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조회 : 1,092 추천 : 0 글자수 : 5,042 자 2022-09-11
난데없이 이세계에 소환 당했다.
용사의 여자친구의 남사친의 자격으로.
….왜?
***
돌이켜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여사친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 그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근질거려하는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갔더니 그 남자친구란 녀석이 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후배였다는 사실.
뭐, 둘 다 적당히 좋은 녀석들이라 잘 해보라며 축하를 해주고 셋이서 같이 식사를 했더랬다.
그 정도가 그 날에 있었던 헤프닝 중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될 만큼 평소와 다를 바 없던 하루였다.
그저 세상 참 좁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딴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세상 좁다고 생각했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넓은 세상은 필요 없잖아?”
필시 불가항력이었다.
몸을 감싸는 낯선 기운에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신체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기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과정에서 몸을 휘감아 오는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것을 거부하고 털어내는 것 뿐이었다.
“아르게리타 대륙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신에게 선택받은 구세의 용사여.”
“...시발. 가지가지하네.”
***
결과적으로 후배놈인 권민우는 여신의 선택을 용사였다.
지닌 바 재능이 세상을 뒤덮을 만큼 찬란하다나?
게다가 여사친인 한지혜는 역사에 기록될 재능을 가진 마법사라고한다.
4대 원소에 모두 적성을 가진 불합리한 재능충이라고.
한 명이 만루홈런이고 한 명이 3점 홈런이라면 나머지 한 명인 나에게도 사람들의 기대가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보통은 3점 홈런을, 아무리 못해도 안타 정도는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내게로 쏠렸다.
“그런 거 없습니다.”
허나. 왕국의 검사 결과 내 적성은 무(無).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이다.
“선배님. 괜찮습니다.”
“오빠. 너무 상심하지 마.”
오죽하면 같이 소환된 두 사람이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위로했을까.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나는 그들의 안쓰러운 시선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
…정확히 의도했던 바다.
“그럼 우선 두 분은 저를 따라오세요. 당신은 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렇게 용사인 권민우와 그에 필적하는 재능을 가진 마법사인 한지혜는 진즉에 호출당해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 동안, 나는 따로 마련된 응접실에서 하품이나 쩍쩍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차라도 내줄 것이지. 그냥 방치만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런 불만을 느끼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 즈음.
“늦어서 죄송합니다.”
드디어 나를 안내해줄 사람이 찾아왔다.
“궁정 마법사인 아이리스라고 해요.”
“강지훈입니다. 알다시피 갑자기 납치당한 피해자죠.”
“그,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희 입장에서도 세 분이나 소환되실 줄은 몰랐거든요.”
내가 비아냥을 살짝 섞어 이야기하자 아이리스라고 불린 여성이 면목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과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이자 그에 따라 긴 백금발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뭘 하면 됩니까?”
여담이지만 권민우와 한지혜는 도와달라는 국왕의 간곡한 부탁에 흔쾌히 함께할 것을 선언했다고 한다.
솔직한 말로 좀 어이가 없었다.
그 녀석들 성정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이야 알고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의감이 넘친다거나 남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직접 뛰어들지는 않아도 구명보트 정도는 던져주는 정도.
그것만 해도 못 본 척 지나가는 것에 비하면 분명 괜찮은 성품이고 그렇기에 나 역시 그들과 그럭저럭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녀석들이 갑자기 자기희생을 선택했다라.’
갑자기 물속을 뛰어드는 행동의 기저에는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건 말 그대로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하고.
“지훈님에게는 현재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세상에 두 가지 되다니. 그 관대한 처사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
별로 성의 없는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멀쩡하게 살고 있던 사람을 갑자기 끌고 왔으니 언짢을 수밖에. 오히려 넙죽 세상을 구하겠다고 수락한 두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일단 묻겠는데.”
“생각해 두신 방법이 있다면 고려해보겠습니다.”
“돌아가는 방법은 있습니까?”
그 담백한 질문에 아이리스라고 불린 여성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말을 내놓을지 대략 예상이 갔다.
“면목 없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대충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이런 소환은 일방통행이 국룰이긴하지.
일단 물어보긴 했지만,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딱히 실망도 크진 않았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녀의 그 두 가지 제안이란 것을 들어볼 차례다.
