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두 개의 날개
조회 : 1,059 추천 : 0 글자수 : 5,005 자 2022-12-12
*이 작품에는 혐오와 차별, 그에 따른 폭력, 기타 부상과 유혈, 사망이 묘사되어있습니다. 해당 요소를 보기 힘드신 경우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도담은 눈을 깜박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분명 두 사람을 처음 보는 데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나래요?”
잠긴 목소리에 흠칫 놀란 도담이 제 목을 매만졌다.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목소리는 낮게 갈라졌다. 이 솔이 물을 건네자, 도담은 머뭇거리며 컵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 마른 목을 적셨다. 정신이 깰 만큼 찬물을 바랐지만, 식어버린 물도 꽤 나쁘지 않았다.
“그래. 우리도 나래와 나비야. 너희처럼.”
“미리내는, 미리내는 어디 있죠? 윤슬 씨는요?”
멍하니 앉아있던 도담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하람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애는 다른 방에 있어. 사정이 좀 있어서.”
“미리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윤슬 씨는…….”
“진정해.”
금방이라도 일어나려는 도담의 어깨를 이 솔이 지그시 눌러 내렸다.
“네가 그런 상태면 우리도 알려주기 힘들어. 일단 말해두자면, 미리내라는 애는 자고 있어. 상처는 다 나았고. 윤슬이라는 마름은 아주 멀쩡해. 미리내를 돌봐주고 있지.”
“……감사합니다.”
도담은 이 솔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윤슬도 무사하고, 미리내의 상처가 나았다는 건 다행이었다. 특히 미리내는 자신 때문에 상당히 끔찍한 상태였으니까. 쓰러지기 전, 윤슬의 어깨너머로 본 미리내는 붉게 물든 바닥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광경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도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크게 심호흡했다.
“편하게 말해. 동갑이니까.”
이 솔은 도담의 어깨에서 손을 치우고는 고개 숙인 도담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이 떨리는 걸 보니 상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지만, 미리내가 걱정된다며 갑자기 방을 뛰쳐나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분명 처음 만나는 건데도 그리운 기분이야.”
하람이 중얼거리며 도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도담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거나 어깨를 꾹꾹 누르기도 했다. 도담은 당황스러워 고개를 들었으나, 진중한 눈빛에 하람이 뜻대로 하도록 얌전히 몸에서 힘을 뺐다.
“뭐야, 일어났냐?”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별하가 들어왔다. 별하는 시큰둥한 얼굴로 도담을 보더니 팔을 꼬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야, 꼬맹이.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이동 시설 쓰느라 한바탕 뒤엎고, 집 찾느라 또 뒤엎고…….”
“그건 네가 성질을 죽였으면 되는 문제 아니냐?”
“내가 강하게 안 나갔으면 일 처리가 빨리 됐을 거라고 생각해?”
별하와 이 솔이 투닥거리는 동안 하람은 웃으며 도담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사실 우리는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거든. 날개를 깨우고서 너희를 찾고 있었는데, 네 친구……미리내였던가? 그 애가 신호를 줘서 다행히 찾아올 수 있었어.”
“미리내가요?”
“하늘까지 닿는 엄~청 거대한 빛 기둥이었대.”
별하가 팔을 머리 위로 길게 뻗으며 답했다. 도담은 그 손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미리내가 신호를 보냈다. 자신 때문에 죽어가는 그 상황에서. 상당히 힘을 소모했을 테니 그 상태의 미리내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텐데……. 별하는 고개를 숙인 도담을 보며 입 모양으로 ‘내가 잘못한 거?’라고 뻐끔거렸다. 이 솔은 별하를 흘겨보고는 도담 앞으로 걸어갔다.
“우선 인사하지. 나는 나비인 이 솔. 이쪽은 ‘내’ 나래인 하람 언니. 저쪽은 가온교 마름 나부랭이.”
“나부랭이가 뭐냐? 나 직속부대 소속이라고! 난 청옥 마리 직속 ‘청록의 가지’ 소속 마름인 유별하야.”
“어, 그래.”
“건방진 꼬맹이…….”
