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감언이설을 팩트로 만들면 홍 대리님, 저에게 오실래요?
조회 : 1,569 추천 : 0 글자수 : 4,657 자 2022-10-10
“네. 본부장님.”
아메리카노로 입안을 적신 재현 본부장이 떠보듯 물었다.
“홍 대리님 보시기엔 이상한 점이 없나요?”
“매출액 감소로 반품된 제품들이 폐기 처분하는 과정에서 증발했습니다. 내부 감사에서 지적했지만, 무슨 이유지 흐지부지 넘어갔습니다.”
재현 본부장은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서류 갖고 장난을 쳤다! 그럼, 전 본부장님은 꼬리일까요? 머리일까요? 홍 대리님 보시기엔 어느 쪽일 것 같습니까?”
재현 본부장의 ‘답장너’가 되는 순간, 사내 정치에 휘둘린 생각이 없는 임수는 철벽을 쳤다.
“글쎄요? 일개 직원이 뭘 알겠습니까. 왕따당하는 직원보다, 사내 정보를 잘 알고 있는 김 과장과 이야기하시는 편이 여러모로, 도움 되시길 겁니다.”
“잘됐네요. 그럼 왕따끼리 덜 외롭게 잘해보는 의미로, 점심 식사 어때요?”
“다이어트 중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본부장님이 말씀하신 동맹은 저와 같은 일개 직원에겐 충성 맹세를 강요하는 감언이설에 불과합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임수가 재현 본부장에게 목례하고 뒤돌아 걸어갔다.
재현 본부장은 나가는 임수의 등 뒤로 불쑥 고백했다.
“진심으로 물어보겠습니다. 홍임수 대리님, 충성심을 가장한 홍임수 씨의 마음을 저에게 주실 의향은 있습니까?”
재현 본부장의 남다른 언어 구사력에 당황한 임수는 문고릴 잡고 멈칫했다.
‘월급쟁이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인데. 사랑놀이라도 해보자는 거야?’
임수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본부장님의 애사심이 남달라 회사에 충성할 수 있어도. 저는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일개 직원이라 충성 맹세는 어불성설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현 본부장이 임수 곁으로 걸어오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음~ 홍 대리님은 충성으로 들었을지 몰라도, 저는 연애 이야기했는데요. 그럼, 감언이설을 팩트로 만들면! 그때, 홍 대리님이 저에게 오실래요?”
재현 본부장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차마 뒤돌아볼 엄두가 안 나는 임수에게 훅 들어가듯, 결재한 서류를 내밀었다.
“대답은 천천히 듣겠습니다. 박 부장님께 전해 주세요. 지시 상황은 메모지에 적어뒀습니다. 나가보셔도 됩니다. 홍 대리님.”
민망함에 붉게 물든 임수는 급한 마음에 문고리를 잡고 돌려보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 낑낑대는 임수의 귓가에 재현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 대리님, 밀지 마시고, 문고리 잡고, 안으로 당기세요. 저도 한 달 내내, 헤맵니다. 저를 밀지 마시고, 당겨주세요. 이렇게요.”
문을 열어준 본부장에게 인사도 없이, 도망치듯 박차고 나왔다.
본부장실 앞에 넋을 놓고 있는 임수가 걱정스러운 윤 비서가 조용히 다가왔다.
“큰 소리는 안 났는데, 괜찮으세요? 홍 대리님.”
“긴장했나 봐요. 결재받기 힘드네요. 아메리카노 잘 마셨습니다. 그만 가볼게요.”
***
운전대를 잡은 영실은 장 집사의 검정 세단을 미행하듯 거리를 두고 이탈리아 레스토랑 앞에 주차했다.
검은색 세단에서 내린 장 집사가 영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가르다 레스토랑에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운전대 잡은 영실에게 짜증 내듯 구시렁거렸다.
“하필이면, 또 여기야! 올 때마다 기분이 더럽네.”
싸늘한 내 목소리에 겁먹은 영실이 조용히 내렸다.
***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나와 영실은 예약석에 앉았다.
건너편에 사람을 기다리는 장 집사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직원이 내려놓고 간 메뉴판을 힐끔거렸다.
직원의 인기척에 메뉴판의 각 장을 넘기며 음식을 주문했다.
“페이지마다 1번으로 주세요.”
당황한 직원이 주문을 재차 확인했다.
“고객님 두 분께서 드시기에는 양이 너무 많습니다.”
내 눈치를 보던 영실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맞장구쳤다.
“그렇죠. 너무 많죠. 사람 달랑 2명인데.”
“그럼, 스테이크 두 접시에 파스타 좋을 것 같습니다. 부족하시면 샐러드 추가하시는 것도,”
“다 주세요. 제 동생이 워~낙 먹성이 좋아서, 괜찮습니다. 그렇지, 영실아!”
“하하하.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고 하니, 다 주세요. 포장되죠.”
