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를 이용하세요
조회 : 917 추천 : 2 글자수 : 7,291 자 2022-09-29
이미 지난 7년간 바샤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었기 때문에
국왕는 이미 바샤의 말을 적극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하에온은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그로부터 다시 1년 후.
1829년.
하에온이 라자루스의 대공으로 복권했다.
대공은 여전히 데이모스로서
미냐르 국왕에게서 내려오는 모든 임무를 말끔히 해내었다.
1830년.
바샤는 미냐르 국왕에게 우랄산맥에 있는
마력석 광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국왕은 직접 인부들을 보내어 마력석 광맥을 확인하였으나
그를 대놓고 유통하기에는 큰 위험이 있었다.
“하에온이 있잖아요. 그를 이용하세요.
라자루스를 통해 마력석을 교류하면 교황이 어떻게 알겠어요?”
국왕은 이제 바샤가 차를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양귀비 차를 찾았다.
1832년.
바샤는 미냐르 왕자의 반란을 예고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소녀에게 휘둘리던 국왕을
차마 지켜보지 못한 왕자의 반란이었다.
국왕은 바샤의 말대로 그의 아들을 즉결 처형시켰다.
단 두 명이었던 미냐르 왕손은 모두 국왕의 손에 죽었다.
1833년.
하에온에게 미냐르 신성 왕국의 비밀을
케렌시아 교황에게 흘리라 명령했다.
헬라오스 교황은 미냐르 신성 왕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1834년.
라자루스 대공국은 미냐르 신성 왕국과 우방 협정을 맺었다.
불평등 조약에 가까웠으나 국왕은 의심하지 않았다.
한때는 검은 세계를 아우르던 미냐르 국왕은
이제 바샤의 꼭두각시가 되어 바샤의 말대로 협정을 맺었다.
1835년 11월.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국왕에게 바샤는 속삭였다.
“당신의 자리를 지켜줄 후계자는
하에온 빌로나 라자루스 대공이에요.
데이모스만 하에온에게 주면 되죠.
국왕 자리는 여전히 폐하시랍니다.”
국왕는 데이모스의 후계자로 하에온을 선택했다.
1835년 12월.
미냐르 신성 왕국과 라자루스 공국과의 마력석 교류, 마도학 양성이 세상에 밝혀졌다.
케렌시아 교황국의 헬라오스 교황은 미냐르 왕국에게 크게 분노했다.
미냐르 신성 왕국은 신성 왕국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1836년 1월.
라자루스의 군대가 미냐르 왕국에 침입했다.
미냐르 왕국은 악마 소환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악마의 힘에 빌어 대 빌로나 제국을 위협하려 했다는 죄명이었다.
그녀는 지난날 파르케가 당했던 것처럼.
바샤는 데이모스의 국왕을 바샤가 직접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를 회생시켰다가 다시 고통을 주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파르케의 죽음처럼
그를 사지로 몰아세운 후 하에온의 군대에 넘겼다.
◇◆◇
크기가 너무 작아, 소국이라고 칭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대국들 사이에서
버텨오며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설산을 자랑하던
미냐르 신성 왕국은
라자루스 대공국에 편입되어
1836년 7월.
이제는 미냐르 도시라고 불린다.
모든 일을 정리한 바샤는 데이모스의 뒤처리를 하에온에게 넘긴 뒤
그녀는 자신의 성을 파르케라고 선언했다.
바샤는 신전이 청해온 빌로나 황녀 암살이라는
득 될 것 없는 제안을 수락한 후 리아와 함께 미냐르를 떠나버렸다.
◇◆◇
인간의 마음은 참 모순이 많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떤 단어로 규정하는 것조차 힘들다.
어떨 때는 말로 내뱉어야 느껴지는 감정도 있었다.
또 어떨 때는 꽁꽁 숨겨져 있어서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감정이 자신을 지배할 때도 있었다.
바샤는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현자가 되지는 못하고 점점 모순적으로 변하는 자신이 싫었다.
“당신은 아실까요?
그날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하에온은 파르케의 묘에
하얀 국화 다발을 내려놓으며 바샤에게 물었다.
바샤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하에온은 바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맹세 한 날.
전 너무 부끄러웠어요.”
바샤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하에온은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속을 다 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뇨. 당신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때 전, 제가 정말 천재인 줄 알고 있었어요.
