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저는 당신을 위해 가주가 되겠습니다
조회 : 842 추천 : 1 글자수 : 6,434 자 2022-10-08
로제타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바샤는 로제타를 굳이 배웅하지 않았다.
혼자 온실에 남아 생각을 정리했다.
‘영혼의 맹세가 실현되었다.
데이모스의 맹세마저 특별한 도구를 사용했었는데.’
“실현이 되었다?”
바샤는 자신의 힘을 다시 개방했다.
짙은 검은 마력.
그 위로 빛나는 별처럼 박힌 성력.
매 생을 반복할 때마다 힘이 강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그녀의 힘이 더 짙어졌다.
신탁.
갑자기 생겨버린 예지 능력.
메이의 미래를 예견한 이후
메이의 인생은 자신이 본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미래도 확인해 봤지만
미래가 읽히지 않았다.
“역시 답은 성물과 신탁에 있나.”
혼자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온실에 다른 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온실에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바샤, 키르헨 그리고 시몬이었다.
“시몬 메르헨스타인.”
이 인기척은 시몬 이었다.
“로제타 성녀님은 방금 전 나가셨어.”
바샤는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성녀님이 가시는 걸 보고 왔습니다.”
시몬의 대답에 바샤는 그제야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바샤는 이 주인공 커플이 오늘 쌍으로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바샤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시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갯짓으로 그에게 얼른 말하고 꺼지라는 눈치를 주었다.
“메르헨스타인의 탑.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된 것 같은 호텔에서의 만남을 떠올렸다.
「내가 돌아가면, 넌 메르헨스타인에게서 버려질 거야.
또다시 메르헨스타인의 탑에 갇히고 싶어?」
‘아 맞다. 그때 그런 말을 했었지.
바샤 이 등신. 그걸 아는 척하면 어떻게 해.’
그때 시몬에게 언급한 탑은 수도 저택의 탑이 아닌
메르헨스타인 지역의 본성의 탑이었다.
바샤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시치미 떼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말이야. 탑? 내가 언제 탑을 말했어.”
“당신은 정말....”
바샤는 최대한 불량스럽게 시치미 떼었으나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시몬은 감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지?’
“감사합니다.”
시몬이 바샤에게 고개까지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바샤는 더욱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우직하고 정직한 기사님인 시몬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는 아시다시피 가주님에게 거둬진 바르하 제국의 최후의 황손입니다.”
바르하 제국은 타난토스 대륙의 지배자였으나 타난토스 대륙에 마물들이 범람하기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바샤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넘쳐났다.
‘왜 시몬이 갑자기 찾아와서 고해 성사를 하는 거지?’
“모두가 마물을 막지 못했다고, 마력 쓰레기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마물 웨이브를 일으킨 바르하 제국의 황가를 비난했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저의 조상은 바르하 제국민들에게 처형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바르하의 마법사들은 황족이 성인이 되면 마력이 폭주하여 죽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때 키르헨 메르헨스타인님이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바샤를 찾기 위해 타난토스 대륙으로 향했던 키르헨은 목숨이 위태로웠던 어린 시몬을 구해주었다.
어린 시몬은 타고난 거대한 마력으로 인해 마력 폭주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마력 폭주를 마력제어 도구를 사용해 눌러주고 시몬을 구해준 사람이 키르헨이었다.
키르헨도 시몬의 폭주를 안정적으로 누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으며 위험했기에 시몬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메르헨스타인 영지의 탑에 가두고 그를 치료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야.”
바샤는 그의 과거사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관없으니 온실에서 나가라는 의미였다.
“역시...당신은....”
요컨대 왜 그는 다시 한번 엄청난 명작을 읽은 사람처럼 감동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몬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바샤는 더 큰 오해를 받기 싫어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기로 결심했다.
“역시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가주 자리를 저에게 넘기신 거군요.”
바샤는 자신의 결심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샤님. 저는 당신을 위해 가주가 되겠습니다.”
바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대사의 주어는 바샤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저 대사의 주어는 로제타여야 했다.
원작에서 시몬은 로제타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자 읊었던 말이었다.
“뭐?”
바샤는 입을 다물었다고 오해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당신이 저의 비밀을 지켜주고,
메르헨스타인으로 살게 해주었습니다. 당신도 가주 자리를 내어놓는다는 것은 힘든 선택이었겠지요.”
“아니. 오해 하지마. 정말 귀찮은 자리라서 하지 않은 거야.”