“우선 첫 번째는 왕성에 남아 이 세계에 적응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최소한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안전하기도 해서 추천해 드리고 싶은 방법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는?”
“용사님이나 지혜님과 함께 훈련을 받으시는 방법이 있어요.”
“쥐뿔도 없는 사람한테 용사나 대마법사 급 재능충들과 같은 훈련을 받아라?”
“어,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에요! 아무래도 낯선 곳이다 보니 함께 있는 게 덜 불안하지 않을까 해서요!”
가는 눈으로 아이리스를 쳐다보자 그녀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그래도 하나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상대하는 눈앞에 궁정 마법사가 그렇게까지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람을 대하는 타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은 자율적으로 좀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 훈련이란 걸 견학도 하고 심사숙고도 좀 할 수 있게 말입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요. 알겠습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구역을 제외하고는 돌아다닐 수 있게끔 집사부에 말을 전해놓을게요.”
“고맙습니다.”
“아뇨. 오히려 허락 없이 소환했음에도 이런 것밖에 못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나는 왕궁 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
“라면 먹고 싶다.”
이 야심한 밤을 혼자 거닐다 보니 괜히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나는 현재 왕성의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창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각 구역을 삼엄하게 경비하는 중이었다.
“어디보자... 이쪽이었나?”
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은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즉 용사 소환 마법이 이뤄진 장소다.
“역시 경비 한 번 삼엄하구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마왕을 무찌르고 세계를 구해야하는 용사를 소환하는 마법진을 허술하게 관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 테니 말이다.
“문제는 내가 여기 들어가야한다는 건데.”
애석하게도 아이리스가 발급해준 통행증으로는 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 그녀가 말한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저곳이다.
“그렇다면 어쩌겠어. 몰래 들어가는 수밖에.”
어차피 이 야밤중에 여기까지 온 것도 ‘들키지 않은 채’ 온 것이다.
지금도 코 앞에 있는 나를 병사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말 다했지.
“그보다 그렇게 간단하게 눈치채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지.”
만약 들킨 거라면 조금 많이 슬플 것 같다.
그렇게 어떻게든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는 사이.
기회가 찾아왔다.
“늦은 밤까지 수고가 많군.”
“카, 카를 마법사님을 뵙습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회색머리 남자가 병사에게 인사를 건네자 병사들도 그를 알아보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잠깐 안쪽에 들어가 봐야겠네.”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연구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영감이 있어서 말이지.”
“하, 하지만 허가증이 없으시면 원칙적으로는…”
“자네들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네. 하지만 그대들만 입을 다물고 있는다면 오늘 일은 아무도 보지 않은 것이지. 그렇지 않나?”
대놓고 못 본 척하라는 압박.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 보내는 노골적인 협박은 병사들을 긴장하게 했다.
“자네들 이름이 뭔가?”
“메, 메튜입니다!”
“스미스입니다.”
“그래, 메튜와 스미스. 자네들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오밤중에 하품만 해가면서 보초만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내가 되었으면 무릇 좀 더 큰 판에서 놀아야하지 않겠나?”
협박 뒤에 이어지는 것은 달콤한 당근이다.
당근과 채찍.
그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한낱 병사들이 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이고 달콤했다.
“그, 그렇다면 정말 잠시만입니다…!”
“물론일세. 만약 지금 내 연구가 성과를 얻게 된다면 자네들의 공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야. 내 약속하지.”
“가, 감사합니다!”
“나도 드디어…!”
병사들의 표정에는 희미한 기대감과 열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당연하다는 듯 그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카를이란 남자를 보며 나 역시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재빨리 닫히는 문.
그와 동시에.
“라이트.”
카를의 가벼운 영창과 함께 내부가 은은하게 빛났다.
덕분에 나도 별다른 고생 없이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크흐흐. 이것이 바로 소환 마법진. 이것만 있다면 나도 아이리스 그년을 넘어설 수 있지.”
진득한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결코 순수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의도가 엿보였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저 아저씨가 어떤 구리구리한 의도를 가졌는지는 솔직히 내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시선 역시 이미 소환 마법진을 향해 있었다.
“과연. 그런 거로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곧장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켰다.
그 와중에 남은 배터리가 29%다.
슬슬 불안해져 가는 배터리 잔량을 보면 당장이라도 충전을 하고 싶지만, 이곳에 콘센트가 있을리가 없다.
