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렇게 만난 게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조회 : 913 추천 : 1 글자수 : 5,730 자 2022-10-12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가게를 채웠다.
“바샤 메르헨스타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샤님의 담당자인 제인이라고 합니다. ”
의상실의 담당자가 다가와 바샤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바샤는 제인을 따라 고층의 VIP룸으로 올라갔다.
어느새 카로는 바샤의 품에 쏙 안겨 있었으며 그 뒤로 시몬이 바짝 붙어있었다.
먼저 보인 건 VIP룸의 대기실이었다.
VIP룸의 대기실은 원형의 형태로, 곳곳에는 마력석을 비치하여 은은한 조명을 비추고 있었다. 특히 중앙의 큰 공간에는 VIP들이 쉴 수 있도록 푹신한 쇼파가 있었으며 쇼파 맞은 편으로는 다양한 미술 조각품들이 공간을 채워주고 있었다. 공간의 사방에는 개별 룸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들이 있었다.
제인은 곧바로 바샤를 개별룸으로 안내했다.
이미 룸 안에는 고급 옷들이 행거에 가득히 걸려있었다.
행거를 양쪽에 세우고 중앙에는 앉을 수 있는 쇼파가 있었으며 그 쇼파의 맞은 편에는 거울이 달린 문이 위치해 있었다. 쇼파에 먼저 뛰어오른 건 카로였다. 카로의 옆에 바샤가 쇼파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녀의 뒤로 시몬이 서있었다.
시몬에게 옆에 앉으라는 듯이 고갯짓을 하였다.
“전 오늘 바샤님의 일일 호위 기사로 동행하였습니다. 피보호자의 옆에 나란히 서는 것은 호위로서 옳지 못한 자세입니다.”
기사도의 정석 같은 시몬 다운 말이었다.
“냥? 그건 약한 자들이나 하는 말이다냥.”
카로가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킨 뒤, 양팔을 굽혀 자신의 허리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이가 화를 내는 모양새였다.
바샤는 다시 시작된 그들의 신경전에서 시선을 거둬 제인을 바라보았다.
“바샤님의 취향에 맞춰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원하시는 디자인을 선택하시면 바샤님의 체형에 알맞게 새로 제작하겠습니다.”
건국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돈 앞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한 만족스러운 말이었다.
“주인님! 이 옷 다 입어보는거냥?”
“아니. 설마.”
바샤는 직접 옷을 입어보는 건 귀찮았기 때문에 바샤와 비슷한 체형의 모델을 고용했다.
바샤가 나긋하게 손짓을 하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들어온 문 반대쪽에서 바샤와 비슷한 체형의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모델들이 입은 옷은 행거에 걸려있는 옷과 동일한 디자인이었다.
모델이 한 명씩 걸어 나올 때마다 제인은 행거에 걸려있는 옷을 바샤에게 들어 보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드레스는 파르케의 기업의 오너이신 바샤님을 위해 특별히 공수한 디자인입니다. 바샤님의 세련된 오너로서의 이미지에 알맞게 검푸른색의 옷감을 선택했습니다. 드레스 전반을 이루는 보석들은 모두 최고급 다이아 마력석으로 커팅한 엘프의 눈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인의 설명처럼 검정색에 푸른 빛이 조금 섞여 묘한 느낌을 주는 드레스는 모델의 유려한 곡선을 드러내는 머메이드 드레스였다.
드레스에 자수처럼 장식이 되어있는 보석이 조명에 은은하게 빛나며 이지적이면서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다음.”
바샤가 다음을 외치자 모델이 바샤에게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한 후 자신이 들어왔던 문으로 나갔다.
곧바로 다른 옷을 입은 모델이 등장하자 제인이 옷을 설명했다.
그렇게 총 열 벌의 옷과 장신구들의 설명이 끝났다.
바샤는 제인이 준비한 옷들이 마음에 들었다.
희귀한 광물을 사용한 점이나, 바샤의 이미지를 고려한 디자인들이라 나름 깐깐한 바샤의 눈에도 만족스러울 정도의 드레스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들 모두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보내줘. 그리고 고양이가 목줄 같은 것도 있나?”