“아~네. 주문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식사 하세요.”
울상이 된 영실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메뉴판을 도로 가져갔다.
장 집사 쪽을 주시하던 나는 정중하게 인사는 남자를 곁눈질했다.
‘참 빨리도 온다. 시계야? 정시에 딱 맞춰서 오게. 마음에 안 들어.’
피클 접시를 보자 저놈에게 덜어준 누나의 파스타가 떠올라 신경질적으로 영실에게 밀어버렸다.
“…형, 왜 그래? 무섭게.”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많이 먹어.”
불타오르는 질투심에 물 한 모금도 넘길 수 없었다. 사냥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장 집사 쪽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영실이 궁금했는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진짜, 형 왜 그래? 뭐가 있어? 연예인이라도 봤어? 왜 그래?”
“쉿! 잘 봐 둬, 저 사람.”
긴장한 목소리로 고개 숙인 영실이 따지듯이 속삭였다.
“다짜고짜, 무슨 사람을 보라고. 설명해야지.”
온통 장 집사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남자의 입술을 읽어 내려갔다.
***
장 집사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장지욱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최재현 본부장입니다.”
가벼운 인사를 건넨 장 집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재현 본부장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내 조건은 이거 하나입니다.”
건네받은 서류를 훑어보던 재현 본부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희 H 푸드에 투자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약속대로 인턴으로 채용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살펴보던 서류를 한 장을 펼쳐 보인 재현 본부장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외람되지만, 어르신, 감히 여쭤보겠습니다.”
“편히 말씀하세요. 재현 본부장님.”
“S대 졸업하고, 벤처 창업으로 상까지 받았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굳이 인턴으로. 그것도 H 식품으로 취직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은 장 집사는 매서운 눈매로 기선을 제압하듯 말했다.
“자네, 아직 젊어. 하긴, 나도 그 나이 때는 그랬지. 세상 중심에 내가 있다는 착각!”
장 집사의 냉담한 경고에 재현 본부장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주제넘은 호기심이었습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닐세. 속 좁게 늙은이가 역정을 냈습니다. 오히려 내가 민망하고, 미안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반말과 존댓말로 제압하는 장 집사의 경고에 재현 본부장은 머리를 숙였다.
“어르신 충고 감사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러시게. 나는 마시던 차나 마시고 가겠네.”
재현 본부장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현 본부장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장 집사가 본심을 드러냈다.
“적이면, 골치 아프게 생겼는데.”
장 집사가 착잡한 표정으로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도련님,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건너편에서 통화하던 내가 장 집사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재현 본부장은 제가 온 걸 알 겁니다.”
미심쩍은 장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미행도 없었고. 그쪽 사장도 부도나기 직전이라, 우릴 뒷조사할 여력이 없을 텐데요.”
레스토랑의 천장을 보며 대답했다.
“여기 매니저와 최재현 본부장이 안부 인사 주고받던데요. 계산대의 모니터에서 우리를 봤을 겁니다.”
배부른 강아지가 배들 뒤집듯 먹다 지친 영실은 의자 등받이 기대어 징징거렸다.
“몰라! 이젠, 정말 나도 못 먹어! 형이 나 죽인다고 해도, 더는 못 먹어. 안 먹어! 배 째! 배 째라고!”
투덜거리는 영실이 귀여워 장난스럽게 엄포를 놓았다.
“그게 소원이라면, 내 동생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가로, 아니면 세로 배 째 줘?”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형도~참. 하하하.”
영실의 놀리는 맛에 답장너로 물었다.
“그 남자가 멋있어? 내가 더 멋있어?”
“형! 내가 정말 잘못했어. 살려주세요. 할아버지 우리 형 왜 그래요?”
영실의 보란 듯이 입에 침을 바른 장 비사가 너그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당연히! 우리 도련님이 훨씬 ~더 멋있고. 잘생겼죠. 완벽 그 자체.”
장 집사의 눈짓에 영실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쏟아냈다.
“그렇죠. 장 집사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멋있지. 돈도 많지. 걸어 다니는 명품 그 자체․… 또 뭐더라. 아무튼 킹! 왕짱!”
“남들도 다~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내가 봐도 나! 정말 괜찮은 놈이지. 승산 있어. 영실아 이 정도면, 우리 누나도 넘어오겠지.”
할 말 잃은 영실은 ‘왜 저딴 식으로 나를 키워냐고’ 장 집사에게 눈으로 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한테는 어디 내놔도 모자란 형이라는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스치듯 심란함을 숨기는 장 집사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호랑인데. 호랑이 굴을 접수해야죠. 여우가 계속 왕 노릇 하게 놔둘 수 없잖아요.”
“맞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호랑이죠.”
장 집사와 나의 오글거리는 쿵짝에 영실은 진저리 쳤다.
“울렁거려!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꼰대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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