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발. 없다고 말해.
조회 : 843 추천 : 2 글자수 : 1.2만 자 2022-10-02
남은 이들 중 한 명은
괴기한 비명을 지르며 신전 깊숙이 기어들어 갔다.
하에온은 기어들어 가던 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순식간에 하에온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듯 옮겨졌다.
그의 목이 하에온의 손에 꺾여 버렸다.
“신전 안에서 소란은 안 되죠. 신께서 보고 계시잖아요.”
이미 신전 안에 여러 구의 시체들이 존재했지만
아무도 그의 모순된 말을 지적하진 못했다.
이제 남은 첩자는 한 명뿐이었다.
바샤가 아는 하에온이 아니었다.
하에온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이가 아니었다.
피를 휘두른 저 모습은
바샤가 알던 하에온이 아니었다.
“아니야.”
바샤는 자신도 모르게 뱉은 말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아니다.
그는 하에온이 맞다.
이제껏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저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그는 이제껏 바샤의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어울리지 않게 오랜만에 과거를 회상했더니
내가 잊고 있었나 보다.
데이모스는 저런 모습을 만드는 곳이었다.
바샤가 추억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없다.
해맑게 웃던 황족으로서 자긍심만 넘쳐나던 바보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만큼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항상 따뜻하게 쳐다봐주던 그녀의 연인은 없다.
그는 오래전. 첫 번째 생에 죽었다.
하에온도 나처럼 회귀를 통해 바뀌었을 것이다.
바샤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납득 시켜봤지만
차가운 현재 그의 모습이 더욱 낯설게만 느껴졌다.
바샤는 그에서 느껴지는 낯섦이 서먹했다.
그의 낯섦에 먹먹한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
그에게서 느껴지는 건 죄책감이었다.
그를 저렇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 세계를 설정한 사람으로서의 죄책감.
이제 와 죄책감을 느끼면 무엇을 하겠나.
그보다 더한 일도 저질렀던 나인데.
그를 보고 경악할 자격이나 되는가.
내가 그를 저렇게 만들었는데.
내가 이 세계를 만들었는데.
추억에서 벗어나 돌아온 현실은
너무나 공허했으며, 매서웠다.
숨어서 보는 것을 멈추고
바샤는 뒤돌아 홀로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은 자는 지하로 데려가세요.”
하에온은 살아남은 한 명을 가리키며 그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멀리 가세요.
제가 찾지도.
넘보지도 못할 만큼.”
그의 시선은 바샤가 숨어있던 기둥 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
바샤는 메르헨스타인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카로를 찾았다.
카로도 바샤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방 창문 앞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었다.
카로의 털은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을 받아 오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형의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의 형태로 돌아갈 것이다.
무형의 것은 영원할지어니. 」
카로의 입에서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카로가 아니었다.
작은 마물의 몸을 빌려 신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었다.
“하에온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신이 하는 건가.”
바샤는 카로에게 다가섰다.
카로의 동공에는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바샤가 조심스레 카로를 안아 들었을 때야, 그의 몸이 축 처졌다.
[죽여.]
[목을 비틀면 끝나잖아.]
[널 버린 간악한 신이잖아.]
그녀의 미친 자아가
카로를 죽여서라도 신에게 화풀이를 하자고
카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샤는 자신의 품에 곤히 잠든 카로를 내려다보았다.
“시끄러.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그녀는 다시는 저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카로를 품에 소중히 안고 잠에 들었다.
오늘 하루가 미친 듯이 길게 느껴졌다.
그날.
바샤는 꿈을 꾸었다.
파르케와 바샤, 하에온이 안전하게 우랄산맥을 넘어 라자루스에 도착한 꿈이었다.
.
.
.
.
.
모두가 잠에 든 밤.
창틀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그런 밤이었다.
메르헨스타인 저택의 모두가 곤히 잠에 들었을 때.
한 남성이 바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는 달빛을 닮은 은빛이었다.
그의 눈매는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었으며
눈동자는 햇빛을 머금은 금빛으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성인에 가까웠으나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던 은발의 소년이
바샤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나의 주인님.”
나즉이 바샤를 부르던 소년은
바샤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그녀에게 닿기 직전
바샤가 잠에 뒤척이며 소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년의 눈에 물기는 없었으나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는 손을 거두고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바샤를 바라보았다.
“이번 생은 반드시 지켜줄게.
닿는 것조차 아까운 나의 신.”
그는 한참을 잠든 바샤를 바라보았다.
미냐르에서 돌아온 다음 날.
1836년 7월 30일
바샤는 카로의 꼬리 공격에 눈을 뜨게 되었다.
카로가 자신의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바샤의 코를 간지럽혀댔다.
“냥!!! 주인님!! 일어나봐라냥!!!!!!!
내 몸이 커졌다냥!!!!!!!!!”
카로의 말대로 카로는 아기고양이가
아니라 조금 커진 어린 고양이가 되어있었다.
“그러게. 커졌네.”
“냥냥!!! 이제 나는 어린이다냥!!!!!!!”
“어린이 륜크스님. 난 더 잘게.”
바샤는 카로의 외침을 뒤로 한 채
노곤히 밀려오는 피로에 눈이 감겨왔다.
그녀의 단잠을 깨우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바샤님.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녀의 하녀였다.
아침부터 바샤를 찾은 키르헨은 화가 나 있었다.
키르헨은 자신의 집무실 쇼파에 앉아 있었는데
바샤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그녀에게 소리를 쳐댔다.
“바샤. 밖에서 뭘 했던 것이냐!”
“그냥. 뭐 이것저것 했어요.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잖아요.”
바샤는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에게 사실대로
‘어떤 조직에서 살인 청부업을 하다가,
그 조직 보스와 소국 하나까지 해치우고 요양 중이었어요.’
라고 할 수는 없었다.
키르헨의 앞에는 세 장의 편지와 꽃다발, 선물들이 널려있었다.