별하가 구시렁거렸으나 이 솔은 가볍게 무시했다. 도담은 가온교의 마름한테, 그것도 마리 직속한테 저럴 수 있는 것도 참 대단한 담력이라고 생각하며 이 솔을 향한 존경심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 날개는 인도(引導)의 날개. 날개의 이름이 운명의 이름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도담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 솔은 하람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날개를 받을 때, 이름과 함께 다른 이야기도 들었어.”
“다른 이야기……?”
“‘길 잃은 날개를 인도하라’고.”
이 날개가 그대의 의지를 인도하리니. 나의 나비여, 길 잃은 날개를 인도하라.
‘하람’은 이 솔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너희가 길을 잃지 않게 인도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야. 우리는 너희를 위해서 온 힘을 다 할 거다.”
길을 잃지 않도록. 이 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미리내의 상태를 생각하면 자신은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 그날 그 순간에 날개가 깨어난 의미가 있겠지.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도담의 걱정을 늘려주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도담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지쳐서 한계에 다다른 얼굴. ‘토벌’을 끝마친 사냥꾼들에게서 익히 본 모습이다. 그들은 대개 동료를, 친구를 잃거나 죽을 고비를 넘긴 자들이었다. 이 솔은 가만히 도담을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도담의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지.”
별하가 느긋하게 다가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이 솔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서 별하는 시선을 도담에게 고정했다.
“미리내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 말이야.”
“그, 그건 미리내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도담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래 때도 그랬듯이, 자신의 이런 태도 때문에 더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별하는 인상을 쓰고서 쏘아붙였다.
“말이야 누가 못 하겠니. 분명 ‘지금’의 미리내는 재앙이 될 거라 보기는 힘들지. 하지만 나래는 각성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기도 하거든.”
신의 힘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자신감이라고는 없는 무능력자. 자책과 불안, 다른 이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그런데도 본질은 선하고 순수한. 윤슬에게 전해 들은 미리내는 딱 그런 아이였다. ‘재앙’이라는 글자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하지만 나래는 힘을 각성하는 순간 다른 사람처럼 변하기도 한다. 재앙으로 기록된 7대 나래도 누구보다 순수하고 타인을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이였다. 날개를 각성하기 전까지는.
감정이 왈칵 올라와 소리치려던 도담을 이 솔이 가로막았다. 팔을 들어 올려 도담의 시선을 가린 이 솔은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가 진심으로 미리내가 ‘재앙’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짜증 나는 꼬맹이.”
별하는 혀를 차고서 구시렁거렸다. 처음부터 별하에게 살의는 없었다. 만약 별하가 조금이라도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솔이 그녀의 접근을 막았을 것이다. 별하는 청옥 마리의 직속 마름. 별하가 미리내를 ‘재앙’이라고 결론지었다면, 미리내는 물론이고 별하를 막으려는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아직 힘을 사용하는데 미숙한 이 솔은 물론, 이 집에 있는 누구도 별하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별하는 다리를 꼬고서 도담을 흘겨보았다.
“대체 이유가 뭐야? 왜 그렇게 미리내한테 집착하는데?”
“…….”
“윤슬 언……아무튼 그 사람한테 들었어. 네가 하던 행동은 정상이 아니야. 호안 마리가 세뇌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맹목적인 보호와 집착. 도담은 날개를 받은 후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다른 이들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하던 아이는 중급 능력자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미리내를 괴롭혀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뒤에는 어땠는가. 가온교인 윤슬을 향한 위협,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다루던 힘, 극심해진 정신적 불안.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별하가 미리내를 ‘재앙’이라고 규정하지 않은 건…….
별하는 입술을 삐죽였다.
“저는, 그게 아니라…….”
도담은 이불자락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천천히 진심을 털어놓았다. 길고도 짧은 이야기 뒤에, 침묵을 헤치고 별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별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돌려 정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긴 침묵에 도담의 손이 축축해져 갔다.
“난 믿어.”
“뭐?”
이 솔의 산뜻한 대답에 별하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미쳤니?”
“내 운명은 이 녀석들을 잘 이끌어 주는 거잖아? 기왕 할 거면 얘네를 믿고 하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하람 언니가 부탁한 거니까.”