꽤나 긴 시간의 패션쇼에 쇼파 끄트머리에서 졸고 있던 카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카탈로그를 가져오겠습니다.”
제인은 바샤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아니. 보는 건 귀찮고. 있는 대로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냥? 쭈인님....”
카로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손을 모아 바샤를 바라보았다.
“주인 있는 마물이라고 티를 내야지. 누가 안 건들지.”
바샤는 다소곳하게 모은 카로의 손을 툭 치며 말했다.
카로가 의기양양하게 바샤의 뒤편에 조각처럼 서 있는 시몬에게 눈길을 돌렸다.
“보았는가냥!! 하찮은 인간이여!”
시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바샤님...저는...”
바샤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시무룩한 시몬의 목소리에 그답지 않게 어깨가 살짝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저에게는 바샤님이 큰 선물을 주셨으니깐요.”
바샤는 다시 신경전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쇼파에서 일어나며 제인에게 말했다.
“결제는 파르케 앞으로 청구해.”
바샤가 일어나자 시몬이 먼저 움직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아직 쇼파 위에 있는 카로를 향해 나직이 눈길을 보냈다.
저 눈빛을 해석하자면, ‘넌 이런 것 못하지?’ 정도일 것 같지만.
바샤는 다시 한번 애써 무시하며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서 제일 먼저 보인 건 분홍색 뒤통수였다.
하늘하늘 굽이치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움직였다.
딸기를 닮은 사랑스러운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바샤는 머리가 아파왔다.
카로와 눈싸움을 하던 시몬이 인기척에 먼저 반응하며 바샤의 안색을 살폈다.
“어머. 바샤님!”
VIP룸 대기실의 쇼파에 앉아 있던 사람은 로제타였다.
로제타가 쇼파에서 일어나 바샤에게로 몸을 돌린 후 박수를 짝하고 쳤다.
“엄청난 우연이네요! 저도 마침 쇼핑을 끝내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어요.”
로제타의 두 볼은 사랑스럽게 붉게 물들어있었다.
마치 오래된 친우를 마주한 듯한 로제타의 행동에 제인은 묵례를 한 후 VIP룸을 벗어났다.
“바샤님.”
로제타가 바샤에게 다가오려 하자 시몬이 바샤의 앞을 막아섰다.
로제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모로 돌렸다.
바샤는 그녀에게서 등을 지고 있는 시몬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들의 첫 만남에서 일어날 사랑의 징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게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어차피 둘은 어디에서 만나든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다.
시몬도 로제타와 마주하면 바샤에게 이런 과대한 관심을 쏟지 않을 예정이었다.
시몬은 바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의중을 확인하는 듯했다.
시몬의 표정부터 확인했다.
원작에서 ‘그의 동공이 흔들리고, 입매가 풀어지며 그녀의 분홍 머리가 그의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 같이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라고 서술을 했었다. 이미 첫 번째 삶에서 그 문장이 실현된 그의 표정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바샤의 예상과는 달리 시몬은 경계. 그 자체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매는 여전히 경계를 담아 매섭게 빛나고 있었으며, 입매는 굳게 다물고 있었다.
시몬은 굳은 얼굴로 바샤에서 무언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바샤는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눈을 돌려 로제타에게 시선을 두었다.
로제타의 진심은 표정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도 시몬에게 경계를 세우고 있다는 건 그녀가 뒤로 숨긴 손에서 느껴졌다. 로제타는 경계하는 대상이 앞에 있으면 손을 뒤로 숨기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다르다.
이제는 변화에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10번의 반복을 통해 인지한, 당연한 공식이 깨질 때마다 바샤는 혼란스러웠다.
몇 초간의 침묵을 깨는 건 카로였다.
“냥? 이 분위기는 뭐냥”
바샤는 카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시몬에게 고개를 저어 그녀의 뜻을 알렸다.
그는 짧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샤의 대각선으로 몸을 움직였다.