“빨리 돌아가서 충전시켜야지.”
그래. 나는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다.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 오밤중에 잠도 안 자고 여기까지 숨어들어오지도 않았을 테지.
“꼴에 용사를 소환했다고 거들먹거리기는...! 마탑주의 수제자라는 배경만 없었다면 용사를 소환하는 것은 바로 이 몸 카를님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옆에서 계속해서 찡찡대는 아재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아주 그냥 열등감에 찌들어서 상대방을 까내리는 모습은 뭐랄까.
‘추하네.’
나는 나이 처먹고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니 어떤 의미로는 고마운 존재였다.
“이 내가 지금의 용사보다 더 대단한 존재를 소환한다면 분명 아이리스 그 여자에게로 향하는 선망과 찬사는 모두 내게로 집중될 것이 분명하다! 크하하!”
그렇게 마흔이 넘은 것 같은 아재의 안쓰러운 자기 합리화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그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사진을 찍어놨으니 제대로 살펴보는 것은 혼자 있을 때 집중해서 보면 될 일이다.
옆에서 계속해서 궁시렁대는 아재 덕분에 집중도 되지 않았고.
‘내일은 애들 훈련이나 구경 가볼까?’
그래도 일단은 동향 사람이다.
그들을 강제로 설득시켜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행여라도 무자비하게 착취당하고 있다면 도움 정도는 줄 사이는 된다.
무엇보다 원래 세계에서는 식칼조차 제대로 안잡아봤을 그 녀석들이 과연 피와 살이 낭자할 앞으로의 여정에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정도는 선배로서 확인해두는 것도 필요하겠지.
“그렇군. 여기에서 이 부분을 제거하면 보다 출력을 올릴 수 있어. 게다가 이 지점에서 속박 술식을 새겨넣으면… 간단하게 내 통제하에 둘 수 있어..!”
그거 그렇게하는 거 아닌데.
쿠쿠루삥뽕.
나는 인방을 감상하는 잼민이 마냥 트집을 잡았지만, 당연하게도 내 말이 옆에 있는 아재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가 목적을 완수한 후 밖으로 나가는 틈을 타 나 역시 내게 배정 받은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다음 날이 되었다.
용사의 여자친구의 남사친의 자격으로.
….왜?
***
돌이켜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여사친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 그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근질거려하는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갔더니 그 남자친구란 녀석이 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후배였다는 사실.
뭐, 둘 다 적당히 좋은 녀석들이라 잘 해보라며 축하를 해주고 셋이서 같이 식사를 했더랬다.
그 정도가 그 날에 있었던 헤프닝 중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될 만큼 평소와 다를 바 없던 하루였다.
그저 세상 참 좁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딴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세상 좁다고 생각했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넓은 세상은 필요 없잖아?”
필시 불가항력이었다.
몸을 감싸는 낯선 기운에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신체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기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과정에서 몸을 휘감아 오는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것을 거부하고 털어내는 것 뿐이었다.
“아르게리타 대륙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신에게 선택받은 구세의 용사여.”
“...시발. 가지가지하네.”
***
결과적으로 후배놈인 권민우는 여신의 선택을 용사였다.
지닌 바 재능이 세상을 뒤덮을 만큼 찬란하다나?
게다가 여사친인 한지혜는 역사에 기록될 재능을 가진 마법사라고한다.
4대 원소에 모두 적성을 가진 불합리한 재능충이라고.
한 명이 만루홈런이고 한 명이 3점 홈런이라면 나머지 한 명인 나에게도 사람들의 기대가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보통은 3점 홈런을, 아무리 못해도 안타 정도는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내게로 쏠렸다.
“그런 거 없습니다.”
허나. 왕국의 검사 결과 내 적성은 무(無).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이다.
“선배님. 괜찮습니다.”
“오빠. 너무 상심하지 마.”
오죽하면 같이 소환된 두 사람이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위로했을까.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나는 그들의 안쓰러운 시선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
…정확히 의도했던 바다.
“그럼 우선 두 분은 저를 따라오세요. 당신은 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렇게 용사인 권민우와 그에 필적하는 재능을 가진 마법사인 한지혜는 진즉에 호출당해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 동안, 나는 따로 마련된 응접실에서 하품이나 쩍쩍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차라도 내줄 것이지. 그냥 방치만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런 불만을 느끼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 즈음.
