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남자는 나 하나로 만족해!
조회 : 1,008 추천 : 0 글자수 : 5,658 자 2022-09-29
***
“누나가 뭐 한다고? 소개팅?”
등줄기에 식은땀과 심장이 타는 듯한 초조함에 가르디 레스토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막상 레스토랑 앞까지 쫓아왔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자격으로 누나를 끌고 나오겠다고. 애인도 아니고. 남동생이라고 우겨서? 그것도 아니면 한집에 사는 집주인과 세입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소개팅 남자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누나에겐 그냥 남이었다.
짝사랑의 비애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정우의 타박에 정신을 차렸다.
“너 뭐하냐? 안 들어가고 고사 지냈냐?”
“무슨 자격으로? 내가 뭐라고.”
“버터 새끼, 왜 이래? 날도 덥지 않은데, 흐물거리네. 자격 좋아하시네.”
“들어가서 왜 나를 놔두고, 소개팅을 할 수 있어?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누나를 끌고 나올 수 없는데…….”
씁쓸한 짝사랑에 발길을 돌아서는 나를 붙잡듯이 정우가 내 명치에 우정의 주먹을 날렸다.
“윽!”
“이래서 잘생긴 놈은 짝사랑해도 재수 없게 해! 짝사랑의 대명사가 뭐야! 찌찔함과 간절함이야. 이것저것 다 재고하면, 그게 짝사랑이야!”
가격당한 명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정우에게 소리쳤다.
“때려도, 급소! 아~ 진짜. 네 짝사랑 개똥철학을 들을 생각 없으니까. 가서 일이나 하셔. 네가 보태지 않아도, 천불이 나니까.”
“이 버터 새끼야!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라고. 정면 승부가 안되면 뒷문으로 들어가면 되지.”
내 목덜미를 잡은 정우가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으로 끌고 갔다.
정우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직원 유니폼을 입고, 소개팅 중인 누나를 염탐할 수 있었다.
내가 와있는 줄 모르고, 여신의 광채를 뽐내며 태평하게 앉아 있는 누나가 많이 야속했다.
‘우리 누나를 보고 감히, 실실 쪼개고 있어! 제비처럼 생긴 주제에 어딜 넘봐! 누나 절대 웃지 마.’
죽일 듯이 째려보자, 기척 없이 다가온 정우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놀려댔다.
“백날 여기서 레이저 쏴 봤자, 안구 건조증만 생긴다. 저기…누님….”
실실 쪼개는 놈의 면상을 보고 있잖니, 천불이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내 팔뚝을 때리는 정우의 호들갑에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저 실실 쪼개놈한테 왜! 파스타를 덜어주는데. 어떻게 그래! 누나.’
밀려오는 질투심과 배신감에 다리에 힘이 빠져 바람 빠진 풍선처럼 휘청거렸다.
쨍그랑!
이목 집중된 내 얼굴을 쟁반으로 가린 정우가 주방 쪽으로 끌고 나갔다.
망연자실한 나를 놔두고 정우는 뒤처리 수습하러, 레스토랑 홀로 다시 들어갔다.
언젠가는 누나도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갖가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려봤지만.
돌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깨달았다.
바닥에 달라붙은 파스타를 떼어내듯, 정우가 내 멱살을 잡고 응원의 욕지거리를 날렸다.
“야! 버터 새끼야. 누가 정탐하라고 했지, 정실 줄 놓으라고 했어. 너 이대로 있다간 누나 뺏긴다? 야 XXX~ XXX 아”
헛웃음이 나왔다.
멱살 잡은 정우의 손을 잡아떼면서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무슨 수로?”
“내가 진짜, 내 입으로 이런 말까지 꼭 하게 만들고 싶냐! 너…잘… 으흠. 잘 생겼잖아.”
“눈물 나게 도움돼서 고맙다.”