바샤는 둘의 표정을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사랑의 기류는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생에서만은 왜 이렇게 달라지는 점들이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이 둘의 관계가 달라진 것인지 궁금함이 솟구쳐 올라왔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바샤님. 이분은.”
로제타가 먼저 바샤에게 시몬을 물어왔다.
“성녀님. 이쪽은 메르헨스타인 가문의 차기 가주. 시몬 메르헨스타인입니다.”
바샤의 설명에 시몬은 짧게 묵례로 화답했다.
“이쪽은 케렌시아 교황국의 성녀님. 로제타 케렌시아님.”
바샤는 카로와 시몬에게 로제타를 소개했다.
“로젠타 케렌시아입니다. 마법의 후계자를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로제타는 바샤의 말에 맞춰 지난 날 바샤에게 했던 것처럼 한쪽 팔을 앞으로, 다른 팔을 뒤로 우아하게 굽히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쪽은.”
“난 쭈인님의 냥이인 카로다냥!”
바샤의 말을 가로채고 그녀의 어깨에 안착한 카로가 경례 자세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아.”
로제타는 카로에게서 마물에게서 느껴지는 마력과 기묘한 성력을 인지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카로님.”
로제타는 자신의 옷자락을 살며시 쥐고 무릎을 살짝 굽혀 카로에게도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로제타가 바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시몬의 날 선 경계가 로제타를 향했으나 그녀의 눈에는 바샤만 보이는 듯 했다.
“바샤님 주변에는 대단하신 분들이 많군요. 바샤님과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동행해도 될까요?”
로제타가 어느새 바샤에게 다가와 바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전의 압박.
로제타의 떨리는 손에서 그녀가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바샤를 찾아온 이유를 얼핏 느낄 수 있었다.
“냥! 우리 주인님 만지는 건 안된다냥!!!”
어깨에 매달려있던 카로가 소리를 지르며 맞잡은 손으로 몸을 날렸다.
놀랜 로제타가 손을 급하게 거두었지만, 그녀의 하얀 손 위로 붉게 고양이 발톱 자국이 생겼다.
로제타의 손등을 확인한 바샤가 바닥에 착지한 카로를 불렀다.
“카로.”
바샤가 카로를 향해 낮게 읊조리자 카로는 귀를 접고는 바샤를 올려다보았다.
바샤의 차가운 눈을 보자 카로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쭈뼛거리며 로제타에게 사과를 전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냥...미안하다냥.”
바샤는 바닥에 주저앉은 카로를 살포시 들어 시몬에게 넘겼다.
시무룩해진 카로는 얌전히 시몬에게 안겼다.
“성녀님 죄송합니다. 제 고양이가 성녀님에게 무례를 범했군요.”
바샤는 로제타의 손의 붉게 달아오른 발톱 자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둘만 있는 자리라면 모를까, 어떤 누군가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는 로제타에게 적당히 예를 갖추는 편이 덜 귀찮았다.
“괜찮아요.”
로제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상처 난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 사이로 연분홍빛이 슬며시 삐져나왔다가 사라졌다. 로제타가 손을 치우자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손등의 상처는 사라져있었다.
로제타가 시몬에게 안겨있는 카로에게 다가가 카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봤죠?”
그리고는 뒤를 돌아 바샤를 다시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요 앞에 있는 디저트 가게로 가요.”
자연스럽게 바샤의 팔짱까지 낀 로제타는 바샤를 이끌었다.
바샤는 로제타의 동행 제안을 수락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별 저항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녀들의 뒤를 따라가며 시몬은 카로를 향해 눈총을 보내었다.
◇◆◇
황성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고래가 서식하는 큰 호수가 있었다.
호수 고래는 이따금 씩 물 위로 뛰어오르며 물살을 일으켰다.
호수 주변으로는 잔잔한 잔디밭과 함께 곳곳에 보라색 라벤더가 화려하게 정원을 채워주고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에서는 차양막이 자리를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차양막 밑으로 두 남성이 마주 앉아 있었다.
“형제님.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지요?”
