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조회 : 810 추천 : 0 글자수 : 4,910 자 2022-09-11
눈을 떴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침대가 낯설다’였다.
딱히 불편하다거나 낙후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소설 속 나오는 현대문물 예찬론자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현대에서도 이것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적잖은 시간 지내왔다.
그렇다고 강제는 아니고 반쯤은 자발적이었다. 비록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내 선택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여하튼.
오늘은 권민우와 한지혜를 만나러 가볼 참이다.
원래 세계에서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검과 마법을 배운다고 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꿀잼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검은 그렇다 쳐도 마법쪽은 확실히 흥미가 간단 말이지.”
백보 양보해 검은 비슷한 흉내라도 낼 수 있다지만, 마법은 아예 공상 속에서만 구경했을 한지혜가 과연 어떤 훈련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기에 나는 이른 아침부터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이 훈련을 하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것은…
“하, 시발. 이래서 재능충들은 다 죽어야 해.”
나는 황당함에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챙챙챙!
고작 하루 만에 잘 훈련된 병사 한 명과 대등하게 검을 주고받는 권민우와 인공적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성공한 한지혜의 모습.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재능이란 녀석을 가져다 붙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체대를 다니던 것도 아니고 막 군대에서 전역해 피지컬 만땅인 복학생도 아니고 고작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새내기 남학생이 스승인 친위기사단 단장의 지도 하에 딱 봐도 노련해 보이는 병사와 치열하게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용사님! 하단이 비었습니다!”
“크윽!”
카아앙!
비록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알아야 할 것은 어제부터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오늘이 훈련 고작 이틀 차라는 것이다.
“집중하십시오! 마족의 공격에는 눈이 없습니다!”
“으아아악!”
지도를 하는 기사의 준엄한 말에 권민우가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금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챙그랑!
그리고 마지막 순간 승리를 쟁취한 것은 권민우였다.
숨을 헐떡이며 목검을 부여잡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를 쟁취한 개선장군의 모습이다.
뭐, 그래봐야 현실은 베테랑 병사 한 명을 간신히 이긴 수준이고 심지어 그 병사조차 권민우만큼 필사적인 자세로 대련에 임한 것도 아니지만, 거듭 강조하듯 오늘이 소환 이틀째, 그리고 훈련 이틀 째란 사실을 참작해야만 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음 훈련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허억..허억… 알겠습니다. 로니 기사님.”
“그냥 편하게 로니라고 부르시죠. 당신은 용사입니다. 높은 귀족과 왕족을 제외한다면 굳이 말씀을 높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하하, 그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고민해도록 하죠.”
권민우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자기보다 못해도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대뜸 말을 놓는다는 것은 현대의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상대방은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진이 다 빠져버린 채 휴식을 취하는 놈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마법을 훈련중인 한지혜 쪽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엘리멘탈과의 교감이에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어제 나를 안내해준 아이리스라는 여자가 그녀의 옆에 붙어서 마법의 원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후우우우…”
이쪽은 땀내 풀풀 나는 권민우 쪽과는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훈련이 이뤄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치열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우선 한지혜는 훈련 내내 눈을 감은 채 마력을 감지하기 위해 연신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옆에 있던 아이리스가 조근조근 쿠사리를 넣는 탓에 숨돌릴 시간도 제대로 못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기어이 자신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 제갈공명도 부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 그쳤는데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내다니. 적벽대전 갔으면 전쟁 영웅 취급 받았을 것이다.
“그래. 그거까지는 다 좋다 이거야.”
그럼에도 한 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유로운 상상이란 범주를 그들이 말하는 엘리멘탈에 한정 짓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냐는 의문만큼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게다가 4원소설은 원자론이 대두됨과 동시에 뒤안길로 접어들었지. 그 와중에 아직도 저런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좀 게으른 접근 방법이 아닌가?’
그래봐야 어디까지나 외부인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궁금증에 불과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이곳에 와서 저들의 방식을 지적하는 몰상식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라? 선배님?”
“오빠, 언제부터 왔어?”