이 솔의 시선이 하람에게 향했다. ‘미래’의 하람이 한 부탁이라도 어쨌든 하람이 자신에게 한 부탁이었다. 하람은 잠시 멍해져서 이 솔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 솔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 솔은 하람의 손을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저도 믿어요.”
“넌 그래도 이성적일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제 ‘날개’가 말하고 있는 걸요. 저 둘은 믿어도 된다고.”
하람이 이 솔의 볼을 놓고서 별하와 눈을 마주쳤다.
“제 날개의 이름은, 미리내와 도담이를 위해서 지어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별하가 쏘아붙였다.
“날개의 이름은 운명의 이름이잖아!”
“하지만 그 이름을 말한 건 미래의 나잖아요. 또,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고.”
하람은 이 솔의 손을 꼭 잡고서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별하가 인상을 쓰고서 하람을 바라보았지만, 하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도 간절히 바라요. 이 두 사람이 무사하기를. 그리고…….”
하람은 몸을 돌려 도담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도담의 두 손을 감싸고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날개’의 문양이 있을 도담의 왼쪽 손등을.
“모두가 있을 자리에서 말하려고 했지만, 별하 씨가 결정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분명히 말해둘게요.”
도담은 고개를 든 하람을 바라보았다. 하람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리내는 재앙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애가 길을 잃으면 단순히 ‘재앙’이 나타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우리가 두 사람을 인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도담은 눈을 깜박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분명 두 사람을 처음 보는 데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나래요?”
잠긴 목소리에 흠칫 놀란 도담이 제 목을 매만졌다.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목소리는 낮게 갈라졌다. 이 솔이 물을 건네자, 도담은 머뭇거리며 컵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 마른 목을 적셨다. 정신이 깰 만큼 찬물을 바랐지만, 식어버린 물도 꽤 나쁘지 않았다.
“그래. 우리도 나래와 나비야. 너희처럼.”
“미리내는, 미리내는 어디 있죠? 윤슬 씨는요?”
멍하니 앉아있던 도담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하람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애는 다른 방에 있어. 사정이 좀 있어서.”
“미리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윤슬 씨는…….”
“진정해.”
금방이라도 일어나려는 도담의 어깨를 이 솔이 지그시 눌러 내렸다.
“네가 그런 상태면 우리도 알려주기 힘들어. 일단 말해두자면, 미리내라는 애는 자고 있어. 상처는 다 나았고. 윤슬이라는 마름은 아주 멀쩡해. 미리내를 돌봐주고 있지.”
“……감사합니다.”
도담은 이 솔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윤슬도 무사하고, 미리내의 상처가 나았다는 건 다행이었다. 특히 미리내는 자신 때문에 상당히 끔찍한 상태였으니까. 쓰러지기 전, 윤슬의 어깨너머로 본 미리내는 붉게 물든 바닥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광경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도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크게 심호흡했다.
“편하게 말해. 동갑이니까.”
이 솔은 도담의 어깨에서 손을 치우고는 고개 숙인 도담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이 떨리는 걸 보니 상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지만, 미리내가 걱정된다며 갑자기 방을 뛰쳐나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분명 처음 만나는 건데도 그리운 기분이야.”
하람이 중얼거리며 도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도담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거나 어깨를 꾹꾹 누르기도 했다. 도담은 당황스러워 고개를 들었으나, 진중한 눈빛에 하람이 뜻대로 하도록 얌전히 몸에서 힘을 뺐다.
“뭐야, 일어났냐?”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별하가 들어왔다. 별하는 시큰둥한 얼굴로 도담을 보더니 팔을 꼬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야, 꼬맹이.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이동 시설 쓰느라 한바탕 뒤엎고, 집 찾느라 또 뒤엎고…….”
“그건 네가 성질을 죽였으면 되는 문제 아니냐?”
“내가 강하게 안 나갔으면 일 처리가 빨리 됐을 거라고 생각해?”
별하와 이 솔이 투닥거리는 동안 하람은 웃으며 도담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사실 우리는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거든. 날개를 깨우고서 너희를 찾고 있었는데, 네 친구……미리내였던가? 그 애가 신호를 줘서 다행히 찾아올 수 있었어.”
