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후회... 안 하시겠어요?
조회 : 1,573 추천 : 2 글자수 : 4,502 자 2022-09-30
노블레스 웨딩홀은 주말 하루 한 팀만 예식을 진행한다. 워낙 재벌가들과 유명인들이 예식을 진행하는 장소이다 보니 하루 한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회사 방침이다.
오늘도 대기업 아들의 결혼식.
정신이 없이 바쁜 와중에 여울의 얼굴은 넋이 나가보였다. 멍한 시선으로 신부의 볼에 브러쉬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이봐요!”
까랑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여울은 그제야 신부의 얼굴을 확인했다. 브러쉬로 얼마나 문질러 댔는지 볼 한쪽이 붉게 타오르는 듯 보였다.
“어머! 죄송합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나 오늘 결. 혼. 식. 이라고요! 정신을 어따 팔고 있는거예요?”
“죄.. 죄송합니다. 신부님, 수정해드릴게요.”
당황하며 재빨리 신부의 볼을 닦아냈다. 오늘따라 집중을 못하는 여울을 보며 나연은 불안해했다.
“신부님, 드레스 실로 이동하실게요.”
메이크업을 마친 신부는 여울을 힐끗 째려본 뒤 드레스실로 이동했다.
“휴...”
여울은 집중 못한 자신을 탓하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여울의 뒤에 바짝 붙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멋! 깜짝... 이야..”
기분 나쁜 바람 섞인 귓속말에 고개를 돌렸더니 다름 아닌 오늘의 신랑이었다. 너무 바짝 다가와 있길래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한 발짝 떨어졌다.
“아.. 네. 제가 죄송하죠. 신부님께 좀 더 신경쓰겠습니다.”
여울이 정중한 태도로 고개 숙이며 말했다. 그러나 신랑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신부 말고 저도 좀 신경 써주세요. 여기 차석진 이사장 있죠? 제 친구예요.”
“네? 아.. 그러시군요. 두 분... 다 신경 쓰겠습니다.”
여울이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신랑은 여울을 향해 눈을 찡긋하더니 사라졌다. 결혼식날 보통은 긴장을 많이 한 탓에 신랑들은 말이 별로 없다.
뭐 유난히 붙임성 좋은 신랑들은 직원들에게도 살갑게 대해주는 일도 있지만.
‘뭐야.. 저 신랑.. 근데 이사장 친구라고?’
요 며칠 석진과의 일로 신경을 써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제 공지수가 돌아왔다는 말에 왜인지 어젯밤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왜 신경쓰는거야...’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보지만 석진의 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 여울은 빨리 오늘 하루가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
.
드레스로 갈아 입고 신부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다. 여울도 마음에 걸렸는지 계속 옆에서 체크해 주고 있었다.
“신부님, 정말 눈부시네요.”
여울이 칭찬을 했지만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신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늘 실장님이 예식 때 옆에서 계속 체크해주세요.”
“네?”
“아까 화장 망친거요.”
“아.. 수정 다 해드렸는데.”
신부의 따가운 시선에 여울은 말을 다 잇지도 못했다. 분위기가 가라 앉자 눈치 보던 신랑이 신부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뭘 그런거 가지고 그래? 좋은 날인데 웃어야지.”
“뭐.. 그런거? 우리 한번 뿐인 결혼식이 별거 아니란 소리로 들리네?”
“그럴 리가 있나~ 오늘 공주님에서 여왕님이 되는 날인데 특, 특, 특별해야지! 난 자기 얼굴에 주름 질까봐 그러지.”
웨딩 경력 5년차. 분위기를 보아하니 신부는 원하는 걸 가질 때까지 기분이 풀어지지 않을 듯 보였다.
“신부님, 제가 오늘 하루 옆에서 메이크업 수정 해드리겠습니다.”
“진작 그래야지.”
속은 부글부글 끓어 올랐지만 자신의 실수를 알기에 여울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신부가 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울도 얼른 뒤따라 내려가려고 메이크업 장비를 챙기려는데 신랑이 앞에 서 있었다.
“어? 신랑님은 왜 같이 안 내려가세요?”
“아까 곤란했죠? 신부 성격이 원래 저렇게 까칠해요.”
“네?”
“아니, 원래 재벌가들은 비즈니스 결혼을 많이 하거든요. 사랑 없는 집안끼리의 결혼.”
끈적한 눈길로 바라보며 여울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순간 온몸의 소름이 끼쳤다. 여울을 훑어보는 모습이 꼭 먹잇감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짐승 같았다.
여울은 이를 꽉 물고 천천히 고개 돌려 신랑의 눈을 응시했다.
“후회.. 안하시겠어요?”
“훗. 후회라니. 난 꽤 스릴을 즐기는 타입이라서.”
이제서야 노골적으로 더러운 속내를 내보였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결혼 반지 케이스를 열어보였다. 다이아에 크기만 봐도 5캐럿은 돼 보였다.
“이거보다 더 좋은 거 해줄 수도 있고.”
찡긋-
윙크를 날리는 신랑의 눈을 찌를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잘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후회 안 하신다니.. 그럼 지금 하신 말들... 신부님께 그대로 전해드릴까요?”
그 말에 신랑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굳어버렸다. 그러더니 반지 케이스를 닫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를 바꿨다.
“후. 별것도 아닌 게 콧대 세우면 재미가 없지. 맘에 안드네.”
신랑은 되려 몸을 돌리는 순간까지도 여울을 노려보며 자리를 피했다. 신랑이 나가고 나서야 긴장이 확 풀어졌다. 그리고 그가 쓸어내렸던 팔을 탁탁 털어냈다.