“얼마 안 됐다.”
그 사이 휴식 시간을 틈타 두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둘 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노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나는 둘의 몸에 흐르는 땀방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멋지더라. 둘 다.”
“하하, 아직 많이 부족하죠.”
“그래, 이제 겨우 발걸음을 뗐을 뿐인걸?”
대견하게도 두 사람은 스스로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갈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그 의욕 넘치는 태도에 나는 불현듯 어제 든 생각을 입에 올렸다.
“이건 정말로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다만. 만약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냐?”
“돌아갈…”
“방법…?”
누가 연인 관계 아니랄까 봐 번갈아 가며 말을 완성시키는 두 사람.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이 찰나동안 보이고 지나간 미세한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로봇의 전원이 순간적으로 끊어진 것 같은 멈칫거림.
단순히 생각에 잠겨 그런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굳이 따지면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도 생각하고 싶지만.
“아하하! 선배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돌아가다뇨. 마왕을 무찌르는 것이 용사의 사명인데 그것을 팽개치고 어떻게 도망을 가요.”
“마, 맞아 오빠! 나는 비록 용사는 아니지만, 힘을 받은 입장에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잖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 말도 몰라?”
두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지구에서 보여주었던 태도에 비하면 묘하게 더 적극적인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은 없다.
그러나 나는 위화감을 떨쳐낼 수가 없다. 아직 뭐라구 구체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입맛이 조금 찝찝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여기까지 오신 김에 선배님도 훈련 한 번 받으시죠.”
“그래, 오빠! 무재능이라고는 해도 설마 아무런 재능이 없겠어? 게다가 검을 휘두르는 정도는 일반인들도 노력하면 충분히 1인분은 할 수 있다구!”
이 와중에 두 년놈들이 나한테 작업을 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의도야 어찌되었든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내가 무슨 쌈박질이냐. 나는 내 한 몸 가누기도 버겁다. 너희들이 내 몫까지 열심히 해줘라.”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싸늘한 기세에 눈을 가늘게 떠야했다.
곱씹어봐도 내 말이 그렇게 도발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질투한 것도 아니고, 관심없다며 쿨찐내를 풍기지도 않았다.
그저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니 나는 빠지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반응이 심상치가 않다.
“선배님. 노력도 해보지 않고 단정 짓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아 오빠. 우리의 적은 노력으로 수천 수만 명이 웃으면서 행복해할 수 있어. 그 고귀한 기회를 이렇게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야.”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를 힐난하고 동시에 설득하려 든다.
무슨 가스라이팅하는 것도 아니고 마치 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대단히 잘못하고 있다는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나를 몰아간다.
“야, 아무리 그래도 니들이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되지.”
본인들은 지구에서 얼마나 숭고하고 고귀한 삶을 살아왔다고 이제와서 말을 이딴식으로 하냐.
조금 섭섭한 마음에 한 마디 더 퍼부어주려는데.
“용사님 다시 훈련 하실 시간입니다.”
“지혜님. 시작해야해요.”
로이라는 기사와 아이리스가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에게 가보겠다는 눈짓을 하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나는 그들을 붙잡을 생각도 못한 채,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좋아요. 지금 그 상태. 그 상태 그대로 잠시만 집중하고 계세요.”
아이리스는 한지혜에게 지시를 내린 뒤, 한쪽에서 자신들의 훈련을 구경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상해요.’
용사와 함께 소환된 남자.
용사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연인이라는 사람조차 막대한 재능을 타고난 것에 비해 기이하리만치 아무런 재능도 발견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한미한 재능, 별 볼 일 없는 재능, 미천한 재능.
볼품없는 수많은 단어들을 비웃듯 재치고 당당히 무재능이라 결론이 났다.
시험을 봐도 10점이나 20점은 그냥 찍었겠거니, 혹은 공부를 안했겠거니 하며 인정할 수 있지만 0점은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번호로만 찍어도 오지선다 기준 20점은 나오는 마당에 모든 정답을 완벽하게 비껴가는 것은 의도했다고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무엇보다.