“라자루스 대공이 보낸 거야. 도대체-!”
그는 기가 차는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바샤는 하에온의 편지를 펼쳐보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송한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네. 그렇네요.”
바샤의 미적찌근한 반응에 키르헨이 ‘허. 참.’을 연발했다.
“대공과는 어떤 관계인 거냐.”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럼 이 선물들은 무엇인 게야?”
“저도 몰라요. 어디에선가 저를 봤겠죠.”
그의 집요한 시선이 바샤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넌 대공을 잘 모르는데 대공이 직접 이걸 보냈다.
그 라자루스 대공이?”
“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렇네요.”
키르헨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알겠다.”
잠깐의 정적 이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장은
케렌시아의 성녀와 나탈리에 황녀의 편지다.
벌써 이것까지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냈어.”
바샤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두 장의 편지를 눈으로 훑었다.
고급스러운 검보라색 편지지와 순백의 하얀 편지지가 보였다.
“폴에게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했는데.”
하긴.
폴이 적당히 답신을 써서 보내기엔 너무 거물들이었다.
“바샤!! 이 아비-!”
키르헨이 25살이나 먹은 딸의 아버지라고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는 그 단어를 내뱉고는 주춤거렸다.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말을 다시 정정했다.
“나에게 지금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줘야 너를 도와줄 수 있어.”
바샤는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친우였어요.”
케렌시아의 성녀인 로제타와는 친우라고 하기에 애매하지만
나탈리에 황녀와는 표면적으로 친우에 가까웠다.
바샤가 황녀의 암살을 위해 일부러 접근했긴 하지만.
“친우....친우....”
키르헨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친우’라는 단어만 되새겼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전 유시아 대륙에서 마금속 사업을 했습니다.”
첫 번째 삶에서 바샤는 미냐르 신전을 나와
리아와 함께 유시아 대륙의 서후 제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금속 회사를 인수하여 사업을 확장 시켰다.
마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유시아 대륙의 사람들은
바샤가 부린 조그마한 마법에도 환호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마법 쇼를 펼치며 확장한 그녀의 사업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반년도 안된 시간 동안 빠르게 확장한 그녀의 상품은
유시아 대륙을 넘어
판게아 대륙의 빌로나 제국에게까지
과장에 과장이 더해진 채
명성을 떨쳤다.
특히 황족, 왕족과 같이 고귀한 자들이
바샤의 마금속 장신구를 좋아했다.
모두 빌로나 황가에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빌로나 황가는 마법의 비호를 받아
이중 삼중으로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
첫 번째 바샤는
지금보다 약했으나 치기 어린 소녀였다.
빌로나 황성을 그녀의 힘으로 파괴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가의 최후는 주인공 일행에게 넘겼었다.
‘그땐 그 귀찮은 짓거리를 왜 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상상으로만 그려오던 장면을
직접 관람한다는 생각에 나름 들떠있었다.
“그래. 그랬지.”
키르헨은 바샤에게 더 설명해보라는 듯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제 회사가 마금속 장식품으로 유명하다 보니,
뭐. 그렇게 됐어요.”
그녀 나름대로 최대한 설명한 것이었다.
바샤에게는 오래전 인연들이었기 때문에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키르헨의 반짝거리던 눈은 무척이나 실망한 듯이 바닥으로 향했다.
“하... 알겠다. 올라가거라.”
그는 딸에게 축객령을 내리며 골머리가 아픈 듯
이제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맸다.
바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제타 성녀나, 빌로나 황가와 관련된 그 누구더라도.”
키르헨의 이어지는 말에 바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케렌시아 신전과 빌로나 황가 전체와는 어울리지 말 거라.
아비의 부탁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아버지’라는 단어에
다시 흠칫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바샤는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키르헨의 행동을 관찰했다.
키르헨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는 반복하며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답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항상 예리하게 날을 세운 칼 같았던 모습이었는데
오늘따라 칼날이 무뎌진 장난감 칼처럼 보였다.
“.....미안하구나.”
키르헨은 바샤의 앞에서 항상 죄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바샤에게 사죄했다.
“내가.....아니.....
하아.....
미안하구나. 바샤.”
자신이 키르헨을 아버지로 설정을 했으나
바샤는 부모였던 적이 없었기에
지금껏 그의 미안함이 막연하게만 느껴졌었다.
열한 번의 반복 끝에야
저 멀리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의 감정이
바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사랑스러운 딸이 20년간의 세월을 거쳐
웃음을 잃고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그 한 문장으로 모두 다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죄책감과 자괴감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죄스러울 것이다.
어젯밤 변해버린 하에온을 보고 바샤가 그렇게 느꼈으니깐.
바샤는 두 손으로 잡고 있던 하에온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사죄를 들어줘야,
자신도 하에온에게 사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합리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바샤는 그렇게라도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만 덜어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요.”
바샤가 미약하게 미소를 띄었다.
말을 뱉고 나서야 바샤는 자신의 진짜 마음이 느껴졌다.
“괜찮았어요.”
지난 생보다 힘이 더 커졌으니, 키르헨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생에서만이라도.
그의 사죄를 들어주면 안 될까?
20년 후 고통받을 자신을 알지만
한 번만 더 모르는 척 지나가면 안 될까.
어차피 그와 정을 쌓아봤자 모두 무너질 것이란 걸
여러 번의 생 끝에 알고 있지만
한 번만 더 멍청한 짓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하에온을 향한 죄책감도 핑계였을 뿐이다.
그녀는 단지 아버지의 정을 다시 한번 더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에온을 향한 죄책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한다고 핑계라도 대면서
다시 누군가를 밀어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에온의 편지가 구겨지며
그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툭하고 떨어졌다.
“전 행복하게 잘 살아왔어요. 미안하지 않아도 돼요.”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고 떨려왔다.
