문은 갑자기 왜?
“그대가 울었으니까.”
“…….”
“이아, 그대가 괴롭다는 듯 울었으니까.”
그의 다정한 말에 나는 일순간 그의 모습 위에 아체테가 겹쳐 보이면서 그리움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체테….”
“…….”
내 말이 끝나자 아체는 마차 안으로 들어와서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곤 날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고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한참 뒤에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대가 원한다면 아체테가 될게.”
“…….”
“그럼 그대는 이안 베르들레로 돌아와.”
“……!”
그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이안 베르들레. 내 전생의 이름이다.
전생으로 돌아가라고?
“…못하겠지?”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솔직히 이안으로 다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아로 살아온 시간만 24년이니까.
“나 역시 그래. 난 아체테가 아니라 아첼레란도니까.”
“…….”
“하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난 과거마저도 되어줄 수 있어.”
그가 애절하게 말했다. 나는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겠다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날 위하는 걸까?
“그러지 말아요.”
내 말에 날 안고 있던 그의 팔 힘이 느슨해졌다. 그는 아무런 말도 안 했고 나는 아체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살짝 그를 밀었다.
“내가 아체테이기까지 거부한다면…….”
아까의 그 다정하고 매달리는 듯 애절한 목소리는 거짓이었다는 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 안은 팔에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고 이내 그는 날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현재의 나를 부정하지 말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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