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넌 이미 다 가졌잖아.
조회 : 903 추천 : 1 글자수 : 7,309 자 2022-10-04
“냥? 그건 또 무슨 개소리다냥?”
“거절하면 기분 상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네.
카로. 잠시만 여기 있어.”
바샤는 카로의 등을 한번 쓰다듬은 후 자신의 옆에 앉혔다.
“냥!”
카로는 앞발 들어 충성의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한 번 더 카로를 거둬들인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문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바샤는 공중에서 몸을 가볍게 뒤틀어 회전한 뒤
땅 위에 사뿐히 안착했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치마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사르륵 춤을 추며 내려왔다.
“주인님은 가만 보면,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지 않는 것 같다냥.”
카로는 창틀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그루밍을 시작했다.
크리스탈로 만든 반투명한 유리를 육각형 형태로 잘라
외부를 꾸민 온실 안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여러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우겨진 사이로 햇살이 빛을 내며 들어왔다.
바샤는 일부러 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온실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인기척을 듣고 로제타가 뒤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파르케님. 아!”
익숙하게 그녀의 성을 부른 로제타는 놀라며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이제 메르헨스타인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진실한 가족을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대의 앞길에 항상 루카 신의 가호가 있기를.”
우아하게 한쪽 팔을 가슴 앞으로
다른 한쪽 팔을 뒤로 접으며 무릎을 살짝 굽히는 인사를 해왔다.
다른 인사말도 있는데.
마법 가문의.
그것도 마법 가문 수장의 딸에게 신의 가호라니.
차라리 악마의 저주를 내리지.
자신이 만든 캐릭터이지만
웃으면서 엿 먹이는 점은 정말 정이 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여기까지 어떤 일로 오셨죠?”
‘너 따위 달갑지 않으니 본론만 말하고 썩 꺼져.’
본심을 숨긴 채 바샤는 나름대로 친절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 저의 방문이 달갑지 않으시군요.”
바샤가 선을 긋는 태도에 그녀가 상처받은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처음 뵙는 분이 저의 집을 찾아오셔서 놀랐습니다.”
바샤는 일부러 ‘처음 뵙는 분’과 ‘저의 집’을 강조해 발음했다.
로제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살짝 미묘하게 금이 갔다.
바샤는 로제타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아서 정원 한가운데 위치한 테이블에 풀썩 앉았다.
“저는 메르헨스타인님과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로제타는 표정을 가다듬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이고 바샤를 살짝 올려다보며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휙휙 돌리는 행태가
마치 바샤를 유혹하는 모습같이 보였다.
“그 제안은 이미 두 번이나 거절했을 텐데요.
수도여행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다른 이를 찾으세요.”
바샤는 싸구려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로제타가 손바닥을 짝하고 마주치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찾아왔어요!”
“성녀님 잘 알고 있겠지만,
메르헨스타인 가문에서 당신을 반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바샤는 그녀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로제타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한 번은 당신과 클로나 어머니가 머물렀던 집이 보고 싶었어요.”
어느새 손을 마주한 채로 로제타의 붉은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만 맺혀있을 뿐 떨어지지는 않았다.
바샤는 로제타를 바라보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참 감정 표현도 잘하고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홀렸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대단한 여자야.’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이게 왜 클로나보고 어머니래.’
“로제타. 당신을 위한 말이에요.
메르헨스타인을 향한 미련과 복수를 멈추세요.”
바샤는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창작자이자, 그녀의 오래전 친우로서 그녀를 위한 조언이었다.
로제타 케렌시아는 여자 주인공답게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소녀였다.
키르헨 메르헨스타인과 클로나 케렌시아는
빌로나의 건국제에서 첫눈에 반해 서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헬라오스 교황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 성녀 클로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그녀의 인기에 힘입어 루카 신을 믿는 신도들이
이제 막 늘어나고 있던 차였다.
헬라오스 교황은 클로나에게
그녀를 대신할 대체제를 주고 떠나라는 제안을 했다.
클로나는 자신의 생명을 깎아가며
그녀 힘의 일부를 한 아이에게 물려주었다.
그 아이가 로제타였다.
로제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클로나와
메르헨스타인을 그리고 황가의 악행을 알게 된 이후에는
클로나를 죽게 만든 황가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캐릭터였다.
“이미 신탁이 내려왔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았답니다.”