행복하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제발 죽여달라고 매일을 신에게 빌 만큼.
괴로운 날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다고 말을 해야
키르헨의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더 빨리 찾을 것을....”
키르헨의 눈에도 빠르게 눈물이 차오르더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지런히 놓여진 바샤의 손 위로 키르헨의 손이 겹쳐졌다.
“미안해...
이 아비가 못난 탓이다... 나를 원망하거라.”
그는 흐느끼며 말을 뱉어냈다.
가슴이 안개로 꽉 찬 듯 먹먹해져 왔다.
그녀는 지난밤처럼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묵묵히 그가 뱉어내는 모든 사죄에
물기 어린 미약한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참 모순이 많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떤 단어로 규정하는 것조차 힘들다.
어떨 때는 말로 내뱉어야 느껴지는 감정도 있었다.
또 어떨 때는 꽁꽁 숨겨져 있어서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감정이 자신을 지배할 때도 있었다.
바샤는 수백의 세월을 살았지만
현자가 되지는 못하고 점점 모순적으로 변하는 자신이 싫었다.
방으로 돌아온 바샤는 창가에 위치한
자신의 의자에 몸을 던졌다.
카로가 바샤의 무릎 위로 폴짝하고 뛰어올랐다.
“냥? 주인! 울었냥??”
“그런가봐.”
“주인은 의외로 울보다냥. 맨날 운다냥.”
카로가 바샤의 눈 위로 핑크 젤리를 꾹꾹 눌러댔다.
안구에 압박감을 느낀 바샤가
카로의 목덜미를 잡고 떼어냈다.
테이블 위에 카로를 올려두고는 하녀를 불러
오늘 자로 발행된 잡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하녀에게 가져오라고 시킨 신문은
유명인들의 소문이나 행적을 다루는 삼류 잡지였다.
하녀가 가져온 잡지를 휘리릭 넘겼다.
넘기는 중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바샤가 얼굴을 구겼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더 넘기다 보니 바샤가 찾는 사진이 나왔다.
하에온의 사진이 잡지의 두 면을 가득 채워 크게 걸려있었다.
“너 얘 알아?”
바샤가 하에온의 사진을 가리키며 카로에게 물었다.
“냐아앙???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섹시하면서 우수에 찬 눈!!!!
날카로운 콧날!!! 섬세한 몸 선!!!
위태로우면서 자상한 것 같은 이 미소!!!
이 완벽한 슈트 빨과 그 옷 속에 숨은 다부진 근육까지!!!
완전 내 취향이다냥!!!!!!”
카로는 사진 속으로 들어갈 기세로
코를 박고 연신 소리를 쳐대며 그의 외모를 묘사했다.
“너 여성체 였어?”
괜히 기분이 언짢아진 기분에 의아하며 카로에게 물었다.
“아직 무성체다냥!!!!!!! 쭈인님!!!
질투하냐냥????
카로는 이 남자보다 주인님이 더 취향이다냥!!!!”
카로가 허리를 펴고 서서 앞발로
바샤의 얼굴 하나하나를 가리켰다.
“화려한 눈코입!!!
빛에 따라 달라지는 머리 색.
나태로운 눈매에서 느껴지는 나른하고 섹시한 분위기,
유려한 몸 곡선.
가장 매력적인 오드아이까지.
완전 카로 취향이다냥.
한눈에 반했다냥.
카로는 평생 주인님 곁에 있을 거다냥.”
“얼굴만 보고 주인으로 선택했다고?”
“냐아앙???
제일 중요한게 외모다냥!!!!!
이 카로님은 외모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냥!!!!
처음 본 날 뛰면서도
저 멀리서 주인님의 뒤에서 후광이 보이고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냥.
‘아가야. 저 사람이 주인이다냥’
이게 한눈에 반한 거지 뭐겠냐냥!!!”
“마물 따위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냥!!!
주인님은 음유적 표현도 모른다냥!!!!”
바샤는 턱을 괴고 뚫어져라 자신의 륜크스를 쳐다봤다.
그날 카로가 들었다던 신의 목소리는 사실일 수도 있다.
어젯밤 카로의 몸으로 신이 직접 강림해
바샤에게 말을 전했다.
‘신과 조우 할 수 있는 환수 마물 륜크스라.’
모든 것을 조합해 봤을 때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카로는 자신의 몸에 신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카로. 그래서 이 남자 알아?”
“라...자.....루....스....
대.....공......의.......야.....콘...뉴?”
카로는 바샤의 물음에 다시 기사에 코를 박고
앞발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짚어가며 읽어나갔다.
“하에온 빌로나 라자루스 대공의 약혼녀.”
바샤는 자신이 뱉은 말을 곱씹더니 똥 씹은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카로에게서 잡지를 빼앗아 정독하기 시작했다.
잡지의 내용은 라자루스 대공이
조만간 약혼을 발표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약혼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로제타 성녀가 유력 후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 밑에,
성녀 로제타와 라자루스 대공의 데이트 장면을 보았다는
행인의 인터뷰가 적혀있었다.
또한 케렌시아 대륙에서만 활동하던
성녀 로제타가 예외적으로 이번 빌로나 건국제에 참석하는 것이
의뭉스럽다고 설명을 덧붙여 쓰여 있었다.
그 외 후보 명단도 깨알만 한 글씨로 쓰여 있었는데
그 중 바샤의 이름도 있었다.
바샤는 잡지를 찢어 불태워 버렸다.
“하에온 빌로나 라자루스 알아? 몰라?”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방 안 공기에
카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바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모..모른다냥...”
“동쪽 탑에는 언제 올라갔어?”
“냥? 카로는 올라간 적 없다냥!”
“어제는 봤다며?”
“무슨 소리냐냥....”
“「카로. 진실만을 말해」”
바샤가 마력을 담아 카로에게 물었다.
“냥!”
카로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발을 모아 제대로 앉았다.
