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인도(引導)(2)
조회 : 1,034 추천 : 0 글자수 : 5,282 자 2022-11-21
*이 작품에는 혐오와 차별, 그에 따른 폭력, 기타 부상과 유혈, 사망이 묘사되어있습니다. 해당 요소를 보기 힘드신 경우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 솔아 뭐 먹고 싶어? ]
이 솔은 하람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학교가 끝나고 하람의 집에 들러서 저녁까지 먹고 가는 건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생필품을 지원해주기 위해서라는 핑계가 있지만, 순전히 함께 있고 싶다는 사심이었다.
하람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온새미로와 이 한은 무능력자라 일을 할 수 없는 하람의 생계를 평생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이는 하람에 대한 동정이 아닌, 친우라 여긴 하람의 부모님을 위해서라면서.
중급 능력자인 하람의 부모님과 사냥꾼인 이 한, 그녀의 아내인 온새미로는 어쩌면 평생 만나지 않았을 인연이었으나, 이 솔과 하람의 만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람의 부모님은 선하고 밝은 사람들이었으며, 이 한과 온새미로는 그런 하람의 부모님을 벗으로 소중히 여겼다. 까칠한 이 솔도 하람의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말랑말랑해졌다.
“솔이 왔구나. 아저씨가 도넛 만들었는데 먹을래?”
“어머, 솔이 왔어? 손 씻고 들어가야 한다?”
“솔이다!! 어서 와!”
악명높은 이 한의 딸, 죽여야 하는 어린 사냥꾼. 이 솔은 하람의 집에서는 평범한 아이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중급 능력자인 하람의 부모님에게 사냥꾼인 이 솔은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언제나 웃어주었다. 딸인 하람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아이로 대해주었다. 이 솔은 하람과 하람의 부모님 사이에서 평범한 아이처럼 울고, 웃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2년, 하람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심지어 사고를 낸 건 상급 능력자였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 상급 능력자는 하람의 부모님 장례식에 태연히 나타났다. 그러고는 울고 있는 하람에게 한다는 소리가.
“이런 무능력자를 자식이라고 키우니까 벌 받아서 죽은 거 아니야?”
이 솔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달려들었다. 이 솔은 당시 9살이었지만 사냥꾼의 능력을 물려받은 아이였다. 덕분에 성인인 상급 능력자 2명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만,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하지만 그 상처보다 더 아픈 건 하람의 눈물이었다.
“흑, 끕……. 미안해, 솔아. 나 때문에……. 미안해…….”
이 솔은 하람의 눈물 섞인 사과를 들으며 무력감을 느꼈다. 감정에 휩쓸려서 행동한 데다가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다. 차라리 그 옆에서, 하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다면 하람이 자신에게 사죄하며 울지는 않았으리라. 아니, 차라리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라도 있었다면…….
“솔아, 분한 거냐?”
“……네.”
이 한은 그런 이 솔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 강함을 타고났다고 말하지만,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전부 의미 없었을 거야. 난 지키기 위해 강해졌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신념을 지키기 위해. 네가 강해진다면 적어도 물어뜯길 일은 없다.”
“…….”
“이 솔. 이번 일은 네 마음속에 돌부리로 남을 거다. 넌 어떻게 하고 싶지? 돌부리를 보며 화만 낼 거냐, 넘어진 채로 있을 거냐. 그것도 아니라면 하고 싶은 걸 말해라.”
어린 이 솔은 두 주먹을 쥐고서 이 한을 바라보았다.
“나는……. 강해질래요. 그런 양아치 같은 놈들에게서 하람 언니를 지킬 수 있게요.”
이 한은 이 솔을 안아 들고서 끌어안아 주었다.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 이 솔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 이 솔은 생각했다. 가족 없이 혼자 남게 된 하람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울었던 소중한 사람을.
“그래. 우리 사냥꾼은 죽이는 게 아니라 지키는 싸움을 하는 자들이다. 명심해라. 분노는 버리고 현실을 봐. 감정이 치우치면 죽을 뿐이야.”