“늦어서 죄송합니다.”
드디어 나를 안내해줄 사람이 찾아왔다.
“궁정 마법사인 아이리스라고 해요.”
“강지훈입니다. 알다시피 갑자기 납치당한 피해자죠.”
“그,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희 입장에서도 세 분이나 소환되실 줄은 몰랐거든요.”
내가 비아냥을 살짝 섞어 이야기하자 아이리스라고 불린 여성이 면목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과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이자 그에 따라 긴 백금발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뭘 하면 됩니까?”
여담이지만 권민우와 한지혜는 도와달라는 국왕의 간곡한 부탁에 흔쾌히 함께할 것을 선언했다고 한다.
솔직한 말로 좀 어이가 없었다.
그 녀석들 성정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이야 알고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의감이 넘친다거나 남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직접 뛰어들지는 않아도 구명보트 정도는 던져주는 정도.
그것만 해도 못 본 척 지나가는 것에 비하면 분명 괜찮은 성품이고 그렇기에 나 역시 그들과 그럭저럭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녀석들이 갑자기 자기희생을 선택했다라.’
갑자기 물속을 뛰어드는 행동의 기저에는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건 말 그대로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하고.
“지훈님에게는 현재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세상에 두 가지 되다니. 그 관대한 처사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
별로 성의 없는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멀쩡하게 살고 있던 사람을 갑자기 끌고 왔으니 언짢을 수밖에. 오히려 넙죽 세상을 구하겠다고 수락한 두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일단 묻겠는데.”
“생각해 두신 방법이 있다면 고려해보겠습니다.”
“돌아가는 방법은 있습니까?”
그 담백한 질문에 아이리스라고 불린 여성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말을 내놓을지 대략 예상이 갔다.
“면목 없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대충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이런 소환은 일방통행이 국룰이긴하지.
일단 물어보긴 했지만,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딱히 실망도 크진 않았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녀의 그 두 가지 제안이란 것을 들어볼 차례다.
“우선 첫 번째는 왕성에 남아 이 세계에 적응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최소한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안전하기도 해서 추천해 드리고 싶은 방법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는?”
“용사님이나 지혜님과 함께 훈련을 받으시는 방법이 있어요.”
“쥐뿔도 없는 사람한테 용사나 대마법사 급 재능충들과 같은 훈련을 받아라?”
“어,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에요! 아무래도 낯선 곳이다 보니 함께 있는 게 덜 불안하지 않을까 해서요!”
가는 눈으로 아이리스를 쳐다보자 그녀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그래도 하나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상대하는 눈앞에 궁정 마법사가 그렇게까지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람을 대하는 타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은 자율적으로 좀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 훈련이란 걸 견학도 하고 심사숙고도 좀 할 수 있게 말입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요. 알겠습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구역을 제외하고는 돌아다닐 수 있게끔 집사부에 말을 전해놓을게요.”
“고맙습니다.”
“아뇨. 오히려 허락 없이 소환했음에도 이런 것밖에 못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나는 왕궁 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
“라면 먹고 싶다.”
이 야심한 밤을 혼자 거닐다 보니 괜히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나는 현재 왕성의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창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각 구역을 삼엄하게 경비하는 중이었다.
“어디보자... 이쪽이었나?”
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은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즉 용사 소환 마법이 이뤄진 장소다.
“역시 경비 한 번 삼엄하구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마왕을 무찌르고 세계를 구해야하는 용사를 소환하는 마법진을 허술하게 관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 테니 말이다.
“문제는 내가 여기 들어가야한다는 건데.”
애석하게도 아이리스가 발급해준 통행증으로는 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 그녀가 말한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저곳이다.
“그렇다면 어쩌겠어. 몰래 들어가는 수밖에.”
어차피 이 야밤중에 여기까지 온 것도 ‘들키지 않은 채’ 온 것이다.
지금도 코 앞에 있는 나를 병사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말 다했지.
“그보다 그렇게 간단하게 눈치채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지.”
만약 들킨 거라면 조금 많이 슬플 것 같다.
그렇게 어떻게든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는 사이.
기회가 찾아왔다.
“늦은 밤까지 수고가 많군.”