로제타가 그녀답지 않은 말을 이어나갔다.
바샤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올리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로제타의 키워드는 복수심이었다.
그런 그녀가 복수를 내려놓았다고?
고작 신탁 하나 때문에?
바샤의 의문 섞인 표정을 본 로제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풀썩 무릎을 꿇었다.
“신전에서는 당신을 메시아로 추앙하려 하고 있어요.
메르헨스타인님.
아니, 바샤님. 저를 살려주세요.
제 존재가 메르헨스타인에게 달갑지 않은 건 알아요.
하지만 이번만 도와주세요.”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상황인지
바샤는 머리가 아파 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디 한번 설명해보라는 식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저는 클로나 성녀님의 힘을 받아 자란 아이입니다.
제 존재의 이유는 클로나 성녀님을 대신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에요.”
이는 바샤가 더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두 달 전 신탁이 내려오자
교황 성하는 저를 치워버리고 당신을 메시아로 추앙하려 해요.”
로제타의 몸 전체가 배신감에 부들거렸다.
“왜 신전은 굳이 나를 메시아라고 생각하죠?”
‘새로운 빛이 탄생할 지어니. 새로운 빛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라.’
모로스가 알려준 신탁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 어디에도 바샤가 신탁의 주인이라는 단서는 없었다.
[귀찮지? 부시자]
[부셔버리자.]
[신전 따윈 태워버리자]
바샤의 미친 자아가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 케렌시아의 루카 신전을 부셔 버리자고 외쳤다.
“저도 자세히 몰라요. 교황 성하만이 진짜 신탁을 들으셨어요.
하지만
전 신에게 가장 가까웠다던 클로나 성녀님의 힘을 받은 아이이지만.
당신은 정말 그분에게서 ‘탄생’하신 아이니깐요.”
바샤는 자신이 앉은 의자 팔걸이를 일정한 속도로 툭툭 쳤다.
교황 성하만이 신탁을 들으셨다라...
신탁의 내용이 바뀐 것이 석연치 않았다.
하물며 매 생마다
자신을 향해 칼날을 세웠던 로제타가
복수심을 버렸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왜 굳이 나를 찾아온 거죠?
황가에게 당신을 의탁해도 되었을 텐데.”
“당신이 속한 조직과 신전 사이의 거래를 알고 있어요.”
내가 속한 조직이라면 데이모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탈리에 황녀 암살을 의뢰한 자는 헬라오스 교황의 측근이었다.
“그래서요?”
바샤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하자
로제타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 올라왔다.
“그래서 그걸로 나를 협박이라도 하려고?”
“아...아니...”
“말할 수 있다면 말해보세요.”
바샤는 평소 갈무리하고 다니던
자신의 마력을 아주 조금만 개방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검은 마력이
바샤의 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거대한 성운 속에 박힌 별들처럼
촘촘히 검은 마력 사이에서 성력이 빛을 내뿜었다.
검은 연기처럼 흩날리던 마력이
로제타의 주변으로 둥근 원을 그렸다.
붉게 물들어있던 로제타의 얼굴이
이제는 흑빛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 손으로 목을 감싸며 켁켁 대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면서. 매 생마다 나를 죽이려 들다니. ’
고작 마력에 쌓인 것만으로 괴로워하는
하찮은 로제타의 힘에 바샤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죽여.]
[하찮은 인간 따위. 죽여버려]
[지금껏 당한 걸 기억해.]
[죽이자]
지금 죽여버릴까.
죽이면 귀찮아질까.
아니다.
이제는 저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바샤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
로제타는 힘겹게 입을 열어 외쳤다.
“가... 가족이잖아!”
단 한 번이라도
로제타는 바샤를 가족이나 친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향한 복수심을 드러내었다.
거창하게 복수심이라 표현했지만
바샤의 입장에서는 로제타의 열등감으로 느껴졌다.
로제타와 바샤는
이세계의 주인공이고 이세계의 악역이었다.
그녀들은 성력과 마력처럼
서로 사이좋게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바샤는 로제타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열등감을 강제로 굴복시킬 방법이 떠올랐다.
“가족... 가족이라....
그러면 로제타. 나에게 영혼의 맹세를 할 수 있어?”
영혼의 맹세는 이번 생이 끝나더라도,
환생을 하더라도 깨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바샤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과 같은 형태의 고대 마법이었다.