그날부터였다. 이 솔이 정상을 노리게 된 것은. 이 솔은 그 뒤로 피나는 노력을 하며 수련에 임했다. 모두가 이 솔의 타고난 능력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만, 재능만 믿고 게으름을 피웠다면 왕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으리라.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죽을 만큼 노력하며 수련하는 것도, 모두 하람을 위해서였다.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 솔의 위치가 높아지고 견고해질수록 그에게 보호받는 하람을 건드리는 이들도 줄어들었다. 하람을 건드리는 이들을 전부 족쳐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남들이 또라이라고 수군거려도 상관없었다.
8살의 그날, 하람을 만난 이후로 이 솔에게 세상의 중심은 하람으로 정해졌으니까.
이 솔은 미소를 띠며 하람에게 답장을 보냈다.
[ 언니가 해주는 거면 다 좋아요. ]
늘 하는 말에 하람은 화를 내는 토끼 이모티콘과 답을 보내왔다.
[ 또 그런 말!!]
[정하기 어려우니까 솔이가 정해줘! ]
옆에 없는 데도 함께 하는 것처럼 화를 내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지금쯤 하람은 ‘솔이는 늘 그 소리야.’라며 투덜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옆에 있었다면 등을 한 대 얻어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맞은 이 솔보다 때린 하람의 손이 더 아파서 두 배로 혼나지만.
[ 그럼 저는_ ]
“선배!”
메시지를 보내던 이 솔에게 밝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 솔이 고개를 돌리자,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 솔을 바라보고 있는 후배가 보였다. 이 솔보다 2살 어린 서향. 그녀는 이 솔을 존경하는 쪽에 속했다. 사냥꾼 내에서 이 솔을 적대하는 쪽이 더 많기는 했으나, 전설이라 불리는 이 한과 그 명성을 뛰어넘으리라 예상되는 이 솔을 존경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서향은 그중 한 명으로, 이 솔이 가끔 지도 대련을 해 줄 정도로 친한 후배다.
서향은 똑바로 마주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시간 괜찮으시면 대련해주실 수 있으세요? 저번에 지적해주신 패턴을 고쳐봤는데…….”
“미안, 지금은 바빠서. 내일 봐줄게.”
서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솔이 수업이 끝난 후 무능력자에게 달려간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솔을 존경하는 이들이라도, 무능력자에 대한 것까지 긍정하는 건 아니었다. 이 솔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으나, 무능력자인 하람에 대해서 증오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 솔 선배는 훈련하기도 바쁜데, 쓸데없는 시간을 쓰게 하기는!’
이 솔의 결과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자신만은 알고 있다고 서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존경하는 이 솔의 명예를 깎아 먹는 주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열등한 무능력자 주제에 이 솔의 시간을 빼앗고,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랑받는다. 서향 안의 하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한 번은 이 솔이 하람과 통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 솔은 늘 무심하게 행동하는 평소와는 다르게 웃고, 사과하고, 당황하기도 하며 처음 듣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그 눈빛은 마치…….
‘나한테는 그렇게 웃어주신 적 없는데.’
서향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솔 앞에서 하람을 모욕했던 이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이 솔이 무능력자인 하람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더 지켜보기 힘들었다. 서향은 겨우 입을 열었다.
“…선배. 이런 말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선배의 명성에 흠만 가고…….”
“서향.”
이 솔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자, 서향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말했을 텐데. 나한테 하람 언니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내 모든 건 그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야.”
단호하고 무거운 대답. 서향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이 실수한 걸까? 괜히 말을 꺼냈다. 하람을 향한 혐오를 숨기지 못할 거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건데. 존경하는 선배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이 솔에게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신뢰를 쌓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신이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서, 선…….”
“…무섭게 해서 미안. 대련은 내일 해줄게.”
이 솔은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버려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관계가 깨진 건 알 수 있었다. 이 솔은 다시는 전처럼 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천천히 거리가 멀어질지도 모르지. 서향은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피가 나는데도 아픔보다 분노가 더 강했다.
‘그 여자만 아니면.’
분노는 이 솔보다 무능력자인 하람을 향했다. 그 무능력자만 아니면 이 솔은 완벽해질 텐데. 대체 왜 고집을 부리는 건지! 그 쓸모없는 게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죽었으면.’
그 무능력자가 죽어버렸으면. 어차피 하찮은 그 목숨이 사라져버렸으면.