조금 더 노력하면 조금 더 강해지면
언젠가 당신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죠.”
“충분해.”
바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파르케님.
바샤님이 꽃 들고 오지 않았다고 해도
너무 뭐라 하면 안 돼요.”
“파르케는 내 얼굴만 봐도 좋다고 할걸?
내 얼굴 예쁘다고 좋아한 거 기억 안 나?”
“맞아요.
제가 바샤님 볼을 꼬집어서 엉덩이를 몇 대나 맞았었는지.”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셋이 모인 건 오랜만이네요.”
하에온은 파르케의 죽음 이후 모든 사람에게 존칭과 예를 갖췄다.
“파르케가 살아있을 때나 존댓말 할 것이지.”
바샤는 지난 어린 날처럼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의 말에는 씁쓸함과 후회가 서려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추운 날이었죠.”
“언제를 말하는 거야.”
“항상.
파르케님과 함께 했을 때도.
우랄산맥 중턱에서도.
목숨 걸고 유시아 대륙을 건널 때도. 항상 이렇게 추웠어요.
그땐 바샤님처럼 강해지면 추위를 타지 않을 줄 알았어요.”
“맞아. 안 추워.”
바샤는 눈보라가 몰아쳐도 춥지 않았다.
이건 지금의 하에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전 추워서 겨울이 싫어요.”
“나도.”
그들에게 미냐르는 항상 춥고 매서운 곳이었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거세졌지만,
바샤와 하에온은 파르케의 무덤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메르헨스타인 성으로 모셔 드릴게요.”
하에온이 바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샤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파르케의 무덤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죽음 후에 귀신이 된다,
영혼이 된다는 터무니 없는 소리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파르케의 영혼만큼은 그들을 보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내려가서 이야기해.”
바샤는 그의 손을 지나쳐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에온의 얼굴에 아쉬움과 진한 슬픔이 맺혔지만
바샤는 모르는 척 지나쳤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전 쪽에서 산으로 올라오는 이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샤님.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바샤는 그의 거절에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저를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은 저들을 만나고 싶지 않잖아요.”
바샤는 그의 말에 동의 할수 밖에 없었다.
올라오고 있는 자들은 라자루스의 기사들이었다.
그들과 마주쳐 굳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바샤는 손가락을 휘둘러 기사들이
산에서 길을 헤매도록 환각 마법을 걸어버렸다.
“이제 되었지?”
“불쌍한 자들이에요. 바샤. 오늘만 봐주세요.”
“그러면 내 물음에 대답하고 가면 되겠네.”
하에온은 바샤의 강경한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되돌아온다는 말. 무슨 말이야?”
“말할 수 없어요.”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가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뭐?”
“신의 섭리대로. 전 말할 수 없어요.”
또.
신이다.
바샤를 이 세계로 부르고,
영원히 반복하는 저주를 내린 자.
신에게 물음을 구하니,
수수께끼 같은 신탁만 내리는 자.
“죄송해요.”
하에온은 바샤를 바라보았다.
바샤는 저 표정을 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신이 내려준 저주이니
정답은 알아서 찾아야 한다는 건가?
바샤는 이가 갈렸다.
신을 향한 혐오감이 저 너머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사라졌던 건데?”
바샤는 질문을 바꿔 다른 것을 하에온에게 물었다.
하에온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왜. 이것도 말하지 못해?”
“....제가....사라졌었나요?”
“지난-!”
바샤는 ‘지난 생 동안 사라졌었잖아!’라고 외치려 했다.
[말하게?]
[말할 거야?]
[그러면 이번에도 사라질 텐데.]
[사라져도 괜찮아?]
[어차피 죽일 거잖아. 바샤 네가 죽이는 건 어때?’-]
[말해. 얼른.]
[사라졌다고 말해.]
바샤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수백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제히 그들이 말하라고 소리를 쳐댔다.
바샤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속 안에 울려대는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도 재밌겠네]
[말해!]
[말하라고!!]
[재밌겠다. 죽여!]
[죽여!!!!!!!!!1]
그들은 일제히 바샤가 말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을 하면 그가 사라진다고 외쳐댔다.
지난 삶에서 하에온을 죽였을 때처럼 그들은 소리를 쳐댔다.
바샤의 눈에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삶처럼.