‘어제 한참 동안 숙소에 계시질 않았어요.’
불편한 것은 없나 싶어 사용인을 통해 알아봐달라고 한 결과, 해가 지고 난 후부터 한참 동안 숙소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어딜 갔는지 추적이라도 해보려는데 그 누구도 저 남자의 모습을 본 자가 없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에 돌연 방에 다시 나타났다.
아이리스는 그렇기에 그의 이 공교로운 무재능과 어제의 행방불명이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강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별다른 감흥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용사와 그의 연인이 낯선 환경에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과는 퍽 대조적인 모습이다.
“지혜님.”
“네, 넷! 스승님.”
아이리스가 한지혜를 부르자 그녀는 몸을 움찔 떨며 대답한다. 아이리스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그새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다.
사실 그 정도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처음 마력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뜻 안에 통제하는 것은 퍽 난해한 일이고, 비단 한지혜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는 과정이다.
그보다 아이리스가 한지혜를 부른 것은 그녀가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혹시 강지훈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세 사람이 면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재능이 없다는 것에 그저 연민을 느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한 번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 순간, 저 남자에 대한 굼금증이 생긴 것이다.
“지훈 오빠요?”
그리고 한지혜는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알고 지낸 지는 꽤 지났는데 지금도 신기한 사람이에요. 신출귀몰하다고 해야하나.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갑자기 휙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모로 조금 괴짜 같은 면이 있죠.”
“이런, 피곤하겠어요.”
살짝 한지혜를 떠보고자 슬쩍 그를 비하하는 말을 던졌다.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빠한테 부탁하면 대체로 좋게 해결이 됐거든요.”
“...그런가요?”
“네, 고민 상담이든 가벼운 부탁이든 이상하리만치 과정은 알려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가 돼요.”
역시 이상하다.
명백히 이상하다.
듣기론 용사와 한지혜가 있던 곳에는 마법이나 정령, 신성력 같은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한다.
모두가 평범하게 과학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놀라운 세상.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부탁만 하면 과정은 생략된 채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
“...한 번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어요.”
아이리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딱히 불편하다거나 낙후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소설 속 나오는 현대문물 예찬론자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현대에서도 이것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적잖은 시간 지내왔다.
그렇다고 강제는 아니고 반쯤은 자발적이었다. 비록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내 선택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여하튼.
오늘은 권민우와 한지혜를 만나러 가볼 참이다.
원래 세계에서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검과 마법을 배운다고 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꿀잼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검은 그렇다 쳐도 마법쪽은 확실히 흥미가 간단 말이지.”
백보 양보해 검은 비슷한 흉내라도 낼 수 있다지만, 마법은 아예 공상 속에서만 구경했을 한지혜가 과연 어떤 훈련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기에 나는 이른 아침부터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이 훈련을 하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것은…
“하, 시발. 이래서 재능충들은 다 죽어야 해.”
나는 황당함에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챙챙챙!
고작 하루 만에 잘 훈련된 병사 한 명과 대등하게 검을 주고받는 권민우와 인공적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성공한 한지혜의 모습.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재능이란 녀석을 가져다 붙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체대를 다니던 것도 아니고 막 군대에서 전역해 피지컬 만땅인 복학생도 아니고 고작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새내기 남학생이 스승인 친위기사단 단장의 지도 하에 딱 봐도 노련해 보이는 병사와 치열하게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용사님! 하단이 비었습니다!”
“크윽!”
카아앙!
비록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알아야 할 것은 어제부터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오늘이 훈련 고작 이틀 차라는 것이다.
“집중하십시오! 마족의 공격에는 눈이 없습니다!”
“으아아악!”
지도를 하는 기사의 준엄한 말에 권민우가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금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챙그랑!
그리고 마지막 순간 승리를 쟁취한 것은 권민우였다.
숨을 헐떡이며 목검을 부여잡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를 쟁취한 개선장군의 모습이다.