“실례합니다.”
서향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서향도 사냥꾼 중에서는 상위에 속했다. 그런 자신이 바로 뒤까지 오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잔뜩 경계하며 돌아본 그곳에는,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검은 정장에 흰색 넥타이를 착용한 여자가 있었다.
‘저 복장은……. 가온교?’
가온교에서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옷을 정복으로 입으며, 복장과 넥타이, 두루마기 색으로 계급을 분류한다. 그중에서도 위아래가 검은색에 흰색 넥타이를 착용한 사람은 가온교의 무력을 담당하는 전투 인원, 다짐지기를 뜻한다.
“무, 무슨 일이신가요?”
본래 사냥꾼과 가온교의 사이는 좋지 않다. 가온교 소속은 자존심이 높았고,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두억시니 사냥을 할 수 있는 사냥꾼을 싫어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면서 허세만 높다.’면서 ‘어차피 축복이 걸린 무기가 아니면 두억시니를 잡을 수 없으니 가온교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게다가 몇몇은 축복을 걸어주는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사냥꾼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사냥꾼은 제 일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고,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한다. ‘목숨 걸고 싸우는 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더럽게 돈까지 요구한다.’라는 인식이 박힌 후로 가온교와 사냥꾼은 앙숙이나 다름없어졌다.
단지 가온교는 ‘두억시니의 박멸을 위해.’, 사냥꾼은 ‘두억시니와 싸우려면 축복이 꼭 필요하니까.’, 이런 각자의 사정 때문에 손을 잡고 있을 뿐인 관계다. 하지만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는 앙숙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더욱이 가온교에서 높은 계급에 속하는 다짐지기가 사냥꾼 교육생인 서향에게 말을 걸 이유는 없을 텐데.
‘무시하고 지나쳐도 모자랄 판에 무슨 속셈이지?’
가온교는 뱀처럼 교활한 자들이다. 서향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붙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서향을 바라보던 다짐지기는 웃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저에게요…?”
“네. 보아하니 ‘이 솔’학생과 친하신 것 같은데 맞나요?”
“서, 선배에 대한 건 왜…!”
잔뜩 경계하던 서향은 이어지는 말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솔 학생과 친하다는 무능력자에 대한 일입니다.”
[ 솔아 뭐 먹고 싶어? ]
이 솔은 하람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학교가 끝나고 하람의 집에 들러서 저녁까지 먹고 가는 건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생필품을 지원해주기 위해서라는 핑계가 있지만, 순전히 함께 있고 싶다는 사심이었다.
하람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온새미로와 이 한은 무능력자라 일을 할 수 없는 하람의 생계를 평생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이는 하람에 대한 동정이 아닌, 친우라 여긴 하람의 부모님을 위해서라면서.
중급 능력자인 하람의 부모님과 사냥꾼인 이 한, 그녀의 아내인 온새미로는 어쩌면 평생 만나지 않았을 인연이었으나, 이 솔과 하람의 만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람의 부모님은 선하고 밝은 사람들이었으며, 이 한과 온새미로는 그런 하람의 부모님을 벗으로 소중히 여겼다. 까칠한 이 솔도 하람의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말랑말랑해졌다.
“솔이 왔구나. 아저씨가 도넛 만들었는데 먹을래?”
“어머, 솔이 왔어? 손 씻고 들어가야 한다?”
“솔이다!! 어서 와!”
악명높은 이 한의 딸, 죽여야 하는 어린 사냥꾼. 이 솔은 하람의 집에서는 평범한 아이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중급 능력자인 하람의 부모님에게 사냥꾼인 이 솔은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언제나 웃어주었다. 딸인 하람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아이로 대해주었다. 이 솔은 하람과 하람의 부모님 사이에서 평범한 아이처럼 울고, 웃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2년, 하람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심지어 사고를 낸 건 상급 능력자였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 상급 능력자는 하람의 부모님 장례식에 태연히 나타났다. 그러고는 울고 있는 하람에게 한다는 소리가.
“이런 무능력자를 자식이라고 키우니까 벌 받아서 죽은 거 아니야?”
