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미쳐버렸다
조회 : 1,247 추천 : 3 글자수 : 6,607 자 2022-09-14
[프롤로그]
그는 미쳤다.
나도 미쳤지만.
그는 더욱이 미쳤다.
***
드래곤이 마침내 쓰러졌다.
거대한 몸뚱아리가 천천히 땅을 향해 기울더니
엄청난 양의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먼지가 안개가 되어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와아!”
누군가의 외마디에서 시작된 함성은 점차 광장 전체를 메꾸었다.
“메시아다!”
“신의 사자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신을 찾으며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바샤님이 우리를 구원했다!!!”
“메르헨스타인 만세!!!”
“대마법사가 광룡을 물리쳤다!!!!!!”
누군가는 용을 물리친 바샤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를 해댔다.
“빌로나 만세!!!!”
“빌로나의 영광은 계속되리!!”
또 누군가는 빌로나 제국의 영광을 부르짖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바샤는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로구나.’
먼지 안개로 가득한 세상 속.
그와 바샤만이 존재하는 듯 했다.
“하에온. 너로구나.”
하에온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그의 미소가 이제는 역겹다.
오랫동안 시간을 거스르고 거슬러.
몇 번이고 사랑에 빠지게 했던 그의 미소가,
이제는 구역질이 올라온다.
“하에온.
네가. 반복된 회귀의 원인이로구나.”
바샤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을 담아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 아.”
아쉬운 듯 그가 말을 늘어트린다.
“벌써 알아버리셨네요.”
저 목소리가 감미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역시 바샤님이라면,
제 예상보다 먼저 알아차리실 줄 알았어요.”
그의 부드러운 태도가 나를 존중한다고 착각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다.
몸을 갈기갈기 찢고 싶다.
심장을 도려내 버리고 싶다.
그렇게 원하던.
그렇게나 저주하던.
이백여 년의 세월 동안 미친 듯이 원망했던.
나를 이세계에 끌어들이고.
나에게 무한의 굴레라는 저주를 내린 자.
“하에온.
네가 어떻게-”
따뜻하고 진득한 붉은 액체가
그녀의 입에서 울컥하고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피를 받아냈다.
조금 전 충격이 내상을 만들었나보다.
“아하하하하.”
붉은 색을 보고 미친 소처럼.
갑자기 바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도 않아.
내가 평생 저주해온 너를 위해.
너를 살릴겠다고.
갈기 찢어발기고 싶은 너 때문에.
내가 여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가.
그의 죽음에 가장 마음이 아파했던 것도 나였다.
매 순간 환각과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었다.
지난 생에서
왜 그를 죽이고 그렇게나 괴로워했을까.
모든 과정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그를 죽인건 내 상상이지 않았을까.
내가 이세계를 만들었다는 것도 다 상상이지 않을까.
그는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저주를 내린 걸까.’
“왜!!!!
왜 그랬어!!!”
목이 갈라지며 외친 목소리는 절규가 되어버렸다.
“그래야.”
그가 한발짝 다가온다.
“당신을 온전히 가질 수 있으니깐.”
그의 몸을 따라 흘러나온 짙은 검은 마력이
족쇄를 채우듯 바샤의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는다.
“당신을 죽이지 않고.”
천천히 타고 올라온 검은 연기는 그녀의 팔을 묶어버렸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고.”
그의 손이 부드럽게 바샤의 얼굴을 매만졌다.
“당신이 미쳐버려야.
온전한 나만의 신으로 만들 수 있으니깐.”
“미쳤어. 하에온.
넌.
미친 거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
하에온이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마주한다.
그의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광기로 일렁였다.
“사랑해. 바샤.”
------------------------------------------------
아무리 명작이더라도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질려버린다.
하물며 자신이 쓴 버러지 같은 소설이라면 구역질이 날 정도이다.
바샤는 자신이 적은 소설에 빙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갇혀버렸다.
루카력 1816년.
바샤는 살인 청부 조직인 데이모스의 지하 감옥에서 자신이 빙의했음을 깨달았다.
첫 번째 바샤의 삶은 완벽에 가까웠다.
자신이 적은 소설에 빙의한 바샤는
어느 빙의물과 같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목표를 쟁취했다.