“첫째. 하에온을 알아?”
“모른다냥.”
“둘째. 동쪽탑에 올라간 적 있어?”
“없다냥!”
“셋째. 신을 만난 적 있어?”
“...”
카로의 동공에 빛이 사라졌다.
륜크스의 동공이 풀리며 몸을 휘청거렸다가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냥? 우리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냥?”
명백한 이상 반응이었다.
신이라 불리는 간악한 자는
회귀도, 신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막아놓은 것이 분명했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짜증나네.”
‘누군가에게서 물어봤자 답을 찾을 수 없으니
알아서 해결해라?’
그녀에게 저주를 내린 신다운 행동이었다.
그래도 이전 생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들이긴 했다.
“카로는!!!
무조건 남성체 할꺼다냥.
남성체로 사는 게 꿈이었다냥!!!
주인님 옆에 꼭 붙어있을 꺼다냥.
주인님은 화내는 것도 섹시하다냥!!!
하에온인지 하데스인지 뭔지
그 남자보다 주인님이 더 짱 쎄고 짱 섹시하다냥!!!!
주인님이 훨씬 좋다냥.”
카로는 바샤에게 볼을 부비며 아부를 떨어댔다.
그의 애교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방 안의 공기가 다시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바샤는 카로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키르헨에게서 받은 세 개의 편지로 눈을 돌렸다.
내 목표는 늘 하나뿐이다.
평온한 안식.
반복되는 이 저주를 풀어야 한다.
저주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하찮은 것들에게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
매 삶마다 자신을 위협하는 원작의 여주인공인 로제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아예 죽여버리는 나탈리에 황녀,
바샤를 위협하는 것들은 많지만,
일단 지금은 저 두 여자를 처리해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바샤는 아침에 자신을 깨웠던 하녀를 불렀다.
이름 모르는 하녀는 매번 그녀의 잔심부름을 담당했다.
바샤가 가주를 포기한 이후
항상 공포에 질려있던 사용인들의 태도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특히나 그녀의 하녀는 다른 사용인들보다 그나마 편하게 대했다.
‘똑-똑’
하녀가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한 후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그녀의 눈과
바샤의 눈이
마주한 순간.
시간이 잠시 멈췄다.
바샤의 머리에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처럼
저 하녀의 과거, 현재, 미래가 흘러 들어왔다.
단연코 난 저 여자를 모른다.
저 여자는 소설 속 엑스트라도 아니었다.
저 여자는
‘하녀들은 두려움에 떨었다.’라는
한 줄짜리 문장 속 하녀를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삶에서 어떤 관계를 맺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샤는 그녀의 이름, 고향, 나이, 가족관계까지
다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다.
“바샤님.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하녀 메이는 바샤의 대답이 들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냥?”
카로가 바샤의 눈앞에 발을 이리저리 흔들어대어도
바샤는 메이를 응시한 채로 얼어 있었다.
륜크스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그녀의 뺨을 앞발로 툭툭 쳤다.
“냐앙??? 쭈인님???? 왜그러냥????”
카로에게 뺨을 맞아 볼이 얼얼해진 이후에야
바샤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메이.”
바샤는 하녀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것을 불렀다.
“예. 바샤님.”
메이의 대답에 바샤는 소름이 끼쳐 올라왔다.
누군가 바샤의 위에 찬물을 순식간에 끼얹은 느낌이었다.
혹시나 이름은 어디에선가 들었을 수도 있었다.
“메이. 네 고향이 어디지?”
“바르하의 히릿 사막입니다.”
“바르하의 히릿 사막이면
타난토스 대륙에 있는 거기 말이냥!!”
“네. 맞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은혜를 받아
판게아 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이것 역시 바샤가 본 장면과 일치했다.
바샤는 다시 조금 전에 자신이 본 장면들을 하나하나 상기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장신구 함을 열었다.
장신구 함에서
에메랄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메이에게 건넸다.
“네 동생 수술비로 사용해.”
자신이 본 미래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마지막 물음이었다.
바샤는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목걸이를 건네며 메이의 반응을 관찰했다.
‘제발...제발...아픈 동생 따위는 없다고 말해.
그래야 내가 본 예지가 틀려.
그냥 나는 헛것을 본 것일 뿐이야.
언젠가 너와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겠지.
우연히 너의 고향이나 이름을 들은 적이 있겠지.
제발. 없다고 말해.’
바샤는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미묘한 어긋남이 바샤의 심정을 묵직이 눌러왔다.
메이는 바샤가 내민 목걸이와 바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초록색 눈이 커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맞구나.’
바샤의 심장도 함께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바샤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샤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바샤는 메이가 내뱉은 말과 동시에 말을 속으로 뱉었다.
역시나. 예지가 맞았다.
메이는 신의 은혜를 얻는 표정으로 바샤를 바라보았다.
“그래.”
바샤의 눈에는 허망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이번 생에서도 하에온은 먼저 죽는구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문장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하에온의 편지로 향한다.
“동생이 건강해지는지 궁금하구나. 매일 경과를 나에게 알려줘.”
바샤는 자신이 이런 말을 뱉는 것도 미리 보았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이 바샤가 메이를 통해 본 미래 그대로였다.
‘나는 결국 이번 생에서도 하에온의 죽음을 마주하는구나.’
바샤가 미리 본 미래에는.
미래의 바샤는 자신의 입으로.
하에온의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메이의 시선으로 본 미래이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다.
창밖 풍경이나, 바샤의 옷으로 미루어보아 겨울이라는 점만 알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을 또다시 마주한다면 바샤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미 미쳤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죽음을 다시는 볼 자신이 없다.
그를 살려야 한다.
바샤가 본 미래는 실현되어서는 안 되었다.
신이 자신에게 미래를 알려주었으니 내가 미래를 바꾸면 된다.
‘미래는 바꾸면 그만이야.’
이번 생의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바샤는 속으로 자신에게 되새겼다.