이 솔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달려들었다. 이 솔은 당시 9살이었지만 사냥꾼의 능력을 물려받은 아이였다. 덕분에 성인인 상급 능력자 2명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만,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하지만 그 상처보다 더 아픈 건 하람의 눈물이었다.
“흑, 끕……. 미안해, 솔아. 나 때문에……. 미안해…….”
이 솔은 하람의 눈물 섞인 사과를 들으며 무력감을 느꼈다. 감정에 휩쓸려서 행동한 데다가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다. 차라리 그 옆에서, 하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다면 하람이 자신에게 사죄하며 울지는 않았으리라. 아니, 차라리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라도 있었다면…….
“솔아, 분한 거냐?”
“……네.”
이 한은 그런 이 솔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 강함을 타고났다고 말하지만,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전부 의미 없었을 거야. 난 지키기 위해 강해졌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신념을 지키기 위해. 네가 강해진다면 적어도 물어뜯길 일은 없다.”
“…….”
“이 솔. 이번 일은 네 마음속에 돌부리로 남을 거다. 넌 어떻게 하고 싶지? 돌부리를 보며 화만 낼 거냐, 넘어진 채로 있을 거냐. 그것도 아니라면 하고 싶은 걸 말해라.”
어린 이 솔은 두 주먹을 쥐고서 이 한을 바라보았다.
“나는……. 강해질래요. 그런 양아치 같은 놈들에게서 하람 언니를 지킬 수 있게요.”
이 한은 이 솔을 안아 들고서 끌어안아 주었다.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 이 솔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 이 솔은 생각했다. 가족 없이 혼자 남게 된 하람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울었던 소중한 사람을.
“그래. 우리 사냥꾼은 죽이는 게 아니라 지키는 싸움을 하는 자들이다. 명심해라. 분노는 버리고 현실을 봐. 감정이 치우치면 죽을 뿐이야.”
그날부터였다. 이 솔이 정상을 노리게 된 것은. 이 솔은 그 뒤로 피나는 노력을 하며 수련에 임했다. 모두가 이 솔의 타고난 능력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만, 재능만 믿고 게으름을 피웠다면 왕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으리라.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죽을 만큼 노력하며 수련하는 것도, 모두 하람을 위해서였다.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 솔의 위치가 높아지고 견고해질수록 그에게 보호받는 하람을 건드리는 이들도 줄어들었다. 하람을 건드리는 이들을 전부 족쳐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남들이 또라이라고 수군거려도 상관없었다.
8살의 그날, 하람을 만난 이후로 이 솔에게 세상의 중심은 하람으로 정해졌으니까.
이 솔은 미소를 띠며 하람에게 답장을 보냈다.
[ 언니가 해주는 거면 다 좋아요. ]
늘 하는 말에 하람은 화를 내는 토끼 이모티콘과 답을 보내왔다.
[ 또 그런 말!!]
[정하기 어려우니까 솔이가 정해줘! ]
옆에 없는 데도 함께 하는 것처럼 화를 내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지금쯤 하람은 ‘솔이는 늘 그 소리야.’라며 투덜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옆에 있었다면 등을 한 대 얻어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맞은 이 솔보다 때린 하람의 손이 더 아파서 두 배로 혼나지만.
[ 그럼 저는_ ]
“선배!”
메시지를 보내던 이 솔에게 밝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 솔이 고개를 돌리자,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 솔을 바라보고 있는 후배가 보였다. 이 솔보다 2살 어린 서향. 그녀는 이 솔을 존경하는 쪽에 속했다. 사냥꾼 내에서 이 솔을 적대하는 쪽이 더 많기는 했으나, 전설이라 불리는 이 한과 그 명성을 뛰어넘으리라 예상되는 이 솔을 존경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서향은 그중 한 명으로, 이 솔이 가끔 지도 대련을 해 줄 정도로 친한 후배다.
서향은 똑바로 마주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시간 괜찮으시면 대련해주실 수 있으세요? 저번에 지적해주신 패턴을 고쳐봤는데…….”
“미안, 지금은 바빠서. 내일 봐줄게.”
서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솔이 수업이 끝난 후 무능력자에게 달려간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솔을 존경하는 이들이라도, 무능력자에 대한 것까지 긍정하는 건 아니었다. 이 솔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으나, 무능력자인 하람에 대해서 증오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 솔 선배는 훈련하기도 바쁜데, 쓸데없는 시간을 쓰게 하기는!’
