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반갑다. 꼬맹이!
조회 : 1,569 추천 : 0 글자수 : 5,046 자 2022-09-18
평상시에는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단호하게 내 의견을 피력할 때는 장 집사라고 불렀다.
완강한 내 태도에 장 집사도 체념하듯 넌지시 당부했다.
“물론 그랬죠. 도련님. 문제는 그곳이 호랑이 굴인지, 여우 굴인지. 도통 몰라서요. 늙은이의 조바심이라고 해두죠. 도련님.”
“그러니까. 더욱더 확인해봐야죠. 장 집사님.”
뺑소니 사고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로, 내 뜻대로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무리 준비한들 변수는 늘 존재하고. 무엇보다! 이거 제고, 저거 따지다 보면 때마저도 놓칠 수 있다. 솔직히 밀고 나가는 거 말고, 답이 없다.
적어도 장 집사에게 모양 빠지게, 겁먹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보살펴준 장 집사에 대한 고마움과 최소한 보답이라고 생각에서 더욱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영실이가 잔망스럽게 일어났다.
“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겠습니다. 그럼 내일 봬요.”
“이왕 왔으니까, 알바하고 가라.”
“형? 무슨 알바요?”
***
내 눈엔 도도한 고양이었다.
매혹적인 고양이 눈과 둥근 이마, 작지도 크지도 않은 붉은 입술까지. 누나는 도도한 고양이 그 자체였다.
무관심한 얼굴로 공원 벤치에 앉아 일광욕하는 매혹적인 누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저 멀리서 새침한 얼굴로 누나가 감흥 없는 풍경을 구경하듯 살짝 고개를 돌려 볼 뿐 별다른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나름 멋있는 집사인데, 그윽하게 눈길 한 번 보내지.’
누나의 옆자리에 앉아도, 느른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가져온 도시락을 내밀었다.
누나의 관심을 끌려고,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맛을 다시며 눈웃음을 쳤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일했더니, 배고프다.”
밥알을 세는 누나와 달리 천하에 진미를 맛보듯 입안 한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씹었다.
탐스럽게도 오물거리는 누나의 입술에 물려있는 소시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키스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흔적도 없어 도망갈 누나라서 애써 참았다.
누나의 입술 사이로 유혹적으로 반쯤 나온 소시지라고 맛보고 싶다는 충동에 고개를 살짝 틀었다. 빼빼로 게임 하듯 살포시 누나의 소시지를 뺏아 먹었다.
“야! 너…너….”
내 응큼 지수에 용수철이 튕기듯 벌떡 일어난 누나가 뒷걸음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맛있다. 너무 맛있어, 그만. 미안해 누나.”
천연덕스럽게 내뱉었지만, 다시 안 본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까 봐, 심장은 졸았다.
누나가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시락통은 이제부터 네가 씻어. 나, 간다.”
또 개가 풀 뜯어 먹는 개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 누나가 총총 걸어갔다.
오늘따라 냉담한 누나의 등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오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응? 사랑스러운 누나.”
홱 돌아선 누나가 정말 모르겠냐? 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말해 봐. 사랑스러운 누나의 든든한,”
쿵!
뿔난 황소처럼 내 가슴에 헤딩을 날렸다.
“커헉!”
순간 들숨을 들이킨 가슴 통증에 바닥에 쓰러졌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던 누나가 무심하게 갈 길 갔다.
“아픈 사람을 놔두고, 혼자 가시면. 발병 생긴다. 누나.”
“안 그래도 속 시끄러운데, 너까지 보태지 마라.”
“문어 박 부장이 사랑스러운 누나를 또 괴롭혀? 확~문어탕으로 끓여버릴까.”
“문어 끓여 먹을 생각하지 말고, 너나! 그놈의 사랑스러운 누나라는 헛소리 집어 쳐주면 좋겠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다면, 임수 씨? 어때?”
“야! 죽을래.”
“응. 햇살이 좋은 날에 임수 대리님과 맛난 도시락도 먹고, 정말~ 행복해 죽겠어! 임수 대리님도, 같은 마음이죠?”
“하! 임수 대리? 그래. 좋겠다. 나는 이렇게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날, 점심값이나 아낀다고 어줍지도 않은 도시락을 너랑 나눠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눈물이 흐른다. 됐냐.”
