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조금 변했을까?
조회 : 971 추천 : 1 글자수 : 6,255 자 2022-10-24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유일한 혈육인데 이리 매정해서 원. 이 형님이 참 속상하답니다.”
황제는 나긋하게 말을 한 뒤 찻잔을 들었다.
“전하께서 저를 바쁘게 하시니, 황성에 올 틈이 없습니다.”
하에온은 존대를 하고는 있으나 어딘지 불량한 말투였다.
“하하하. 맞아. 그랬었지.”
황제가 찻잔을 내려 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짐이 형제를 멀리 보냈었지요. 그때는 이 자리가 무어라고 그렇게 겁이 나던지.”
그의 시선이 호수 너머의 라일락 정원으로 향했다.
“이곳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지요.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저는 참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었답니다.
몇 번이고 이곳이 먼지 더미로 변할 때마다,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두 형제님의 덕이지요.”
황제의 시선을 따라 하에온도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호수 고래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호수 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잔잔했던 호수가 고래의 요동침에 따라 바다가 된 듯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촤아악 거센 물소리가 정원을 가득 메웠다가, 점차 물소리가 다시금 고요해지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몇 번째이지요?”
“다섯 번입니다.”
하에온은 다소 뜬금없는 황제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섯....다섯이라.....신은 매정하기도 하시지.”
황제가 이번에는 정원을 넘어 더 멀리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형제님. 저의 소원은 하나밖에 없답니다.”
“....”
하에온에게서 대답이 없자 황제는 고개를 돌려 하에온을 바라보았다. 하에온은 매서운 눈길로 황제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인지도 안 물어봐 주십니까? 참 가족의 정이 덧없군요.”
황제가 투정 부리듯 말하자 하에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황제와 하에온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적갈색 눈동자와 흑빛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눈을 돌린 쪽은 적갈색 눈동자를 가진 황제였다.
황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성물을 내어주어야 할 차례겠군요.”
하에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신이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하기를.”
황제는 내려놓았던 찻잔을 들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손님이 있는 듯하니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하에온은 정중하게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형제님과 소담을 나누나 했는데 먼저 가시다니요.”
황제는 아쉬운 듯 그에게 말을 걸었으나, 인사를 마친 하에온은 걸음을 옮긴 후였다.
“그대와 그대의 신을 위한 선물도 준비했는데....”
하에온은 정원을 넘어 본성으로 걸음을 돌렸다.
정원에서 본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긴 회랑을 지나야 했다. 길게 끝없이 이어진 회랑의 양쪽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나열되어있었다.
정원을 나서는 회랑에서 키르헨과 하에온이 마주쳤다.
키르헨이 먼저 허리를 숙여 하에온에게 인사를 하였다. 곧이어 하에온도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걸음을 옮겼다.
키르헨은 고개를 들어 멀어지고 있는 하에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가 그도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핏빛 물에 염색한 실같이 부드러운 적갈색 장발과 적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황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키르헨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르헨. 왔는가?”
황제는 손을 붕붕 흔들어 카르헨에게 인사를 했다.
샤를마뉴 2세 황제의 나이가 벌써 불혹에 가까웠으나, 타고난 대량의 마력으로 인해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황제의 자유로운 행동이 그의 나이를 더욱 감 잡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키르헨은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판게아 대륙의 지배자. 빌로나의 주인에게 인사드리옵니다.”
“에잉. 그렇게 딱딱한 인사는 필요 없대도. 어서 자리에 앉게.”
황제는 손을 가로로 저어 가며 키르헨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황제는 좋게 이야기하면 바람같이 자유로운 자였다.
나쁘게 말하면 황제로서의 살랑거리는 바람이라, 위엄이 없는 자이기도 했다.
키르헨은 그의 진 모습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경계했다.
“소신은 빌로나 황가의 충직한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예법을 지킨 것이옵니다.”