괴기한 비명을 지르며 신전 깊숙이 기어들어 갔다.
하에온은 기어들어 가던 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순식간에 하에온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듯 옮겨졌다.
그의 목이 하에온의 손에 꺾여 버렸다.
“신전 안에서 소란은 안 되죠. 신께서 보고 계시잖아요.”
이미 신전 안에 여러 구의 시체들이 존재했지만
아무도 그의 모순된 말을 지적하진 못했다.
이제 남은 첩자는 한 명뿐이었다.
바샤가 아는 하에온이 아니었다.
하에온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이가 아니었다.
피를 휘두른 저 모습은
바샤가 알던 하에온이 아니었다.
“아니야.”
바샤는 자신도 모르게 뱉은 말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아니다.
그는 하에온이 맞다.
이제껏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저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그는 이제껏 바샤의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어울리지 않게 오랜만에 과거를 회상했더니
내가 잊고 있었나 보다.
데이모스는 저런 모습을 만드는 곳이었다.
바샤가 추억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없다.
해맑게 웃던 황족으로서 자긍심만 넘쳐나던 바보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만큼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항상 따뜻하게 쳐다봐주던 그녀의 연인은 없다.
그는 오래전. 첫 번째 생에 죽었다.
하에온도 나처럼 회귀를 통해 바뀌었을 것이다.
바샤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납득 시켜봤지만
차가운 현재 그의 모습이 더욱 낯설게만 느껴졌다.
바샤는 그에서 느껴지는 낯섦이 서먹했다.
그의 낯섦에 먹먹한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
그에게서 느껴지는 건 죄책감이었다.
그를 저렇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 세계를 설정한 사람으로서의 죄책감.
이제 와 죄책감을 느끼면 무엇을 하겠나.
그보다 더한 일도 저질렀던 나인데.
그를 보고 경악할 자격이나 되는가.
내가 그를 저렇게 만들었는데.
내가 이 세계를 만들었는데.
추억에서 벗어나 돌아온 현실은
너무나 공허했으며, 매서웠다.
숨어서 보는 것을 멈추고
바샤는 뒤돌아 홀로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은 자는 지하로 데려가세요.”
하에온은 살아남은 한 명을 가리키며 그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멀리 가세요.
제가 찾지도.
넘보지도 못할 만큼.”
그의 시선은 바샤가 숨어있던 기둥 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
바샤는 메르헨스타인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카로를 찾았다.
카로도 바샤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방 창문 앞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었다.
카로의 털은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을 받아 오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형의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의 형태로 돌아갈 것이다.
무형의 것은 영원할지어니. 」
카로의 입에서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카로가 아니었다.
작은 마물의 몸을 빌려 신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었다.
“하에온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신이 하는 건가.”
바샤는 카로에게 다가섰다.
카로의 동공에는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바샤가 조심스레 카로를 안아 들었을 때야, 그의 몸이 축 처졌다.
[죽여.]
[목을 비틀면 끝나잖아.]
[널 버린 간악한 신이잖아.]
그녀의 미친 자아가
카로를 죽여서라도 신에게 화풀이를 하자고
카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샤는 자신의 품에 곤히 잠든 카로를 내려다보았다.
“시끄러.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그녀는 다시는 저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카로를 품에 소중히 안고 잠에 들었다.
오늘 하루가 미친 듯이 길게 느껴졌다.
그날.
바샤는 꿈을 꾸었다.
파르케와 바샤, 하에온이 안전하게 우랄산맥을 넘어 라자루스에 도착한 꿈이었다.
.
.
.
.
.
모두가 잠에 든 밤.
창틀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그런 밤이었다.
메르헨스타인 저택의 모두가 곤히 잠에 들었을 때.
한 남성이 바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는 달빛을 닮은 은빛이었다.
그의 눈매는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었으며
눈동자는 햇빛을 머금은 금빛으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성인에 가까웠으나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던 은발의 소년이
바샤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나의 주인님.”
나즉이 바샤를 부르던 소년은
바샤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그녀에게 닿기 직전
바샤가 잠에 뒤척이며 소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년의 눈에 물기는 없었으나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는 손을 거두고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바샤를 바라보았다.
“이번 생은 반드시 지켜줄게.
닿는 것조차 아까운 나의 신.”
그는 한참을 잠든 바샤를 바라보았다.
미냐르에서 돌아온 다음 날.
1836년 7월 30일
바샤는 카로의 꼬리 공격에 눈을 뜨게 되었다.
카로가 자신의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바샤의 코를 간지럽혀댔다.
“냥!!! 주인님!! 일어나봐라냥!!!!!!!
내 몸이 커졌다냥!!!!!!!!!”
카로의 말대로 카로는 아기고양이가
아니라 조금 커진 어린 고양이가 되어있었다.
“그러게. 커졌네.”
“냥냥!!! 이제 나는 어린이다냥!!!!!!!”
“어린이 륜크스님. 난 더 잘게.”
바샤는 카로의 외침을 뒤로 한 채
노곤히 밀려오는 피로에 눈이 감겨왔다.
그녀의 단잠을 깨우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바샤님.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녀의 하녀였다.
아침부터 바샤를 찾은 키르헨은 화가 나 있었다.
키르헨은 자신의 집무실 쇼파에 앉아 있었는데
바샤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그녀에게 소리를 쳐댔다.
“바샤. 밖에서 뭘 했던 것이냐!”
“그냥. 뭐 이것저것 했어요.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잖아요.”
바샤는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에게 사실대로
‘어떤 조직에서 살인 청부업을 하다가,
그 조직 보스와 소국 하나까지 해치우고 요양 중이었어요.’
라고 할 수는 없었다.
키르헨의 앞에는 세 장의 편지와 꽃다발, 선물들이 널려있었다.
“라자루스 대공이 보낸 거야. 도대체-!”