농담할 기분도 아니고, 끔찍한 장면만 되새김질하는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도망치듯 뒷문으로 나와버렸다.
***
주머니 속에서 꺼낸 핸드폰의 통화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점심 같이 먹기로 해놓고, 갑자기 취소했잖아. 그 핑계로 통화만 한다는데, 설마 누나가 집 나가겠어. 그래. 통화만.”
누나가 잘 보이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세게 눌렀다.
핸드폰 연결음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 누나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야? 밥 먹었어? 누나 회사 앞인데, 잠깐 볼 수 있어? 연결음 너머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핸드폰 너머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
[지국장!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 할 말 없으면 끊는다.]
“밥 먹었어?”
백지장처럼 하얘진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말이 고작, 밥 먹었어? 라니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
[점심 약속 생겼다고 깨톡 보내잖아. 설마? 아직도 내 도시락 기다린다고, 밥도 안 먹은 거야?]
“당연히 안 먹었지. 누나도 없는데.”
[네가 얘야! 알아서 챙겨 먹고.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있어. 누구랑 약속인데?”
[하! 내가 누구랑 만나는지, 너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 할 말 없는 것 같은데, 끊는다.]
넌지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말해 줄 필요가 없다는 누나의 말에 울컥해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렸다.
“음~ 요즘은 거래처 사람이랑 크림 파스타도 먹는구나! 그것도 소개팅하기 좋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누구는 도시락도 없이, 온 졸일 굶었는데.”
다급하게 화장실에서 나온 누나가 레스토랑 홀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잠깐! 내가 바람을 피우다가 걸린 사람처럼, 국장을 찾긴 왜 찾아? 애인도 아니고. 아는 동생인데. 만사 귀찮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누나의 혼잣말이 암담해 서둘러 끊었다.
“애인까지 바라지도 않는데, 고작 아는 동생은… 아프다. 누나.”
피곤한 표정을 갈무리한 누나가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에 나도 발길을 돌렸다.
***
“맛있게 식사하셨어요?”
“네. 임수 씨, 덕분에 푸짐하고 맛있는 점심 식사였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취적인 임수 씨라서 떨리네요.”
임수가 사무적인 말투로 너스레를 떠는 재현에게 선을 그었다.
“경험상 에둘러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편이 좋더라고요. 특히 감정적인 문제는요.”
싱글거리는 재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렇겠죠. 말씀하세요.”
“제 나이는 알고 계시죠.”
“네. 저도 임수 씨, 못지않게 37살입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나이 이야기는 건너뛰죠. 하하하.”
“네. 그럼 다른 문제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재현 씨.”
임수의 완강한 의사 표현에 재현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임수 씨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군요. 평범하게 생겨서 그러실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제 말씀을 오해하신 것 같은데, 재현 씨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에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제가 비혼주의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비혼주의자라도 연애는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외로운 것보다 귀찮은 연애가 더 싫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한 재현이 반박하듯 되물었다.
“연애가 귀찮을 수 있나요? 물론 저의 개인적인 호기심 차원이니까,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서 연애를 못 하는 가봅니다. 하하하.”
임수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상대를 위해서 시간을 내서, 나조차도 모르는 내 감정까지 설명하고 공유하는 자제가 피곤합니다. 한마디로 일보다 연애가 더 지쳐요.”
“지칠 수 있겠죠. 사람이니까. 그래도 연애는 case by case니까, 집중도 높은데 귀찮게 하지 않는 저랑 연애하시면 어떨까요?”
생글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재현을 보자, 임수는 지나간 사랑의 아픈 기억들이 떠올랐다.
{다른 여자처럼 애교가 있기를 해, 그렇다고 돈이 많아! 불쌍해서 사귀어줬더니! 침대에선 고고한 척 존나 뻗대고! 불감증 주제에. 너는 여자도 아니야!}
악몽 같았던 연애의 기억들이 어지럽게 올라와서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재현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별하는 것조차 지겹습니다. 혼자가 제일 편하고 좋습니다.”