그를 다시 죽이는 환각.
그의 심장에 칼이 꽂히던 그 감각.
그의 눈에 이채가 사라지던 모습.
그가 후련한 듯 웃으며 울었던 표정.
뼛가루가 되어 흩어지던 모습까지.
바샤의 몸에 힘이 빠졌다.
귀를 틀어막았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눈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바샤님!”
하에온이 바샤를 외치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와 닿음과 동시 소리와 환각이 사라졌다.
쿵.
쿵.
그와 가까이 있으니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아직은 괜찮다.
그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바샤의 마음이 그의 심장 소리에 맞춰서 빠르게 진정되었다.
“바샤. 괜찮아요?”
그가 바샤를 껴안은 채로 물어왔다.
바샤의 진정되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요동쳐왔다.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안겨있음을 인지하고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쳤다.
그가 부드럽게 뒤로 밀려났다.
“괜찮아. 추워서 그래.”
바샤의 얼굴이 괜히 붉어지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푹 숙였다.
더한 일도 같이 한 사이인데
이 정도 스킨쉽으로 부끄러워지는 게
더욱 민망하면서 한편으로는 분했다.
“추우면 이제 집으로 가야죠.”
하에온의 말에 바샤는 다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기사들에게 걸려있던 환각 마법을 거둬들였다.
“하.”
바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많이 늘었죠?”
바샤가 한 번 더 마법을 쓰려하자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바샤의 손가락 사이로 밀착하며 들어온다.
살결과 살결이 조금의 공감도 없이 완전히 맞닿았다.
얼어 있던 그녀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오늘만....
오늘만 봐줘요.”
그는 웃지 않았다.
검은색 눈동자가 결연하게까지 느껴졌다.
“오늘만 우리 예전처럼 지내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여
바샤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기다릴게. 갔다 와.”
“고마워요.”
그는 그녀의 손을 아쉬운 듯
그의 손가락이 바샤의 손가락을 끝까지 스치며 놓았다.
그리곤 그녀를 지나쳐 기사들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바샤는 하에온의 뒤를 조심스레 밟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
투명 마법을 이중 삼중으로 걸었다.
‘어떤 일이길래?’
바샤는 자신을 두고 갈 정도로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그러냐며 속으로 외쳤다.
그는 기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신전으로 향했다.
바샤는 조금의 시간차를 두고 그를 따라 신전으로 들어갔다.
이미 신전 안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내부로 조심스럽게 잠입해
신전의 기둥 위에 자리 잡고 그를 찾았다.
하에온은 제사장의 의자에 턱을 괸 채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의례적으로 만드는 미소도 없었다.
차갑고 오만한 라자루스의 공왕만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바샤가 처음으로 듣는
낮고 무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에온의 목소리가 맞았지만
다른 사람이 내뱉는 음성 같이 들려왔다.
전율이 돋을 만큼의 이상한 이 낯섦.
금방 전까지 같이 추억을 공유했던 자가
저기에 오만하게 앉아 있는 자와 동일인이라는 게 믿겨 지지 않았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하.”
그의 맞은편에는 시체 몇 구와
한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 몇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하. 저는 정말 유시아 대륙으로 건너가던 상인들입니다.”
포박당한 사람은 절박하게 하에온에게 빌었다.
“그래. 그랬겠지.”
하에온은 손짓으로 그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의 뜻을 읽은 그의 부하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이의 포박을 풀었다.
“그럼 가보세요.”
하에온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 저었다.
포박당했던 이는 연신
‘감사합니다, 전하’를 외치며
중앙 신전에서 벗어나 바샤의 시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에 발을 딛었다.
바샤는 나간 이를 따라 자리를 옮겨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앞에는 이미 하에온이 서 있었다.
상인이라던 자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다시 중앙 신전으로 몸을 돌렸지만 하에온이 휘두른 칼에 그의 몸을 관통당했다.
“4개밖에 남지 않았네요.”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어지럽게 흩뿌려졌다.
하에온이 잡은 검날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황... 황제 폐하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전하! 정말로 전하를 배신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또 다른 포박당한 이가 살기 위해 몸부림쳐대며
무릎으로 눈 덮인 정원까지 걸어 나왔다.
하에온은 무릎으로 기어 나온 이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어버렸다.