자신이 적은 소설이었으니 그 어느 빙의자보다 쉬운 일이었다.
소설의 서사를 비틀면서 바샤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주인공들의 대업을 이루게 해주었다.
바샤를 얽매이게 한 데이모스라는 조직을 스스로 해체하고,
주인공을 도와 메르헨스타인과 황가에 대한 복수를 이룰 수 있도록 조력했다.
그녀에게는 정말 사랑하는 연인도 있었다.
목숨이 달린 지옥 같은 상황들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사랑했었다.
그녀의 연인이 바샤보다 먼저 전쟁 속에서 생을 달리했긴 하지만,
바샤가 이뤄낸 세계는 평화로웠고 평안했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웠다.
그의 죽음 후에 바샤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더 매달렸다.
모든 서사를 끝낸 후, 바샤는 먼저 떠난 그녀의 연인을 따라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1856년 7월 1일.
본능적으로 바샤는 자신이 살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바샤는 한적한 시골에서 여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바다가 잘 보이는 발코니에 앉아,
그녀의 친우인 황제 부부가 선사해 준 고귀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든 그녀의 손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지만, 자신의 생의 곧 마감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이세계를 설정한 작가의 직감이었다.
죽음의 이유가 전쟁으로 인한 자상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는지, 주인공 부부가 보낸 차 속 독 때문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바샤는 자신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지 궁금했다.
그녀는 이미 이 세계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삶에 대한 미련보다 기대감이 들었던 것 같다.
루카력 1856년 7월 1일. 바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샤가 눈을 다시 떴을 때, 20년 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빙의한 날이 아닌,
20년 전으로 돌아왔는지 이유는 몰랐다.
바샤는 빙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두 번째 바샤의 삶은 비참했다.
바샤는 소설의 서사를 비틀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적은 소설 속 순리대로, 메르헨스타인 가문의 오래전 잃어버린 딸이 되어 메르헨스타인 가문에 입적했다.
그녀는 소설 속 역할에 알맞게 사사건건 주인공인 로제타와 시몬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소설 속 최후처럼, 그녀와 메르헨스타인은 몰락했다.
바샤는 자신을 처치하러 온 주인공 일행에게서 도망갈 수 있었으나 순순히 붙잡혀주었다.
그녀는 단두대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지난 삶에서 군중들은 그녀를 생명의 마녀라 부르며 칭송했다.
지금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기도 하며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전의 삶에서 서로에게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던 주인공 일행은 이제 바샤를 악의 근원이라 불렀다.
이미 한번 겪은 죽음보다 끔찍한 것은 믿고 사랑했던 이들의 변화였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을 현실로 여겼던 것인지, 오래전부터 소설 속에 동화되었던 것인지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배반감에 몸서리쳐졌다.
“바샤 메르헨스타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요?”
지난 생에서 그녀의 친우였던 로제타가 바샤에게 묻는다.
“없어.”
바샤는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사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져 삶을 끝내고 싶었다.
짧게 말을 끝낸 바샤가 군중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군중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난 삶에서 그녀의 귀에 사랑한다고 속삭인 자신의 연인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걱정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슬퍼했던 눈빛이 아니었다.
그마저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허망해졌을 때 시퍼런 칼날이 목을 스쳐 지나갔다.
단두대에 목이 잘렸지만, 그녀의 의식은 끊기지 않았다.
처음 죽었던 날과 다른 느낌이었다. 목 아래로는 느낌이 없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사악한 마녀다!!!”
로제타와 시몬은 바샤가 마왕과 손을 잡은 죽음의 마녀라 공표하며 그녀의 머리를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했다.
10년 동안 바샤는 황성 지하의 장식장 속에서 숨만 쉬며 살아갔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장식품이자 대혁명의 전리품일 뿐이었다.
다시 루카력 1856년 7월 1일이 되어서야
바샤는 다시 20년 전 그날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세 번째 삶의 바샤는 모든 걸 버리고 떠났다.
주인공 일행과도 엮이지 않고 모든 소설 속 서사에서 손을 떼었다.
간절히 찾고 싶었던 연인의 소식마저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세속과 등을 지고 산속에 홀로 살아가며 마법을 연구했다.
길 잃은 모험가들을 돌보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로 내려가 약초를 팔며 소소한 일상을 보냈다.