“… 그러시구나.”
단칼에 거절당한 재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커피잔으로 옮겼다.
임수의 철벽에 재현은 파스텔 추억에 검은색 물감을 덧칠하는 것 같아 착잡했다.
‘그날 이후로, 나도 꼬맹이도 변했는데. 미련스럽게 나만 추억하네. 많이 컸다. 꼬맹아.’
같은 장소에 다른 시공간에 있는 괴리감에 임수가 서둘러 이별을 고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제가 나이가 많아서 차인 걸로 부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임수를 보고 다급하게 고해성사를 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임수 씨, 저도 파혼도 당해봤습니다. 잘난 거, 하나도 없다고요.”
“네.”
“저에 대해서 확실히 아시고 가셔야 공평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담백하다 못해 영혼 없는 임수의 반응에 재현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그 반응이 다예요?”
재현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임수는 멀뚱멀뚱 쳐다볼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먼저 나가는 임수 따라서 일어선 재현은 아쉬운 마음으로 레스토랑 계산대로 향했다.
신용카드를 내미는 재현에게 매니저가 들뜬 목소리로 감상평을 읊어댔다.
“좋으시겠어요. 이런 경우는 매니저 되고 나서 진짜~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고객님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으면, 저 숙녀분께서 미리 계산하고 나가셨습니까! 센스 있게. 부럽습니다.”
재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매니저에게 재차 확인했다.
“네? 언제요?”
매니저는 달콤한 로맨스 영화라도 관람한 표정으로 답했다.
“화장실 가실 때, 이미 계산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성공적인 소개팅, 축하드려요!”
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김칫국 잘 마셨습니다.”
재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보지만, 임수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집에서 기다려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심란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누나가 오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속이 안 좋은지, 명치를 누르고 걸어오는 누나가 보였다.
좀처럼 내려가지 체기에 누나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또 체했네. 또 손 따야겠다.”
성큼성큼 걸어가 다짜고짜 누나의 손을 잡고 어깨부터 손목까지 쓸어내렸다.
“혼자 먹으니까 좋았어? 아주~맛있게 먹었나 봐.”
“그래. 아주 맛있었다. 어쩔 건데?”
“얼마나 맛있게 드셨으면, 체했을까?”
“뭐 하냐?”
뒷주머니에 넣어둔 실을 누나의 엄지손가락에 둘둘 말고 툴툴거렸다.
“뭐 하긴! 내 속도 모르는 야속한 누나의 속을 달래려고 하지. 두 번만 맛있게 먹으면, 응급실 가서 위내시경 하겠다. 저 여자 미쳤나 봐. 치마가~ 빨리 봐봐.”
내 호들갑을 원천 봉쇄하듯 누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찔러.”
“싫어! 그냥 저기 좀 봐주면 안 돼?”
“섹시한 남자도 아닌데, 내가 봐서 뭐 하게. 그냥 바늘 줘. 내 손 내가 따야지.”
“남자는 나 하나로 만족해! 누나.”
욱하는 마음에 채혈기로 누나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찔렀다.
“앗~씁음.”
“얼마나 속이 부대꼈으면, 내 속처럼 피가 검다. 검어! 얼마나 잘 먹고 잘겠다고. 남들이랑 밥을 먹어.”
“아프다고! 점심 약속 취소했다고, 감정이 실렸는데.”
“감정은 무슨~. 걱정돼서 그렇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나랑만 밥 먹자고! 누나.”
아픈지 미간을 구긴 누나의 엄지손가락을 내 입에 넣고 빨았다.
“읏…으응.”
순간 튀어나온 신음 소리에 화들짝 놀란 누나가 내 입 속에 갇힌 엄지손가락을 빼려고 하자.
강아지가 장난스럽게 깨물 듯 내 치아에 누나의 엄지손가락을 가둬놓고, 혀로 휘어 감아 지그시 눌렀다.