이 솔의 결과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자신만은 알고 있다고 서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존경하는 이 솔의 명예를 깎아 먹는 주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열등한 무능력자 주제에 이 솔의 시간을 빼앗고,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랑받는다. 서향 안의 하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한 번은 이 솔이 하람과 통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 솔은 늘 무심하게 행동하는 평소와는 다르게 웃고, 사과하고, 당황하기도 하며 처음 듣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그 눈빛은 마치…….
‘나한테는 그렇게 웃어주신 적 없는데.’
서향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솔 앞에서 하람을 모욕했던 이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이 솔이 무능력자인 하람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더 지켜보기 힘들었다. 서향은 겨우 입을 열었다.
“…선배. 이런 말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선배의 명성에 흠만 가고…….”
“서향.”
이 솔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자, 서향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말했을 텐데. 나한테 하람 언니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내 모든 건 그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야.”
단호하고 무거운 대답. 서향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이 실수한 걸까? 괜히 말을 꺼냈다. 하람을 향한 혐오를 숨기지 못할 거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건데. 존경하는 선배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이 솔에게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신뢰를 쌓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신이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서, 선…….”
“…무섭게 해서 미안. 대련은 내일 해줄게.”
이 솔은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버려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관계가 깨진 건 알 수 있었다. 이 솔은 다시는 전처럼 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천천히 거리가 멀어질지도 모르지. 서향은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피가 나는데도 아픔보다 분노가 더 강했다.
‘그 여자만 아니면.’
분노는 이 솔보다 무능력자인 하람을 향했다. 그 무능력자만 아니면 이 솔은 완벽해질 텐데. 대체 왜 고집을 부리는 건지! 그 쓸모없는 게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죽었으면.’
그 무능력자가 죽어버렸으면. 어차피 하찮은 그 목숨이 사라져버렸으면.
“실례합니다.”
서향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서향도 사냥꾼 중에서는 상위에 속했다. 그런 자신이 바로 뒤까지 오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잔뜩 경계하며 돌아본 그곳에는,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검은 정장에 흰색 넥타이를 착용한 여자가 있었다.
‘저 복장은……. 가온교?’
가온교에서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옷을 정복으로 입으며, 복장과 넥타이, 두루마기 색으로 계급을 분류한다. 그중에서도 위아래가 검은색에 흰색 넥타이를 착용한 사람은 가온교의 무력을 담당하는 전투 인원, 다짐지기를 뜻한다.
“무, 무슨 일이신가요?”
본래 사냥꾼과 가온교의 사이는 좋지 않다. 가온교 소속은 자존심이 높았고,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두억시니 사냥을 할 수 있는 사냥꾼을 싫어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면서 허세만 높다.’면서 ‘어차피 축복이 걸린 무기가 아니면 두억시니를 잡을 수 없으니 가온교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게다가 몇몇은 축복을 걸어주는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사냥꾼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사냥꾼은 제 일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고,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한다. ‘목숨 걸고 싸우는 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더럽게 돈까지 요구한다.’라는 인식이 박힌 후로 가온교와 사냥꾼은 앙숙이나 다름없어졌다.
단지 가온교는 ‘두억시니의 박멸을 위해.’, 사냥꾼은 ‘두억시니와 싸우려면 축복이 꼭 필요하니까.’, 이런 각자의 사정 때문에 손을 잡고 있을 뿐인 관계다. 하지만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는 앙숙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더욱이 가온교에서 높은 계급에 속하는 다짐지기가 사냥꾼 교육생인 서향에게 말을 걸 이유는 없을 텐데.
‘무시하고 지나쳐도 모자랄 판에 무슨 속셈이지?’
가온교는 뱀처럼 교활한 자들이다. 서향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붙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서향을 바라보던 다짐지기는 웃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저에게요…?”
“네. 보아하니 ‘이 솔’학생과 친하신 것 같은데 맞나요?”
“서, 선배에 대한 건 왜…!”
잔뜩 경계하던 서향은 이어지는 말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솔 학생과 친하다는 무능력자에 대한 일입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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