그는 기가 차는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바샤는 하에온의 편지를 펼쳐보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송한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네. 그렇네요.”
바샤의 미적찌근한 반응에 키르헨이 ‘허. 참.’을 연발했다.
“대공과는 어떤 관계인 거냐.”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럼 이 선물들은 무엇인 게야?”
“저도 몰라요. 어디에선가 저를 봤겠죠.”
그의 집요한 시선이 바샤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넌 대공을 잘 모르는데 대공이 직접 이걸 보냈다.
그 라자루스 대공이?”
“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렇네요.”
키르헨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알겠다.”
잠깐의 정적 이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장은
케렌시아의 성녀와 나탈리에 황녀의 편지다.
벌써 이것까지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냈어.”
바샤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두 장의 편지를 눈으로 훑었다.
고급스러운 검보라색 편지지와 순백의 하얀 편지지가 보였다.
“폴에게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했는데.”
하긴.
폴이 적당히 답신을 써서 보내기엔 너무 거물들이었다.
“바샤!! 이 아비-!”
키르헨이 25살이나 먹은 딸의 아버지라고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는 그 단어를 내뱉고는 주춤거렸다.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말을 다시 정정했다.
“나에게 지금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줘야 너를 도와줄 수 있어.”
바샤는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친우였어요.”
케렌시아의 성녀인 로제타와는 친우라고 하기에 애매하지만
나탈리에 황녀와는 표면적으로 친우에 가까웠다.
바샤가 황녀의 암살을 위해 일부러 접근했긴 하지만.
“친우....친우....”
키르헨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친우’라는 단어만 되새겼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전 유시아 대륙에서 마금속 사업을 했습니다.”
첫 번째 삶에서 바샤는 미냐르 신전을 나와
리아와 함께 유시아 대륙의 서후 제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금속 회사를 인수하여 사업을 확장 시켰다.
마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유시아 대륙의 사람들은
바샤가 부린 조그마한 마법에도 환호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마법 쇼를 펼치며 확장한 그녀의 사업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반년도 안된 시간 동안 빠르게 확장한 그녀의 상품은
유시아 대륙을 넘어
판게아 대륙의 빌로나 제국에게까지
과장에 과장이 더해진 채
명성을 떨쳤다.
특히 황족, 왕족과 같이 고귀한 자들이
바샤의 마금속 장신구를 좋아했다.
모두 빌로나 황가에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빌로나 황가는 마법의 비호를 받아
이중 삼중으로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
첫 번째 바샤는
지금보다 약했으나 치기 어린 소녀였다.
빌로나 황성을 그녀의 힘으로 파괴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가의 최후는 주인공 일행에게 넘겼었다.
‘그땐 그 귀찮은 짓거리를 왜 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상상으로만 그려오던 장면을
직접 관람한다는 생각에 나름 들떠있었다.
“그래. 그랬지.”
키르헨은 바샤에게 더 설명해보라는 듯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제 회사가 마금속 장식품으로 유명하다 보니,
뭐. 그렇게 됐어요.”
그녀 나름대로 최대한 설명한 것이었다.
바샤에게는 오래전 인연들이었기 때문에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키르헨의 반짝거리던 눈은 무척이나 실망한 듯이 바닥으로 향했다.
“하... 알겠다. 올라가거라.”
그는 딸에게 축객령을 내리며 골머리가 아픈 듯
이제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맸다.
바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제타 성녀나, 빌로나 황가와 관련된 그 누구더라도.”
키르헨의 이어지는 말에 바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케렌시아 신전과 빌로나 황가 전체와는 어울리지 말 거라.
아비의 부탁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아버지’라는 단어에
다시 흠칫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바샤는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고 키르헨의 행동을 관찰했다.
키르헨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는 반복하며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답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항상 예리하게 날을 세운 칼 같았던 모습이었는데
오늘따라 칼날이 무뎌진 장난감 칼처럼 보였다.
“.....미안하구나.”
키르헨은 바샤의 앞에서 항상 죄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바샤에게 사죄했다.
“내가.....아니.....
하아.....
미안하구나. 바샤.”
자신이 키르헨을 아버지로 설정을 했으나
바샤는 부모였던 적이 없었기에
지금껏 그의 미안함이 막연하게만 느껴졌었다.
열한 번의 반복 끝에야
저 멀리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의 감정이
바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사랑스러운 딸이 20년간의 세월을 거쳐
웃음을 잃고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그 한 문장으로 모두 다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죄책감과 자괴감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죄스러울 것이다.
어젯밤 변해버린 하에온을 보고 바샤가 그렇게 느꼈으니깐.
바샤는 두 손으로 잡고 있던 하에온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사죄를 들어줘야,
자신도 하에온에게 사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합리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바샤는 그렇게라도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만 덜어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요.”
바샤가 미약하게 미소를 띄었다.
말을 뱉고 나서야 바샤는 자신의 진짜 마음이 느껴졌다.
“괜찮았어요.”
지난 생보다 힘이 더 커졌으니, 키르헨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생에서만이라도.
그의 사죄를 들어주면 안 될까?
20년 후 고통받을 자신을 알지만
한 번만 더 모르는 척 지나가면 안 될까.
어차피 그와 정을 쌓아봤자 모두 무너질 것이란 걸
여러 번의 생 끝에 알고 있지만
한 번만 더 멍청한 짓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하에온을 향한 죄책감도 핑계였을 뿐이다.
그녀는 단지 아버지의 정을 다시 한번 더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에온을 향한 죄책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한다고 핑계라도 대면서
다시 누군가를 밀어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에온의 편지가 구겨지며
그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툭하고 떨어졌다.
“전 행복하게 잘 살아왔어요. 미안하지 않아도 돼요.”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고 떨려왔다.
행복하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제발 죽여달라고 매일을 신에게 빌 만큼.
괴로운 날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다고 말을 해야
키르헨의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더 빨리 찾을 것을....”