“누나가 뭐 한다고? 소개팅?”
등줄기에 식은땀과 심장이 타는 듯한 초조함에 가르디 레스토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막상 레스토랑 앞까지 쫓아왔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자격으로 누나를 끌고 나오겠다고. 애인도 아니고. 남동생이라고 우겨서? 그것도 아니면 한집에 사는 집주인과 세입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소개팅 남자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누나에겐 그냥 남이었다.
짝사랑의 비애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정우의 타박에 정신을 차렸다.
“너 뭐하냐? 안 들어가고 고사 지냈냐?”
“무슨 자격으로? 내가 뭐라고.”
“버터 새끼, 왜 이래? 날도 덥지 않은데, 흐물거리네. 자격 좋아하시네.”
“들어가서 왜 나를 놔두고, 소개팅을 할 수 있어?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누나를 끌고 나올 수 없는데…….”
씁쓸한 짝사랑에 발길을 돌아서는 나를 붙잡듯이 정우가 내 명치에 우정의 주먹을 날렸다.
“윽!”
“이래서 잘생긴 놈은 짝사랑해도 재수 없게 해! 짝사랑의 대명사가 뭐야! 찌찔함과 간절함이야. 이것저것 다 재고하면, 그게 짝사랑이야!”
가격당한 명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정우에게 소리쳤다.
“때려도, 급소! 아~ 진짜. 네 짝사랑 개똥철학을 들을 생각 없으니까. 가서 일이나 하셔. 네가 보태지 않아도, 천불이 나니까.”
“이 버터 새끼야!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라고. 정면 승부가 안되면 뒷문으로 들어가면 되지.”
내 목덜미를 잡은 정우가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으로 끌고 갔다.
정우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직원 유니폼을 입고, 소개팅 중인 누나를 염탐할 수 있었다.
내가 와있는 줄 모르고, 여신의 광채를 뽐내며 태평하게 앉아 있는 누나가 많이 야속했다.
‘우리 누나를 보고 감히, 실실 쪼개고 있어! 제비처럼 생긴 주제에 어딜 넘봐! 누나 절대 웃지 마.’
죽일 듯이 째려보자, 기척 없이 다가온 정우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놀려댔다.
“백날 여기서 레이저 쏴 봤자, 안구 건조증만 생긴다. 저기…누님….”
실실 쪼개는 놈의 면상을 보고 있잖니, 천불이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내 팔뚝을 때리는 정우의 호들갑에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저 실실 쪼개놈한테 왜! 파스타를 덜어주는데. 어떻게 그래! 누나.’
밀려오는 질투심과 배신감에 다리에 힘이 빠져 바람 빠진 풍선처럼 휘청거렸다.
쨍그랑!
이목 집중된 내 얼굴을 쟁반으로 가린 정우가 주방 쪽으로 끌고 나갔다.
망연자실한 나를 놔두고 정우는 뒤처리 수습하러, 레스토랑 홀로 다시 들어갔다.
언젠가는 누나도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갖가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려봤지만.
돌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깨달았다.
바닥에 달라붙은 파스타를 떼어내듯, 정우가 내 멱살을 잡고 응원의 욕지거리를 날렸다.
“야! 버터 새끼야. 누가 정탐하라고 했지, 정실 줄 놓으라고 했어. 너 이대로 있다간 누나 뺏긴다? 야 XXX~ XXX 아”
헛웃음이 나왔다.
멱살 잡은 정우의 손을 잡아떼면서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무슨 수로?”
“내가 진짜, 내 입으로 이런 말까지 꼭 하게 만들고 싶냐! 너…잘… 으흠. 잘 생겼잖아.”
“눈물 나게 도움돼서 고맙다.”
농담할 기분도 아니고, 끔찍한 장면만 되새김질하는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도망치듯 뒷문으로 나와버렸다.