“역시. 키르헨 자세는 너무 딱딱해. 자네 아들도 매한가지야. 너무 재미가 없어.
메르헨스타인 가문들은 모두 딱딱해. 호수의 물을 봅세. 아름답지 않은가? 너무 나무처럼 딱딱하기만 하면 갈라지고 미를 잃을 뿐일세.”
황제는 하에온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원의 아름다움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키르헨은 하에온처럼 황제에게 독촉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맞은편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그의 잡담이 끝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정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황제는 무반응인 키르헨을 보며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됐네. 됐어. 자네는 반응도 없고. 형제는 매정히 가버리고.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가 알아주리오,”
황제는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북서쪽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드디어 황제가 본론을 이야기하자 키르헨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문장 그대로 북서쪽에서 일어난 일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그리아 왕국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미 그리아 인근 해역은 마물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마물의 바다라. 그 다음은 마물의 산맥인가?”
북서쪽에 위치한 그리아 왕국이 흔들리고 있다.
그리아 왕국이 마물들에게 멸망하면 그 다음 타자는 빌로나 제국의 영토인 칸디루스 지역이었다.
“빌로나 제국에 마물이 들어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키르헨은 올곧게 말을 이었다.
“그래. 없어야지. 빌로나 제국이 자네의 고향인 타난토스 대륙과 같이 멸망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일이지. 마물 따위에게 몰살당하다니.”
황제의 말에 키르헨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 오해하지 말게나.
짐은 자네가 최선을 다할 것을 믿는다는 의미였네.
그러고 보니. 자네 드디어 딸을 찾았는데 왜 짐에게 한번을 보여주지 않나.”
황제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청년처럼 키르헨에게 몸을 가까이 숙였다.
고요했던 키르헨의 눈빛에 날이 세워졌다.
“하하. 내가 며느리라도 삼을까 봐 그러는가? 나는 단지 자네의 오랜 숙원을 이루어서 다행이다 싶어서 그랬지.”
“20년 만에 찾은 소중한 아이입니다.”
“맞아. 자네가 그토록 얼마나 찾았는지. 내 직접 보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딸을 찾아 정말 다행일세.”
황제가 실없이 웃으며 키르헨 앞에 있는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키르헨은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찻잔에 찻물이 조금씩 차올랐다.
“내 장난으로 말했긴 하지만. 메르헨스타인의 가주가 될 예정이 아니라면, 황비 자리도 꽤 좋은 제안이 아닌가?”
키르헨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어져 갔다.
바샤가 가주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외부로 숨겼다.
날 선 키르헨의 눈빛이 황제를 향할 때.
조용했던 정원 전체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이런. 이런. 수도에 무언가 나타났나 보구나.”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
수도 페치아에 경보음이 울리기 전.
로제타는 수도에서 가장 사람 많기로 유명한 대로를 건너,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카페테라스로 바샤 일행을 이끌었다.
마력차를 이용해도 되었을 거리이지만 로제타는 굳이 바샤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로제타에게 팔짱이 끼워진 채 끌려가던 바샤는 로제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뭐한 짓이야?”
“당신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니깐. 내가 답답해서 왔잖아.”
로제타도 바샤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그거 말고 지금 팔짱 끼고 돌아다닌 짓. 어디 광고라도 하려고?”
“잘 아네. 이렇게 쇼라도 보여야 어머니께서 의심을 안 하지. 신전이 지금 너를 두고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나 알아?”
바샤는 로제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했다. 지난달 모로스를 바샤에게 보냈던 것과 로제타의 반응으로 보아 신전은 바샤 영입에게 진심처럼 보였다.
바샤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를 보이자, 로제타는 더욱 힘주어 몸을 부대꼈다.
“그니깐. 친한 척 좀 해.”
“해주고 있잖아.”
바샤는 진심이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가까이 걸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로제타는 헛웃음을 치더니 카페의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언제 날이 섰냐는 듯 바샤에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친구랑 오는 게 소원이었답니다! 바샤님과 오게 되어서 너무 행복해요.”