“미리내가요?”
“하늘까지 닿는 엄~청 거대한 빛 기둥이었대.”
별하가 팔을 머리 위로 길게 뻗으며 답했다. 도담은 그 손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미리내가 신호를 보냈다. 자신 때문에 죽어가는 그 상황에서. 상당히 힘을 소모했을 테니 그 상태의 미리내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텐데……. 별하는 고개를 숙인 도담을 보며 입 모양으로 ‘내가 잘못한 거?’라고 뻐끔거렸다. 이 솔은 별하를 흘겨보고는 도담 앞으로 걸어갔다.
“우선 인사하지. 나는 나비인 이 솔. 이쪽은 ‘내’ 나래인 하람 언니. 저쪽은 가온교 마름 나부랭이.”
“나부랭이가 뭐냐? 나 직속부대 소속이라고! 난 청옥 마리 직속 ‘청록의 가지’ 소속 마름인 유별하야.”
“어, 그래.”
“건방진 꼬맹이…….”
별하가 구시렁거렸으나 이 솔은 가볍게 무시했다. 도담은 가온교의 마름한테, 그것도 마리 직속한테 저럴 수 있는 것도 참 대단한 담력이라고 생각하며 이 솔을 향한 존경심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 날개는 인도(引導)의 날개. 날개의 이름이 운명의 이름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도담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 솔은 하람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날개를 받을 때, 이름과 함께 다른 이야기도 들었어.”
“다른 이야기……?”
“‘길 잃은 날개를 인도하라’고.”
이 날개가 그대의 의지를 인도하리니. 나의 나비여, 길 잃은 날개를 인도하라.
‘하람’은 이 솔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너희가 길을 잃지 않게 인도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야. 우리는 너희를 위해서 온 힘을 다 할 거다.”
길을 잃지 않도록. 이 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미리내의 상태를 생각하면 자신은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 그날 그 순간에 날개가 깨어난 의미가 있겠지.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도담의 걱정을 늘려주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도담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지쳐서 한계에 다다른 얼굴. ‘토벌’을 끝마친 사냥꾼들에게서 익히 본 모습이다. 그들은 대개 동료를, 친구를 잃거나 죽을 고비를 넘긴 자들이었다. 이 솔은 가만히 도담을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도담의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지.”
별하가 느긋하게 다가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이 솔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서 별하는 시선을 도담에게 고정했다.
“미리내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 말이야.”
“그, 그건 미리내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도담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래 때도 그랬듯이, 자신의 이런 태도 때문에 더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별하는 인상을 쓰고서 쏘아붙였다.
“말이야 누가 못 하겠니. 분명 ‘지금’의 미리내는 재앙이 될 거라 보기는 힘들지. 하지만 나래는 각성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기도 하거든.”
신의 힘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자신감이라고는 없는 무능력자. 자책과 불안, 다른 이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그런데도 본질은 선하고 순수한. 윤슬에게 전해 들은 미리내는 딱 그런 아이였다. ‘재앙’이라는 글자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하지만 나래는 힘을 각성하는 순간 다른 사람처럼 변하기도 한다. 재앙으로 기록된 7대 나래도 누구보다 순수하고 타인을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이였다. 날개를 각성하기 전까지는.
감정이 왈칵 올라와 소리치려던 도담을 이 솔이 가로막았다. 팔을 들어 올려 도담의 시선을 가린 이 솔은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가 진심으로 미리내가 ‘재앙’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짜증 나는 꼬맹이.”
별하는 혀를 차고서 구시렁거렸다. 처음부터 별하에게 살의는 없었다. 만약 별하가 조금이라도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솔이 그녀의 접근을 막았을 것이다. 별하는 청옥 마리의 직속 마름. 별하가 미리내를 ‘재앙’이라고 결론지었다면, 미리내는 물론이고 별하를 막으려는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아직 힘을 사용하는데 미숙한 이 솔은 물론, 이 집에 있는 누구도 별하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별하는 다리를 꼬고서 도담을 흘겨보았다.
“대체 이유가 뭐야? 왜 그렇게 미리내한테 집착하는데?”
“…….”