***
주머니 속에서 꺼낸 핸드폰의 통화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점심 같이 먹기로 해놓고, 갑자기 취소했잖아. 그 핑계로 통화만 한다는데, 설마 누나가 집 나가겠어. 그래. 통화만.”
누나가 잘 보이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세게 눌렀다.
핸드폰 연결음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 누나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야? 밥 먹었어? 누나 회사 앞인데, 잠깐 볼 수 있어? 연결음 너머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핸드폰 너머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
[지국장!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 할 말 없으면 끊는다.]
“밥 먹었어?”
백지장처럼 하얘진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말이 고작, 밥 먹었어? 라니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
[점심 약속 생겼다고 깨톡 보내잖아. 설마? 아직도 내 도시락 기다린다고, 밥도 안 먹은 거야?]
“당연히 안 먹었지. 누나도 없는데.”
[네가 얘야! 알아서 챙겨 먹고.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있어. 누구랑 약속인데?”
[하! 내가 누구랑 만나는지, 너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 할 말 없는 것 같은데, 끊는다.]
넌지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말해 줄 필요가 없다는 누나의 말에 울컥해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렸다.
“음~ 요즘은 거래처 사람이랑 크림 파스타도 먹는구나! 그것도 소개팅하기 좋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누구는 도시락도 없이, 온 졸일 굶었는데.”
다급하게 화장실에서 나온 누나가 레스토랑 홀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잠깐! 내가 바람을 피우다가 걸린 사람처럼, 국장을 찾긴 왜 찾아? 애인도 아니고. 아는 동생인데. 만사 귀찮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누나의 혼잣말이 암담해 서둘러 끊었다.
“애인까지 바라지도 않는데, 고작 아는 동생은… 아프다. 누나.”
피곤한 표정을 갈무리한 누나가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에 나도 발길을 돌렸다.
***
“맛있게 식사하셨어요?”
“네. 임수 씨, 덕분에 푸짐하고 맛있는 점심 식사였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취적인 임수 씨라서 떨리네요.”
임수가 사무적인 말투로 너스레를 떠는 재현에게 선을 그었다.
“경험상 에둘러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편이 좋더라고요. 특히 감정적인 문제는요.”
싱글거리는 재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렇겠죠. 말씀하세요.”
“제 나이는 알고 계시죠.”
“네. 저도 임수 씨, 못지않게 37살입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나이 이야기는 건너뛰죠. 하하하.”
“네. 그럼 다른 문제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재현 씨.”
임수의 완강한 의사 표현에 재현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임수 씨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군요. 평범하게 생겨서 그러실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제 말씀을 오해하신 것 같은데, 재현 씨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에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제가 비혼주의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비혼주의자라도 연애는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외로운 것보다 귀찮은 연애가 더 싫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한 재현이 반박하듯 되물었다.
“연애가 귀찮을 수 있나요? 물론 저의 개인적인 호기심 차원이니까,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서 연애를 못 하는 가봅니다. 하하하.”
임수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상대를 위해서 시간을 내서, 나조차도 모르는 내 감정까지 설명하고 공유하는 자제가 피곤합니다. 한마디로 일보다 연애가 더 지쳐요.”
“지칠 수 있겠죠. 사람이니까. 그래도 연애는 case by case니까, 집중도 높은데 귀찮게 하지 않는 저랑 연애하시면 어떨까요?”
생글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재현을 보자, 임수는 지나간 사랑의 아픈 기억들이 떠올랐다.
{다른 여자처럼 애교가 있기를 해, 그렇다고 돈이 많아! 불쌍해서 사귀어줬더니! 침대에선 고고한 척 존나 뻗대고! 불감증 주제에. 너는 여자도 아니야!}
악몽 같았던 연애의 기억들이 어지럽게 올라와서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재현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별하는 것조차 지겹습니다. 혼자가 제일 편하고 좋습니다.”
“… 그러시구나.”