샤를마뉴 2세 황제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하에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에온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 놓여진 붉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형제를 부르기 위해 피를 내야만 한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바샤 메르헨스타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샤님의 담당자인 제인이라고 합니다. ”
의상실의 담당자가 다가와 바샤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바샤는 제인을 따라 고층의 VIP룸으로 올라갔다.
어느새 카로는 바샤의 품에 쏙 안겨 있었으며 그 뒤로 시몬이 바짝 붙어있었다.
먼저 보인 건 VIP룸의 대기실이었다.
VIP룸의 대기실은 원형의 형태로, 곳곳에는 마력석을 비치하여 은은한 조명을 비추고 있었다. 특히 중앙의 큰 공간에는 VIP들이 쉴 수 있도록 푹신한 쇼파가 있었으며 쇼파 맞은 편으로는 다양한 미술 조각품들이 공간을 채워주고 있었다. 공간의 사방에는 개별 룸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들이 있었다.
제인은 곧바로 바샤를 개별룸으로 안내했다.
이미 룸 안에는 고급 옷들이 행거에 가득히 걸려있었다.
행거를 양쪽에 세우고 중앙에는 앉을 수 있는 쇼파가 있었으며 그 쇼파의 맞은 편에는 거울이 달린 문이 위치해 있었다. 쇼파에 먼저 뛰어오른 건 카로였다. 카로의 옆에 바샤가 쇼파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녀의 뒤로 시몬이 서있었다.
시몬에게 옆에 앉으라는 듯이 고갯짓을 하였다.
“전 오늘 바샤님의 일일 호위 기사로 동행하였습니다. 피보호자의 옆에 나란히 서는 것은 호위로서 옳지 못한 자세입니다.”
기사도의 정석 같은 시몬 다운 말이었다.
“냥? 그건 약한 자들이나 하는 말이다냥.”
카로가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킨 뒤, 양팔을 굽혀 자신의 허리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이가 화를 내는 모양새였다.
바샤는 다시 시작된 그들의 신경전에서 시선을 거둬 제인을 바라보았다.
“바샤님의 취향에 맞춰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원하시는 디자인을 선택하시면 바샤님의 체형에 알맞게 새로 제작하겠습니다.”
건국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돈 앞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한 만족스러운 말이었다.
“주인님! 이 옷 다 입어보는거냥?”
“아니. 설마.”
바샤는 직접 옷을 입어보는 건 귀찮았기 때문에 바샤와 비슷한 체형의 모델을 고용했다.
바샤가 나긋하게 손짓을 하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들어온 문 반대쪽에서 바샤와 비슷한 체형의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모델들이 입은 옷은 행거에 걸려있는 옷과 동일한 디자인이었다.
모델이 한 명씩 걸어 나올 때마다 제인은 행거에 걸려있는 옷을 바샤에게 들어 보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드레스는 파르케의 기업의 오너이신 바샤님을 위해 특별히 공수한 디자인입니다. 바샤님의 세련된 오너로서의 이미지에 알맞게 검푸른색의 옷감을 선택했습니다. 드레스 전반을 이루는 보석들은 모두 최고급 다이아 마력석으로 커팅한 엘프의 눈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인의 설명처럼 검정색에 푸른 빛이 조금 섞여 묘한 느낌을 주는 드레스는 모델의 유려한 곡선을 드러내는 머메이드 드레스였다.
드레스에 자수처럼 장식이 되어있는 보석이 조명에 은은하게 빛나며 이지적이면서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다음.”
바샤가 다음을 외치자 모델이 바샤에게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한 후 자신이 들어왔던 문으로 나갔다.
곧바로 다른 옷을 입은 모델이 등장하자 제인이 옷을 설명했다.
그렇게 총 열 벌의 옷과 장신구들의 설명이 끝났다.
바샤는 제인이 준비한 옷들이 마음에 들었다.
희귀한 광물을 사용한 점이나, 바샤의 이미지를 고려한 디자인들이라 나름 깐깐한 바샤의 눈에도 만족스러울 정도의 드레스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들 모두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보내줘. 그리고 고양이가 목줄 같은 것도 있나?”
