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빅토리아!
조회 : 1,109 추천 : 0 글자수 : 5,059 자 2022-09-16
프롤로그
***
사랑하는 아가야, 그들을 믿지 말거라.
너의 호의가 그들에겐 권리이고,
너의 사랑이 그들에겐 권력이란다.
아가, 나는 무섭구나.
사랑과 호의를 갖은 그들이 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까, 무섭다.
***
자타크로스 제국의 여황제이자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젠 그들의 뼛속까지 의심할 겁니다.
저의 적의가 그들의 권리를 짓밟고.
저의 복수심이 그들의 파멸로 끌어내릴 것입니다.
자타크로스 제국의 태양인 나의 어머니 뒤를 이어, 빅토리아가 여황제가 되겠습니다.
제 1화
***
바람 한 점. 빛 한 줌도 허락되지 않는 황궁의 북쪽 탑에 3년을 갇혀 있었다. 이것도 보름달을 세며 얼추 계산한 날짜에 지나지 않아,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어렴풋이 보름달이 뜨면, 장막에 쌓여 있던 북쪽 탑이 비로소 황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황제를 제외한 누구도 황실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고. 제국의 시민 또한 망자의 밤이라고 부르며, 빛 하나 그림자 하나도 집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없었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에 쟌크로스 제국이 삼켜지듯, 소름 끼치게 고요했다.
서서히 북쪽 탑의 장막이 걷히면, 청아한 보름달이 애처롭게 탑 안을 잠식해 왔다. 그러자 독살당한 로렌스 황제이자 나의 어마마마가 영롱한 보름달의 신기루처럼 찾아왔다.
"아가야, 불쌍한 나의 빅토리야. 쟌크로스 제국의 태양은 너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알고 있다. 이건 보름달의 광기에 사로잡힌 매혹적인 환상이라는 걸. 탑의 농간이든, 보름달의 광기든 상관없었다. 비록 독살당해 피가 낭자한 어마마마의 형상으로 나타났지만, 그래도 좋았다. 죽도록 보고 싶은 나의 어마마마를 볼 수 있고, 손이 닳도록 용서를 빌 수 있으니까.
"어마마마, 잘 못 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마마마."
아련한 눈빛으로 지극히 바라보던 어마마마가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빅토리아, 무엇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냐?"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고해성사했다.
"저의 미련하고 어설픈 신념으로 어마마마를 궁지에 모는 것도 모르고,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만 했습니다."
서글픈 눈으로 한숨을 몰아쉰 어마마마가 다시 물었다.
"또?"
"대공이자 나의 아버지의 거짓말을 알고도 묵인했습니다."
"또 있지 않으냐?"
"로잔스키 드 마타드 공작의 거짓 사랑에 놀아난 죄!"
"그리고?"
"마틸다 드 마타르 공녀의 얄팍한 우정에 매달린 죄악!"
"아가, 더 있을 것이다."
"지하드 드 에멀란드 공작을 황실에서 내친 죄인입니다. "
"불쌍한 빅토리아, 정말 네 죄악이 이거밖에 없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마마마."
고해성사에 가장 큰 잘못을 뺏다는 표정으로 어마마마가 불같이 역정을 냈다.
"날 독살한 본죄는 왜 말하지 않느냐!"
"저는 결백합니다! 어마마마를 독살했다는 죄만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가, 패륜의 죄악을 부정하느냐?"
"하르스 신께 맹세코 절대 저는 아닙니다. 제가 이 탑에 나가면! 어마마마를 독살한 저들을 심판해 그들을 팔과 다리는 어마마마의 무덤에 받치고. 그 죄인들의 머리는 하르신 신전의 용암에 받치겠습니다. 믿어주옵서서."
바닥에 엎드려 기다시피 빌고 빌면서 무죄를 호소했다. 냉담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어마마마의 형상이 일그러지면서 말소리마저 지지직 뭉개졌다.
"그들이 오고 있구나. 조심...하거라... 내 ...아...가..."
뚜벅 탁! 뚜벅 탁! 뚜벅 쾅!
'지팡이 짚고 걸어오는 발소리이다. 아버지가 오는 구나.'
검은 그림자가 점점 작아질 무렵, 창살에 등을 돌리고 태아 자세로 잔뜩 웅크린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아가!"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어떤 굴욕에도 언제나 당당하고 위엄 있는 황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개처럼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새 나는 아버지의 개가 되었다.
아버지의 한없이 자상한 목소리 뒤에 다가올 폭언과 폭력의 두려움에 내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
"아가! 아버지가 왔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보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온 아버지에게 얼굴을 안 보여 줄 참이냐. "
"........"
애써 자는 척 뒤척이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저 숨만 붙어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딸로 비춰야만 했다. 그래야 목숨을 연명할 수 있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그 모진 세월을 무작정 버터 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아버지는 지팡이를 들어 창살에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탕 탕 탕!
"빅토리야! 너는 알고 있지? 로렌스 그 빌어먹을 여자가 숨긴 황제의 반지의 행방을!"
'악지도 쟌크로스 1세의 반지를 못 찾았구나.'
이 탑에 갇히고 나서야, 그 반지의 존재를 알았다. 쟌크로스 제국의 시민이라면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노랫말이 대 예언인 줄, 누가 생각이라도 했을까?
[쟌크로스 1세의 반지를 가진 자는 제국의 태양이 될 것이고, 잃어버린 자는 쟌크로스 제국의 저주를 받아 끝내 불타 죽을 것이다.]
황제의 반지를 잃어버린 자는 저주를 받아 고통받다가 끝내 불타 죽는다는 예언이 있으니. 아버지의 반지에 대한 집착도 이해가 되었다.
첫 구절의 예언은 아버지에게 절망을 선사했지만, 마지막 구절의 예언은 나에겐 희망이 되었다.