“웨딩 짬밥 5년 된 날 뭘로 보고. 어디서 입을 털어? 으윽. 진짜 오늘 일진 사납다, 사나워.”
말하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문쪽을 향해 돌아서서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내가 여태 모쏠인 이유가 다 저런 놈들 때문이라고! 퉤퉤퉤!!!”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낸 후 여울은 메이크업 박스를 챙겨 신부 대기실로 내려갔다.
.
.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신부 대기실_
신부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미소를 짓고 있다. 누가 왔다 갔는지 모를 정도로 끊임없이 손님들이 들어와 사진을 찍고 있다.
찰칵-
신부의 사진을 찍고 있는 정우림. 여울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있는 정우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공지수가 돌아온 걸.. 알고 있을까?’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게 있는데 사진을 찍고 있던 정우림과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확 들었다. 시선을 피하고 괜히 두리번 거렸다.
그때 신부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신랑이 들어왔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는 차석진.
“자기야, 인사해. 여기 내 대학동기 말했지? 노블레스 이사장 차석진.”
“어머! 말씀 많이 들었어요.”
수트 차림에 반짝이는 조명 밑에 있으니 석진의 피지컬은 더 빛났다. 석진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결혼 진행에 불편한 점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이사장님도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데 직원들은 좀 그렇지 못하더라고요.”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이 여울에게 향했다. 신랑과 석진도 신부의 시선을 따라 여울을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에 놀란 여울은 눈치를 살피며 신부 곁으로 다가갔다.
“아! 신부님. 어디 불편한 곳 있으세요?”
식장에는 올 일이 없는 여울이 옆에 서 있자 석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
“송 실장님이 여기 어떻게...”
“제가 실장님께 부탁 좀 드렸어요. 저한테 관심 좀 없으신거 같아서요.”
신부가 웃으며 말했지만 뼈있는 말로 여울은 곤란해졌다. 눈치 빠른 석진은 무슨일이 있었다는 걸 미뤄 짐작한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미리 말해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여울은 자신의 실수에 석진이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괜히 미안해졌다. 그러나 신부는 여우 같이 웃으며 손짓했다.
“음~ 괜찮아요~. 아참, 자기 결혼 반지 잘 챙겼지?”
불안했던 분위기에 신랑은 신부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갑게 대답했다.
“하하하. 그럼, 잘 챙겼지.”
“그거 잃어버리면 안 돼.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하느라 석 달이나 기다린 반지잖아.”
신부가 디자인 했다는 말에 여울은 아까 신랑이 반지 케이스를 열어 보여준 반지의 디자인이 떠올랐다.
“아.. 어쩐지 반지 디자인 되게 특이하던데요?”
“어? 그걸 실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아.. 그게..”
신부의 질문에 아까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어 머뭇거리는데 신랑이 급하게 껴들었다.
“알지, 알지. 그리고 이게 몇 캐럿 짜린데 잃어..버...”
주머니를 열심히 뒤적거리던 신랑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리고는 양쪽 주머니 수트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불안한 그의 행동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신랑에게 향했다.
“자기, 왜그래? 불안하게.”
신랑이 아무런 말없이 급기야 턱시도 쟈켓을 벗어 탈탈 털었다. 그리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 왜 없지?”
“뭐라고??”
당황스러운건 석진도 마찬가지였다.
“진짜야? 천천히 잘 찾아봐.”
신랑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곧 울어버릴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으아아악! 진짜 없어!!!”
얌전히 눈웃음 짓고 있던 신부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자기 진짜 미쳤어!! 진짜로 잃어버린거면 나 이 결혼식 안해!! 아니 못해!!!”
신부대기실은 한순간에 살얼음판이 됐다. 신부가 발을 동동구르며 짜증을 내자 신랑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신랑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리더니 갑자기 여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실장님! 실장님한테 아까 반지 맡겼잖아요!!!”
“네???”
신부를 달래주던 여울은 난데없는 소리에 입이 쩍 벌어졌다.
“무.. 무슨 소리하시는거예요??”
“아까! 내가 메이크업실에서.. 잠깐 맡아달라고 했잖아요!”
큰소리로 다그치는 신랑을보며 여울은 황당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매서운 눈으로 신부가 여울을 노려봤다.
“실장님, 진짜 너무 하시네요. 메이크업 할때부터 마음에 안들더니 지금 뭐하시는거예요? 반지 어딨어요?”
신부까지 의심하게 되자 여울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저 아니에요. 그리고 반지 받은 적도 없어요.”
“근데.. 내 결혼 반지 디자인이 특이한건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그.. 그건..”
머뭇거리던 여울은 그 순간 확실한 반지 도둑이 되어버렸다. 그 순간 석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반지가 없는 거 같으니 일단 반지부터 찾읍시다. 예식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신랑은 재빨리 신부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억울하지만 여울도 자신이 마지막 반지를 봤던 메이크업실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석진도 반지를 찾기 위해 신부대기실 문을 열고 나서는데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트렌치 코트를 목 끝까지 채우고 움츠린 어깨, 조금 불안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 속을 지나 그 여자는 비상 계단 문을 열고 나갔다.
직감적으로 그 여자를 따라 비상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상문을 열자 여자는 인기척 소리에 다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깊게 넣었다. 석진은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신랑 분이 반지 케이스를 맡겼다는데 저에게 주실 수 있나요? 곧 식이 시작 될거라서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석진을 바라봤다. 주머니에서 머뭇거리던 손을 천천히 꺼냈다. 그 손에는 반지 케이스가 쥐어져 있었다.
석진이 손을 내밀자 여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반지 케이스를 건넸다. 시선을 피한 채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를 향해 석진이 물었다.
“왜 가져간거예요? 이 반지.”
‘!’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관심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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