뭐, 그래봐야 현실은 베테랑 병사 한 명을 간신히 이긴 수준이고 심지어 그 병사조차 권민우만큼 필사적인 자세로 대련에 임한 것도 아니지만, 거듭 강조하듯 오늘이 소환 이틀째, 그리고 훈련 이틀 째란 사실을 참작해야만 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음 훈련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허억..허억… 알겠습니다. 로니 기사님.”
“그냥 편하게 로니라고 부르시죠. 당신은 용사입니다. 높은 귀족과 왕족을 제외한다면 굳이 말씀을 높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하하, 그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고민해도록 하죠.”
권민우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자기보다 못해도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 대뜸 말을 놓는다는 것은 현대의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상대방은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진이 다 빠져버린 채 휴식을 취하는 놈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마법을 훈련중인 한지혜 쪽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엘리멘탈과의 교감이에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어제 나를 안내해준 아이리스라는 여자가 그녀의 옆에 붙어서 마법의 원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후우우우…”
이쪽은 땀내 풀풀 나는 권민우 쪽과는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훈련이 이뤄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치열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우선 한지혜는 훈련 내내 눈을 감은 채 마력을 감지하기 위해 연신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옆에 있던 아이리스가 조근조근 쿠사리를 넣는 탓에 숨돌릴 시간도 제대로 못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기어이 자신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 제갈공명도 부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 그쳤는데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내다니. 적벽대전 갔으면 전쟁 영웅 취급 받았을 것이다.
“그래. 그거까지는 다 좋다 이거야.”
그럼에도 한 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유로운 상상이란 범주를 그들이 말하는 엘리멘탈에 한정 짓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냐는 의문만큼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게다가 4원소설은 원자론이 대두됨과 동시에 뒤안길로 접어들었지. 그 와중에 아직도 저런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좀 게으른 접근 방법이 아닌가?’
그래봐야 어디까지나 외부인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궁금증에 불과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이곳에 와서 저들의 방식을 지적하는 몰상식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라? 선배님?”
“오빠, 언제부터 왔어?”
“얼마 안 됐다.”
그 사이 휴식 시간을 틈타 두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둘 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노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나는 둘의 몸에 흐르는 땀방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멋지더라. 둘 다.”
“하하, 아직 많이 부족하죠.”
“그래, 이제 겨우 발걸음을 뗐을 뿐인걸?”
대견하게도 두 사람은 스스로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갈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그 의욕 넘치는 태도에 나는 불현듯 어제 든 생각을 입에 올렸다.
“이건 정말로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다만. 만약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냐?”
“돌아갈…”
“방법…?”
누가 연인 관계 아니랄까 봐 번갈아 가며 말을 완성시키는 두 사람.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이 찰나동안 보이고 지나간 미세한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로봇의 전원이 순간적으로 끊어진 것 같은 멈칫거림.
단순히 생각에 잠겨 그런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굳이 따지면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도 생각하고 싶지만.
“아하하! 선배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돌아가다뇨. 마왕을 무찌르는 것이 용사의 사명인데 그것을 팽개치고 어떻게 도망을 가요.”
“마, 맞아 오빠! 나는 비록 용사는 아니지만, 힘을 받은 입장에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잖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 말도 몰라?”
두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지구에서 보여주었던 태도에 비하면 묘하게 더 적극적인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은 없다.
그러나 나는 위화감을 떨쳐낼 수가 없다. 아직 뭐라구 구체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입맛이 조금 찝찝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여기까지 오신 김에 선배님도 훈련 한 번 받으시죠.”
“그래, 오빠! 무재능이라고는 해도 설마 아무런 재능이 없겠어? 게다가 검을 휘두르는 정도는 일반인들도 노력하면 충분히 1인분은 할 수 있다구!”
이 와중에 두 년놈들이 나한테 작업을 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의도야 어찌되었든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내가 무슨 쌈박질이냐. 나는 내 한 몸 가누기도 버겁다. 너희들이 내 몫까지 열심히 해줘라.”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싸늘한 기세에 눈을 가늘게 떠야했다.