숲속의 마녀라 불리며 소소한 행복한 찾아갈 무렵.
다시 1856년 7월 1일이 되었을 때. 1836년 7월 1일로 돌아왔다.
또 한 번의 회귀.
그건 저주였다.
네 번째 바샤는 세계의 모든 곳을 뒤졌다.
혹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있는지,
회귀에 대한 단서를 찾아 대륙을 넘나들었지만,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1856년 7월 1일. 바샤는 다시 1836년으로 돌아갔다.
다섯 번째 바샤는 신전에 들어갔다.
매일 매일 신의 제단 앞에서 제발 죽여 달라고, 왜 자신에게 이런 삶을 주는 것이냐고 눈물로 기도했다.
신은 그녀의 기도에 응하지 않았다.
케렌시아 신전과 빌로나 황가의 골이 깊어질 무렵,
그녀의 태생이 메르헨스타인이란 것을 여주인공인 로제타에게 들켜버렸다.
로제타는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 바샤를 함정에 빠트렸다.
바샤는 빌로나 황가의 선전포고를 위한 제물로 신전 앞 광장에서 화형당한 후, 화각장에 버려졌다.
일정한 기간마다 타오르는 불 속에서 한 줌의 뼈가 되어 하염없이 1856년이 되기를 빌었다.
여섯 번째.
신은 바샤를 놀려대듯 그제야 답을 내려주었다.
신의 신탁이 내려왔다.
100년만의 신탁은 온 대륙을 시끄럽게 울려대었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반복을 거듭하는 자여. 그대의 굴레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군중은 어지러운 세계를 구원할 용자가 나타날 것이라 해석했다.
신전은 옛 영광을 되찾으리라 기대하며 신도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황가는 반역을 꾀하는 거짓 신탁이라며 마법 가문과 마법사들을 앞세워 신전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바샤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잠시 희망을 품었기도 했었다.
황가는 결국 신전과 전쟁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지속된 황가와 신전의 전쟁은 모든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끝이 나버렸다.
그녀가 자그마하게 변화를 향해 품어온 희망은 세상의 파멸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일곱 번째 삶. 바샤는 미쳐버렸다.
허망함과 공허함이 드디어 그녀를 미치게 했다.
신을 원망하고 원망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누구든 굴레를 끊어줄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아니 그 굴레 자체를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여덟 번째 삶.
이번 생에도 저번 생에도 신탁은 내려왔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바샤는 길거리의 부랑자로, 골목길에 벽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이렇게 널브러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구둣발이 그녀 앞에서 한동안 멈춰 있던 것을 본 후에야 그가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샤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그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하에온이었다.
늘 그랬듯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의 머리카락은 달빛마저 삼킨 흑색이었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와 대비되는 그의 하얀 피부.
적당히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그의 근육질 몸매.
날카롭게 올라가 있는 눈매라 차가우면서 위험한 느낌을 주는 인상.
그는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인 시몬보다 더 매력적인 남자였다.
바샤는 처음 그를 보고, 자신이 이런 캐릭터를 만들었었나. 라고 되짚어 볼 만큼 그의 인상은 강렬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았다.
혼란한 시대를 잠재운 영웅.
데이모스의 왕이자, 라자루스 대공국의 왕.
잠시나마 그녀를 구원하기도, 그녀가 구원하기도 했던 남자.
첫 번째 삶의 그의 연인. 하에온.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며칠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탁이 떠올랐다.
‘굴레.’
‘굴레야.’
‘저자가 원인이야.’
‘저 남자를 죽여.’
‘신이 말한 굴레가 쟤야.’
바샤의 머릿속을 울려대는 미친 목소리들이 모두 그가 「굴레」라고 소리쳤다.
바샤는 이미 미쳐있었고, 지쳐있었다.
그 역시 지쳐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공격이나 방어의 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반복을 거듭하는 자여. 그대의 굴레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
그가 입을 열었다.
바샤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 남자를 죽여. 그래야 이 모든 게 끝나!’
‘죽여!!’
‘목을 비틀어.’
‘죽여야 끝나.’
그녀의 미친 자아는 그를 죽여야지만 이 저주가 끝난다고 반복해서 속삭여 왔다.