[쟌크로스 1세의 반지에 피를 받치는 자의 주인이 쟌크로스 제국의 황금시대에 황제가 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반지를 가질 수 있다면! 내 잘못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헛된 희망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더 죽을 수 없었다. 미련한 집착이라고 해도....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실물로 황제의 반지를 보지 못했다. 또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렇게 막무가내로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아버지의 광기에 숨이 막혔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손에 아직까지 들어가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
대꾸 없는 나를 타박하듯 창살 안으로 지팡이를 집어넣어 사정없이 휘둘렀다.
"앗 ~윽! "
아버지의 패배감과 열패감에 찌든 지팡이의 찜질로 내 온몸은 멍들었고, 찢어졌다. 머리에선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아버지는 격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말하거라! 어서. 잔크로스 제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황제의 반지가 숨겨진 곳을 말해라."
"모릅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고요!"
"너 또한 황족이니, 그 반지가 어떤 의미이지 알고 있지 않으냐!"
"모른다고요. 몰라요! 아버지도 모른 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감히 어디서! 아직도 너희 주제를 모르고. 까불고 짖던 네 어미를 닮아서, 고집이 고약하구나!"
"이 탑에 갇혀, 3년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모르십니까! 제가 정말 모른다는 걸....."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적인 질문과 대답에 헛구역질까지 올라왔다.
"생각해 봐!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네 어미와 매일 속닥거리지 않았느냐. 내놓으라고. 어서."
"......."
협박에도 입을 열지 않자. 피범벅이 된 내 얼굴을 창살 앞으로 끌어당겨 광기 어린 목소리로 회유했다.
"모를 수도 있지. 그래, 한 이불 덮고 자던 나에게 끝내 말하지 않았으니까. "
'아내를 죽이고, 자식을 탑에 가둬서 황제가 되었는데. 제 눈에는 왜 이리도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십니까! 아버지는 절대 어마마마를 이기지 못하십니다.'
"아버지를 이렇게 애처롭게 쳐다보면서, 왜 말하지 않느냐? 내가 아무리 짐승이라도 해도. 핏줄은 죽이지 않는다."
'당신도 입으로 말했습니다. 단 한 번도, 나를 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그런데 이제와 이러시면 역겹습니다. 아버지.'
"그러니, 어서 말하거라.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뭐라도 말하거라."
"........"
알고 있지도 않지만, 내 혀를 깨물어서라도 절대 말하기 싫었다. 권력에 미친 황제라면, 차라리 전설처럼 불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에 하르스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쟌크로스 1세 황제와 전능하신 하르스 신께 빕니다. 제발 저의 아바마마를 불태워 주시고. 억울하게 독살당한 나의 어머니이자 로렌스 황제를 돌려주세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의 피를 받아 주시고, 그들의 심장을 씹어 먹게 해주옵서서.'
"그래, 그렇게 버텨라. 그래도 끝내는 네 입으로 말할 것이다. 이 아버지와 쟌크로스 제국의 멸망하는 꼴을 보기 싫다면."
천륜을 버린 아버지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한때 사랑했던, 아니. 나의 세상이라고 믿었던 잔인하고, 흉악무도한 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한때 내 약혼자였던 로잔스키 드 마타드 공작이었다.
금실과 보석으로 장식된 황태자 정복을 입고 나타난 로잔스키 드 마타드 공작은 기세 좋게 한쪽 무릎을 꿇고 감언이설로 비아냥거렸다.
"3년 전에는 결혼식 예복이었는데. 지금은 황태자 정복을 입고 있으니. 세상, 우습지."
죽이고 싶었다. 찬란한 금빛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의 황금빛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었고. 사랑스럽게 날 담았던 그의 맑고 청아했던 파란색의 눈동자를 뽑아 들판에 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였던 그의 혀를 반으로 잘라, 개먹이로 먹이고 싶었지만. 창살에 갇힌 나의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마! 너의 무죄를 밝히려고, 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 했어."
'죽을힘을 다해, 내 황위를 찬탈했겠지.'
"사방팔방 다 뛰어다니면서 귀족들에게 연판장도 받아내지만...."
핏빛에 물들고 빛바랜 웨딩드레스가 찬란하게 빛나던 우리의 결혼식날에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다.
"비록 결혼식을 끝까지 올리지 못했지만. 너는 나의 태양인 걸 잊지 마. 절대로 너를 단두대 앞에 세우지 않겠어. 나 믿지. 빅토리야."
"믿어! 하지만, 체스판에 버려진 말 신세로 전락했는데. 쉽게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이미 조작된 증거를 준비한 저들이 날 죽일 거야."
"널 쉽게 죽일 수 없을 거야. 넌 쟌크로스 제국의 황위 서열 1위 빅토리야 황태녀야. 그러니까, 재판 받자."
"이미 함정에 빠졌는데, 재판한다고 판세가 달라지지 않을 꺼야. 어쩜, 재판마저 그들의 계획일수도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설마..."
"어마마마를 독살한 그들이라면, 충분히 조작된 증거로 날 단두대 위에 세울 거야."
"나를 경멸하던 그 미친놈의 말을 듣자고! 내 앞에서."
"진정하고. 로잔스키, 내 말을 좀 들어봐. 지하드 공작 말처럼, 일단 피신해서 황실파 귀족들에게 몸을 위탁해서 훗날을 도모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증거를 찾아내면! 충분히 승산."
"미쳤어. 넌 황족이라고. 품위 없게 도망을 가? 자결이라도 해서 너의 결백을 증명해도 모자란 판에!"
"....뭐?"
"분명히 말하지만. 빌어먹을 황녀 이전에 너는! 남편을 섬겨야 할 내 부인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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