키르헨의 눈에도 빠르게 눈물이 차오르더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지런히 놓여진 바샤의 손 위로 키르헨의 손이 겹쳐졌다.
“미안해...
이 아비가 못난 탓이다... 나를 원망하거라.”
그는 흐느끼며 말을 뱉어냈다.
가슴이 안개로 꽉 찬 듯 먹먹해져 왔다.
그녀는 지난밤처럼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묵묵히 그가 뱉어내는 모든 사죄에
물기 어린 미약한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참 모순이 많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떤 단어로 규정하는 것조차 힘들다.
어떨 때는 말로 내뱉어야 느껴지는 감정도 있었다.
또 어떨 때는 꽁꽁 숨겨져 있어서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감정이 자신을 지배할 때도 있었다.
바샤는 수백의 세월을 살았지만
현자가 되지는 못하고 점점 모순적으로 변하는 자신이 싫었다.
방으로 돌아온 바샤는 창가에 위치한
자신의 의자에 몸을 던졌다.
카로가 바샤의 무릎 위로 폴짝하고 뛰어올랐다.
“냥? 주인! 울었냥??”
“그런가봐.”
“주인은 의외로 울보다냥. 맨날 운다냥.”
카로가 바샤의 눈 위로 핑크 젤리를 꾹꾹 눌러댔다.
안구에 압박감을 느낀 바샤가
카로의 목덜미를 잡고 떼어냈다.
테이블 위에 카로를 올려두고는 하녀를 불러
오늘 자로 발행된 잡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하녀에게 가져오라고 시킨 신문은
유명인들의 소문이나 행적을 다루는 삼류 잡지였다.
하녀가 가져온 잡지를 휘리릭 넘겼다.
넘기는 중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바샤가 얼굴을 구겼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더 넘기다 보니 바샤가 찾는 사진이 나왔다.
하에온의 사진이 잡지의 두 면을 가득 채워 크게 걸려있었다.
“너 얘 알아?”
바샤가 하에온의 사진을 가리키며 카로에게 물었다.
“냐아앙???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섹시하면서 우수에 찬 눈!!!!
날카로운 콧날!!! 섬세한 몸 선!!!
위태로우면서 자상한 것 같은 이 미소!!!
이 완벽한 슈트 빨과 그 옷 속에 숨은 다부진 근육까지!!!
완전 내 취향이다냥!!!!!!”
카로는 사진 속으로 들어갈 기세로
코를 박고 연신 소리를 쳐대며 그의 외모를 묘사했다.
“너 여성체 였어?”
괜히 기분이 언짢아진 기분에 의아하며 카로에게 물었다.
“아직 무성체다냥!!!!!!! 쭈인님!!!
질투하냐냥????
카로는 이 남자보다 주인님이 더 취향이다냥!!!!”
카로가 허리를 펴고 서서 앞발로
바샤의 얼굴 하나하나를 가리켰다.
“화려한 눈코입!!!
빛에 따라 달라지는 머리 색.
나태로운 눈매에서 느껴지는 나른하고 섹시한 분위기,
유려한 몸 곡선.
가장 매력적인 오드아이까지.
완전 카로 취향이다냥.
한눈에 반했다냥.
카로는 평생 주인님 곁에 있을 거다냥.”
“얼굴만 보고 주인으로 선택했다고?”
“냐아앙???
제일 중요한게 외모다냥!!!!!
이 카로님은 외모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냥!!!!
처음 본 날 뛰면서도
저 멀리서 주인님의 뒤에서 후광이 보이고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냥.
‘아가야. 저 사람이 주인이다냥’
이게 한눈에 반한 거지 뭐겠냐냥!!!”
“마물 따위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냥!!!
주인님은 음유적 표현도 모른다냥!!!!”
바샤는 턱을 괴고 뚫어져라 자신의 륜크스를 쳐다봤다.
그날 카로가 들었다던 신의 목소리는 사실일 수도 있다.
어젯밤 카로의 몸으로 신이 직접 강림해
바샤에게 말을 전했다.
‘신과 조우 할 수 있는 환수 마물 륜크스라.’
모든 것을 조합해 봤을 때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카로는 자신의 몸에 신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카로. 그래서 이 남자 알아?”
“라...자.....루....스....
대.....공......의.......야.....콘...뉴?”
카로는 바샤의 물음에 다시 기사에 코를 박고
앞발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짚어가며 읽어나갔다.
“하에온 빌로나 라자루스 대공의 약혼녀.”
바샤는 자신이 뱉은 말을 곱씹더니 똥 씹은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카로에게서 잡지를 빼앗아 정독하기 시작했다.
잡지의 내용은 라자루스 대공이
조만간 약혼을 발표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약혼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로제타 성녀가 유력 후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 밑에,
성녀 로제타와 라자루스 대공의 데이트 장면을 보았다는
행인의 인터뷰가 적혀있었다.
또한 케렌시아 대륙에서만 활동하던
성녀 로제타가 예외적으로 이번 빌로나 건국제에 참석하는 것이
의뭉스럽다고 설명을 덧붙여 쓰여 있었다.
그 외 후보 명단도 깨알만 한 글씨로 쓰여 있었는데
그 중 바샤의 이름도 있었다.
바샤는 잡지를 찢어 불태워 버렸다.
“하에온 빌로나 라자루스 알아? 몰라?”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방 안 공기에
카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바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모..모른다냥...”
“동쪽 탑에는 언제 올라갔어?”
“냥? 카로는 올라간 적 없다냥!”
“어제는 봤다며?”
“무슨 소리냐냥....”
“「카로. 진실만을 말해」”
바샤가 마력을 담아 카로에게 물었다.
“냥!”
카로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발을 모아 제대로 앉았다.
“첫째. 하에온을 알아?”
“모른다냥.”
“둘째. 동쪽탑에 올라간 적 있어?”