“윤슬 언……아무튼 그 사람한테 들었어. 네가 하던 행동은 정상이 아니야. 호안 마리가 세뇌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맹목적인 보호와 집착. 도담은 날개를 받은 후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다른 이들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하던 아이는 중급 능력자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미리내를 괴롭혀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뒤에는 어땠는가. 가온교인 윤슬을 향한 위협,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다루던 힘, 극심해진 정신적 불안.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별하가 미리내를 ‘재앙’이라고 규정하지 않은 건…….
별하는 입술을 삐죽였다.
“저는, 그게 아니라…….”
도담은 이불자락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천천히 진심을 털어놓았다. 길고도 짧은 이야기 뒤에, 침묵을 헤치고 별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별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돌려 정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긴 침묵에 도담의 손이 축축해져 갔다.
“난 믿어.”
“뭐?”
이 솔의 산뜻한 대답에 별하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미쳤니?”
“내 운명은 이 녀석들을 잘 이끌어 주는 거잖아? 기왕 할 거면 얘네를 믿고 하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하람 언니가 부탁한 거니까.”
이 솔의 시선이 하람에게 향했다. ‘미래’의 하람이 한 부탁이라도 어쨌든 하람이 자신에게 한 부탁이었다. 하람은 잠시 멍해져서 이 솔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 솔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 솔은 하람의 손을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저도 믿어요.”
“넌 그래도 이성적일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제 ‘날개’가 말하고 있는 걸요. 저 둘은 믿어도 된다고.”
하람이 이 솔의 볼을 놓고서 별하와 눈을 마주쳤다.
“제 날개의 이름은, 미리내와 도담이를 위해서 지어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별하가 쏘아붙였다.
“날개의 이름은 운명의 이름이잖아!”
“하지만 그 이름을 말한 건 미래의 나잖아요. 또,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고.”
하람은 이 솔의 손을 꼭 잡고서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별하가 인상을 쓰고서 하람을 바라보았지만, 하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도 간절히 바라요. 이 두 사람이 무사하기를. 그리고…….”
하람은 몸을 돌려 도담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도담의 두 손을 감싸고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날개’의 문양이 있을 도담의 왼쪽 손등을.
“모두가 있을 자리에서 말하려고 했지만, 별하 씨가 결정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분명히 말해둘게요.”
도담은 고개를 든 하람을 바라보았다. 하람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리내는 재앙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애가 길을 잃으면 단순히 ‘재앙’이 나타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우리가 두 사람을 인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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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9. 두 개의 날개조회 : 1,06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05 29.28. 인도(引導)(7)조회 : 9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78 28.27. 인도(引導)(6)조회 : 9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28 27.26. 인도(引導)(5)조회 : 1,02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1 26.25. 인도(引導)(4)조회 : 96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85 25.24. 인도(引導)(3)조회 : 1,15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56 24.23. 인도(引導)(2)조회 : 99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82 23.22. 인도(引導)조회 : 1,05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35 22.21. 파도(5)조회 : 39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62 21.20. 파도(4)조회 : 94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35 20.19. 파도(3)조회 : 8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61 19.18. 파도(2)조회 : 5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70 18.17. 파도조회 : 54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07 17.16. 파문(波紋)(4)조회 : 46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35 16.15. 파문(波紋)(3)조회 : 7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50 15.14. 파문(波紋)(2)조회 : 4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445 14.13. 파문(波紋)조회 : 50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70 13.12. 기억(4)조회 : 54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039 12.11. 기억(3)조회 : 5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4 11.10. 기억(2)조회 : 4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7 10.9. 기억조회 : 49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79 9.8. 혼돈조회 : 4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274 8.7. 변화(4)조회 : 4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25 7.6. 변화(3)조회 : 6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700 6.5. 변화(2)조회 : 5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91 5.4. 변화조회 : 5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17 4.3. 하늘 아래(3)조회 : 585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572 3.2. 하늘 아래(2)조회 : 655 추천 : 2 댓글 : 0 글자 : 5,117 2.1. 하늘 아래조회 : 680 추천 : 1 댓글 : 0 글자 : 4,972 1.0. 기도조회 : 2,457 추천 : 1 댓글 : 2 글자 : 4,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