“그건 전설 속 이야기잖아요.”
로제타가 의아한 듯이 되물어왔다,
“난 메르헨스타인이니까. 영혼의 맹세 할 거야?”
그 어느 메르헨스타인도 영혼의 맹세를 한 적은 없으며 할 수도 없었다.
영혼의 맹세에는 상당한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데이모스들도 특별한 장치를 사용했었다.
할 수 있더라도 영혼이 묶이는 맹세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바샤도 하에온과도 구두의 약속만 했었다.
문신의 저주를 당하기만 하고
주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알지 직접 시행 해 본 적은 없었다.
바샤는 할 수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로제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샤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온실을 나서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게요.”
로제타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바샤는 이 상황이 흥미로웠다.
설마 하며 내뱉은 미끼에 대어가 낚였다.
그녀는 마력을 이용해
고개를 아직 숙이고 있던 로제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로제타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패배감과 열등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런 그녀의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간 당했던 것들이 생각나 통쾌하면서도
로제타를 설정한 사람으로서 아주 조금의 씁쓸함이 들기도 했다.
“좋아. 지금 바로 하자.”
바샤의 말에 로제타의 얼굴이 당혹감에 낯빛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바샤는 파란색 로제타는 뒤로 하고
늘 가지고 다니는 단도를 이용해 자신의 손바닥을 베었다.
베인 틈으로 피가 흘러 내려왔다.
그리고 로제타를 향해 고갯짓했다.
로제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의 오른팔을 바샤에게 내밀었다.
바샤는 잘 벼린 칼날으로 그녀의 팔에 큰 상처를 내었다.
“아앗!”
로제타가 아파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팔을 파고 피가 흘러내렸다.
바샤와 로제타의 피가 바닥에 뚝뚝 흘러내렸다.
서로의 피가 섞여 바닥에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내었다.
“「로제타 케렌시아는
바샤 메르헨스타인에게 영혼의 복종을 할 것을 맹세한다.」”
바샤가 콧노래 부르듯 나긋하게 맹세를 하였다.
“「로제타 케렌시아는
바샤 메르헨스타인에게 영혼의 복종을 할 것을 맹세한다.」”
로제타는 분한 마음을 꾹꾹 담아 바샤의 말을 따라 말했다.
로제타의 말이 끝나자
바닥에 맺힌 문양은 빛을 내며 로제타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부근을 그러쥐고 숨을 헐떡거렸다.
바샤는 로제타의 신전 사제복을 살짝 벌려
그녀의 심장 부근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양귀비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흐음.”
바샤는 만족스러움에 제스처를 취하고 성수 분수를 향해 걸어갔다.
분수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한 후
성수를 조금 떠서 로제타에게 다시 돌아왔다.
“마셔. 그나마 나아질 거야.”
로제타는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아
손을 부들거리며 바샤에게서 성수를 받아 마셨다.
성수가 입에 닿자 빠른 속도로 로제타의 안색이 돌아왔다.
“로제타. 넌 이제 나를 죽일 수도,
내 말에 거역할 수도 없어.
내 충실한 종이 된 걸 환영해.”
로제타의 얼굴이 만족스럽게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대신 네가 이루고 싶은 것 하나만 들어줄게. 무엇을 원해?”
바샤는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아 거만하게 로제타를 내려보았다.
굳이 소원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바샤의 종이 된 그녀를 위해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회유책 또는 위로 보상 개념이었다.
“헬라오스 교황.
루카 신전.
케렌시아 대륙의 파멸을 원해요.”
로제타의 사랑스럽던 붉은 눈이 복수심으로 붉게 빛났다.
그녀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은 바샤는
이제야 그녀의 행동이 납득 되었다.
열 한번째 로제타는
자신을 버린 클로나 케렌시아에 대한 복수심보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바샤에 대한 열등감보다
자신을 도구로만 사용하다 버릴
헬라오스에 대한 복수심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었다.
“스케일이 너무 큰 것 아냐? 넌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어?”
바샤는 다시금 비뚜룸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진정한 메시아니깐.”
로제타는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다는 듯이 말을 했다.
바샤는 그녀의 모습에서
오래전.
다섯 번째 생에서의 로제타가 겹쳐 보였다.
‘바샤.
당신이 살아있는 그 자체만으로 난 가짜가 되어버려.
네가 사라져야 내가 진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널 죽여도 너무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넌 이미 다 가졌잖아.’