로제타와 바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두가 그녀들에게 집중했다.
로제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한몫했다.
로제타는 굳이 5층이나 되는 건물의 내부가 아닌, 1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로제타와 바샤, 시몬을 아닌 척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지나다니는 이들은 성녀, 메르헨스타인, 대마법사 등등 그들을 지칭하는 말들을 수근거렸다.
바샤는 이왕 광고하기로 시작한 거, 마음을 비웠다.
로제타의 옆자리에 앉아 도도하게 허리를 펴고 부채질이나 했다.
“시몬. 여기서도 서 있을 거야?”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꿋꿋이 서 있으려 했지만, 바샤는 부담스러웠다.
“앉아. 밖이야. 보는 눈이 많아.”
바샤는 의상실에서와는 다르게 강경한 태도로 시몬을 맞은 편에 앉혔다.
시몬은 바샤의 다그침에 허리를 곱게 펴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몬의 품에 곱게 안겨있던 카로는 테이블을 폴짝 뛰어 바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카로는 허리를 쭉 늘리고 기지개를 펴더니, 꽈리를 틀며 낮잠을 자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냐아아앙. 여기 완전 시원하다냐아앙.”
그들의 자리 위에 높게 올려진 캐노피에 냉방 마법이 걸려있어 야외 테라스도 나름 시원했다.
여름의 습기 찬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내 종업원이 3단 디저트 트레이와 커피를 가져왔다. 그들의 테이블에 달달한 디저트가 가득히 채워졌다.
“빌로나 제국은 정말 신기한 게 많은 것 같아요.
여름날에 야외에 있어도 이렇게 시원하고.
커피 같은 신기한 음료도 있고.”
로제타가 여름 햇살보다 더 해맑게 웃으며 디저트를 감상평을 늘여놓았다.
그녀가 디저트 트레이에서 핑크색 마카롱을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로제타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열심히 오물거렸다.
“우와. 바샤님. 정말 달아요. 바샤님도 드셔보세요.”
그리고 바샤에게 노란색 마카롱을 하나 들어 건네며 상냥하게 웃었다.
“난 됐어.”
바샤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거절했다.
로제타는 머쓱한지,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가 시선을 시몬에게로 돌렸다.
“시몬....아니. 메르헨스타인님. 드셔보시겠어요? 정말 맛있어요!”
그녀는 바샤에게 권하려던 것을 시몬에게 다시 권했다.
더불어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제타의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예의에 어긋난 다소 무례한 행동들이었으나, 그녀를 마주하는 누구든 예의를 따져 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행동이 솔직하고 사랑스럽다며 호의를 표한다.
로제타가 모두를 홀리는 마법 같은 현상은,
바샤가 만든 로제타의 법칙이었다.
“감사합니다.”
시몬은 마카롱을 받아 한입에 먹어 치웠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제스쳐와 수줍은 표정에 시몬 역시 예의를 따지지 않았다.
그는 레이디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기사도의 정석 같은 남자이기도 했으며, 어느새 로제타에게 경계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맛있죠?”
“네.”
시몬은 로제타의 뜨거운 눈을 그대로 마주하자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그의 귀가 빨개지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뭐.’
바샤가 만들어 놓은 법칙에 따르면 시몬과 로제타는 언제,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사랑에 빠진다.
단지, 지금 시몬 메르헨스타인이 바샤에게 이상한 오해를 하는 중이라 로제타에게 맘 놓고 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바샤는 부채를 접어 입술을 톡톡 쳤다.
고민할 때 무언가를 톡톡 치는 건 바샤의 오랜 습관이었다.
로제타가 바샤와 계약을 한 지금.
시몬과 로제타를 엮는 것이 나을 것인가. 아니면 시몬의 오해를 이용해 이들을 찢어놓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아니면.