꽤나 긴 시간의 패션쇼에 쇼파 끄트머리에서 졸고 있던 카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카탈로그를 가져오겠습니다.”
제인은 바샤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아니. 보는 건 귀찮고. 있는 대로 메르헨스타인 저택으로.”
“냥? 쭈인님....”
카로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손을 모아 바샤를 바라보았다.
“주인 있는 마물이라고 티를 내야지. 누가 안 건들지.”
바샤는 다소곳하게 모은 카로의 손을 툭 치며 말했다.
카로가 의기양양하게 바샤의 뒤편에 조각처럼 서 있는 시몬에게 눈길을 돌렸다.
“보았는가냥!! 하찮은 인간이여!”
시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바샤님...저는...”
바샤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시무룩한 시몬의 목소리에 그답지 않게 어깨가 살짝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저에게는 바샤님이 큰 선물을 주셨으니깐요.”
바샤는 다시 신경전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쇼파에서 일어나며 제인에게 말했다.
“결제는 파르케 앞으로 청구해.”
바샤가 일어나자 시몬이 먼저 움직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아직 쇼파 위에 있는 카로를 향해 나직이 눈길을 보냈다.
저 눈빛을 해석하자면, ‘넌 이런 것 못하지?’ 정도일 것 같지만.
바샤는 다시 한번 애써 무시하며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서 제일 먼저 보인 건 분홍색 뒤통수였다.
하늘하늘 굽이치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움직였다.
딸기를 닮은 사랑스러운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바샤는 머리가 아파왔다.
카로와 눈싸움을 하던 시몬이 인기척에 먼저 반응하며 바샤의 안색을 살폈다.
“어머. 바샤님!”
VIP룸 대기실의 쇼파에 앉아 있던 사람은 로제타였다.
로제타가 쇼파에서 일어나 바샤에게로 몸을 돌린 후 박수를 짝하고 쳤다.
“엄청난 우연이네요! 저도 마침 쇼핑을 끝내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어요.”
로제타의 두 볼은 사랑스럽게 붉게 물들어있었다.
마치 오래된 친우를 마주한 듯한 로제타의 행동에 제인은 묵례를 한 후 VIP룸을 벗어났다.
“바샤님.”
로제타가 바샤에게 다가오려 하자 시몬이 바샤의 앞을 막아섰다.
로제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모로 돌렸다.
바샤는 그녀에게서 등을 지고 있는 시몬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들의 첫 만남에서 일어날 사랑의 징후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게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어차피 둘은 어디에서 만나든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다.
시몬도 로제타와 마주하면 바샤에게 이런 과대한 관심을 쏟지 않을 예정이었다.
시몬은 바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의중을 확인하는 듯했다.
시몬의 표정부터 확인했다.
원작에서 ‘그의 동공이 흔들리고, 입매가 풀어지며 그녀의 분홍 머리가 그의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 같이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라고 서술을 했었다. 이미 첫 번째 삶에서 그 문장이 실현된 그의 표정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바샤의 예상과는 달리 시몬은 경계. 그 자체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매는 여전히 경계를 담아 매섭게 빛나고 있었으며, 입매는 굳게 다물고 있었다.
시몬은 굳은 얼굴로 바샤에서 무언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바샤는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눈을 돌려 로제타에게 시선을 두었다.
로제타의 진심은 표정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도 시몬에게 경계를 세우고 있다는 건 그녀가 뒤로 숨긴 손에서 느껴졌다. 로제타는 경계하는 대상이 앞에 있으면 손을 뒤로 숨기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다르다.
이제는 변화에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10번의 반복을 통해 인지한, 당연한 공식이 깨질 때마다 바샤는 혼란스러웠다.
몇 초간의 침묵을 깨는 건 카로였다.
“냥? 이 분위기는 뭐냥”
바샤는 카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시몬에게 고개를 저어 그녀의 뜻을 알렸다.
그는 짧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샤의 대각선으로 몸을 움직였다.
바샤는 둘의 표정을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사랑의 기류는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생에서만은 왜 이렇게 달라지는 점들이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이 둘의 관계가 달라진 것인지 궁금함이 솟구쳐 올라왔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바샤님. 이분은.”