“거절하면 기분 상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네.
카로. 잠시만 여기 있어.”
바샤는 카로의 등을 한번 쓰다듬은 후 자신의 옆에 앉혔다.
“냥!”
카로는 앞발 들어 충성의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한 번 더 카로를 거둬들인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문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바샤는 공중에서 몸을 가볍게 뒤틀어 회전한 뒤
땅 위에 사뿐히 안착했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치마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사르륵 춤을 추며 내려왔다.
“주인님은 가만 보면,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지 않는 것 같다냥.”
카로는 창틀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그루밍을 시작했다.
크리스탈로 만든 반투명한 유리를 육각형 형태로 잘라
외부를 꾸민 온실 안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여러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우겨진 사이로 햇살이 빛을 내며 들어왔다.
바샤는 일부러 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온실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인기척을 듣고 로제타가 뒤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파르케님. 아!”
익숙하게 그녀의 성을 부른 로제타는 놀라며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이제 메르헨스타인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진실한 가족을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대의 앞길에 항상 루카 신의 가호가 있기를.”
우아하게 한쪽 팔을 가슴 앞으로
다른 한쪽 팔을 뒤로 접으며 무릎을 살짝 굽히는 인사를 해왔다.
다른 인사말도 있는데.
마법 가문의.
그것도 마법 가문 수장의 딸에게 신의 가호라니.
차라리 악마의 저주를 내리지.
자신이 만든 캐릭터이지만
웃으면서 엿 먹이는 점은 정말 정이 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여기까지 어떤 일로 오셨죠?”
‘너 따위 달갑지 않으니 본론만 말하고 썩 꺼져.’
본심을 숨긴 채 바샤는 나름대로 친절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 저의 방문이 달갑지 않으시군요.”
바샤가 선을 긋는 태도에 그녀가 상처받은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처음 뵙는 분이 저의 집을 찾아오셔서 놀랐습니다.”
바샤는 일부러 ‘처음 뵙는 분’과 ‘저의 집’을 강조해 발음했다.
로제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살짝 미묘하게 금이 갔다.
바샤는 로제타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아서 정원 한가운데 위치한 테이블에 풀썩 앉았다.
“저는 메르헨스타인님과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로제타는 표정을 가다듬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이고 바샤를 살짝 올려다보며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휙휙 돌리는 행태가
마치 바샤를 유혹하는 모습같이 보였다.
“그 제안은 이미 두 번이나 거절했을 텐데요.
수도여행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다른 이를 찾으세요.”
바샤는 싸구려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로제타가 손바닥을 짝하고 마주치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찾아왔어요!”
“성녀님 잘 알고 있겠지만,
메르헨스타인 가문에서 당신을 반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바샤는 그녀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로제타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한 번은 당신과 클로나 어머니가 머물렀던 집이 보고 싶었어요.”
어느새 손을 마주한 채로 로제타의 붉은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만 맺혀있을 뿐 떨어지지는 않았다.
바샤는 로제타를 바라보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참 감정 표현도 잘하고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홀렸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대단한 여자야.’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이게 왜 클로나보고 어머니래.’
“로제타. 당신을 위한 말이에요.
메르헨스타인을 향한 미련과 복수를 멈추세요.”
바샤는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창작자이자, 그녀의 오래전 친우로서 그녀를 위한 조언이었다.
로제타 케렌시아는 여자 주인공답게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소녀였다.
키르헨 메르헨스타인과 클로나 케렌시아는
빌로나의 건국제에서 첫눈에 반해 서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헬라오스 교황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 성녀 클로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그녀의 인기에 힘입어 루카 신을 믿는 신도들이
이제 막 늘어나고 있던 차였다.
헬라오스 교황은 클로나에게
그녀를 대신할 대체제를 주고 떠나라는 제안을 했다.
클로나는 자신의 생명을 깎아가며
그녀 힘의 일부를 한 아이에게 물려주었다.
그 아이가 로제타였다.
로제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클로나와
메르헨스타인을 그리고 황가의 악행을 알게 된 이후에는
클로나를 죽게 만든 황가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캐릭터였다.
“이미 신탁이 내려왔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았답니다.”
로제타가 그녀답지 않은 말을 이어나갔다.
바샤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올리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로제타의 키워드는 복수심이었다.