바샤가 그녀답지 않게 팔을 저으며 아니라고 피력했다.
“하긴. 당신은 메르헨스타인이라는 가문의 이름 없이도 홀로 빛나던 사람이었지요. 당신은 서후 제국의 대 마법사였으니깐요.”
“아니!”
바샤는 자신의 이마를 탁하고 칠 수 밖에 없었다.
서후 제국의 대마법사는 황성에서 불로 용을 만드는 쇼 한번 보여주고 얻은 칭호였다.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대 마법사니, 현자니 그런 말 들을 마법이 아니었다.
단지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서후 제국민들이 보기에 신기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빌어먹은 첫 번째 바샤.
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다닌거야.
“서후 제국의 대마법사로 호위호식을 누리며 살 수 있었는데.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돌아오셨음에도. 가주 자리를 저에게 내어준 건 모두 신전 때문입니까?”
“아니.”
‘그건 하에온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서 그냥 여기로 왔던 거야.’
바샤는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며 마음속으로 절규 했다.
“솔직하게 말씀하시기 어려운 거 잘 압니다.”
시몬은 바샤의 부정을 이제 긍정으로 받아 들이기로 했나보다.
이제는 바샤도 거듭 아니라고 하기 벅찼다.
“제가 가주가 되어 신전으로부터, 황성으로부터.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시몬은 결의를 다지더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가슴 앞에 절도 있게 한쪽 팔을 수평으로 들었다.
바르하 제국식 기사 서임 자세였다.
“아니...그럴 필요는....”
바샤는 그를 일으키기 위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목숨을 받처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시몬은 다가온 바샤의 오른손을 덥석 잡더니 손등에 키스를 했다.
물컹하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바샤는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세게 쳤다.
‘오늘 주인공 커플이 지랄하는 날이 맞네. 맞아.’
바샤는 아무리 그에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시몬은 ‘압니다.’만을 내뱉으며 저 혼자만의 오해를 더욱 크게 부풀렸다.
마침내 바샤는 그에게 백기를 들었다.
시몬은 저 혼자만의 기사 서임 이후 바샤의 뒷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새벽에도 한 번씩 나와 그녀의 방 근처를 순찰을 도는 시몬 덕분에 하에온의 저택 방문은 어려웠다.
한번은 바샤가 시몬을 재우려고 했으나, 그가 평소 착용하고 다니는 마력 제어구 때문인지 바샤의 마법이 잘 듣지 않았다. 마력에 걸리긴 하는데 독이 해독되듯 빠르게 효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마법을 세게 걸기에는 마력 제어구가 깨질까 걱정되었다.
마력 제어구가 깨지면 시몬이 폭주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바샤는 시몬을 죽여야 했고, 그녀가 아니더라도 키르헨이 시몬을 죽여야만 했다.
시몬이 사라지면 메르헨스타인 가주자리는 바샤였다.
아직은 시몬이 체스 말로 필요했다.
“등신 같은 바샤. 왜 굳이 남자 주인공한테 쓸데없는 방어 패시브 스킬을 주어서는.”
“쟤 말하는거냥?”
카로가 꼬리를 둥글게 말아 홀로 정원에서 바샤를 지키고 있는 시몬을 가리켰다.
시몬이 바샤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하자, 먼저 날을 세운 건 카로였다.
“주인님을 지키는 건 나로 충분한데냥. 쟤보다는 내가 더 세다 냥! 카로로 충분하지 않냐냥?”
카로가 허리를 곧게 펴고 바샤의 가슴을 솜 망치로 두들겨댔다.
바샤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닌데.”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이런 관계를 바란 건 아니었다.
“주인님!! 얼른 내가 더 좋다고 말하라냥!!!”
카로는 바샤가 반응하지 않자 주먹에 힘을 더 주기 시작했다.
찌이익-
바샤의 한탄을 잠재운 건 카로의 발톱으로 인해 바샤의 옷이 찢겨나가는 소리였다.
“하아...”
“쭈....쮸인님.....”
놀란 카로가 주먹질 하던 자세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카로는 찢겨버린 옷조각을 들고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대었다.
카로가 손을 떼자 붙어있을 리 만무한 옷자락이 휘리릭 떨어졌다.
“하아아.......”
바샤는 한숨을 더 크게 내쉬었다.
“주인님...미안하다냥......옷사러 가자냥. 내...내가 사주겠다냥.”