“사랑스러운 누나 같이 가요~”
***
회사로 돌아온 임수 대리가 책상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배 나온 박 부장이 손가락질로 그녀를 불렀다.
‘할 말 있으면! 지가 올 것이지. 꼭 똥개를 부르듯, 손가락질로 사람을 불러. 교양 머리는 쌈 싸 먹었나! 저놈의 손가락을 분질러 먹고 퇴사할 거야. 반드시!’
마지못해 일어난 임수 대리는 박 부장의 자리로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걸어갔다.
“네. 부장님 부르셨습니까.”
“어때? 생각해 봤어?”
‘귀찮다. 제발 관심 좀 꺼줘,’
의자를 한껏 뒤로 제친 박 부장이 눈을 내리깔고 거만하게 오지랖을 폈다.
“다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만나는데, 돈 들어? 맛있는 점심 얻어먹고 온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차는 공짜로 마시니? 그리고 내가 거지야! 뭘 얻어먹어? 또 황금 같은 내 시간은 어떻게 보상할 건데. 문어 대가리. 박 부장아.’
“내일 점심시간에 약속 잡아놨어.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내가 장소도 특별히 신경 썼어. 홍대리.”
쓸데없는 소개팅 주선에 속이 부글부글 끓은 홍 대리가 갈무리하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비꼬았다.
“부장님, 저 때문에 괜스레 욕 들을 실까 봐, 그 소개팅 못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더는 애쓰지 마세요. 제발~부장님.”
“홍 대리가 나이 많다는 거, 그쪽도 OK 했어. 걱정하지 말고, 만나봐. 그리고 차이면 어때.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저 문어 새끼! 씹어 먹을까? 연포탕을 끓여서 구내식당에 납품해? 하지 말라는 짓은 오지게도 한다. 제발 그 정성으로 업무나 제대로, 눈치껏 해라.’
***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임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탈리아 레스토랑 문 앞에 장승처럼 처량하게 서 있었다.
‘평일에 그것도 직장 상사가 주선한 소개팅이라니! 보고서 작성이라도 해야 하나? 한동안 파스타 ’파‘자도 쳐다보기 싫을 것 같다.’
오가는 사람마다 그녀를 힐끔거렸다. 절망적인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남녀의 소음 때문에 그들을 쳐다봤다.
“어머. 오빠, 저 여자 왜 이래?”
“딱 보면 몰라, 차였네. 차였어.”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 보니까, 설마 애인이 바람이 피우는 현장을 목격했나 봐. 어! 오빠도, 나 몰래, 아니지?”
“또 그런다. 난~자기밖에 없어. 이렇게 이쁜 너를 두고 어떻게 바람을 피워. 어떻게 여신과 아줌마랑 비교해. 말이 안 되지.”
안 그래도, 레스토랑을 폭발시키고 싶은 임수는 바퀴벌레 한 쌍의 앞 담화를 참지 못하고 일갈을 날렸다.
“우리 자기도, 그렇게 말했는데. 바람 피웠어요. 여신님도, 내일이라도 땅바닥에 패대기 쳐질 수 있으니까! 너무 믿지 말라고요. 내 꼴 납니다.”
혈압 올라가는 커플을 뒤로하고, 임수는 투덜거리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나만 빼고, 행복한 세상~! 짜증 난다. 난다고.”
***
적당히 어둡고,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분위기에 연인끼리 오면 딱 좋은 곳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매니저가 상냥한 목소리로 임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가르디 레스토랑에 오실 걸 환영합니다. 예약하셨어요?”
임수는 어색한 미소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홍임수로 예약,”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던 매니저가 탄성과 함께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 홍 임수 고객님! 박 부장님의 특별한 부탁으로 우리 가르디에서 고객님의 미모를 한층 돋보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문어 대가리! 아주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
“특별한 만남을 기다리시는 고객님만을 위한 자리로 이동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임수는 매니저의 부담스러운 친절에 편두통이 밀려와, 관자놀이를 누르며 뒤따라갔다.
‘쪽팔리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팔팔 끓은 지옥의 연포탕에 집어 던져주마.’
스포츠머리에 검은 조끼를 입고 서빙하던 정우가 임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자리는 소개팅하는 자리인데, 설마? 아니겠지. 그 녀석도 알고 있나?’
가르디 직원이 넋 놓고 쳐다보는 정우에게 눈치를 준다.