시몬이 조금 변했을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까?
“유일한 혈육인데 이리 매정해서 원. 이 형님이 참 속상하답니다.”
황제는 나긋하게 말을 한 뒤 찻잔을 들었다.
“전하께서 저를 바쁘게 하시니, 황성에 올 틈이 없습니다.”
하에온은 존대를 하고는 있으나 어딘지 불량한 말투였다.
“하하하. 맞아. 그랬었지.”
황제가 찻잔을 내려 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짐이 형제를 멀리 보냈었지요. 그때는 이 자리가 무어라고 그렇게 겁이 나던지.”
그의 시선이 호수 너머의 라일락 정원으로 향했다.
“이곳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지요.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저는 참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었답니다.
몇 번이고 이곳이 먼지 더미로 변할 때마다,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두 형제님의 덕이지요.”
황제의 시선을 따라 하에온도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호수 고래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호수 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잔잔했던 호수가 고래의 요동침에 따라 바다가 된 듯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촤아악 거센 물소리가 정원을 가득 메웠다가, 점차 물소리가 다시금 고요해지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몇 번째이지요?”
“다섯 번입니다.”
하에온은 다소 뜬금없는 황제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섯....다섯이라.....신은 매정하기도 하시지.”
황제가 이번에는 정원을 넘어 더 멀리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형제님. 저의 소원은 하나밖에 없답니다.”
“....”
하에온에게서 대답이 없자 황제는 고개를 돌려 하에온을 바라보았다. 하에온은 매서운 눈길로 황제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인지도 안 물어봐 주십니까? 참 가족의 정이 덧없군요.”
황제가 투정 부리듯 말하자 하에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황제와 하에온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적갈색 눈동자와 흑빛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눈을 돌린 쪽은 적갈색 눈동자를 가진 황제였다.
황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성물을 내어주어야 할 차례겠군요.”
하에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신이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하기를.”
황제는 내려놓았던 찻잔을 들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손님이 있는 듯하니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하에온은 정중하게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형제님과 소담을 나누나 했는데 먼저 가시다니요.”
황제는 아쉬운 듯 그에게 말을 걸었으나, 인사를 마친 하에온은 걸음을 옮긴 후였다.
“그대와 그대의 신을 위한 선물도 준비했는데....”
하에온은 정원을 넘어 본성으로 걸음을 돌렸다.
정원에서 본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긴 회랑을 지나야 했다. 길게 끝없이 이어진 회랑의 양쪽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나열되어있었다.
정원을 나서는 회랑에서 키르헨과 하에온이 마주쳤다.
키르헨이 먼저 허리를 숙여 하에온에게 인사를 하였다. 곧이어 하에온도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걸음을 옮겼다.
키르헨은 고개를 들어 멀어지고 있는 하에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가 그도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핏빛 물에 염색한 실같이 부드러운 적갈색 장발과 적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황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키르헨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르헨. 왔는가?”
황제는 손을 붕붕 흔들어 카르헨에게 인사를 했다.
샤를마뉴 2세 황제의 나이가 벌써 불혹에 가까웠으나, 타고난 대량의 마력으로 인해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황제의 자유로운 행동이 그의 나이를 더욱 감 잡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키르헨은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판게아 대륙의 지배자. 빌로나의 주인에게 인사드리옵니다.”
“에잉. 그렇게 딱딱한 인사는 필요 없대도. 어서 자리에 앉게.”
황제는 손을 가로로 저어 가며 키르헨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황제는 좋게 이야기하면 바람같이 자유로운 자였다.
나쁘게 말하면 황제로서의 살랑거리는 바람이라, 위엄이 없는 자이기도 했다.
키르헨은 그의 진 모습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경계했다.
“소신은 빌로나 황가의 충직한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예법을 지킨 것이옵니다.”
“역시. 키르헨 자세는 너무 딱딱해. 자네 아들도 매한가지야. 너무 재미가 없어.