바샤는 속삭임에 못 이긴 듯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첫 번째 삶처럼 따스하지도, 두 번째 삶처럼 차갑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바샤는 천천히 그의 목에 손을 가져다 데었다. 그녀의 비쩍 마른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에온은 순순히 바샤에게 몸을 내어주었다.
“바샤...”
그가 처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샤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그를 밀쳐내려고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하지만 밀려 넘어진 것은 바샤 였다.
하에온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와 그녀는 잠시 떨어져 서로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가 부유하고 높은 신분을 가졌음을 알려주는 검보라색 정장과 그의 허리춤에서 빛을 내고있는 그의 검. 그의 업적을 나타내주는 그의 가슴팍에 붙은 여러 훈장들.
바샤가 고개를 뒤로 젖혀야지 얼굴을 볼 수 있는 큰 키.
바샤가 마주한 하에온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를 향해 박혀 있었다.
그와 반대로 바샤의 몰골은 더러웠다.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더럽고 떡 진 머리카락. 빛을 잃은 혼탁한 눈동자. 원래의 빛을 잃어버린 남루한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말라비틀어져 앙상하게 보이는 뼈. 군데군데 파먹고 썩어 버린 살갗.
그의 얼굴이 점점 괴로운 듯 일그러져 갔다.
하에온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잠시 그녀를 향하다가 그대로 힘없이 바닥을 향해 내팽개쳐졌다.
쇳덩이와 돌이 부딪쳐 나는 파열음만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그의 눈빛이 그녀를 재촉했다.
바샤는 검과 그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굴레.」”
그가 뱉은 한 단어가 다시 바샤의 미친 자아를 자극했다.
‘죽여’
‘죽여야 해.’
‘죽여!!’
‘죽여!!!!’
‘죽여!!!!!!!!!!!!!’
허공에서 바샤만 들을 수 있도록 수백 명이 ‘죽여’라고 소리를 쳐대었다.
바샤는 검을 주워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어서 찔러.’
‘할 수 있잖아. 바샤.’
‘죽이면 돼.’
‘어차피 네가 만든 글자야. 다 허상이라고!’
‘네가 아니었으면 소설 속에 단 한 줄만 등장할 조연일 뿐이야.’
‘죽여!!’
그는 미쳤다.
나도 미쳤지만.
그는 더욱이 미쳤다.
***
드래곤이 마침내 쓰러졌다.
거대한 몸뚱아리가 천천히 땅을 향해 기울더니
엄청난 양의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먼지가 안개가 되어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와아!”
누군가의 외마디에서 시작된 함성은 점차 광장 전체를 메꾸었다.
“메시아다!”
“신의 사자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신을 찾으며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바샤님이 우리를 구원했다!!!”
“메르헨스타인 만세!!!”
“대마법사가 광룡을 물리쳤다!!!!!!”
누군가는 용을 물리친 바샤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를 해댔다.
“빌로나 만세!!!!”
“빌로나의 영광은 계속되리!!”
또 누군가는 빌로나 제국의 영광을 부르짖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바샤는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로구나.’
먼지 안개로 가득한 세상 속.
그와 바샤만이 존재하는 듯 했다.
“하에온. 너로구나.”
하에온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그의 미소가 이제는 역겹다.
오랫동안 시간을 거스르고 거슬러.
몇 번이고 사랑에 빠지게 했던 그의 미소가,
이제는 구역질이 올라온다.
“하에온.
네가. 반복된 회귀의 원인이로구나.”
바샤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을 담아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 아.”
아쉬운 듯 그가 말을 늘어트린다.
“벌써 알아버리셨네요.”
저 목소리가 감미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역시 바샤님이라면,
제 예상보다 먼저 알아차리실 줄 알았어요.”
그의 부드러운 태도가 나를 존중한다고 착각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다.
몸을 갈기갈기 찢고 싶다.
심장을 도려내 버리고 싶다.
그렇게 원하던.
그렇게나 저주하던.
이백여 년의 세월 동안 미친 듯이 원망했던.
나를 이세계에 끌어들이고.
나에게 무한의 굴레라는 저주를 내린 자.
“하에온.
네가 어떻게-”
따뜻하고 진득한 붉은 액체가
그녀의 입에서 울컥하고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피를 받아냈다.