“없다냥!”
“셋째. 신을 만난 적 있어?”
“...”
카로의 동공에 빛이 사라졌다.
륜크스의 동공이 풀리며 몸을 휘청거렸다가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냥? 우리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냥?”
명백한 이상 반응이었다.
신이라 불리는 간악한 자는
회귀도, 신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막아놓은 것이 분명했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짜증나네.”
‘누군가에게서 물어봤자 답을 찾을 수 없으니
알아서 해결해라?’
그녀에게 저주를 내린 신다운 행동이었다.
그래도 이전 생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들이긴 했다.
“카로는!!!
무조건 남성체 할꺼다냥.
남성체로 사는 게 꿈이었다냥!!!
주인님 옆에 꼭 붙어있을 꺼다냥.
주인님은 화내는 것도 섹시하다냥!!!
하에온인지 하데스인지 뭔지
그 남자보다 주인님이 더 짱 쎄고 짱 섹시하다냥!!!!
주인님이 훨씬 좋다냥.”
카로는 바샤에게 볼을 부비며 아부를 떨어댔다.
그의 애교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방 안의 공기가 다시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바샤는 카로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키르헨에게서 받은 세 개의 편지로 눈을 돌렸다.
내 목표는 늘 하나뿐이다.
평온한 안식.
반복되는 이 저주를 풀어야 한다.
저주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하찮은 것들에게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
매 삶마다 자신을 위협하는 원작의 여주인공인 로제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아예 죽여버리는 나탈리에 황녀,
바샤를 위협하는 것들은 많지만,
일단 지금은 저 두 여자를 처리해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바샤는 아침에 자신을 깨웠던 하녀를 불렀다.
이름 모르는 하녀는 매번 그녀의 잔심부름을 담당했다.
바샤가 가주를 포기한 이후
항상 공포에 질려있던 사용인들의 태도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특히나 그녀의 하녀는 다른 사용인들보다 그나마 편하게 대했다.
‘똑-똑’
하녀가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한 후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그녀의 눈과
바샤의 눈이
마주한 순간.
시간이 잠시 멈췄다.
바샤의 머리에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처럼
저 하녀의 과거, 현재, 미래가 흘러 들어왔다.
단연코 난 저 여자를 모른다.
저 여자는 소설 속 엑스트라도 아니었다.
저 여자는
‘하녀들은 두려움에 떨었다.’라는
한 줄짜리 문장 속 하녀를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삶에서 어떤 관계를 맺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샤는 그녀의 이름, 고향, 나이, 가족관계까지
다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다.
“바샤님.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하녀 메이는 바샤의 대답이 들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냥?”
카로가 바샤의 눈앞에 발을 이리저리 흔들어대어도
바샤는 메이를 응시한 채로 얼어 있었다.
륜크스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그녀의 뺨을 앞발로 툭툭 쳤다.
“냐앙??? 쭈인님???? 왜그러냥????”
카로에게 뺨을 맞아 볼이 얼얼해진 이후에야
바샤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메이.”
바샤는 하녀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것을 불렀다.
“예. 바샤님.”
메이의 대답에 바샤는 소름이 끼쳐 올라왔다.
누군가 바샤의 위에 찬물을 순식간에 끼얹은 느낌이었다.
혹시나 이름은 어디에선가 들었을 수도 있었다.
“메이. 네 고향이 어디지?”
“바르하의 히릿 사막입니다.”
“바르하의 히릿 사막이면
타난토스 대륙에 있는 거기 말이냥!!”
“네. 맞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은혜를 받아
판게아 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이것 역시 바샤가 본 장면과 일치했다.
바샤는 다시 조금 전에 자신이 본 장면들을 하나하나 상기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장신구 함을 열었다.
장신구 함에서
에메랄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메이에게 건넸다.
“네 동생 수술비로 사용해.”
자신이 본 미래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마지막 물음이었다.
바샤는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목걸이를 건네며 메이의 반응을 관찰했다.
‘제발...제발...아픈 동생 따위는 없다고 말해.
그래야 내가 본 예지가 틀려.
그냥 나는 헛것을 본 것일 뿐이야.
언젠가 너와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겠지.
우연히 너의 고향이나 이름을 들은 적이 있겠지.
제발. 없다고 말해.’
바샤는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미묘한 어긋남이 바샤의 심정을 묵직이 눌러왔다.
메이는 바샤가 내민 목걸이와 바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초록색 눈이 커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맞구나.’
바샤의 심장도 함께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바샤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샤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바샤는 메이가 내뱉은 말과 동시에 말을 속으로 뱉었다.
역시나. 예지가 맞았다.
메이는 신의 은혜를 얻는 표정으로 바샤를 바라보았다.
“그래.”
바샤의 눈에는 허망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이번 생에서도 하에온은 먼저 죽는구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문장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하에온의 편지로 향한다.
“동생이 건강해지는지 궁금하구나. 매일 경과를 나에게 알려줘.”
바샤는 자신이 이런 말을 뱉는 것도 미리 보았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이 바샤가 메이를 통해 본 미래 그대로였다.
‘나는 결국 이번 생에서도 하에온의 죽음을 마주하는구나.’
바샤가 미리 본 미래에는.
미래의 바샤는 자신의 입으로.
하에온의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메이의 시선으로 본 미래이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었다.
창밖 풍경이나, 바샤의 옷으로 미루어보아 겨울이라는 점만 알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을 또다시 마주한다면 바샤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미 미쳤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죽음을 다시는 볼 자신이 없다.
그를 살려야 한다.
바샤가 본 미래는 실현되어서는 안 되었다.
신이 자신에게 미래를 알려주었으니 내가 미래를 바꾸면 된다.
‘미래는 바꾸면 그만이야.’
이번 생의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바샤는 속으로 자신에게 되새겼다.
작가의 말
부족한 저의 작품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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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대공님, 집착 말고 날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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