그런 그녀가 복수를 내려놓았다고?
고작 신탁 하나 때문에?
바샤의 의문 섞인 표정을 본 로제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풀썩 무릎을 꿇었다.
“신전에서는 당신을 메시아로 추앙하려 하고 있어요.
메르헨스타인님.
아니, 바샤님. 저를 살려주세요.
제 존재가 메르헨스타인에게 달갑지 않은 건 알아요.
하지만 이번만 도와주세요.”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상황인지
바샤는 머리가 아파 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디 한번 설명해보라는 식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저는 클로나 성녀님의 힘을 받아 자란 아이입니다.
제 존재의 이유는 클로나 성녀님을 대신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에요.”
이는 바샤가 더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두 달 전 신탁이 내려오자
교황 성하는 저를 치워버리고 당신을 메시아로 추앙하려 해요.”
로제타의 몸 전체가 배신감에 부들거렸다.
“왜 신전은 굳이 나를 메시아라고 생각하죠?”
‘새로운 빛이 탄생할 지어니. 새로운 빛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라.’
모로스가 알려준 신탁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 어디에도 바샤가 신탁의 주인이라는 단서는 없었다.
[귀찮지? 부시자]
[부셔버리자.]
[신전 따윈 태워버리자]
바샤의 미친 자아가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 케렌시아의 루카 신전을 부셔 버리자고 외쳤다.
“저도 자세히 몰라요. 교황 성하만이 진짜 신탁을 들으셨어요.
하지만
전 신에게 가장 가까웠다던 클로나 성녀님의 힘을 받은 아이이지만.
당신은 정말 그분에게서 ‘탄생’하신 아이니깐요.”
바샤는 자신이 앉은 의자 팔걸이를 일정한 속도로 툭툭 쳤다.
교황 성하만이 신탁을 들으셨다라...
신탁의 내용이 바뀐 것이 석연치 않았다.
하물며 매 생마다
자신을 향해 칼날을 세웠던 로제타가
복수심을 버렸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왜 굳이 나를 찾아온 거죠?
황가에게 당신을 의탁해도 되었을 텐데.”
“당신이 속한 조직과 신전 사이의 거래를 알고 있어요.”
내가 속한 조직이라면 데이모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탈리에 황녀 암살을 의뢰한 자는 헬라오스 교황의 측근이었다.
“그래서요?”
바샤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하자
로제타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 올라왔다.
“그래서 그걸로 나를 협박이라도 하려고?”
“아...아니...”
“말할 수 있다면 말해보세요.”
바샤는 평소 갈무리하고 다니던
자신의 마력을 아주 조금만 개방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검은 마력이
바샤의 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거대한 성운 속에 박힌 별들처럼
촘촘히 검은 마력 사이에서 성력이 빛을 내뿜었다.
검은 연기처럼 흩날리던 마력이
로제타의 주변으로 둥근 원을 그렸다.
붉게 물들어있던 로제타의 얼굴이
이제는 흑빛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 손으로 목을 감싸며 켁켁 대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면서. 매 생마다 나를 죽이려 들다니. ’
고작 마력에 쌓인 것만으로 괴로워하는
하찮은 로제타의 힘에 바샤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죽여.]
[하찮은 인간 따위. 죽여버려]
[지금껏 당한 걸 기억해.]
[죽이자]
지금 죽여버릴까.
죽이면 귀찮아질까.
아니다.
이제는 저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바샤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
로제타는 힘겹게 입을 열어 외쳤다.
“가... 가족이잖아!”
단 한 번이라도
로제타는 바샤를 가족이나 친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향한 복수심을 드러내었다.
거창하게 복수심이라 표현했지만
바샤의 입장에서는 로제타의 열등감으로 느껴졌다.
로제타와 바샤는
이세계의 주인공이고 이세계의 악역이었다.
그녀들은 성력과 마력처럼
서로 사이좋게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바샤는 로제타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열등감을 강제로 굴복시킬 방법이 떠올랐다.
“가족... 가족이라....
그러면 로제타. 나에게 영혼의 맹세를 할 수 있어?”
영혼의 맹세는 이번 생이 끝나더라도,
환생을 하더라도 깨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바샤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과 같은 형태의 고대 마법이었다.
“그건 전설 속 이야기잖아요.”
로제타가 의아한 듯이 되물어왔다,
“난 메르헨스타인이니까. 영혼의 맹세 할 거야?”