“카, 카를 마법사님을 뵙습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회색머리 남자가 병사에게 인사를 건네자 병사들도 그를 알아보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잠깐 안쪽에 들어가 봐야겠네.”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연구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영감이 있어서 말이지.”
“하, 하지만 허가증이 없으시면 원칙적으로는…”
“자네들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네. 하지만 그대들만 입을 다물고 있는다면 오늘 일은 아무도 보지 않은 것이지. 그렇지 않나?”
대놓고 못 본 척하라는 압박.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 보내는 노골적인 협박은 병사들을 긴장하게 했다.
“자네들 이름이 뭔가?”
“메, 메튜입니다!”
“스미스입니다.”
“그래, 메튜와 스미스. 자네들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오밤중에 하품만 해가면서 보초만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내가 되었으면 무릇 좀 더 큰 판에서 놀아야하지 않겠나?”
협박 뒤에 이어지는 것은 달콤한 당근이다.
당근과 채찍.
그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한낱 병사들이 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이고 달콤했다.
“그, 그렇다면 정말 잠시만입니다…!”
“물론일세. 만약 지금 내 연구가 성과를 얻게 된다면 자네들의 공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야. 내 약속하지.”
“가, 감사합니다!”
“나도 드디어…!”
병사들의 표정에는 희미한 기대감과 열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당연하다는 듯 그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카를이란 남자를 보며 나 역시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재빨리 닫히는 문.
그와 동시에.
“라이트.”
카를의 가벼운 영창과 함께 내부가 은은하게 빛났다.
덕분에 나도 별다른 고생 없이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크흐흐. 이것이 바로 소환 마법진. 이것만 있다면 나도 아이리스 그년을 넘어설 수 있지.”
진득한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결코 순수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의도가 엿보였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저 아저씨가 어떤 구리구리한 의도를 가졌는지는 솔직히 내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시선 역시 이미 소환 마법진을 향해 있었다.
“과연. 그런 거로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곧장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켰다.
그 와중에 남은 배터리가 29%다.
슬슬 불안해져 가는 배터리 잔량을 보면 당장이라도 충전을 하고 싶지만, 이곳에 콘센트가 있을리가 없다.
“빨리 돌아가서 충전시켜야지.”
그래. 나는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다.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 오밤중에 잠도 안 자고 여기까지 숨어들어오지도 않았을 테지.
“꼴에 용사를 소환했다고 거들먹거리기는...! 마탑주의 수제자라는 배경만 없었다면 용사를 소환하는 것은 바로 이 몸 카를님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옆에서 계속해서 찡찡대는 아재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아주 그냥 열등감에 찌들어서 상대방을 까내리는 모습은 뭐랄까.
‘추하네.’
나는 나이 처먹고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니 어떤 의미로는 고마운 존재였다.
“이 내가 지금의 용사보다 더 대단한 존재를 소환한다면 분명 아이리스 그 여자에게로 향하는 선망과 찬사는 모두 내게로 집중될 것이 분명하다! 크하하!”
그렇게 마흔이 넘은 것 같은 아재의 안쓰러운 자기 합리화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그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사진을 찍어놨으니 제대로 살펴보는 것은 혼자 있을 때 집중해서 보면 될 일이다.
옆에서 계속해서 궁시렁대는 아재 덕분에 집중도 되지 않았고.
‘내일은 애들 훈련이나 구경 가볼까?’
그래도 일단은 동향 사람이다.
그들을 강제로 설득시켜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행여라도 무자비하게 착취당하고 있다면 도움 정도는 줄 사이는 된다.
무엇보다 원래 세계에서는 식칼조차 제대로 안잡아봤을 그 녀석들이 과연 피와 살이 낭자할 앞으로의 여정에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정도는 선배로서 확인해두는 것도 필요하겠지.
“그렇군. 여기에서 이 부분을 제거하면 보다 출력을 올릴 수 있어. 게다가 이 지점에서 속박 술식을 새겨넣으면… 간단하게 내 통제하에 둘 수 있어..!”
그거 그렇게하는 거 아닌데.
쿠쿠루삥뽕.
나는 인방을 감상하는 잼민이 마냥 트집을 잡았지만, 당연하게도 내 말이 옆에 있는 아재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가 목적을 완수한 후 밖으로 나가는 틈을 타 나 역시 내게 배정 받은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다음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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