그러고보니 곧 건국제였다.
건국제에 입고 나갈 드레스를 하나 맞추긴 맞춰야 했었다.
바샤는 보통 재단사를 저택으로 부르는 편이었다.
“옷을 사러 나가는 척. 하에온에게 갔다 올까?”
한 달이나 지나 바샤에 대한 기자들의 관심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요근래 하에온의 저택도 방문을 못했었다.
그에게 더 이상 회귀에 대해 물어 보지 못한단 건 알아도, 그의 예정된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야 했다.
카로는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은지 고개가 떨어지도록 끄덕였다.
◇◆◇
바샤는 키르헨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외출을 이야기했다.
“안된다! 혼자서 밖을 돌아다닌다니! 건국제 때문에 수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많아.”
그녀의 아버지인 키르헨이 호통을 쳐댔다.
이 세계 어떤 누가 수도에 있던지 사람이라면 열한번째 바샤는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드래곤 정도면 모를까냥.”
바샤의 무릎에서 카로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시몬이 바샤 곁을 맴돌기 시작할 때부터 카로는 바샤에게서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쉿.”
바샤는 카로에게 양배추를 한 잎 떼어주며 입을 막았다.
카로는 구길 면적도 좁으면서 온 힘을 다해 얼굴을 구겨가며 양배추를 씹었다.
키르헨의 과보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한 번 잃어버렸던 딸이기에 그의 과보호는 당연한 거였다.
“그러면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갈게요.”
“누가 너를 노리고 있는 줄 알고! 호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나, 시몬 정도면 모를까.”
“맞습니다. 바샤님. 밖은 위험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몬 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했다.
“흥. 나로 충분하다냥!!”
카로가 시몬에게 눈총을 쏘아대었다.
시몬은 카로의 눈총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바샤만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각하와 같이 가죠.”
바샤는 부담스럽게 그녀를 처다 보는 시몬보다는 키르헨이 더 편했다.
카로가 유난히 시몬을 경계하기도 했다.
“크흠...그러면 뭐...”
바샤의 대답에 키르헨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바샤의 선택은 물거품이 된 채.
하악질을 해대는 카로와 그런 카로를 무시하는 시몬과 함께 수도의 제 5구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분명 바샤는 무서운 아저씨랑 가겠다 했다냥!!!! 무서운 아저씨는 어디 가고 쟤가 왔냐냥!”
“각하께서는 바쁘시다.”
시몬의 말대로 키르헨은 아침에 급히 황성으로 가야했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키르헨을 찾은 것이였다.
“바샤님. 각하께서는 무척이나 동행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알고 있어.”
키르헨은 무척이나 오늘 나들이를 기대한 눈치였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간 바샤는 그의 황성행에 실망할 수 없었다.
‘벌써. 북쪽에서 마물 웨이브가 시작되려나.’
빌로나 제국이 위치한 판게아 대륙에도 타난토스 대륙처럼 대재앙이 쏟아질 예정이었다.
북쪽에서 서서히 마물들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사방으로 마물이 퍼져갔다.
시기의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보통 이맘때쯤
북쪽에서 거대 마물 웨이브가 일어나 대륙 북쪽 변방에 위치한 그리아 소국이 멸망했다.
황제는 이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키르헨을 부른 것일 터였다.
바샤는 등허리를 세모 모양으로 올리고 있는 카로를 쓰다듬었다.
“냥. 봐라 냥! 하찮은 인간아!! 넌 주인님이 이런 것도 안 해주지? 냥!”
카로는 몸을 바샤에게 더욱 밀착하며 꼬리를 양쪽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시몬의 부러운 얼굴이 살짝 엿보였으나 바샤는 애써 무시하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길거리에는 한 달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노점상의 주인들, 환경 보호를 주장하며 시위하는 사람들, 건국제를 맞아 관광을 온 사람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마력차는 수도 최고의 의류점 앞에 도착했다.
시몬이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바샤를 향해 왼쪽 손을 뻗었다.
카로가 시몬이 뻗은 손 위로 올라탄 후 바샤에게 앞발을 내밀었다.
‘미친.’
바샤는 속으로 욕이 터져 나왔다.
두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사뿐히 마차에서 내렸다.
시몬과 카로는 허탈해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시몬을 심하게 경계하는 카로도 이해가 잘되지 않지만, 마물과 유치하게 겨루는 시몬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
바샤는 둘을 뒤로 한 채 의상실의 문을 열었다.