단칼에 거절당한 재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커피잔으로 옮겼다.
임수의 철벽에 재현은 파스텔 추억에 검은색 물감을 덧칠하는 것 같아 착잡했다.
‘그날 이후로, 나도 꼬맹이도 변했는데. 미련스럽게 나만 추억하네. 많이 컸다. 꼬맹아.’
같은 장소에 다른 시공간에 있는 괴리감에 임수가 서둘러 이별을 고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제가 나이가 많아서 차인 걸로 부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임수를 보고 다급하게 고해성사를 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임수 씨, 저도 파혼도 당해봤습니다. 잘난 거, 하나도 없다고요.”
“네.”
“저에 대해서 확실히 아시고 가셔야 공평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담백하다 못해 영혼 없는 임수의 반응에 재현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그 반응이 다예요?”
재현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임수는 멀뚱멀뚱 쳐다볼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먼저 나가는 임수 따라서 일어선 재현은 아쉬운 마음으로 레스토랑 계산대로 향했다.
신용카드를 내미는 재현에게 매니저가 들뜬 목소리로 감상평을 읊어댔다.
“좋으시겠어요. 이런 경우는 매니저 되고 나서 진짜~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고객님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으면, 저 숙녀분께서 미리 계산하고 나가셨습니까! 센스 있게. 부럽습니다.”
재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매니저에게 재차 확인했다.
“네? 언제요?”
매니저는 달콤한 로맨스 영화라도 관람한 표정으로 답했다.
“화장실 가실 때, 이미 계산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성공적인 소개팅, 축하드려요!”
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김칫국 잘 마셨습니다.”
재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보지만, 임수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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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기다려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심란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누나가 오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속이 안 좋은지, 명치를 누르고 걸어오는 누나가 보였다.
좀처럼 내려가지 체기에 누나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또 체했네. 또 손 따야겠다.”
성큼성큼 걸어가 다짜고짜 누나의 손을 잡고 어깨부터 손목까지 쓸어내렸다.
“혼자 먹으니까 좋았어? 아주~맛있게 먹었나 봐.”
“그래. 아주 맛있었다. 어쩔 건데?”
“얼마나 맛있게 드셨으면, 체했을까?”
“뭐 하냐?”
뒷주머니에 넣어둔 실을 누나의 엄지손가락에 둘둘 말고 툴툴거렸다.
“뭐 하긴! 내 속도 모르는 야속한 누나의 속을 달래려고 하지. 두 번만 맛있게 먹으면, 응급실 가서 위내시경 하겠다. 저 여자 미쳤나 봐. 치마가~ 빨리 봐봐.”
내 호들갑을 원천 봉쇄하듯 누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냥 찔러.”
“싫어! 그냥 저기 좀 봐주면 안 돼?”
“섹시한 남자도 아닌데, 내가 봐서 뭐 하게. 그냥 바늘 줘. 내 손 내가 따야지.”
“남자는 나 하나로 만족해! 누나.”
욱하는 마음에 채혈기로 누나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찔렀다.
“앗~씁음.”
“얼마나 속이 부대꼈으면, 내 속처럼 피가 검다. 검어! 얼마나 잘 먹고 잘겠다고. 남들이랑 밥을 먹어.”
“아프다고! 점심 약속 취소했다고, 감정이 실렸는데.”
“감정은 무슨~. 걱정돼서 그렇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나랑만 밥 먹자고! 누나.”
아픈지 미간을 구긴 누나의 엄지손가락을 내 입에 넣고 빨았다.
“읏…으응.”
순간 튀어나온 신음 소리에 화들짝 놀란 누나가 내 입 속에 갇힌 엄지손가락을 빼려고 하자.
강아지가 장난스럽게 깨물 듯 내 치아에 누나의 엄지손가락을 가둬놓고, 혀로 휘어 감아 지그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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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댕댕이가 아니라 늑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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