“뭐해요. 정우 씨. 빨리 움직여요. 고객님들이 쳐다보잖아요.”
“아. 네! 죄송합니다.”
***
매니저가 안내한 자리에 참석한 임수는 어색한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포털 기사도 읽는 것도 지겨운 임수가 통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사람인가? 신나서 손을 흔들고 걸어오는 걸 보니, 소개팅할 남자는 아닌 거 같고. 빨리 헤어지게, 빨리나 오지. 다~귀찮다. 맹렬히 내 침대나 덮치고 싶다.’
그때.
세미 캐주얼 입은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저 실실거리면서 걸어오는 저 사람은 아니겠지?’
점점 좁혀오는 그의 걸음걸이를 부정하듯 임수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들뜬 목소리가 그녀의 귀가를 때렸다.
“안녕하세요. 홍임수 씨? 맞으시죠?”
낯선 남자의 해맑은 인사에 화들짝 놀란 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듯한 이마를 돋보이게 쓸어 넘긴 머리와 단정한 눈썹으로 깔끔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거기다가 부드러운 미소까지.
한마디로 커피 광고에서 나올법한 자상하고 귀공자 스타일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홍임수입니다. 성함이?”
새삼 이름도 모르고 소개팅이 나온 자신이 한심한 그녀였다.
‘이런 나 자신도 싫은데, 저쪽은 오죽할까.’
커피 광고의 미소로 그 남자가 임수에게 명함을 건넸다.
“최재현입니다. 앉으세요. 임수 씨, 임수 씨라고 불러도 되죠.”
“네. 재현 씨. 재현 씨, 편한 실대로 부르세요.”
그의 손길에 명함에 묻어난 향기에 임수는 상념에 빠진다.
‘박하와 사과가 섞인 향인가? 이거 어디서 맡아본 향인데. 그 향수 이름이 뭐더라?’
기억에서 향을 더듬고 있을 때, 재현이 말문을 열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임수 씨는 뭘 좋아하세요?”
‘그냥 차나 마시자. 피곤하게. 무슨 밥을 먹어.’
대답 없는 임수의 압박에도 재현은 꿋꿋하게 메뉴판을 정독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능청을 떨었다.
“물론 소개팅에서 식사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알면서 왜 이래!’
“무리한 부탁인 거 알지만,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한 놈. 살려준다고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밥 한 끼만, 함께 먹어주세요. 임수 씨.”
재현의 너스레가 임수의 귓가에는 나랑 밥 안 먹으면 박 부장에 ‘꼰지르겠다’로 들렸다.
문어 부장의 갈굼에 시달릴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 임수가 별수 없이 메뉴를 골랐다.
“저는 크림파스타 먹을 게요.”
무덤덤하게 말하는 임수와 달리 재현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메뉴를 추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임수 씨. 그럼, 샐러드도 추가하세요. 음료는 와인 어떠세요?”
“아니요. 이걸로 충분합니다. 물 마시면 됩니다.”
재현은 배고픈 표정으로 벨을 눌러 주문했다.
“이분은 크림파스타. 저는 1번 피자로 레귤러 사이즈와 해물 리조트 음료는 콜라주세요.”
노골적인 호감의 눈길을 애써 모른 척하는 임수가 귀여운 재현이었다.
‘설마 하고 나왔는데. 진짜, 꼬맹이네. 여전히 이쁘다. 반갑다 꼬맹이’
먼저 나온 크림 파스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수가 입을 뗐다.
“배고프신데, 제 파스타가 먼저 나왔네요. 잠시만요.”
임수는 앞접시에 크림파스타들 덜어 재현에게 건넸다.
“우선 이거라도 드세요. 여자의 내숭이라고 생각하시고, 부담 없이 드세요.”
앞접시를 건네 받은 재현은 감동 어린 눈으로 임수를 쳐다보지만, 그녀의 속내는 달랐다.
임수는 딱히 배고프지도 않고. 먹으면 얹힐 거 같아서, 미운 놈 파스타 한 가닥 준다는 심정으로 덜어준 것이다.
한마디로 동상이몽 소개팅이지만, 그들은 별말 없이도 편했다.
임수는 소개팅이라는 미명아래 무례한 호구조사와 자랑질을 주절이 듣지 않아서 좋았고.