바샤는 로제타를 굳이 배웅하지 않았다.
혼자 온실에 남아 생각을 정리했다.
‘영혼의 맹세가 실현되었다.
데이모스의 맹세마저 특별한 도구를 사용했었는데.’
“실현이 되었다?”
바샤는 자신의 힘을 다시 개방했다.
짙은 검은 마력.
그 위로 빛나는 별처럼 박힌 성력.
매 생을 반복할 때마다 힘이 강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그녀의 힘이 더 짙어졌다.
신탁.
갑자기 생겨버린 예지 능력.
메이의 미래를 예견한 이후
메이의 인생은 자신이 본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미래도 확인해 봤지만
미래가 읽히지 않았다.
“역시 답은 성물과 신탁에 있나.”
혼자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온실에 다른 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온실에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바샤, 키르헨 그리고 시몬이었다.
“시몬 메르헨스타인.”
이 인기척은 시몬 이었다.
“로제타 성녀님은 방금 전 나가셨어.”
바샤는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성녀님이 가시는 걸 보고 왔습니다.”
시몬의 대답에 바샤는 그제야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바샤는 이 주인공 커플이 오늘 쌍으로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바샤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시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갯짓으로 그에게 얼른 말하고 꺼지라는 눈치를 주었다.
“메르헨스타인의 탑.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된 것 같은 호텔에서의 만남을 떠올렸다.
「내가 돌아가면, 넌 메르헨스타인에게서 버려질 거야.
또다시 메르헨스타인의 탑에 갇히고 싶어?」
‘아 맞다. 그때 그런 말을 했었지.
바샤 이 등신. 그걸 아는 척하면 어떻게 해.’
그때 시몬에게 언급한 탑은 수도 저택의 탑이 아닌
메르헨스타인 지역의 본성의 탑이었다.
바샤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시치미 떼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말이야. 탑? 내가 언제 탑을 말했어.”
“당신은 정말....”
바샤는 최대한 불량스럽게 시치미 떼었으나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시몬은 감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지?’
“감사합니다.”
시몬이 바샤에게 고개까지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바샤는 더욱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우직하고 정직한 기사님인 시몬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는 아시다시피 가주님에게 거둬진 바르하 제국의 최후의 황손입니다.”
바르하 제국은 타난토스 대륙의 지배자였으나 타난토스 대륙에 마물들이 범람하기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바샤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넘쳐났다.
‘왜 시몬이 갑자기 찾아와서 고해 성사를 하는 거지?’
“모두가 마물을 막지 못했다고, 마력 쓰레기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마물 웨이브를 일으킨 바르하 제국의 황가를 비난했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저의 조상은 바르하 제국민들에게 처형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바르하의 마법사들은 황족이 성인이 되면 마력이 폭주하여 죽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때 키르헨 메르헨스타인님이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바샤를 찾기 위해 타난토스 대륙으로 향했던 키르헨은 목숨이 위태로웠던 어린 시몬을 구해주었다.
어린 시몬은 타고난 거대한 마력으로 인해 마력 폭주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마력 폭주를 마력제어 도구를 사용해 눌러주고 시몬을 구해준 사람이 키르헨이었다.
키르헨도 시몬의 폭주를 안정적으로 누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으며 위험했기에 시몬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메르헨스타인 영지의 탑에 가두고 그를 치료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야.”
바샤는 그의 과거사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관없으니 온실에서 나가라는 의미였다.
“역시...당신은....”
요컨대 왜 그는 다시 한번 엄청난 명작을 읽은 사람처럼 감동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몬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바샤는 더 큰 오해를 받기 싫어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기로 결심했다.
“역시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가주 자리를 저에게 넘기신 거군요.”
바샤는 자신의 결심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샤님. 저는 당신을 위해 가주가 되겠습니다.”
바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대사의 주어는 바샤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저 대사의 주어는 로제타여야 했다.
원작에서 시몬은 로제타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자 읊었던 말이었다.
“뭐?”
바샤는 입을 다물었다고 오해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당신이 저의 비밀을 지켜주고,
메르헨스타인으로 살게 해주었습니다. 당신도 가주 자리를 내어놓는다는 것은 힘든 선택이었겠지요.”
“아니. 오해 하지마. 정말 귀찮은 자리라서 하지 않은 거야.”
바샤가 그녀답지 않게 팔을 저으며 아니라고 피력했다.