“당연히 형님이 보냈겠죠.”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었기 때문에
국왕는 이미 바샤의 말을 적극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하에온은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그로부터 다시 1년 후.
1829년.
하에온이 라자루스의 대공으로 복권했다.
대공은 여전히 데이모스로서
미냐르 국왕에게서 내려오는 모든 임무를 말끔히 해내었다.
1830년.
바샤는 미냐르 국왕에게 우랄산맥에 있는
마력석 광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국왕은 직접 인부들을 보내어 마력석 광맥을 확인하였으나
그를 대놓고 유통하기에는 큰 위험이 있었다.
“하에온이 있잖아요. 그를 이용하세요.
라자루스를 통해 마력석을 교류하면 교황이 어떻게 알겠어요?”
국왕은 이제 바샤가 차를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양귀비 차를 찾았다.
1832년.
바샤는 미냐르 왕자의 반란을 예고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소녀에게 휘둘리던 국왕을
차마 지켜보지 못한 왕자의 반란이었다.
국왕은 바샤의 말대로 그의 아들을 즉결 처형시켰다.
단 두 명이었던 미냐르 왕손은 모두 국왕의 손에 죽었다.
1833년.
하에온에게 미냐르 신성 왕국의 비밀을
케렌시아 교황에게 흘리라 명령했다.
헬라오스 교황은 미냐르 신성 왕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1834년.
라자루스 대공국은 미냐르 신성 왕국과 우방 협정을 맺었다.
불평등 조약에 가까웠으나 국왕은 의심하지 않았다.
한때는 검은 세계를 아우르던 미냐르 국왕은
이제 바샤의 꼭두각시가 되어 바샤의 말대로 협정을 맺었다.
1835년 11월.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국왕에게 바샤는 속삭였다.
“당신의 자리를 지켜줄 후계자는
하에온 빌로나 라자루스 대공이에요.
데이모스만 하에온에게 주면 되죠.
국왕 자리는 여전히 폐하시랍니다.”
국왕는 데이모스의 후계자로 하에온을 선택했다.
1835년 12월.
미냐르 신성 왕국과 라자루스 공국과의 마력석 교류, 마도학 양성이 세상에 밝혀졌다.
케렌시아 교황국의 헬라오스 교황은 미냐르 왕국에게 크게 분노했다.
미냐르 신성 왕국은 신성 왕국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1836년 1월.
라자루스의 군대가 미냐르 왕국에 침입했다.
미냐르 왕국은 악마 소환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악마의 힘에 빌어 대 빌로나 제국을 위협하려 했다는 죄명이었다.
그녀는 지난날 파르케가 당했던 것처럼.
바샤는 데이모스의 국왕을 바샤가 직접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를 회생시켰다가 다시 고통을 주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파르케의 죽음처럼
그를 사지로 몰아세운 후 하에온의 군대에 넘겼다.
◇◆◇
크기가 너무 작아, 소국이라고 칭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대국들 사이에서
버텨오며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설산을 자랑하던
미냐르 신성 왕국은
라자루스 대공국에 편입되어
1836년 7월.
이제는 미냐르 도시라고 불린다.
모든 일을 정리한 바샤는 데이모스의 뒤처리를 하에온에게 넘긴 뒤
그녀는 자신의 성을 파르케라고 선언했다.
바샤는 신전이 청해온 빌로나 황녀 암살이라는
득 될 것 없는 제안을 수락한 후 리아와 함께 미냐르를 떠나버렸다.
◇◆◇
인간의 마음은 참 모순이 많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떤 단어로 규정하는 것조차 힘들다.
어떨 때는 말로 내뱉어야 느껴지는 감정도 있었다.
또 어떨 때는 꽁꽁 숨겨져 있어서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감정이 자신을 지배할 때도 있었다.
바샤는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현자가 되지는 못하고 점점 모순적으로 변하는 자신이 싫었다.
“당신은 아실까요?
그날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하에온은 파르케의 묘에
하얀 국화 다발을 내려놓으며 바샤에게 물었다.
바샤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하에온은 바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맹세 한 날.
전 너무 부끄러웠어요.”
바샤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하에온은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속을 다 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뇨. 당신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때 전, 제가 정말 천재인 줄 알고 있었어요.
조금 더 노력하면 조금 더 강해지면
언젠가 당신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죠.”
“충분해.”