재현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 포근했다.
핸드백이 전해지는 진동에 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현 씨, 잠깐 화장실 좀…….”
완강한 내 태도에 장 집사도 체념하듯 넌지시 당부했다.
“물론 그랬죠. 도련님. 문제는 그곳이 호랑이 굴인지, 여우 굴인지. 도통 몰라서요. 늙은이의 조바심이라고 해두죠. 도련님.”
“그러니까. 더욱더 확인해봐야죠. 장 집사님.”
뺑소니 사고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로, 내 뜻대로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무리 준비한들 변수는 늘 존재하고. 무엇보다! 이거 제고, 저거 따지다 보면 때마저도 놓칠 수 있다. 솔직히 밀고 나가는 거 말고, 답이 없다.
적어도 장 집사에게 모양 빠지게, 겁먹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보살펴준 장 집사에 대한 고마움과 최소한 보답이라고 생각에서 더욱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영실이가 잔망스럽게 일어났다.
“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겠습니다. 그럼 내일 봬요.”
“이왕 왔으니까, 알바하고 가라.”
“형? 무슨 알바요?”
***
내 눈엔 도도한 고양이었다.
매혹적인 고양이 눈과 둥근 이마, 작지도 크지도 않은 붉은 입술까지. 누나는 도도한 고양이 그 자체였다.
무관심한 얼굴로 공원 벤치에 앉아 일광욕하는 매혹적인 누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저 멀리서 새침한 얼굴로 누나가 감흥 없는 풍경을 구경하듯 살짝 고개를 돌려 볼 뿐 별다른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나름 멋있는 집사인데, 그윽하게 눈길 한 번 보내지.’
누나의 옆자리에 앉아도, 느른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가져온 도시락을 내밀었다.
누나의 관심을 끌려고,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맛을 다시며 눈웃음을 쳤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일했더니, 배고프다.”
밥알을 세는 누나와 달리 천하에 진미를 맛보듯 입안 한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씹었다.
탐스럽게도 오물거리는 누나의 입술에 물려있는 소시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키스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흔적도 없어 도망갈 누나라서 애써 참았다.
누나의 입술 사이로 유혹적으로 반쯤 나온 소시지라고 맛보고 싶다는 충동에 고개를 살짝 틀었다. 빼빼로 게임 하듯 살포시 누나의 소시지를 뺏아 먹었다.
“야! 너…너….”
내 응큼 지수에 용수철이 튕기듯 벌떡 일어난 누나가 뒷걸음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맛있다. 너무 맛있어, 그만. 미안해 누나.”
천연덕스럽게 내뱉었지만, 다시 안 본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까 봐, 심장은 졸았다.
누나가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시락통은 이제부터 네가 씻어. 나, 간다.”
또 개가 풀 뜯어 먹는 개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 누나가 총총 걸어갔다.
오늘따라 냉담한 누나의 등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오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응? 사랑스러운 누나.”
홱 돌아선 누나가 정말 모르겠냐? 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말해 봐. 사랑스러운 누나의 든든한,”
쿵!
뿔난 황소처럼 내 가슴에 헤딩을 날렸다.
“커헉!”
순간 들숨을 들이킨 가슴 통증에 바닥에 쓰러졌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던 누나가 무심하게 갈 길 갔다.
“아픈 사람을 놔두고, 혼자 가시면. 발병 생긴다. 누나.”
“안 그래도 속 시끄러운데, 너까지 보태지 마라.”
“문어 박 부장이 사랑스러운 누나를 또 괴롭혀? 확~문어탕으로 끓여버릴까.”
“문어 끓여 먹을 생각하지 말고, 너나! 그놈의 사랑스러운 누나라는 헛소리 집어 쳐주면 좋겠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다면, 임수 씨? 어때?”
“야! 죽을래.”
“응. 햇살이 좋은 날에 임수 대리님과 맛난 도시락도 먹고, 정말~ 행복해 죽겠어! 임수 대리님도, 같은 마음이죠?”
“하! 임수 대리? 그래. 좋겠다. 나는 이렇게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날, 점심값이나 아낀다고 어줍지도 않은 도시락을 너랑 나눠 먹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눈물이 흐른다. 됐냐.”
“사랑스러운 누나 같이 가요~”
***
회사로 돌아온 임수 대리가 책상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배 나온 박 부장이 손가락질로 그녀를 불렀다.