메르헨스타인 가문들은 모두 딱딱해. 호수의 물을 봅세. 아름답지 않은가? 너무 나무처럼 딱딱하기만 하면 갈라지고 미를 잃을 뿐일세.”
황제는 하에온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원의 아름다움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키르헨은 하에온처럼 황제에게 독촉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맞은편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그의 잡담이 끝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정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황제는 무반응인 키르헨을 보며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됐네. 됐어. 자네는 반응도 없고. 형제는 매정히 가버리고.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가 알아주리오,”
황제는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북서쪽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드디어 황제가 본론을 이야기하자 키르헨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문장 그대로 북서쪽에서 일어난 일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그리아 왕국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미 그리아 인근 해역은 마물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마물의 바다라. 그 다음은 마물의 산맥인가?”
북서쪽에 위치한 그리아 왕국이 흔들리고 있다.
그리아 왕국이 마물들에게 멸망하면 그 다음 타자는 빌로나 제국의 영토인 칸디루스 지역이었다.
“빌로나 제국에 마물이 들어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키르헨은 올곧게 말을 이었다.
“그래. 없어야지. 빌로나 제국이 자네의 고향인 타난토스 대륙과 같이 멸망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일이지. 마물 따위에게 몰살당하다니.”
황제의 말에 키르헨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 오해하지 말게나.
짐은 자네가 최선을 다할 것을 믿는다는 의미였네.
그러고 보니. 자네 드디어 딸을 찾았는데 왜 짐에게 한번을 보여주지 않나.”
황제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청년처럼 키르헨에게 몸을 가까이 숙였다.
고요했던 키르헨의 눈빛에 날이 세워졌다.
“하하. 내가 며느리라도 삼을까 봐 그러는가? 나는 단지 자네의 오랜 숙원을 이루어서 다행이다 싶어서 그랬지.”
“20년 만에 찾은 소중한 아이입니다.”
“맞아. 자네가 그토록 얼마나 찾았는지. 내 직접 보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딸을 찾아 정말 다행일세.”
황제가 실없이 웃으며 키르헨 앞에 있는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키르헨은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찻잔에 찻물이 조금씩 차올랐다.
“내 장난으로 말했긴 하지만. 메르헨스타인의 가주가 될 예정이 아니라면, 황비 자리도 꽤 좋은 제안이 아닌가?”
키르헨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어져 갔다.
바샤가 가주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외부로 숨겼다.
날 선 키르헨의 눈빛이 황제를 향할 때.
조용했던 정원 전체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이런. 이런. 수도에 무언가 나타났나 보구나.”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
수도 페치아에 경보음이 울리기 전.
로제타는 수도에서 가장 사람 많기로 유명한 대로를 건너,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카페테라스로 바샤 일행을 이끌었다.
마력차를 이용해도 되었을 거리이지만 로제타는 굳이 바샤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로제타에게 팔짱이 끼워진 채 끌려가던 바샤는 로제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뭐한 짓이야?”
“당신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니깐. 내가 답답해서 왔잖아.”
로제타도 바샤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그거 말고 지금 팔짱 끼고 돌아다닌 짓. 어디 광고라도 하려고?”
“잘 아네. 이렇게 쇼라도 보여야 어머니께서 의심을 안 하지. 신전이 지금 너를 두고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나 알아?”
바샤는 로제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했다. 지난달 모로스를 바샤에게 보냈던 것과 로제타의 반응으로 보아 신전은 바샤 영입에게 진심처럼 보였다.
바샤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를 보이자, 로제타는 더욱 힘주어 몸을 부대꼈다.
“그니깐. 친한 척 좀 해.”
“해주고 있잖아.”
바샤는 진심이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가까이 걸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로제타는 헛웃음을 치더니 카페의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언제 날이 섰냐는 듯 바샤에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친구랑 오는 게 소원이었답니다! 바샤님과 오게 되어서 너무 행복해요.”