조금 전 충격이 내상을 만들었나보다.
“아하하하하.”
붉은 색을 보고 미친 소처럼.
갑자기 바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지도 않아.
내가 평생 저주해온 너를 위해.
너를 살릴겠다고.
갈기 찢어발기고 싶은 너 때문에.
내가 여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가.
그의 죽음에 가장 마음이 아파했던 것도 나였다.
매 순간 환각과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었다.
지난 생에서
왜 그를 죽이고 그렇게나 괴로워했을까.
모든 과정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그를 죽인건 내 상상이지 않았을까.
내가 이세계를 만들었다는 것도 다 상상이지 않을까.
그는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저주를 내린 걸까.’
“왜!!!!
왜 그랬어!!!”
목이 갈라지며 외친 목소리는 절규가 되어버렸다.
“그래야.”
그가 한발짝 다가온다.
“당신을 온전히 가질 수 있으니깐.”
그의 몸을 따라 흘러나온 짙은 검은 마력이
족쇄를 채우듯 바샤의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는다.
“당신을 죽이지 않고.”
천천히 타고 올라온 검은 연기는 그녀의 팔을 묶어버렸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고.”
그의 손이 부드럽게 바샤의 얼굴을 매만졌다.
“당신이 미쳐버려야.
온전한 나만의 신으로 만들 수 있으니깐.”
“미쳤어. 하에온.
넌.
미친 거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
하에온이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마주한다.
그의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광기로 일렁였다.
“사랑해. 바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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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명작이더라도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질려버린다.
하물며 자신이 쓴 버러지 같은 소설이라면 구역질이 날 정도이다.
바샤는 자신이 적은 소설에 빙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갇혀버렸다.
루카력 1816년.
바샤는 살인 청부 조직인 데이모스의 지하 감옥에서 자신이 빙의했음을 깨달았다.
첫 번째 바샤의 삶은 완벽에 가까웠다.
자신이 적은 소설에 빙의한 바샤는
어느 빙의물과 같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목표를 쟁취했다.
자신이 적은 소설이었으니 그 어느 빙의자보다 쉬운 일이었다.
소설의 서사를 비틀면서 바샤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주인공들의 대업을 이루게 해주었다.
바샤를 얽매이게 한 데이모스라는 조직을 스스로 해체하고,
주인공을 도와 메르헨스타인과 황가에 대한 복수를 이룰 수 있도록 조력했다.
그녀에게는 정말 사랑하는 연인도 있었다.
목숨이 달린 지옥 같은 상황들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사랑했었다.
그녀의 연인이 바샤보다 먼저 전쟁 속에서 생을 달리했긴 하지만,
바샤가 이뤄낸 세계는 평화로웠고 평안했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웠다.
그의 죽음 후에 바샤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더 매달렸다.
모든 서사를 끝낸 후, 바샤는 먼저 떠난 그녀의 연인을 따라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1856년 7월 1일.
본능적으로 바샤는 자신이 살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바샤는 한적한 시골에서 여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바다가 잘 보이는 발코니에 앉아,
그녀의 친우인 황제 부부가 선사해 준 고귀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든 그녀의 손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지만, 자신의 생의 곧 마감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이세계를 설정한 작가의 직감이었다.
죽음의 이유가 전쟁으로 인한 자상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는지, 주인공 부부가 보낸 차 속 독 때문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바샤는 자신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지 궁금했다.
그녀는 이미 이 세계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삶에 대한 미련보다 기대감이 들었던 것 같다.
루카력 1856년 7월 1일. 바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샤가 눈을 다시 떴을 때, 20년 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빙의한 날이 아닌,
20년 전으로 돌아왔는지 이유는 몰랐다.
바샤는 빙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두 번째 바샤의 삶은 비참했다.
바샤는 소설의 서사를 비틀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적은 소설 속 순리대로, 메르헨스타인 가문의 오래전 잃어버린 딸이 되어 메르헨스타인 가문에 입적했다.
그녀는 소설 속 역할에 알맞게 사사건건 주인공인 로제타와 시몬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소설 속 최후처럼, 그녀와 메르헨스타인은 몰락했다.
바샤는 자신을 처치하러 온 주인공 일행에게서 도망갈 수 있었으나 순순히 붙잡혀주었다.