바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파르케님.
바샤님이 꽃 들고 오지 않았다고 해도
너무 뭐라 하면 안 돼요.”
“파르케는 내 얼굴만 봐도 좋다고 할걸?
내 얼굴 예쁘다고 좋아한 거 기억 안 나?”
“맞아요.
제가 바샤님 볼을 꼬집어서 엉덩이를 몇 대나 맞았었는지.”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셋이 모인 건 오랜만이네요.”
하에온은 파르케의 죽음 이후 모든 사람에게 존칭과 예를 갖췄다.
“파르케가 살아있을 때나 존댓말 할 것이지.”
바샤는 지난 어린 날처럼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의 말에는 씁쓸함과 후회가 서려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추운 날이었죠.”
“언제를 말하는 거야.”
“항상.
파르케님과 함께 했을 때도.
우랄산맥 중턱에서도.
목숨 걸고 유시아 대륙을 건널 때도. 항상 이렇게 추웠어요.
그땐 바샤님처럼 강해지면 추위를 타지 않을 줄 알았어요.”
“맞아. 안 추워.”
바샤는 눈보라가 몰아쳐도 춥지 않았다.
이건 지금의 하에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전 추워서 겨울이 싫어요.”
“나도.”
그들에게 미냐르는 항상 춥고 매서운 곳이었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거세졌지만,
바샤와 하에온은 파르케의 무덤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메르헨스타인 성으로 모셔 드릴게요.”
하에온이 바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샤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파르케의 무덤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죽음 후에 귀신이 된다,
영혼이 된다는 터무니 없는 소리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파르케의 영혼만큼은 그들을 보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내려가서 이야기해.”
바샤는 그의 손을 지나쳐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에온의 얼굴에 아쉬움과 진한 슬픔이 맺혔지만
바샤는 모르는 척 지나쳤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전 쪽에서 산으로 올라오는 이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샤님.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바샤는 그의 거절에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저를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은 저들을 만나고 싶지 않잖아요.”
바샤는 그의 말에 동의 할수 밖에 없었다.
올라오고 있는 자들은 라자루스의 기사들이었다.
그들과 마주쳐 굳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바샤는 손가락을 휘둘러 기사들이
산에서 길을 헤매도록 환각 마법을 걸어버렸다.
“이제 되었지?”
“불쌍한 자들이에요. 바샤. 오늘만 봐주세요.”
“그러면 내 물음에 대답하고 가면 되겠네.”
하에온은 바샤의 강경한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되돌아온다는 말. 무슨 말이야?”
“말할 수 없어요.”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가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뭐?”
“신의 섭리대로. 전 말할 수 없어요.”
또.
신이다.
바샤를 이 세계로 부르고,
영원히 반복하는 저주를 내린 자.
신에게 물음을 구하니,
수수께끼 같은 신탁만 내리는 자.
“죄송해요.”
하에온은 바샤를 바라보았다.
바샤는 저 표정을 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신이 내려준 저주이니
정답은 알아서 찾아야 한다는 건가?
바샤는 이가 갈렸다.
신을 향한 혐오감이 저 너머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사라졌던 건데?”
바샤는 질문을 바꿔 다른 것을 하에온에게 물었다.
하에온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왜. 이것도 말하지 못해?”
“....제가....사라졌었나요?”
“지난-!”
바샤는 ‘지난 생 동안 사라졌었잖아!’라고 외치려 했다.
[말하게?]
[말할 거야?]
[그러면 이번에도 사라질 텐데.]
[사라져도 괜찮아?]
[어차피 죽일 거잖아. 바샤 네가 죽이는 건 어때?’-]
[말해. 얼른.]
[사라졌다고 말해.]
바샤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수백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제히 그들이 말하라고 소리를 쳐댔다.
바샤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속 안에 울려대는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도 재밌겠네]
[말해!]
[말하라고!!]
[재밌겠다. 죽여!]
[죽여!!!!!!!!!1]
그들은 일제히 바샤가 말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을 하면 그가 사라진다고 외쳐댔다.
지난 삶에서 하에온을 죽였을 때처럼 그들은 소리를 쳐댔다.
바샤의 눈에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삶처럼.
그를 다시 죽이는 환각.
그의 심장에 칼이 꽂히던 그 감각.
그의 눈에 이채가 사라지던 모습.