“하긴. 당신은 메르헨스타인이라는 가문의 이름 없이도 홀로 빛나던 사람이었지요. 당신은 서후 제국의 대 마법사였으니깐요.”
“아니!”
바샤는 자신의 이마를 탁하고 칠 수 밖에 없었다.
서후 제국의 대마법사는 황성에서 불로 용을 만드는 쇼 한번 보여주고 얻은 칭호였다.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대 마법사니, 현자니 그런 말 들을 마법이 아니었다.
단지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서후 제국민들이 보기에 신기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빌어먹은 첫 번째 바샤.
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다닌거야.
“서후 제국의 대마법사로 호위호식을 누리며 살 수 있었는데.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돌아오셨음에도. 가주 자리를 저에게 내어준 건 모두 신전 때문입니까?”
“아니.”
‘그건 하에온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서 그냥 여기로 왔던 거야.’
바샤는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며 마음속으로 절규 했다.
“솔직하게 말씀하시기 어려운 거 잘 압니다.”
시몬은 바샤의 부정을 이제 긍정으로 받아 들이기로 했나보다.
이제는 바샤도 거듭 아니라고 하기 벅찼다.
“제가 가주가 되어 신전으로부터, 황성으로부터.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시몬은 결의를 다지더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가슴 앞에 절도 있게 한쪽 팔을 수평으로 들었다.
바르하 제국식 기사 서임 자세였다.
“아니...그럴 필요는....”
바샤는 그를 일으키기 위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목숨을 받처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시몬은 다가온 바샤의 오른손을 덥석 잡더니 손등에 키스를 했다.
물컹하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바샤는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세게 쳤다.
‘오늘 주인공 커플이 지랄하는 날이 맞네. 맞아.’
바샤는 아무리 그에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시몬은 ‘압니다.’만을 내뱉으며 저 혼자만의 오해를 더욱 크게 부풀렸다.
마침내 바샤는 그에게 백기를 들었다.
시몬은 저 혼자만의 기사 서임 이후 바샤의 뒷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새벽에도 한 번씩 나와 그녀의 방 근처를 순찰을 도는 시몬 덕분에 하에온의 저택 방문은 어려웠다.
한번은 바샤가 시몬을 재우려고 했으나, 그가 평소 착용하고 다니는 마력 제어구 때문인지 바샤의 마법이 잘 듣지 않았다. 마력에 걸리긴 하는데 독이 해독되듯 빠르게 효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마법을 세게 걸기에는 마력 제어구가 깨질까 걱정되었다.
마력 제어구가 깨지면 시몬이 폭주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바샤는 시몬을 죽여야 했고, 그녀가 아니더라도 키르헨이 시몬을 죽여야만 했다.
시몬이 사라지면 메르헨스타인 가주자리는 바샤였다.
아직은 시몬이 체스 말로 필요했다.
“등신 같은 바샤. 왜 굳이 남자 주인공한테 쓸데없는 방어 패시브 스킬을 주어서는.”
“쟤 말하는거냥?”
카로가 꼬리를 둥글게 말아 홀로 정원에서 바샤를 지키고 있는 시몬을 가리켰다.
시몬이 바샤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하자, 먼저 날을 세운 건 카로였다.
“주인님을 지키는 건 나로 충분한데냥. 쟤보다는 내가 더 세다 냥! 카로로 충분하지 않냐냥?”
카로가 허리를 곧게 펴고 바샤의 가슴을 솜 망치로 두들겨댔다.
바샤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닌데.”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이런 관계를 바란 건 아니었다.
“주인님!! 얼른 내가 더 좋다고 말하라냥!!!”
카로는 바샤가 반응하지 않자 주먹에 힘을 더 주기 시작했다.
찌이익-
바샤의 한탄을 잠재운 건 카로의 발톱으로 인해 바샤의 옷이 찢겨나가는 소리였다.
“하아...”
“쭈....쮸인님.....”
놀란 카로가 주먹질 하던 자세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카로는 찢겨버린 옷조각을 들고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대었다.
카로가 손을 떼자 붙어있을 리 만무한 옷자락이 휘리릭 떨어졌다.
“하아아.......”
바샤는 한숨을 더 크게 내쉬었다.
“주인님...미안하다냥......옷사러 가자냥. 내...내가 사주겠다냥.”
그러고보니 곧 건국제였다.
건국제에 입고 나갈 드레스를 하나 맞추긴 맞춰야 했었다.