‘할 말 있으면! 지가 올 것이지. 꼭 똥개를 부르듯, 손가락질로 사람을 불러. 교양 머리는 쌈 싸 먹었나! 저놈의 손가락을 분질러 먹고 퇴사할 거야. 반드시!’
마지못해 일어난 임수 대리는 박 부장의 자리로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걸어갔다.
“네. 부장님 부르셨습니까.”
“어때? 생각해 봤어?”
‘귀찮다. 제발 관심 좀 꺼줘,’
의자를 한껏 뒤로 제친 박 부장이 눈을 내리깔고 거만하게 오지랖을 폈다.
“다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만나는데, 돈 들어? 맛있는 점심 얻어먹고 온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차는 공짜로 마시니? 그리고 내가 거지야! 뭘 얻어먹어? 또 황금 같은 내 시간은 어떻게 보상할 건데. 문어 대가리. 박 부장아.’
“내일 점심시간에 약속 잡아놨어.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내가 장소도 특별히 신경 썼어. 홍대리.”
쓸데없는 소개팅 주선에 속이 부글부글 끓은 홍 대리가 갈무리하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비꼬았다.
“부장님, 저 때문에 괜스레 욕 들을 실까 봐, 그 소개팅 못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더는 애쓰지 마세요. 제발~부장님.”
“홍 대리가 나이 많다는 거, 그쪽도 OK 했어. 걱정하지 말고, 만나봐. 그리고 차이면 어때.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저 문어 새끼! 씹어 먹을까? 연포탕을 끓여서 구내식당에 납품해? 하지 말라는 짓은 오지게도 한다. 제발 그 정성으로 업무나 제대로, 눈치껏 해라.’
***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임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탈리아 레스토랑 문 앞에 장승처럼 처량하게 서 있었다.
‘평일에 그것도 직장 상사가 주선한 소개팅이라니! 보고서 작성이라도 해야 하나? 한동안 파스타 ’파‘자도 쳐다보기 싫을 것 같다.’
오가는 사람마다 그녀를 힐끔거렸다. 절망적인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남녀의 소음 때문에 그들을 쳐다봤다.
“어머. 오빠, 저 여자 왜 이래?”
“딱 보면 몰라, 차였네. 차였어.”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 보니까, 설마 애인이 바람이 피우는 현장을 목격했나 봐. 어! 오빠도, 나 몰래, 아니지?”
“또 그런다. 난~자기밖에 없어. 이렇게 이쁜 너를 두고 어떻게 바람을 피워. 어떻게 여신과 아줌마랑 비교해. 말이 안 되지.”
안 그래도, 레스토랑을 폭발시키고 싶은 임수는 바퀴벌레 한 쌍의 앞 담화를 참지 못하고 일갈을 날렸다.
“우리 자기도, 그렇게 말했는데. 바람 피웠어요. 여신님도, 내일이라도 땅바닥에 패대기 쳐질 수 있으니까! 너무 믿지 말라고요. 내 꼴 납니다.”
혈압 올라가는 커플을 뒤로하고, 임수는 투덜거리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나만 빼고, 행복한 세상~! 짜증 난다. 난다고.”
***
적당히 어둡고,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분위기에 연인끼리 오면 딱 좋은 곳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매니저가 상냥한 목소리로 임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가르디 레스토랑에 오실 걸 환영합니다. 예약하셨어요?”
임수는 어색한 미소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홍임수로 예약,”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던 매니저가 탄성과 함께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 홍 임수 고객님! 박 부장님의 특별한 부탁으로 우리 가르디에서 고객님의 미모를 한층 돋보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문어 대가리! 아주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
“특별한 만남을 기다리시는 고객님만을 위한 자리로 이동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임수는 매니저의 부담스러운 친절에 편두통이 밀려와, 관자놀이를 누르며 뒤따라갔다.
‘쪽팔리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팔팔 끓은 지옥의 연포탕에 집어 던져주마.’
스포츠머리에 검은 조끼를 입고 서빙하던 정우가 임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자리는 소개팅하는 자리인데, 설마? 아니겠지. 그 녀석도 알고 있나?’
가르디 직원이 넋 놓고 쳐다보는 정우에게 눈치를 준다.
“뭐해요. 정우 씨. 빨리 움직여요. 고객님들이 쳐다보잖아요.”