그가 후련한 듯 웃으며 울었던 표정.
뼛가루가 되어 흩어지던 모습까지.
바샤의 몸에 힘이 빠졌다.
귀를 틀어막았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눈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바샤님!”
하에온이 바샤를 외치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와 닿음과 동시 소리와 환각이 사라졌다.
쿵.
쿵.
그와 가까이 있으니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아직은 괜찮다.
그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바샤의 마음이 그의 심장 소리에 맞춰서 빠르게 진정되었다.
“바샤. 괜찮아요?”
그가 바샤를 껴안은 채로 물어왔다.
바샤의 진정되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요동쳐왔다.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안겨있음을 인지하고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쳤다.
그가 부드럽게 뒤로 밀려났다.
“괜찮아. 추워서 그래.”
바샤의 얼굴이 괜히 붉어지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푹 숙였다.
더한 일도 같이 한 사이인데
이 정도 스킨쉽으로 부끄러워지는 게
더욱 민망하면서 한편으로는 분했다.
“추우면 이제 집으로 가야죠.”
하에온의 말에 바샤는 다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기사들에게 걸려있던 환각 마법을 거둬들였다.
“하.”
바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많이 늘었죠?”
바샤가 한 번 더 마법을 쓰려하자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바샤의 손가락 사이로 밀착하며 들어온다.
살결과 살결이 조금의 공감도 없이 완전히 맞닿았다.
얼어 있던 그녀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오늘만....
오늘만 봐줘요.”
그는 웃지 않았다.
검은색 눈동자가 결연하게까지 느껴졌다.
“오늘만 우리 예전처럼 지내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여
바샤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기다릴게. 갔다 와.”
“고마워요.”
그는 그녀의 손을 아쉬운 듯
그의 손가락이 바샤의 손가락을 끝까지 스치며 놓았다.
그리곤 그녀를 지나쳐 기사들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바샤는 하에온의 뒤를 조심스레 밟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
투명 마법을 이중 삼중으로 걸었다.
‘어떤 일이길래?’
바샤는 자신을 두고 갈 정도로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그러냐며 속으로 외쳤다.
그는 기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신전으로 향했다.
바샤는 조금의 시간차를 두고 그를 따라 신전으로 들어갔다.
이미 신전 안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내부로 조심스럽게 잠입해
신전의 기둥 위에 자리 잡고 그를 찾았다.
하에온은 제사장의 의자에 턱을 괸 채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의례적으로 만드는 미소도 없었다.
차갑고 오만한 라자루스의 공왕만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바샤가 처음으로 듣는
낮고 무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에온의 목소리가 맞았지만
다른 사람이 내뱉는 음성 같이 들려왔다.
전율이 돋을 만큼의 이상한 이 낯섦.
금방 전까지 같이 추억을 공유했던 자가
저기에 오만하게 앉아 있는 자와 동일인이라는 게 믿겨 지지 않았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하.”
그의 맞은편에는 시체 몇 구와
한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 몇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하. 저는 정말 유시아 대륙으로 건너가던 상인들입니다.”
포박당한 사람은 절박하게 하에온에게 빌었다.
“그래. 그랬겠지.”
하에온은 손짓으로 그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의 뜻을 읽은 그의 부하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이의 포박을 풀었다.
“그럼 가보세요.”
하에온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 저었다.
포박당했던 이는 연신
‘감사합니다, 전하’를 외치며
중앙 신전에서 벗어나 바샤의 시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에 발을 딛었다.
바샤는 나간 이를 따라 자리를 옮겨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앞에는 이미 하에온이 서 있었다.
상인이라던 자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다시 중앙 신전으로 몸을 돌렸지만 하에온이 휘두른 칼에 그의 몸을 관통당했다.
“4개밖에 남지 않았네요.”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어지럽게 흩뿌려졌다.
하에온이 잡은 검날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황... 황제 폐하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전하! 정말로 전하를 배신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또 다른 포박당한 이가 살기 위해 몸부림쳐대며
무릎으로 눈 덮인 정원까지 걸어 나왔다.
하에온은 무릎으로 기어 나온 이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어버렸다.
“당연히 형님이 보냈겠죠.”
작가의 말
부족한 저의 작품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살포시 부탁드리겠습니다.
닫기대공님, 집착 말고 날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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