그녀는 단두대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지난 삶에서 군중들은 그녀를 생명의 마녀라 부르며 칭송했다.
지금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기도 하며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전의 삶에서 서로에게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던 주인공 일행은 이제 바샤를 악의 근원이라 불렀다.
이미 한번 겪은 죽음보다 끔찍한 것은 믿고 사랑했던 이들의 변화였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을 현실로 여겼던 것인지, 오래전부터 소설 속에 동화되었던 것인지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배반감에 몸서리쳐졌다.
“바샤 메르헨스타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요?”
지난 생에서 그녀의 친우였던 로제타가 바샤에게 묻는다.
“없어.”
바샤는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사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져 삶을 끝내고 싶었다.
짧게 말을 끝낸 바샤가 군중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군중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난 삶에서 그녀의 귀에 사랑한다고 속삭인 자신의 연인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걱정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슬퍼했던 눈빛이 아니었다.
그마저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허망해졌을 때 시퍼런 칼날이 목을 스쳐 지나갔다.
단두대에 목이 잘렸지만, 그녀의 의식은 끊기지 않았다.
처음 죽었던 날과 다른 느낌이었다. 목 아래로는 느낌이 없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사악한 마녀다!!!”
로제타와 시몬은 바샤가 마왕과 손을 잡은 죽음의 마녀라 공표하며 그녀의 머리를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했다.
10년 동안 바샤는 황성 지하의 장식장 속에서 숨만 쉬며 살아갔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장식품이자 대혁명의 전리품일 뿐이었다.
다시 루카력 1856년 7월 1일이 되어서야
바샤는 다시 20년 전 그날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세 번째 삶의 바샤는 모든 걸 버리고 떠났다.
주인공 일행과도 엮이지 않고 모든 소설 속 서사에서 손을 떼었다.
간절히 찾고 싶었던 연인의 소식마저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세속과 등을 지고 산속에 홀로 살아가며 마법을 연구했다.
길 잃은 모험가들을 돌보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로 내려가 약초를 팔며 소소한 일상을 보냈다.
숲속의 마녀라 불리며 소소한 행복한 찾아갈 무렵.
다시 1856년 7월 1일이 되었을 때. 1836년 7월 1일로 돌아왔다.
또 한 번의 회귀.
그건 저주였다.
네 번째 바샤는 세계의 모든 곳을 뒤졌다.
혹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있는지,
회귀에 대한 단서를 찾아 대륙을 넘나들었지만,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1856년 7월 1일. 바샤는 다시 1836년으로 돌아갔다.
다섯 번째 바샤는 신전에 들어갔다.
매일 매일 신의 제단 앞에서 제발 죽여 달라고, 왜 자신에게 이런 삶을 주는 것이냐고 눈물로 기도했다.
신은 그녀의 기도에 응하지 않았다.
케렌시아 신전과 빌로나 황가의 골이 깊어질 무렵,
그녀의 태생이 메르헨스타인이란 것을 여주인공인 로제타에게 들켜버렸다.
로제타는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 바샤를 함정에 빠트렸다.
바샤는 빌로나 황가의 선전포고를 위한 제물로 신전 앞 광장에서 화형당한 후, 화각장에 버려졌다.
일정한 기간마다 타오르는 불 속에서 한 줌의 뼈가 되어 하염없이 1856년이 되기를 빌었다.
여섯 번째.
신은 바샤를 놀려대듯 그제야 답을 내려주었다.
신의 신탁이 내려왔다.
100년만의 신탁은 온 대륙을 시끄럽게 울려대었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반복을 거듭하는 자여. 그대의 굴레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군중은 어지러운 세계를 구원할 용자가 나타날 것이라 해석했다.
신전은 옛 영광을 되찾으리라 기대하며 신도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황가는 반역을 꾀하는 거짓 신탁이라며 마법 가문과 마법사들을 앞세워 신전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바샤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잠시 희망을 품었기도 했었다.
황가는 결국 신전과 전쟁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지속된 황가와 신전의 전쟁은 모든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끝이 나버렸다.
그녀가 자그마하게 변화를 향해 품어온 희망은 세상의 파멸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일곱 번째 삶. 바샤는 미쳐버렸다.
허망함과 공허함이 드디어 그녀를 미치게 했다.