로제타와 바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두가 그녀들에게 집중했다.
로제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한몫했다.
로제타는 굳이 5층이나 되는 건물의 내부가 아닌, 1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로제타와 바샤, 시몬을 아닌 척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지나다니는 이들은 성녀, 메르헨스타인, 대마법사 등등 그들을 지칭하는 말들을 수근거렸다.
바샤는 이왕 광고하기로 시작한 거, 마음을 비웠다.
로제타의 옆자리에 앉아 도도하게 허리를 펴고 부채질이나 했다.
“시몬. 여기서도 서 있을 거야?”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꿋꿋이 서 있으려 했지만, 바샤는 부담스러웠다.
“앉아. 밖이야. 보는 눈이 많아.”
바샤는 의상실에서와는 다르게 강경한 태도로 시몬을 맞은 편에 앉혔다.
시몬은 바샤의 다그침에 허리를 곱게 펴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몬의 품에 곱게 안겨있던 카로는 테이블을 폴짝 뛰어 바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카로는 허리를 쭉 늘리고 기지개를 펴더니, 꽈리를 틀며 낮잠을 자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냐아아앙. 여기 완전 시원하다냐아앙.”
그들의 자리 위에 높게 올려진 캐노피에 냉방 마법이 걸려있어 야외 테라스도 나름 시원했다.
여름의 습기 찬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내 종업원이 3단 디저트 트레이와 커피를 가져왔다. 그들의 테이블에 달달한 디저트가 가득히 채워졌다.
“빌로나 제국은 정말 신기한 게 많은 것 같아요.
여름날에 야외에 있어도 이렇게 시원하고.
커피 같은 신기한 음료도 있고.”
로제타가 여름 햇살보다 더 해맑게 웃으며 디저트를 감상평을 늘여놓았다.
그녀가 디저트 트레이에서 핑크색 마카롱을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로제타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열심히 오물거렸다.
“우와. 바샤님. 정말 달아요. 바샤님도 드셔보세요.”
그리고 바샤에게 노란색 마카롱을 하나 들어 건네며 상냥하게 웃었다.
“난 됐어.”
바샤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거절했다.
로제타는 머쓱한지,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가 시선을 시몬에게로 돌렸다.
“시몬....아니. 메르헨스타인님. 드셔보시겠어요? 정말 맛있어요!”
그녀는 바샤에게 권하려던 것을 시몬에게 다시 권했다.
더불어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제타의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예의에 어긋난 다소 무례한 행동들이었으나, 그녀를 마주하는 누구든 예의를 따져 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행동이 솔직하고 사랑스럽다며 호의를 표한다.
로제타가 모두를 홀리는 마법 같은 현상은,
바샤가 만든 로제타의 법칙이었다.
“감사합니다.”
시몬은 마카롱을 받아 한입에 먹어 치웠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제스쳐와 수줍은 표정에 시몬 역시 예의를 따지지 않았다.
그는 레이디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기사도의 정석 같은 남자이기도 했으며, 어느새 로제타에게 경계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맛있죠?”
“네.”
시몬은 로제타의 뜨거운 눈을 그대로 마주하자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그의 귀가 빨개지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뭐.’
바샤가 만들어 놓은 법칙에 따르면 시몬과 로제타는 언제,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사랑에 빠진다.
단지, 지금 시몬 메르헨스타인이 바샤에게 이상한 오해를 하는 중이라 로제타에게 맘 놓고 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바샤는 부채를 접어 입술을 톡톡 쳤다.
고민할 때 무언가를 톡톡 치는 건 바샤의 오랜 습관이었다.
로제타가 바샤와 계약을 한 지금.
시몬과 로제타를 엮는 것이 나을 것인가. 아니면 시몬의 오해를 이용해 이들을 찢어놓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아니면.
시몬이 조금 변했을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까?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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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대공님, 집착 말고 날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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