“아. 네! 죄송합니다.”
***
매니저가 안내한 자리에 참석한 임수는 어색한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포털 기사도 읽는 것도 지겨운 임수가 통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사람인가? 신나서 손을 흔들고 걸어오는 걸 보니, 소개팅할 남자는 아닌 거 같고. 빨리 헤어지게, 빨리나 오지. 다~귀찮다. 맹렬히 내 침대나 덮치고 싶다.’
그때.
세미 캐주얼 입은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저 실실거리면서 걸어오는 저 사람은 아니겠지?’
점점 좁혀오는 그의 걸음걸이를 부정하듯 임수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들뜬 목소리가 그녀의 귀가를 때렸다.
“안녕하세요. 홍임수 씨? 맞으시죠?”
낯선 남자의 해맑은 인사에 화들짝 놀란 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듯한 이마를 돋보이게 쓸어 넘긴 머리와 단정한 눈썹으로 깔끔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거기다가 부드러운 미소까지.
한마디로 커피 광고에서 나올법한 자상하고 귀공자 스타일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홍임수입니다. 성함이?”
새삼 이름도 모르고 소개팅이 나온 자신이 한심한 그녀였다.
‘이런 나 자신도 싫은데, 저쪽은 오죽할까.’
커피 광고의 미소로 그 남자가 임수에게 명함을 건넸다.
“최재현입니다. 앉으세요. 임수 씨, 임수 씨라고 불러도 되죠.”
“네. 재현 씨. 재현 씨, 편한 실대로 부르세요.”
그의 손길에 명함에 묻어난 향기에 임수는 상념에 빠진다.
‘박하와 사과가 섞인 향인가? 이거 어디서 맡아본 향인데. 그 향수 이름이 뭐더라?’
기억에서 향을 더듬고 있을 때, 재현이 말문을 열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임수 씨는 뭘 좋아하세요?”
‘그냥 차나 마시자. 피곤하게. 무슨 밥을 먹어.’
대답 없는 임수의 압박에도 재현은 꿋꿋하게 메뉴판을 정독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능청을 떨었다.
“물론 소개팅에서 식사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알면서 왜 이래!’
“무리한 부탁인 거 알지만,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한 놈. 살려준다고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밥 한 끼만, 함께 먹어주세요. 임수 씨.”
재현의 너스레가 임수의 귓가에는 나랑 밥 안 먹으면 박 부장에 ‘꼰지르겠다’로 들렸다.
문어 부장의 갈굼에 시달릴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 임수가 별수 없이 메뉴를 골랐다.
“저는 크림파스타 먹을 게요.”
무덤덤하게 말하는 임수와 달리 재현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메뉴를 추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임수 씨. 그럼, 샐러드도 추가하세요. 음료는 와인 어떠세요?”
“아니요. 이걸로 충분합니다. 물 마시면 됩니다.”
재현은 배고픈 표정으로 벨을 눌러 주문했다.
“이분은 크림파스타. 저는 1번 피자로 레귤러 사이즈와 해물 리조트 음료는 콜라주세요.”
노골적인 호감의 눈길을 애써 모른 척하는 임수가 귀여운 재현이었다.
‘설마 하고 나왔는데. 진짜, 꼬맹이네. 여전히 이쁘다. 반갑다 꼬맹이’
먼저 나온 크림 파스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수가 입을 뗐다.
“배고프신데, 제 파스타가 먼저 나왔네요. 잠시만요.”
임수는 앞접시에 크림파스타들 덜어 재현에게 건넸다.
“우선 이거라도 드세요. 여자의 내숭이라고 생각하시고, 부담 없이 드세요.”
앞접시를 건네 받은 재현은 감동 어린 눈으로 임수를 쳐다보지만, 그녀의 속내는 달랐다.
임수는 딱히 배고프지도 않고. 먹으면 얹힐 거 같아서, 미운 놈 파스타 한 가닥 준다는 심정으로 덜어준 것이다.
한마디로 동상이몽 소개팅이지만, 그들은 별말 없이도 편했다.
임수는 소개팅이라는 미명아래 무례한 호구조사와 자랑질을 주절이 듣지 않아서 좋았고.
재현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 포근했다.
핸드백이 전해지는 진동에 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현 씨, 잠깐 화장실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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