신을 원망하고 원망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누구든 굴레를 끊어줄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아니 그 굴레 자체를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여덟 번째 삶.
이번 생에도 저번 생에도 신탁은 내려왔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바샤는 길거리의 부랑자로, 골목길에 벽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이렇게 널브러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구둣발이 그녀 앞에서 한동안 멈춰 있던 것을 본 후에야 그가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샤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그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하에온이었다.
늘 그랬듯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의 머리카락은 달빛마저 삼킨 흑색이었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와 대비되는 그의 하얀 피부.
적당히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그의 근육질 몸매.
날카롭게 올라가 있는 눈매라 차가우면서 위험한 느낌을 주는 인상.
그는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인 시몬보다 더 매력적인 남자였다.
바샤는 처음 그를 보고, 자신이 이런 캐릭터를 만들었었나. 라고 되짚어 볼 만큼 그의 인상은 강렬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았다.
혼란한 시대를 잠재운 영웅.
데이모스의 왕이자, 라자루스 대공국의 왕.
잠시나마 그녀를 구원하기도, 그녀가 구원하기도 했던 남자.
첫 번째 삶의 그의 연인. 하에온.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며칠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탁이 떠올랐다.
‘굴레.’
‘굴레야.’
‘저자가 원인이야.’
‘저 남자를 죽여.’
‘신이 말한 굴레가 쟤야.’
바샤의 머릿속을 울려대는 미친 목소리들이 모두 그가 「굴레」라고 소리쳤다.
바샤는 이미 미쳐있었고, 지쳐있었다.
그 역시 지쳐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공격이나 방어의 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반복을 거듭하는 자여. 그대의 굴레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
그가 입을 열었다.
바샤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 남자를 죽여. 그래야 이 모든 게 끝나!’
‘죽여!!’
‘목을 비틀어.’
‘죽여야 끝나.’
그녀의 미친 자아는 그를 죽여야지만 이 저주가 끝난다고 반복해서 속삭여 왔다.
바샤는 속삭임에 못 이긴 듯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첫 번째 삶처럼 따스하지도, 두 번째 삶처럼 차갑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바샤는 천천히 그의 목에 손을 가져다 데었다. 그녀의 비쩍 마른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에온은 순순히 바샤에게 몸을 내어주었다.
“바샤...”
그가 처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샤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그를 밀쳐내려고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하지만 밀려 넘어진 것은 바샤 였다.
하에온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와 그녀는 잠시 떨어져 서로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가 부유하고 높은 신분을 가졌음을 알려주는 검보라색 정장과 그의 허리춤에서 빛을 내고있는 그의 검. 그의 업적을 나타내주는 그의 가슴팍에 붙은 여러 훈장들.
바샤가 고개를 뒤로 젖혀야지 얼굴을 볼 수 있는 큰 키.
바샤가 마주한 하에온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를 향해 박혀 있었다.
그와 반대로 바샤의 몰골은 더러웠다.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더럽고 떡 진 머리카락. 빛을 잃은 혼탁한 눈동자. 원래의 빛을 잃어버린 남루한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말라비틀어져 앙상하게 보이는 뼈. 군데군데 파먹고 썩어 버린 살갗.
그의 얼굴이 점점 괴로운 듯 일그러져 갔다.
하에온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잠시 그녀를 향하다가 그대로 힘없이 바닥을 향해 내팽개쳐졌다.
쇳덩이와 돌이 부딪쳐 나는 파열음만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그의 눈빛이 그녀를 재촉했다.
바샤는 검과 그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굴레.」”
그가 뱉은 한 단어가 다시 바샤의 미친 자아를 자극했다.
‘죽여’
‘죽여야 해.’
‘죽여!!’
‘죽여!!!!’
‘죽여!!!!!!!!!!!!!’
허공에서 바샤만 들을 수 있도록 수백 명이 ‘죽여’라고 소리를 쳐대었다.
바샤는 검을 주워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어서 찔러.’
‘할 수 있잖아. 바샤.’
‘죽이면 돼.’
‘어차피 네가 만든 글자야. 다 허상이라고!’
‘네가 아니었으면 소설 속에 단 한 줄만 등장할 조연일 뿐이야.’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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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대공님, 집착 말고 날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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