로제타가 먼저 바샤에게 시몬을 물어왔다.
“성녀님. 이쪽은 메르헨스타인 가문의 차기 가주. 시몬 메르헨스타인입니다.”
바샤의 설명에 시몬은 짧게 묵례로 화답했다.
“이쪽은 케렌시아 교황국의 성녀님. 로제타 케렌시아님.”
바샤는 카로와 시몬에게 로제타를 소개했다.
“로젠타 케렌시아입니다. 마법의 후계자를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로제타는 바샤의 말에 맞춰 지난 날 바샤에게 했던 것처럼 한쪽 팔을 앞으로, 다른 팔을 뒤로 우아하게 굽히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쪽은.”
“난 쭈인님의 냥이인 카로다냥!”
바샤의 말을 가로채고 그녀의 어깨에 안착한 카로가 경례 자세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아.”
로제타는 카로에게서 마물에게서 느껴지는 마력과 기묘한 성력을 인지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카로님.”
로제타는 자신의 옷자락을 살며시 쥐고 무릎을 살짝 굽혀 카로에게도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로제타가 바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시몬의 날 선 경계가 로제타를 향했으나 그녀의 눈에는 바샤만 보이는 듯 했다.
“바샤님 주변에는 대단하신 분들이 많군요. 바샤님과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동행해도 될까요?”
로제타가 어느새 바샤에게 다가와 바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전의 압박.
로제타의 떨리는 손에서 그녀가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바샤를 찾아온 이유를 얼핏 느낄 수 있었다.
“냥! 우리 주인님 만지는 건 안된다냥!!!”
어깨에 매달려있던 카로가 소리를 지르며 맞잡은 손으로 몸을 날렸다.
놀랜 로제타가 손을 급하게 거두었지만, 그녀의 하얀 손 위로 붉게 고양이 발톱 자국이 생겼다.
로제타의 손등을 확인한 바샤가 바닥에 착지한 카로를 불렀다.
“카로.”
바샤가 카로를 향해 낮게 읊조리자 카로는 귀를 접고는 바샤를 올려다보았다.
바샤의 차가운 눈을 보자 카로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쭈뼛거리며 로제타에게 사과를 전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냥...미안하다냥.”
바샤는 바닥에 주저앉은 카로를 살포시 들어 시몬에게 넘겼다.
시무룩해진 카로는 얌전히 시몬에게 안겼다.
“성녀님 죄송합니다. 제 고양이가 성녀님에게 무례를 범했군요.”
바샤는 로제타의 손의 붉게 달아오른 발톱 자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둘만 있는 자리라면 모를까, 어떤 누군가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는 로제타에게 적당히 예를 갖추는 편이 덜 귀찮았다.
“괜찮아요.”
로제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상처 난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 사이로 연분홍빛이 슬며시 삐져나왔다가 사라졌다. 로제타가 손을 치우자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손등의 상처는 사라져있었다.
로제타가 시몬에게 안겨있는 카로에게 다가가 카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봤죠?”
그리고는 뒤를 돌아 바샤를 다시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요 앞에 있는 디저트 가게로 가요.”
자연스럽게 바샤의 팔짱까지 낀 로제타는 바샤를 이끌었다.
바샤는 로제타의 동행 제안을 수락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별 저항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녀들의 뒤를 따라가며 시몬은 카로를 향해 눈총을 보내었다.
◇◆◇
황성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고래가 서식하는 큰 호수가 있었다.
호수 고래는 이따금 씩 물 위로 뛰어오르며 물살을 일으켰다.
호수 주변으로는 잔잔한 잔디밭과 함께 곳곳에 보라색 라벤더가 화려하게 정원을 채워주고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에서는 차양막이 자리를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차양막 밑으로 두 남성이 마주 앉아 있었다.
“형제님.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지요?”
샤를마뉴 2세 황제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하에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에온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 놓여진 붉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형제를 부르기 위해 피를 내야만 한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작가의 말
제 부족한 첫 작품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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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대공님, 집착 말고 날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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