바샤는 보통 재단사를 저택으로 부르는 편이었다.
“옷을 사러 나가는 척. 하에온에게 갔다 올까?”
한 달이나 지나 바샤에 대한 기자들의 관심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요근래 하에온의 저택도 방문을 못했었다.
그에게 더 이상 회귀에 대해 물어 보지 못한단 건 알아도, 그의 예정된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야 했다.
카로는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은지 고개가 떨어지도록 끄덕였다.
◇◆◇
바샤는 키르헨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외출을 이야기했다.
“안된다! 혼자서 밖을 돌아다닌다니! 건국제 때문에 수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많아.”
그녀의 아버지인 키르헨이 호통을 쳐댔다.
이 세계 어떤 누가 수도에 있던지 사람이라면 열한번째 바샤는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드래곤 정도면 모를까냥.”
바샤의 무릎에서 카로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시몬이 바샤 곁을 맴돌기 시작할 때부터 카로는 바샤에게서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쉿.”
바샤는 카로에게 양배추를 한 잎 떼어주며 입을 막았다.
카로는 구길 면적도 좁으면서 온 힘을 다해 얼굴을 구겨가며 양배추를 씹었다.
키르헨의 과보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한 번 잃어버렸던 딸이기에 그의 과보호는 당연한 거였다.
“그러면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갈게요.”
“누가 너를 노리고 있는 줄 알고! 호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나, 시몬 정도면 모를까.”
“맞습니다. 바샤님. 밖은 위험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몬 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했다.
“흥. 나로 충분하다냥!!”
카로가 시몬에게 눈총을 쏘아대었다.
시몬은 카로의 눈총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바샤만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각하와 같이 가죠.”
바샤는 부담스럽게 그녀를 처다 보는 시몬보다는 키르헨이 더 편했다.
카로가 유난히 시몬을 경계하기도 했다.
“크흠...그러면 뭐...”
바샤의 대답에 키르헨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바샤의 선택은 물거품이 된 채.
하악질을 해대는 카로와 그런 카로를 무시하는 시몬과 함께 수도의 제 5구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분명 바샤는 무서운 아저씨랑 가겠다 했다냥!!!! 무서운 아저씨는 어디 가고 쟤가 왔냐냥!”
“각하께서는 바쁘시다.”
시몬의 말대로 키르헨은 아침에 급히 황성으로 가야했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키르헨을 찾은 것이였다.
“바샤님. 각하께서는 무척이나 동행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알고 있어.”
키르헨은 무척이나 오늘 나들이를 기대한 눈치였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간 바샤는 그의 황성행에 실망할 수 없었다.
‘벌써. 북쪽에서 마물 웨이브가 시작되려나.’
빌로나 제국이 위치한 판게아 대륙에도 타난토스 대륙처럼 대재앙이 쏟아질 예정이었다.
북쪽에서 서서히 마물들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사방으로 마물이 퍼져갔다.
시기의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보통 이맘때쯤
북쪽에서 거대 마물 웨이브가 일어나 대륙 북쪽 변방에 위치한 그리아 소국이 멸망했다.
황제는 이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키르헨을 부른 것일 터였다.
바샤는 등허리를 세모 모양으로 올리고 있는 카로를 쓰다듬었다.
“냥. 봐라 냥! 하찮은 인간아!! 넌 주인님이 이런 것도 안 해주지? 냥!”
카로는 몸을 바샤에게 더욱 밀착하며 꼬리를 양쪽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시몬의 부러운 얼굴이 살짝 엿보였으나 바샤는 애써 무시하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길거리에는 한 달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노점상의 주인들, 환경 보호를 주장하며 시위하는 사람들, 건국제를 맞아 관광을 온 사람들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마력차는 수도 최고의 의류점 앞에 도착했다.
시몬이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바샤를 향해 왼쪽 손을 뻗었다.
카로가 시몬이 뻗은 손 위로 올라탄 후 바샤에게 앞발을 내밀었다.
‘미친.’
바샤는 속으로 욕이 터져 나왔다.
두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사뿐히 마차에서 내렸다.
시몬과 카로는 허탈해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시몬을 심하게 경계하는 카로도 이해가 잘되지 않지만, 마물과 유치하게 겨루는 시몬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
바샤는 둘을 뒤로 한 채 의상실의 문을 열었다.
작가의 말
제 부족한 첫 작품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닫기대공님, 집착 말고 날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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