그 어느 메르헨스타인도 영혼의 맹세를 한 적은 없으며 할 수도 없었다.
영혼의 맹세에는 상당한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데이모스들도 특별한 장치를 사용했었다.
할 수 있더라도 영혼이 묶이는 맹세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바샤도 하에온과도 구두의 약속만 했었다.
문신의 저주를 당하기만 하고
주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알지 직접 시행 해 본 적은 없었다.
바샤는 할 수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로제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샤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온실을 나서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게요.”
로제타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바샤는 이 상황이 흥미로웠다.
설마 하며 내뱉은 미끼에 대어가 낚였다.
그녀는 마력을 이용해
고개를 아직 숙이고 있던 로제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로제타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패배감과 열등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런 그녀의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간 당했던 것들이 생각나 통쾌하면서도
로제타를 설정한 사람으로서 아주 조금의 씁쓸함이 들기도 했다.
“좋아. 지금 바로 하자.”
바샤의 말에 로제타의 얼굴이 당혹감에 낯빛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바샤는 파란색 로제타는 뒤로 하고
늘 가지고 다니는 단도를 이용해 자신의 손바닥을 베었다.
베인 틈으로 피가 흘러 내려왔다.
그리고 로제타를 향해 고갯짓했다.
로제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의 오른팔을 바샤에게 내밀었다.
바샤는 잘 벼린 칼날으로 그녀의 팔에 큰 상처를 내었다.
“아앗!”
로제타가 아파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팔을 파고 피가 흘러내렸다.
바샤와 로제타의 피가 바닥에 뚝뚝 흘러내렸다.
서로의 피가 섞여 바닥에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내었다.
“「로제타 케렌시아는
바샤 메르헨스타인에게 영혼의 복종을 할 것을 맹세한다.」”
바샤가 콧노래 부르듯 나긋하게 맹세를 하였다.
“「로제타 케렌시아는
바샤 메르헨스타인에게 영혼의 복종을 할 것을 맹세한다.」”
로제타는 분한 마음을 꾹꾹 담아 바샤의 말을 따라 말했다.
로제타의 말이 끝나자
바닥에 맺힌 문양은 빛을 내며 로제타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부근을 그러쥐고 숨을 헐떡거렸다.
바샤는 로제타의 신전 사제복을 살짝 벌려
그녀의 심장 부근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양귀비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흐음.”
바샤는 만족스러움에 제스처를 취하고 성수 분수를 향해 걸어갔다.
분수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한 후
성수를 조금 떠서 로제타에게 다시 돌아왔다.
“마셔. 그나마 나아질 거야.”
로제타는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아
손을 부들거리며 바샤에게서 성수를 받아 마셨다.
성수가 입에 닿자 빠른 속도로 로제타의 안색이 돌아왔다.
“로제타. 넌 이제 나를 죽일 수도,
내 말에 거역할 수도 없어.
내 충실한 종이 된 걸 환영해.”
로제타의 얼굴이 만족스럽게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대신 네가 이루고 싶은 것 하나만 들어줄게. 무엇을 원해?”
바샤는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아 거만하게 로제타를 내려보았다.
굳이 소원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바샤의 종이 된 그녀를 위해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회유책 또는 위로 보상 개념이었다.
“헬라오스 교황.
루카 신전.
케렌시아 대륙의 파멸을 원해요.”
로제타의 사랑스럽던 붉은 눈이 복수심으로 붉게 빛났다.
그녀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은 바샤는
이제야 그녀의 행동이 납득 되었다.
열 한번째 로제타는
자신을 버린 클로나 케렌시아에 대한 복수심보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바샤에 대한 열등감보다
자신을 도구로만 사용하다 버릴
헬라오스에 대한 복수심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었다.
“스케일이 너무 큰 것 아냐? 넌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어?”
바샤는 다시금 비뚜룸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진정한 메시아니깐.”
로제타는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다는 듯이 말을 했다.
바샤는 그녀의 모습에서
오래전.
다섯 번째 생에서의 로제타가 겹쳐 보였다.
‘바샤.
당신이 살아있는 그 자체만으로 난 가짜가 되어버려.
네가 사라져야 내가 진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널 죽여도 너무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넌 이미 다 가졌잖아.’
작가의 말
제 부족한 첫 작품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닫기대공님, 집착 말고 날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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