곱씹어봐도 내 말이 그렇게 도발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질투한 것도 아니고, 관심없다며 쿨찐내를 풍기지도 않았다.
그저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니 나는 빠지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반응이 심상치가 않다.
“선배님. 노력도 해보지 않고 단정 짓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아 오빠. 우리의 적은 노력으로 수천 수만 명이 웃으면서 행복해할 수 있어. 그 고귀한 기회를 이렇게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야.”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를 힐난하고 동시에 설득하려 든다.
무슨 가스라이팅하는 것도 아니고 마치 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대단히 잘못하고 있다는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나를 몰아간다.
“야, 아무리 그래도 니들이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되지.”
본인들은 지구에서 얼마나 숭고하고 고귀한 삶을 살아왔다고 이제와서 말을 이딴식으로 하냐.
조금 섭섭한 마음에 한 마디 더 퍼부어주려는데.
“용사님 다시 훈련 하실 시간입니다.”
“지혜님. 시작해야해요.”
로이라는 기사와 아이리스가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에게 가보겠다는 눈짓을 하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나는 그들을 붙잡을 생각도 못한 채,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좋아요. 지금 그 상태. 그 상태 그대로 잠시만 집중하고 계세요.”
아이리스는 한지혜에게 지시를 내린 뒤, 한쪽에서 자신들의 훈련을 구경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상해요.’
용사와 함께 소환된 남자.
용사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연인이라는 사람조차 막대한 재능을 타고난 것에 비해 기이하리만치 아무런 재능도 발견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한미한 재능, 별 볼 일 없는 재능, 미천한 재능.
볼품없는 수많은 단어들을 비웃듯 재치고 당당히 무재능이라 결론이 났다.
시험을 봐도 10점이나 20점은 그냥 찍었겠거니, 혹은 공부를 안했겠거니 하며 인정할 수 있지만 0점은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번호로만 찍어도 오지선다 기준 20점은 나오는 마당에 모든 정답을 완벽하게 비껴가는 것은 의도했다고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무엇보다.
‘어제 한참 동안 숙소에 계시질 않았어요.’
불편한 것은 없나 싶어 사용인을 통해 알아봐달라고 한 결과, 해가 지고 난 후부터 한참 동안 숙소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어딜 갔는지 추적이라도 해보려는데 그 누구도 저 남자의 모습을 본 자가 없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에 돌연 방에 다시 나타났다.
아이리스는 그렇기에 그의 이 공교로운 무재능과 어제의 행방불명이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강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별다른 감흥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용사와 그의 연인이 낯선 환경에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과는 퍽 대조적인 모습이다.
“지혜님.”
“네, 넷! 스승님.”
아이리스가 한지혜를 부르자 그녀는 몸을 움찔 떨며 대답한다. 아이리스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그새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다.
사실 그 정도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처음 마력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뜻 안에 통제하는 것은 퍽 난해한 일이고, 비단 한지혜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는 과정이다.
그보다 아이리스가 한지혜를 부른 것은 그녀가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혹시 강지훈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세 사람이 면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재능이 없다는 것에 그저 연민을 느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한 번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 순간, 저 남자에 대한 굼금증이 생긴 것이다.
“지훈 오빠요?”
그리고 한지혜는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알고 지낸 지는 꽤 지났는데 지금도 신기한 사람이에요. 신출귀몰하다고 해야하나.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갑자기 휙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모로 조금 괴짜 같은 면이 있죠.”
“이런, 피곤하겠어요.”
살짝 한지혜를 떠보고자 슬쩍 그를 비하하는 말을 던졌다.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빠한테 부탁하면 대체로 좋게 해결이 됐거든요.”
“...그런가요?”
“네, 고민 상담이든 가벼운 부탁이든 이상하리만치 과정은 알려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가 돼요.”
역시 이상하다.
명백히 이상하다.
듣기론 용사와 한지혜가 있던 곳에는 마법이나 정령, 신성력 같은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한다.
모두가 평범하게 과학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놀라운 세상.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부탁만 하면 과정은 생략된 채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
“...한 번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어요.”
아이리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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